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23 : 라온 출격 (3) >
“오늘 대체 얼마를 쓰게 만들려는 거냐..”
이노시타씨의 발표와 함께 프로젝터에는 붉은 머리의 주인공이 볼을 튕기며 골대를 향해 높이 뛰어 올랐다.
콰지직!! 골대가 부서질 정도로 강렬한 덩크 씬에 유저들 입에서 저절로 탄성이 흘러 나왔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초중반까지 일본 만화 산업을 이끌어간 양대 산맥이라면 누구나 드래곤볼과 슬램덩크를 꼽을 것이다.
하지만 패밀리 때부터 게임화가 활발히 이루어졌던 드래곤 볼과는 달리 슬램덩크는 아직까지 한 번도 게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실 이 시기에 스포츠 게임이라 치면 ‘열혈’시리즈가 꽉 잡고 있던 때라서 그런지, 난투극과 마구가 없으면 뭔가 심심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래서 일까?
슬램덩크만이 가지고 있는 그 독특한 캐릭터 성을 이용해 게임을 만드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90년대 중반에 출시한 아케이드 '슬램덩크 슈퍼슬램'이라는 게임은 캐릭터들의 인기에 힘입어 대히트를 기록했다.
농구 포지션을 잘 모르는 사람도 캐릭터에 비유해 알려주면 고개를 끄덕거렸을 정도니까..
라온용으로 제작된 슬램덩크는 아케이드 형태의 게임을 3등신으로 SD화 시켜 특유의 귀여움을 자아내고 있었다.
-삐익~!!-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쇼호쿠(북산) 와 료난(능남)의 경기가 시작되자, 행사장 안은 기대와 설레임으로 가득 차올랐다.
“오~ 귀여운데?”
“미쯔이 히사시(정대만) 표정 좀 봐~”
점프 볼에서 선공을 따낸 쇼호쿠의 볼이 곧바로 미야기(송태섭) 쪽으로 흐르자, 전원 속공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만화의 한 장면과 겹쳐 보여 여기저기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순간 안쪽으로 파고들던 미야기(송태섭)의 앞에 센도(윤대협)가 막아서자, 볼이 외각으로 흐르며 노마크 상태인 미쯔이(정대만)에게 흘러갔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미쯔이의 3점 슛이 아름다운 포물선을 그리며 골대로 빨려 들어가자, 화면에 미쯔이의 얼굴이 클로즈 업 되며 컷인이 표시 되었다.
“크으~ 역시 불꽃남자!!”
슬램덩크의 데모 역시 사람들의 뜨거운 환호 속에서 중계가 계속 되었고, 라온의 런칭 행사는 점점 축제 분위기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일부러 저희 행사장까지 찾아와주신 슬램덩크의 원작자 이노시타씨에게 큰 박수를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부디 게임도 많이 즐겨주세요~”
“자~ 그럼 이상으로 신작 발표회를 마치며 정식으로 라온 판매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오오오!!!”
행사장에 모여있는 게이머들은 마치 전장으로 향하는 용사들처럼 큰 함성으로 대답했다.
아직 행사장 안까지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인 모양이다.
잠시 후. 판매 행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되며 총 8개의 계산대에서 새로운 휴대기기 라온은 급속도로 팔려 나가기 시작했다.
“라온이랑 스파2 주세요~!!”
“전 라온이랑 파이널 프론티어 4, 그리고 슬램덩크 주세요!!”
“아, 어쩌지.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슬램덩크가 튀어나와서 고민되네..”
“뭘 고민해. 그냥 다 사. 어차피 살거잖아~!!”
“그치? 나중에 물건 없어서 끙끙 대는 것보다. 그게 낫지.”
“RPG, 대전 액션, 거기다 스포츠 게임이라니, 환상의 라인업이다!!”
“거 고민하지 말고 빨리 좀 사요. 피곤해 죽겠네...”
마치 미국의 추수감사절을 연상케 하듯 행사장은 라온의 구매 고객으로 가득 차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밖에 있다가 시원한 실내로 들어온 손님들은 뒤늦게 알아챈 사이킥 포스 영상과 슬램덩크의 발매소식에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멍하니 영상을 바라보고 있었다.
“펜타곤이 이젠 아케이드 게임도 만드는 구나..”
“슈팅 게임인 사이킥 배틀에서 대전 부분만 떼어내 업그레이드 시킨 건가? 게임 영상이 없으니 좀 답답한데, 오프닝 무비는 진짜 끝내 주네.. 무슨 극장 상영판 같아.”
“겨울!! 겨울이다!!”
