< EP. 28 : 용자의 무덤. (1) >
“하아~ 그러고 보면 나중에 준혁씨네 부모님도 어서 만나 봬야 할 텐데. 한국에 언제 갈 건가요? 지금은 너무 시기가 바쁜가?”
“어...? 아, 글쎄...”
“전에도 한국에 갔을 때 준혁씨네 집부터 들를 줄 알았는데, 그때 얼굴이라도 뵀으면 어색하지도 않았을 테고...”
유키의 말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은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래요. 준혁씨?”
“우리 부모님에 대해선 나중에 천천히 이야기 해줄게. 그러니 너희 부모님께도 일단은 그렇게 말씀 드려줄래?”
“아, 준혁씨. 설마...?”
유키는 조그만 입술을 떼며 뭔가 말하려 했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입을 다물었다.
“나중에 때가 되면 준혁씨가 말해줘요. 기다릴게요.”
“고마워...”
나를 이해해 주는 고마운 마음에 그녀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 준 나는 주차장에 세워준 승용차에 올랐다.
“운전 조심해요.”
“응. 고마워.”
&
1992년 2월 19일. 수요일.
드래곤 엠블렘 발매 하루 전.
이 날은 드래곤 엠블렘 2의 출시 일이자, 새로운 매장의 오픈 일이기도 했다.
펜타곤을 대표하는 명물인 타마고 샵과 거리가 조금 떨어져 있긴 했지만, 마침 아키바에 새로 들어선 빌딩의 1, 2층 전부를 드래곤 엠블렘 전용으로 꾸밀 예정이기에 내부 인테리어가 굉장히 쾌적하게 꾸며져 있었다.
근 한 달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 된 드래곤 엠블렘 전용 매장은 카와구치 대표를 비롯한 모든 펜타곤 직원들의 노력과 열정으로 만들어 졌다.
“이번에 드래곤 엠블렘 2가 발매 되면 그럭저럭 한숨 돌리는 시간이 다가 오겠군요.”
“일단은 재작년에 발표했던 게임들이 모두 발매 되었으니, 아무래도 그렇겠죠?”
카와구치씨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매장을 둘러보았다.
매장의 중심에는 성왕 크로엘과 성녀 카트리나 그리고 폭염술사 미레아의 새하얀 석고상이 유리관 안에 전시되어 있었다.
그때 함께 매장을 둘러보던 카와구치씨의 비서 사유리씨가 말했다.
“이렇게 보니까, 무슨 박물관에 온 것만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1층 절반은 드래곤엠블렘의 게임 타이틀과 관련 굿즈를 판매하는 스토어로 꾸며두었습니다.”
곳곳에 전시 되어 있는 드래곤 엠블렘 관련 상품을 바라보던 그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보이며 물었다.
“2층은 아직 공사 중이라고 하셨죠?”
“워낙에 스케쥴이 빡빡한 상태였기에 일단은 1층만 운영이 가능한 상태로 두었습니다. 차후에 오픈 예정인 2층은 카페를 테마로 하여 드래곤 엠블렘 유저들 간의 만남의 장소로 운영할 계획 입니다.”
“그것 참 기대 되네요.”
카와구치 대표는 나의 구상을 듣고는 흡족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던 중 사유리씨가 집게 손가락을 입에 물으며 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1층의 나머지 절반은 어떻게 사용하실 생각인가요?”
“아, 그 부분은 유저들이 얼마나 빨리 드래곤 엠블렘을 클리어 하는지에 따라 차후에 운영 될 예정입니다.”
“흐음~ 제 2 개발팀 말대로 이번에도 뭔가 꾸미시는 모양이네요. 그래도 대표님 앞에서까지 꽁꽁 싸매두시다니. 너무한대요?”
그러자 사유리의 말에 당황한 카와구치 대표가 서둘러 그녀의 말을 잘랐다.
“커흠~!! 어흠~ 이거 목이 좀 마른데, 사유리씨 물 좀 한 잔만 가져다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카와구치 대표의 말이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그녀였기에 재빨리 고개를 끄덕이곤 직원들이 모여 있는 카운터 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멀리 떨어지자, 카와구치 대표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준혁씨. 이제 펜타곤 소프트도 안정을 찾았으니, 이제 그만 펜타곤의 진짜 대표로 나서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저 역시 가끔 직원들이 준혁씨에게 함부로 말을 할 경우에는 마음에 걸려서...”
“싫은데요. 대표님께서 마음에 걸려 할 일이 뭐가 있나요. 잘 생각해보면 펜타곤을 처음부터 이끌어 온건 대표님 당신입니다. 그러니 조금 더 자신을 가지세요.”
“하, 하지만 그래도 저는 영...”
“대표님은 충분히 잘 해주시고 있습니다. 마음이 불편해도 조금만 참아 주세요.
사실은 제가 펜타곤에 남아 있는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거든요.”
