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22 : 대전 격투의 시대 (3) >
나는 시끄러워지는 대화방을 눈팅하며 차갑게 식은 커피를 홀짝였다.
호오.. 노래 따위 이 사람. 매너 있네..
아직 스포일러에 대한 인식이 미약했던 시기라 그런지 노래 따위가 흘린 과학실에 대해 대화방이 시끌벅적 해졌다.
그때 ‘노래 따위 끊은지 오래다’ 님이 다시 말을 이었다.
-내일 오전에 스케쥴이 있어서 이만 나가봐야 하지만, 혹시 ‘발렌타인 데이’ 가지고 계신 분들은 꼭 스스로의 힘으로 플레이 해보세요. ‘내가 없는 거리’의 엔딩 같은 거대한 감동은 아니지만, 진짜 충격적인 반전이 있습니다.- -으악!! 그렇게 얘기하시니 더 궁금해지잖아요.- 하지만 노래 따위님은 그 말을 끝으로 대화방을 나가버렸다.
주인공이 사라진 대화방에서 남겨진 유저들은 과학실에 대한 여러 가지 추측이 제시했지만, 대부분의 의견은 굉장히 무서운 유령이 숨어 있을 것으로 내용이 흘러갔다.
그러던 중 어떤 한 유저의 명탐정 코난 급 추리가 시작됐다.
-그러고 보니, 게임 속에서 발렌타인 데이가 다가오기 전에도 과학실 문 잠겨 있
지 않았음?-
-어? 그래요? 그전에는 과학실 안 가봐서 모르겠는데..- -맞아요. 발렌타인 데이 오기 전에 과학실에 들어가려고 하면, 며칠 전에 화재 사고가 있었다고 못 들어가요.-
-화재 사고?-
-그러고 보면 홍보 영상 중에 ‘너를 좋아해. 그러니 나와 함께 죽어줘...’ 이런 대사도 있지 않았나?-
‘얼씨구? 이거 다들 왜이래? 게임 클리어도 안하고 결말부터 들출 셈인가?’
나는 대화가 이상한 방향으로 흐르자, 서둘러 키보드를 두드렸다.
-저기, 여기 아직 클리어는 고사하고 게임 시작도 안 한 분들도 계실 텐데, 이야기가 너무 엔딩에만 치중 되는 것 같은데요?- -맞아요. 저도 결말을 알고 플레이하고 싶지 않아요.- -Mr. k님이 적절히 끊어 주셨네. 다들 그냥 즐기자구요. 엔딩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신 분은 따로 대화방 파세요.- 커뮤니티의 대화방은 나의 의견에 찬반이 갈리며 시끄러워 졌지만, 내용을 미리알고 싶지 않았던 유저들이 대화방을 빠져나가며 오늘의 대화가 끝이나 버렸다.
“휴.. 어떻게든 엔딩 까발려지는 건 막았네. 뭐 며칠 더 지나면 거의 다 알게 되겠지만..”
나는 얼마 안 남은 커피를 마저 훌쩍 삼키곤 대화방을 빠져 나왔다.
사실 여기까지 들었다면 얼핏 눈치 챘겠지만, 발렌타인 데이의 주인공은 이미 ‘죽은 사람’이다.
단지 좋아하던 아이에게 편지를 전해주고 싶었던 마음에 자신이 죽었다는 것조차 인지하고 있지 못 하고 있을 뿐이지...
&
다음 날.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직원들을 데리고 본사 건물을 나서는데, 회사 앞에 반가운 얼굴이 찾아 왔다.
언제나 모자를 눌러쓴 채 커다란 카메라를 어깨에 걸치고 다니는 내 친구 준페이였다.
“어이쿠, 조금만 늦었으면 못 만날 뻔했네.”
준페이의 갑작스런 방문에 나는 하야시에게 먼저 직원들 데리고 식사하라고 이야기 한 뒤에 따로 자리를 가졌다.
