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26 : 태동(胎動)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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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1월 1일.
보통 신년 초하루는 가까운 신사에 들러 참배를 드리는 것이 일본인들의 문화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반인들의 신년 문화일 뿐이고, 게이머들에게 1992년의 1월 1일은 기다리고 기다렸던 드래곤 엠블렘 2의 체험판 배포 날이었다.
거기다 바로 어제인 12월 31일.
전국 최초로 오픈 식을 거행한 사이킥 포스 전용 아케이드 센터는 이른 아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들락거리고 있었다.
사이킥 포스 ‘전용’ 이라는 문구에 맞게 모든 기기를 사이킥 포스 기판만으로 가득 채운 이곳은 그동안 기다림에 목말랐던 게이머들의 갈증을 단번에 해소 시켜주었다.
게임 잡지계에서 나름 인지도가 높은 준페이는 시작과 동시에 보스에게 목숨을 잃은 자신의 구구절절한 사연을 소설화하여 리뷰 코너에 실었고, 그것은 게이머들에게 굉장히 좋은 반응을 얻었다.
‘준페이 녀석한테 이런 글재주가 있을 줄이야...’
녀석의 글을 본 나는 너무나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문장 표현력에 잠시나마 가슴이 먹먹해짐을 느꼈다.
‘그래도 사회 좀 보라고 시켰더니, 디오라마 피규어에 눈이 멀어 가지곤..’
어찌보면 인과응보다. 괘씸한 녀석. 감히 유키랑 몰래 짜고 나를 공개 프로 포즈로 밀어 넣더니. 쌤통이구나.
건물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나는 언제나와 같이 서류 가방을 챙겨들고 계단을 올라왔다. 매장에 방문하기 전 담배나 한 대 태울 겸 입가에 연초를 가져가던 나는 눈앞에서 벌어 진 광경에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뜨렸다.
‘헐... 드래곤 엠블렘 2를 기다렸던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았나?’
단지 체험판 배포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다운로드 대기 줄은 건물을 한 바퀴 휘감고도 모자라 전철역 앞의 광장까지 뻗어나가 있었다.
하지만 예전과 조금 다른 풍경이 하나 있다면, 다들 손에 라온 하나씩을 붙들고 데이터 케이블을 이용해 통신 대전을 즐기고 있었다.
어떤 이들은 스트리트 파이어2를... 또 다른 어떤 이들은 슬램덩크를...
혼자 온 고객은 이어폰을 귀에 꽂은 파이널 프론티어나 드래곤 엠블렘을 즐기고 있었다.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도 즐거운지 다들 대기 줄을 유지한 채 신나게 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부장님!? 벌써 오셨어요?”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오늘부터 타마고 샵 부점장으로 승진한 미야자키씨가 나를 바라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긴 하지만, 내방 고객들의 인기투표에서 항상 ‘이 달의 사원’ 1위를 여러 번이나 차지한 그녀였기에 그녀의 부점장 발탁에 이의를 제기라는 직원은 아무도 없었다.
“안녕하세요. 미야자키씨. 승진 축하드려요~”
“감사합니다. 이게 다 부장님께서 저를 좋게 봐주신 덕분이죠~”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유저 분들이 미야자키씨를 선택한 거나 마찬가지인데요”
그러자 그녀는 쑥쓰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나저나 오늘도 엄청 바쁠 것 같은데요? 혹시 데이터 다운로드에 대한 공유기 사용법은 숙지 하셨어요?”
“물론이죠~ 어젯밤 폐점 후 펜타곤 직원 분들이 공유기 업그레이드를 해주시자 마자, 제가 1등으로 받았는 걸요~”
미야자키씨는 유니폼 안주머니에서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를 꺼내 나에게 흔들어 보였다.
그때 우리를 바라보던 대기 중인 사람들 입에서 수근 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있는 여 직원 분 벌써 체험판 다운로드 받았나 봐?”
“그러게, 펜타곤 직원인가 본데? 부럽다...”
사람들의 목소리에 창피했는지 그녀는 혀를 쏙 내민 채 스탭실로 후다닥 사라졌다.
잠시 후. 타마고샵 한 켠에 마련된 데이터 공유기의 검수가 모두 끝나고 개장 개점을 알리는 벨소리와 함께 셔터가 올라가자, 미처 인사를 건 낼 틈도 없이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 들어오기 시작했다.
“손님. 각 공유기 앞으로 한 줄씩 줄을 서주세요.”