“네에!? 아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준혁씨. 펜타곤 소프트를 떠나기라도 하신다는 말입니까?”
카와구치씨의 질문에 나는 그저 살짝 입 꼬리를 올려 웃어보였다.
“나중에 천천히 말씀 드릴게요.”
&
다음 날.
드래곤 엠블렘 2는 전작의 명성과 체험판에 힘입어 호조(好調)의 스타트를 보였다.
행사 첫날에는 미야자키씨의 깜짝 아이디어로 직원들 모두 드래곤 엠블렘 2에 등장하는 직업군 코스튬 이벤트를 실시하였다.
아침 일찍 행사장에 방문한 나와 카와구치씨 조차 그녀가 준비한 이벤트에 깜짝 놀라, 우리는 새로운 매장 오픈 전에 한바탕 크게 웃을 수 있었다.
“마법사이자 점장이신 미야자키님. 그럼 펜타곤의 두 번째 로드샵인 드래곤 엠블렘 스토어를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네. 열심히 하겠습니다.”
정해진 오픈 시간에 맞춰 정문 셔터가 천천히 올라가자, 미야자키씨는 두근거리는지 두 볼이 빨갛게 달아 올랐다.
“여러분. 오늘 하루 잘 부탁드립니다!!”
점장이 먼저 함께 일 할 직원들에게 고개 숙이자, 당황한 직원들은 그녀와 마주 인사하며 소리쳤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파이팅~”
철컹. 정문 셔터가 모두 올라가고 굳게 잠긴 문을 열어젖히자, 마치 폭포수처럼 손님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우와!! 대박이다. 크로엘의 조각상이 있어.”
“뭔가 새로운 피규어도 출시된 거 같은데?”
“커헉, 직원들 옷 좀 봐. 저기 서 있는 여 궁사(弓士) 코스프레 한 직원 엄청 귀엽다.”
다행히 미야자키의 아이디어가 제대로 통했는지, 손님들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우리는 드래곤 엠블렘 2의 첫 날 판매량의 공식 기록을 세우기 위해 직원들은 몰려드는 손님들에게 붙어 빠르게 응대하기 시작했다.
아직 드래곤 엠블렘 2에 관련한 컨텐츠가 모두 준비 되지 않았기에 스토어에는 굿즈나 장식품이 놓여진 공간을 제외하곤 모두 타이틀 판매를 위한 계산대로 활용하고 있었기에 줄은 급속도로 줄어들기 시작했다.
각 판매대 옆에 타이틀이 판매될 때마다 카운트를 세어주는 직원들의 엄지손가락이 쉴새없이 움직이고, 나는 끊임없이 몰려드는 손님들의 대기 줄을 살피며 직원들을 응원해 주었다.
그렇게 정가 6,800엔짜리 게임 카트리지는 전국의 게임 샵을 통해 첫 주에만 약 10만장에 달하는 판매기록을 세웠다.
그리고 이것은 현세대에 모든 기종이 발매한 게임 타이틀 중에 가장 최단 기간이기도 했다.
그리고 체험판을 통해 선보인 친구와 함께 즐기는 레이드 시스템으로 인해 드래곤 엠블렘이 가져온 기기견인 효과는 정말로 어마어마했다.
첫 주에만 소프트 판매량의 반을 뛰어넘는 6만대가 추가로 판매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한창 전성기를 달리던 민텐도의 패밀리와 거의 동급인 판매 속도였다.
다소 불편하게 느낄지 모르는 강제 4인 파티 레이드 시스템으로 인해 라온은 소비자들 사이에서 거미줄 같이 엮여 팔려 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1992년의 4월에 접어들자. 일본 내 콘솔 업계의 순위가 갈렸다.
차세대 기종 중에 가장 후발대로 출발한 라온이 NEGA 드라이브를 꺾고 보급률 2위로 올라선 것이다.
물론 업계 1위인 민텐도와의 격차는 아직도 어마어마했지만, 발매이 후 채 1년도 되지 않아 업계 2위로 올라선 것은 경탄할 만한 일이었다.
덕분에 소니크로 무장한 NEGA는 일본의 내수 시장에서 완전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갓 태어난 휴대용 콘솔에게 2인자의 자리 마저 빼앗긴 것은 그 들에게 있어 굉장히 치욕스러운 일로 남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냥 NEGA 드라이브만 잘 챙길 것이지, 뭐 하러 NEGA CD를 만들어서 스스로 목을 졸라맨 것인지..’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에 새롭게 등장한 NEGA CD는 역대 일본에서 발매된 콘솔 중에 가장 최악의 판매량을 기록하였다.
약 4개월 동안 판매된 NEGA CD는 최근에 들어서야 1,000대를 겨우 넘는 수준으로 보급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 누가 이런 혹독한 경기 불황 속에서 정가 49,800엔짜리 주변기기에 지갑을 열어줄 것이란 말인가?