“전화라도 하고 오지. 갑자기 무슨 일이야?”
“뭐긴 인마. 게임 잡지 기자가 게임 회사에 뭐 하러 왔겠냐?”
“취재냐?”
“그놈의 신비주의 좀 때려 치고, 이제 그만 공개 좀 하지 그러냐. 발매까지 5개월 남짓인데, 슬슬 실물 나올 때 되지 않았어?”
하여튼 귀신같은 놈일세. 나는 준페이의 당당한 말투에 헛웃음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특종 하나 따가고 싶어서 예감 하나 믿고 찾아온 거야?”
“왜? 아직 안 나왔어?”
“아니, 나왔어.”
그러자 준페이 녀석이 손가락을 튕기며 미소 지었다.
“거 봐. 그럴 줄 알았지.”
“보여 줄 수는 있는데, 아직 기사화는 하지 마라. 수정해야 할 부분이 남아 있으니까.”
“오케이. 나도 게임 잡지 기자를 떠나 한 사람의 게이머로서 라온이란 녀석이 굉장히 궁금하거든.”
준페이 녀석은 밥알을 거의 들이 붓다시피 식사를 마치곤 아직 식사중인 나를 재촉했다.
“밥알 세어가며 먹냐. 빨리 빨리 좀 먹어라!!”
“시끄러!! 너 때문에 체하겠다!!”
결국 반 정도 밥을 남긴 채 준페이에게 끌려나오다시피 가게를 나온 나는 식후 연초도 태우지 못하고 회사로 복귀해야만 했다.
“어라, 부장님 벌써 오셨어요?”
“사유리 씨는 식사 안 해요?”
“전 도시락 파라서, 아까 휴게실에서 직원들이랑 먹었어요.”
그러자 준페이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르며 귓속말을 하였다.
‘저 퍼펙트 한 몸매를 가지신 분은 누구냐. 완전 내 이상형인데?’
‘저 퍼펙트 한 몸매를 가진 분이 설마 솔로 일거라 생각하니?’
‘…….’
준페이는 시무룩 해졌다.
하여튼 이 녀석도 눈은 겁나게 높아요. 맨날 몽둥이 하나 들고 마왕한테 돌격하니 아직까지 여친이 없지...
사유리씨는 자신을 앞에 두고 남자 둘이 귓속말을 하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 녀석이 사유리씨 남자 친구 있냐고 물어 봐서..”
“야!! 인마!!”
“아~ 죄송해요. 전 만나는 사람 있어요.”
“아, 네. 물론 그러시겠지요. 실례했습니다.”
준페이는 부끄러운지 얼굴을 붉히며 나를 재촉했다.
잠시 후. 제 2 개발실에 들어온 준페이가 나에게 소리쳤다.
“얌마. 거기서 그렇게 얘기해 버리면 내가 뭐가 되냐.”
“그러게 거기서 그런 건 왜 물어봐.”
그러자 준페이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준페이 에게 서랍에서 라온의 프로토타입 모델을 꺼내보였다.
“억? 설마!?”
“그래. 이게 라온의 초기 모델이다.”
“세상에 이렇게 작아?”
음? 작다고? 그렇게 까지 작지는 않은데, 내 손에 들려 있는 라온은 어른의 손바닥보다 조금더 큰 사이즈라고 해야하나?
기본적인 디자인은 미래에서 보았던 센소니의 포터블기기인 GSP보다 닮아 있었다.
비록 화면 크기가 훨씬 작긴 했지만...
준페이는 나에게서 라온을 받아 들고 양손에 쥐어보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굉장히 쥐기가 편한데? 손바닥 안에 착 감기는 느낌이야..”
“바닥 부분을 곡선 처리해서 그래. 아무래도 휴대기기다 보니 그립갑에 신경을 좀 썼지. 혹시 떨어뜨릴 수도 있으니까. 거기 끝에 달린 스트랩을 손목에 걸어서 쓰는 게 좋을 거야.”