이미 여러 번의 행사를 경험해본 직원들은 능숙하게 손님들 사이를 파고들어 줄을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손님들간에 약간의 소란이 있었지만, 직원들의 도움으로 드래곤 엠블렘 2의 체험판은 순조롭게 배포되기 시작했다.
데이터 공유기 옆에 각각 배치된 직원들은 손님이 건네주는 플래시 메모리 카트리지를 받아 드래곤 엠블렘 2 체험판 복사를 도와주었다.
그때 행사장 내부에서 드래곤 엠블렘의 장대한 테마곡이 흐르자, 다운로드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와~ 진짜 타이틀곡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인다.”
“그러게 이번엔 어떤 잔학한 스토리를 보여주려나...”
대기 줄에 서있던 두 남자의 대화에 괜스레 가슴이 뜨끔한 나는 잠시 뒤로 물러나 그들과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한 사람 당 드래곤 엠블렘의 체험 판을 다운 받는 시간은 약 3분에서 4분 남짓.
처음으로 체험판을 배포 받은 유저들은 어느새 샵 안에 마련된 테이블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체험판을 돌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고개를 갸웃 거리기 시작했다.
“뭐지? 이거??”
“장르가 바뀐 것 같은데?”
유저들은 화면에 버젓이 나타난 캐릭터 생성 창에 의아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 정도 게임에 정통한 플레이어 몇몇이 재빨리 캐릭터 생성을 마치고 본편에 돌입했다.
“이 인터페이스는 마치 육성 시뮬레이션 같잖아?”
“으잉!? 진짜 그러네?”
그러자 다운로드를 기다리고 있던 대기 줄에서 몇 가지 질문이 그들에게 쏟아졌다.
“육성 시뮬!? 진짜에요??”
“장르가 바뀐 건가? 육성 시뮬레이션이면 프린세스 메이커??”
이 시기의 게이머들에게 육성 시뮬레이션은 생소한 장르가 아니었다.
작년 가을. ‘카이낙스’ 라는 곳에서 ‘공주 만들기’라는 작품으로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탄생 시켰기 때문이다.
물론 그 전에도 프린세스 메이커와 비슷한 형식의 캐릭터 육성 게임은 존재했지만, 하나의 캐릭터를 유저의 취향대로 키워낸다는 것에서 카이낙스의 프린세스 메이커는 육성 시뮬레이션이라는 장르 부분에서 그 초석을 다진 기념비 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어째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하던 전략 RPG 게임인 드래곤 엠블렘이 뜬금없이 육성 시뮬레이션으로 장르를 바꾼 것에는 제 작년 펜타곤이 주최한 제작 발표회 때 보여준 ‘성왕 크로엘’의 패배와 관련이 있었다.
성왕이 쓰러지고 부활한 마왕이 다시 인간계를 지배하는 드래곤 엠블렘 2부의 시대는 프롤로그부터 굉장히 암울한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게임을 시작하면 플레이어는 캐릭터의 성별부터 시작해서 나이, 직업, 특기에 대해 정해진 파라메터 안에서 초기 수치를 부여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은 마치 RPG의 시초라 할 수 있는 TRPG인 던전 & 드래곤과 매우 닮아 있었다.
그렇게 캐릭터 생성이 끝나면 간단한 프롤로그에서 유저들은 또 한 번 충격을 맛보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 앞에 던져진 세계는 ‘성왕 크로엘’이 패하고 이미 200년이란 시대였기 때문이다.
전작 주인공의 패배로 복수심에 불타올랐던 유저들은 다시 한 번 마왕 타도를 외치며 달려들었지만, 그들에게 주어진 상황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그런 상황에서 플레이어의 이야기는 어느 작은 산골 마을에서 시작한다.
전사나 마법사로 직업을 선택했다면 몬스터로부터 마을을 지키는 용병단으로서...
사제를 선택했다면 마을의 병자를 돌보거나 포션을 제조하는 약사로서...
음유 시인을 선택했다면 마을 사람들에게 편안한 안정을 가져다주는 음악사로서...
각 직업을 선택 할 때마다 마을의 구성원 중에 하나가 되어 캐릭터를 키워나갈 수 있었다.
이 시대의 게이머들은 참 재밌는 점이 있다.
굳이 미래에서처럼 게임 초반에 튜토리얼을 만들지 않아도, 알아서 스스로 게임의 시스템을 파악해 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올드 게이머들의 고집이다.
이 시대에 게임을 즐기는 유저들은 먼 훗날 ‘올드 게이머’라는 계층으로 불리게 되는데, 복잡해지는 게임 플레이 속에서도 튜토리얼 따위는 그냥 스킵 해버리는 버릇은 먼 미래에도 마찬가지였다.