“저거 나오면 사이킥 배틀 때 우승자인 타카시도 또 나오려나?”
“아~ 그때 결승전 나도 봤지. 겁나 멋있었는데, 마지막에 전탄 방어. 크으~”
“아직도 그 생각만하면 소름 돋아..”
나는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으며 아직까지 사이킥 배틀을 기억해주는 유저들의 열정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타카시의 결승전 보다 훨씬 박진감 넘치는 배틀이 될 겁니다.’
궁극의 배틀 스피드를 자랑하는 사이킥 포스는 순수히 모리타의 기획안으로 만들어진 작품이었다.
기존에 슈팅에 치중되어 있던 장르를 대전 격투로 바꾼 ‘사이킥 포스’는 캐릭터의 이미지를 최대한 살리는 방향에 입각해 아케이드 기판으로 제작을 진행하였다.
라온이 아무리 뛰어난 기기라 해도 모리타의 일러스트를 감당할 만큼 고사양은 아니었기에 아쉽지만, 어설프게 내는 것보단 그 편이 훨씬 좋은 결과물을 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또한 90년대 초반은 게임 센터의 절정기인 만큼 코인 회수 량을 따지면 상당히 득을 보는 장사다.
앞으로 튀어 나올 수많은 대전 격투 게임들 속에 펜타곤 소프트의 이름을 알릴 격투게임 하나정도 필요치 않을까? 하는 생각에 제안해 봤는데, 결론은 모두가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지난 3월부터 서둘러 제작에 들어간 사이킥 포스의 현재 개발 진행도는 약 60%.
이미 어느 정도 대전 격투의 모양새를 잡아가고 있었다.
며칠 전에 모리타와 함께 시험 삼아 테스트용 캐릭터로 플레이 해보았는데, 진짜 정신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빠른 배틀 방식이었다.
상당히 이동반경이 넓은 도심 속에서 두명의 캐릭터가 쏟아내는 탄막에 의해 주변 건물이 무너지는 연출이라던가, 자신에게 날아오는 탄막을 ESP 게이지를 이용해 쳐내거나 되돌려 주거나, 순간이동으로 피해낼 수 있었기에 ESP 게이지 틈틈히 모아두어야 하는 것이 배틀의 포인트였다.
특히나 아직 초 필살기에 대한 확립이 제대로 안된 시기였기에 체력이 30% 이하로 줄어들었을 때만 쓸 수 있는 ‘일발 역전기’가 직원들 사이에서 굉장히 인기가 높았다. (어쩌면 초필살기를 쓸 때 캐릭터가 클로즈 업하며 보여주는 바스트 모핑에 흥분한 것일지도 모르지만..)
가까이 붙어 화끈하게 주먹으로 겨루는 스파2와는 달리 사이킥 포스는 화면에 넘쳐나는 탄막을 피해내거나 서로의 필살기로 장풍 대결을 하는 것에 포인트를 두었기에 같은 대전 격투라도 느낌이 많이 달랐다.
‘하지만 코인 회전률은 이쪽이 더 빠르겠지. 게임 스피드도 빠르고 스파보다 훨씬 다양한 연계기로 인해 잘못 걸리면 진짜 눈 깜짝 사이에 승패가 결정 날 테니까.’
걸음을 옮겨 계산대 뒤편으로 향하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모리타와 하야시가 함박 웃음을 짓고 있었다.
“대박입니다. 부장님께서 기획하셨던 저가 소프트 정책이 제대로 통했어요.”
“이게 다 민텐도에 대한 반발 심리 덕분이지. 캡코에서 스파2를 이식한 게 신의 한수였으니...”
“확실히 판매되는 걸 보면 스파2가 가장 먼저 줄고 있어요.”
“아무래도 현재 게임 센터에서 가장 인기가 높으니까. 거기다 휴대용이라 어디서나 대전까지 할 수 있으니 당연한 선택일 수도...”
하야시의 말대로 계산대로 몰려드는 사람 중 열에 아홉은 거의 다 스파2를 구입하는 편이었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게임을 사자마자, 매장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곧바로 플레이해보는 사람도 있었다.
데이터 케이블은 기본으로 포함하고 있었기에 친구랑 함께 온 유저는 곧바로 기기를 연결해 스파2를 즐겼다.
“와~ 오락실이랑 똑같네..”
“그러게, 설마 이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감격스러워 눈물이 날 것만 같다. 세상에 휴대용으로 스트리트 파이어2를 할 수 있다니. 앞으로 전철에서 심심하지 않겠네.”