“아하~ 그렇구나. 난 게임기에 왠 스트랩이 달려있나 했네..”
준페이는 바깥에 달려있는 손목 스트랩을 손목에 끼우고 다시 라온을 움켜 쥐었다.
아무 것도 없는 화면에서 버튼을 누르던 준페이는 매끄럽게 유광 처리된 블랙 바디를 살피며 감탄사를 뱉어내었다.
“초기 모델 치고 굉장히 세련된 디자인인데? 민텐도에서 나온 휴대용 겜보이가 애들 장난감처럼 보이네.. 거기다가 슈퍼 패밀리랑 똑같이 6버튼이라니.. 이거 정말 휴대용 게임기 맞냐?”
“마침 잘됐다. 너 스파 할 줄 알지?”
“그야 물론이지.”
준페이의 대답에 나는 서랍에서 라온을 하나 더 꺼내 들었다.
“설마? 스파2가 벌써 나왔어!?”
“아니. 아직 테스트용이라, 캐릭터는 3개 밖에 못 골라.”
“3개라도 어디냐!! 나도 사실 이게 제일 궁금하더라. 휴대기기에서 스트리트 파이어2가 어떻게 돌아갈지..”
‘뭘 어떻게 돌아가? 똑같이 돌아가지.’
나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준페이의 기기와 데이터 케이블을 연결했다.
그러자 잠시 후. 어느 화창한 날 거대한 빌딩을 배경으로 카메라 앵글이 천천히 내려오더니 길거리에서 파이팅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노란 머리의 남자가 건들거리며 어깨를 움찔 거리더니 강력한 스트레이트로 상대를 쓰러뜨리자, 곧 조그만 화면 안에 STREET FIRE II 라는 글자가 떠올랐다.
“씨..발.. 똑같네?”
데이터 연결로 인해 VS 모드가 열리자 나는 커서를 대고 스타트 버튼을 눌렀다.
바라바라바라바밤~!!
기기 양쪽에 달린 스테레오 스피커에서 상쾌한 효과음이 터지며 화면이 넘어가고, 곧이어 플레이어를 고르는 화면이 나타났다.
일단 8명의 캐릭터가 있긴 하지만, 베타 버전에서 고를 수 없는 캐릭터는 흑백으로 표시 되어 있었다.
현재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캐릭터는 주인공 캐릭터인 류와, 카일, 그리고 쟌기에 프가 전부 였다. 어째서 이 세 명의 캐릭터로 정했냐면, 이 세 명의 필살기 커맨드 입력이 각각 다르기 때문이었다.
장풍 계열과 승룡권 계열의 류와 같은 경우는 가장 기본적인 커맨드 조작을 필요로 했고, 카일 같은 경우에는 뒤로 모았다가 레버를 앞으로 당기는 모으기 커맨드를 주로 사용하였다.
마지막으로 프로 레슬러 캐릭터인 쟌기에프 같은 경우는 레버를 한 바퀴 돌리거나 주먹 버튼 3개를 동시에 누르는 독특한 커맨드를 사용하고 있어. 최종적으로 이 3명이 베타 테스트 캐릭터로 잡혀 있었다.
준페이는 시작과 동시에 류를 선택했다.
이럴 경우에 나는 류를 고를 수가 없다. 스파2의 초기작에서 같은 캐릭터는 선택이 불가능 하거든..
어차피 내 주력 캐릭터는 카일이었기에 나는 준페이 녀석을 향해 슬쩍 웃어 보이며 카일을 선택했다.
캐릭터 선택이 끝나자, 화면이 넘어가며 거대한 전투기가 세워져 있는 공군 기지 스테이지가 나왔다.
“캬.. 카일 스테이지. 이거 완전 오락실이랑 똑같네? 이젠 신기함을 넘어서 감동이 밀려오는 구나”
-ROUND 1 FIGHT-
시작과 동시에 준페이 녀석은 류의 날아 차기를 시도했다.