‘하기사.. 나만 해도 화염병만 던지면 쉽게 깰 수 있는 보스를 죽자고 검만 휘둘러 5번 죽고 겨우 깼었지... 그러고 보면 올드 게이머들은 게임 아이템을 진짜 아낀단말야? 죽을 때 싸가지고 갈 것도 아닌데, 언젠가 위급할 때 써야지. 위급할 때 써야지 하다가 엔딩까지 싸짊어지고 간 경우가 한 두번이 아니었지...’
나는 커피 한모금과 함께 피식 웃음을 삼키며 점점 늘어나는 드래곤 엠블렘 2의 플레이어들을 바라보았다.
“캐릭터 키우는 게 한명 밖에 안되네... 무슨 직업으로 키우지?”
그때 묘하게 눈치 빠른 플레이어 하나가 기묘한 가설을 내놓았다.
“전사, 마법사, 사제, 궁수, 음유시인. 이거 모두 전작에서 나왔던 영웅들의 초기 직업이잖아? 그럼 나중에 클래스 체인지가 가능 하단 말인가?”
“어억!! 진짜 그러네?”
“이거 말고도 전작이랑 이어지는 뭔가가 있을 것 같은데...”
“그럼 난 궁수 해야지. 신궁의 녹티스... 난 솔직히 크로엘 보다 녹티스를 더 좋아했거든.”
“그럼 난 여 마법사. 언젠가 미레아처럼 폭염술사로 전직 할 수 있으려나...?”
아무런 예고도 없이 장르가 바뀌어 어리둥절해 하던 사람들은 곧 기대에 찬 눈으로 드래곤 엠블렘 2를 즐기기 시작했다.
사실 캐릭터를 하나 밖에 생성하지 못하는 이유 역시 전작에서 가져온 시스템 중에 하나인데, 아직 그것까진 눈치 채지 못했나...?
그때 가장 먼저 마을 밖에 몬스터 퇴치를 의뢰 받은 플레이어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 이거 전투 시스템이 장난 아닌데?”
“뭐? 왜??”
“공격 할 때 타이밍이 나와서 그것에 맞춰 누르면 연격할 수 있고, 적이 공격 할 때 타이밍을 잘 맞추면 방어 할 수 있어.”
“뭐야? 그럼 RPG 게임인가?”
“아니, 분명히 초기화면은 육성 시뮬인데, 의뢰를 받으면 RPG처럼 마을 밖으로 돌아다닐 수가 있네?
“난 약사 의뢰 받았더니, 재료를 구해서 아이템을 만들라는데?”
“으잉?? 대체 뭐야 이거...”
“아무래도 안되겠어. 집에 가서 천천히 플레이 해봐야지.”
혼란에 휩싸인 유저들은 서둘러 가방을 챙겨 행사장을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아니 대체 왜 눈앞에 게임을 만든 디렉터가 있는데, 아무도 플레이 방법에 대해 물어보질 않는 거야~!!’
하는 수 없이 나는 사람들이 행사장을 빠져 나가기 전에 준비해 두었던 영상을 플레이 시켰다.
갑작스레 재생된 영상에 걸음을 옮기던 사람들은 그 자리에서 멈춰서 천장에 걸 린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어...? 뭐지?”
화면 안에는 드래곤 엠블렘의 테마곡과 함께 간단한 플레이 방법에 대해 알려주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캐릭터의 육성과 그에 따른 시나리오의 변화에 대해 눈치 챈 유저들의 입이 점점 크게 벌어졌다. 초반에 캐릭터를 만들고 그것을 키워내는 것은 그저 빙산의 일각일 뿐이었다.
내가 어릴 적 재밌게 즐겼던 게임 중에 말야...
블리저드에서 만든 ‘워 크레셔’ 라는 게임이 있었지. 인간과 오크족의 대규모 전투를 그린 전략 시뮬레이션은 완벽하고 세밀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대규모 온라인 RPG를 만들었었는데..
드래곤 엠블렘 2를 통해 내가 이루고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완벽하고 치밀한 세계관. 우선은 그것부터 만든다..
스크린에 재생되던 영상은 이윽고 마지막에 단 한 줄의 문장을 남기고 종료 되었다.
-거대한 전쟁에서 승리를 거머쥔 마지막 플레이어가... 드래곤 엠블렘 2의 주인공이 될 것입니다.-
"...우... 우와아아아아!!!!!"
< EP. 26 : 태동(胎動)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