그렇게 행사가 시작되고 약 3시간 만에 라온은 거의 2000대 가량이 팔려 나갔다. 첫날 준비한 5000대의 수량이 3시간 만에 절반가량 줄어든 것이다.
직원을 교체 해가며 계산대를 돌리고 있지만, 밖에까지 이어진 대기 줄은 좀처럼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런칭 행사 분위기를 촬영하기 위해 아침부터 나와 있던 준페이가 피곤한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슈퍼 패밀리 때보다 속도가 더 빠른 거 같은데?”
“약간 더 앞서고 있긴 해.”
“기기 자체가 제법 고가정책이라 유저들 반응이 궁금했는데, 진짜 어마어마하네.
이정도일 줄은 몰랐다.”
“기기는 어차피 한번만 사면되잖아, 중요한 건 카트리지 가격이지.”
“들어보니 피닉스의 드래곤 워리어도 라온용 소프트로 제작의도가 있었던 거 같은데, 뭐 알고 있는 거 없어?”
“여기까지 와서 취재 인터뷰냐?”
“이미 업계에 소문이 자자하거든? 실제로 이미 서드 파티 몇 군데는 라온으로 넘어가겠다고 발표했잖아.”
“헛소문이야. 피닉스 소프트의 드래곤 워리어는 현세대에서 가장 보급률이 높은 콘솔로만 제작한다고 발표했으니까. 다섯 번째 시리즈는 이미 슈퍼 패밀리로 제작 되고 있을 거야.”
“아쉽다.”
“민텐도에서도 드래곤 워리어 만큼은 안 뺏기려고 필사적인 모양이니, 쉽지 않을 거야.”
준페이 말대로 대형 소프트 회사인 캡코가 움직이고 난 뒤 은근히 라온 쪽으로 개발 노선을 바꾼 서드 파티가 여럿 있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회사가 ‘악마성’ 시리즈로 유명한 폭스 소프트. 그리고 최근에 건담이나 마징가를 이용해 SRPG 게임을 계획 중인 윙크 소프트였다.
“글쎄, 미안하지만 더 이상은 영업 비밀이라. 자세히는 못 알려줘.”
“쳇. 치사하다.”
“치사... 하다고? 내가 지금까지 너한테 알려준 정보만 몇 갠데?”
그러자 준페이는 대충 웃음으로 때우며 화제를 돌렸다.
“야, 배고프다. 밥 먹으러 안가냐?”
“우리 직원들도 아직 식사 못했는데, 어떻게 나만 달랑 가서 밥을 먹냐.”
그때 행사장 내부에 있던 스피커에서 안내 방송이 흘러 나왔다. 목소리 톤으로 보아 미야자키씨 였다.
“라온을 구매하기 위해 런칭 행사에 방문해 주신 고객님들께 알립니다. 현재 캡코에서 출시한 스트리트 파이어2의 카트리지가 전량 매진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다시 한 번 알려 드립니다.”
“뭐라구? 벌써!?”
“안 돼~!! 그거 사러왔는데..”
역시 예상대로 스파2의 수량이 가장 먼저 동이 나버렸구나. 하지만 아직 슬램덩크과 파이널 프론티어는 여유 수량이 많이 남아 있었기에 유저들은 아쉬운 대로 다른 소프트를 구매하기 시작했다.
사실 세 가지 타이틀 모두 훌륭한 작품이었기에 유저들에게 큰 불만은 터지지 않았다.
만약에 파이널 프론티어와 스파2 만이었다면 조금 위험했을 수도 있겠지만..
&
그날 오후 5시.
한 여름에 날씨처럼 뜨겁게 타올랐던 라온의 런칭은 마지막 판매자를 끝으로 전량 완판을 달성하였다.
"라온. 완판을 축하하며 건배~!!"
펜타곤 직원들은 첫 콘솔 기기의 완판을 자축하며 캔맥주로 목을 축였다. 하루종일 고생했지만 다들 표정이 매우 좋아보였다.
준페이 녀석은 은근 슬쩍 나와 친구라는 연줄로 펜타곤의 자축 행사까지 참여하며 직원들과 신나게 웃고 떠들어 대었다.
저 녀석도 붙임성 하나는 기가 막히다니까..
피식 웃음을 흘리며 캔맥주를 들이키는데 나를 부르는 미야자키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님. 한국의 만트라 소프트에서 연락이 왔는데요?"
아, 한국도 런칭 행사가 끝났나보군..
나는 미야자키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스탭 사무실에 놓여진 수화기를 들었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잔뜩 흥분한 김한석 대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가 기획한대로 한국에서 광복절 런칭행사가 제대로 먹혀 들었습니다!!"
< EP. 23 : 라온 출격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