가볍게 방향키를 뒤로 하여 녀석의 공격을 막아내자, 빈틈을 노리고 다리를 걸어왔다.
재빨리 대각선 밑으로 방향키를 입력해 하단 공격을 막아 낸 나는 방향키를 위로 쓸어 올리며 썸머솔트 킥을 시전 했다. 그러자 파동권을 날리려던 류는 카운터를 맞고 뒤로 나가 떨어졌다.
“어쭈? 좀 하는데?”
준페이는 재빨리 캐릭터를 뒤로 물러서며 파동권으로 견제를 시도했다.
류의 장풍은 약손과 강 손으로 쏠 때 날아오는 속도가 달랐기 때문에 은근히 까다롭다. 좋다고 팔짝 팔짝 뛰어 들었다간 승룡권 한방에 훅 갈수도 있기에 최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했다.
상대적으로 커맨드 입력이 쉬운 류의 장풍은 연속으로 쏘아댈 경우 모으기 캐릭터인 카일은 장풍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었기에 나는 묵묵히 방어에 집중했다.
“생각보다 기술이 잘나가네? 그런데 왜 십자키가 아니고 원형 버튼으로 방향키를 대신한 거야?”
“십자키는 민텐도가 특허를 내서 다른 콘솔 업체가 쓸 수가 없거든.”
“아, 그렇구나..”
나는 날아오는 장풍을 살짝 뛰어 넘으며 류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그러자 귀신같이 타이밍을 재고 있던 류의 승룡권이 날아왔다.
‘이 녀석이..’
나는 이를 악 문채 일어서자마자 날아오는 장풍을 막아내었다.
당시 류의 승룡권은 진짜 똥 파워를 자랑했기에, 데미지가 상당히 들어갔다.
이대로 시간을 끌면 질것이 뻔했던 나는 다시 한 번 녀석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다시 승룡권을 날린 타이밍을 재기 위해 녀석이 물러서는 순간..
묘한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멀쩡히 서있던 류가 뒤로 나가떨어진 것이다.
“뭐야, 갑자기 왜이래!?”
‘역시.. 버그도 그대로 이식 되었구만..’
나는 속으로 미소를 지으며 누워 있는 녀석에게 다시 한 번 ‘그림자 던지기’를 시전 했다. 그러자 누워있던 류가 또 한 번 뒤로 나가 떨어졌다.
“이거 왜이래!?”
“카일 버그야. 일명 그림자 던지기. 게임 센터에서도 사용할 수 있을걸?”
“진짜? 어떻게 하는 건데?”
카일의 그림자 던지기는 굉장히 악질적인 버그중에 하나로 상대방이 어디에 있던간에 집어 던지기가 가능했다. 사용법도 굉장히 쉬웠는데, 그냥 서서 강 킥을 누르면 리버스 스핀킥이라는 기술이 나가는데, 이게 모션이 사실 좀 길다..
이 리버스 스핀킥이 들어가는 사이에 레버를 뒤로 당겨두었다가 10프레임 내외에서 앞으로 재끼며 강 펀치를 누르면 카일 혼자서 던지기 모션이 들어가면서 멀리 있는 캐릭터가 혼자서 뒤로 나가 떨어졌다.
어릴 때 이 기술을 오락실에서 쓰면 기기 꺼버리거나 실제 의자로 체어샷 날리는 걸 본적이 있었는데..
“야!! 치사하게 버그 쓰지마!!”
이미 데미지가 상당히 들어간 준페이는 더 이상 견제만으로 승기를 잡을 수 없자. 가까이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녀석이 거의 다가 온 순간. 카일이 기묘한 포즈을 취했다.
리버스 스핀 킥을 시전 하던 중에 갑자기 멈춰버린 카일은 류의 공격이 통하지 않았다.
“뭐야 이건?”
“학 다리. 처음보냐?”
< EP. 22 : 대전 격투의 시대 (3)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