물론 게임이 훌륭하다면 소비자의 구매욕을 자극시킬 수도 있었겠지만, 기기와 함께 동시에 발매된 소니크의 그래픽을 보면 기존의 NEGA 드라이브에 비해 딱히 달라진 점을 느끼지 못했다.
거기다 게임 한판을 할 때마다 극악의 로딩에 시달려야 했기에 단 한번이라도 플레이를 체험해본 유저들은 모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패드를 내려놓았다.
아키바에서 체험 플레이를 하던 유저는 기계가 멈춘 줄 알고, 계속 껐다 켰다를 반복 했을 정도니 말 다했지...
하지만 그런 NEGA에게 기쁜 소식도 있었다.
소니크를 번들로 끼워준 NEGA 드라이브가 북미와 유럽에서 엄청난 반응을 보이며 최근에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 판매량을 앞서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거기서 번 돈을 NEGA CD의 부진으로 모두 날려 버리긴 했지만...
그렇게 1992년은 콘솔 업계에 지각 변동이 꿈틀거리던 시기였다.
라온의 발 빠른 추격으로 인해 대폭 늘어난 기기 보급률을 앞세워, 그 동안 민텐도에 충성하던 서드 파티 몇몇이 우리 쪽으로 넘어왔다.
그중에서 우리가 두 손 들고 반긴 소프트 회사가 있었으니, 바로 ‘실황 풀 파워 프로야구’와 ‘악마성 시리즈’로 유명한 폭스 소프트였다.
그들이 만들어 낸 실황 풀파워 프로야구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있었는데, 일본 프로야구 선수 중에 ‘이가와 산케이’라는 선수가 있었다.
그는 고교 때부터 실황 풀파워 프로야구에 선수로서 자신의 이름을 올리는 것이 꿈이었고, 열심히 노력한 결과 한센 타이거즈에 입단할 수 있었다.
한센의 쟁쟁한 투수 라인업에서 이가와는 항상 주전에서 밀려났지만, 그래도 다음해에 출시한 풀파워 프로야구에 자신의 이름이 올라간 것에 대해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한다.
하지만 그런 기쁨도 잠시..
분명히 자신의 이름이 올라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친 동생은 게임 속에서 조차 이가와를 기용해 주지 않았다.
왜 자신을 사용하지 않느냐는 물음에 동생은..
“형은 능력치가 너무 낮아.”
“······.”
이 한 마디에 그는 특훈에 특훈을 거듭하여 최고의 투수에게 주어지는 ‘사와무라’상까지 얻게 되었고 수상소감에서 기자에서 게임상의 능력치를 올리기 위해 열심히 연습했다고 대답해 일본열도를 웃음바다로 만들었다. (물론 이것은 1999년에 벌어지는 미래의 이야기긴 하지만...)
이렇듯 폭스 소프트는 일본 게임 회사 중에서 스포츠를 중심으로 다양한 게임을 많이 내었는데, 특히나 그들이 아케이드 용으로 만든 88년 올림픽 게임을 시작으로 스포츠 장르에 대해선 이 시기에 따라올 회사가 없을 정도였다.
-저희가 지향하는 스포츠 게임의 형식과 휴대기기 라온의 조합은 최상의 시너지 효과를 불러올 것입니다.-
패미통신 최신호를 넘기던 나는 폭스 포스트 관련 기사에 피식 웃음을 삼켰다.
‘기본만 충실한 다면 축구와 야구 게임은 팬심 때문에라도 절대 무너질 리가 없는 독특한 장르지’
폭스 소프트 말대로 우리 라온과 궁합도 좋고 말이야..
고개를 끄덕이며 신문을 살피듯 다음 장을 넘기자, 나도 모르게 표정이 살짝 구겨졌다.
-광전사 길드!! 최강의 멤버. 두 번째 마성의 탑 도전~!!-
적어도 3~4개월은 버틸 줄 알았던 드래곤 엠블렘의 하드코어 모드를 최단 시간에 돌파하고 있는 최강의 플레이어들이었다.
“벌써 두 번째 탑에 도전한다고?”
이거 광전사 길드 때문에 생각보다 2부 진행 시기가 더 빨라 질수도 있겠는데?
드래곤 엠블렘 발매 후. 명예의 전당의 꼭대기에 랭크되어 있는 자들로 최근에 유저들에게 엄청난 인기를 얻고 있었다.
나 역시 유저들의 분위기를 달아오르게 해주는 그들의 플레이에 뭐라 할 생각은 없지만, 이 파티 리더 라는 사람. 캐릭터 이름 좀 어떻게 할 수 없나..?
하지만 그로부터 보름이 지나 드래곤 엠블렘 전용 샵 2층.
두 번째 마성의 탑 주인인 블랙 드래곤이 용사 오시리의 검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런 제기랄 전설의 용사 이름이 엉덩이(오시리)라니.. 끝장이다.’
< EP. 28 : 용자의 무덤.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