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127화 (127/252)

< EP. 20 : 제작 발표회 (3) >

“드래곤 엠블렘 크로엘의 검이다..”

촤아앙!!

녀석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두 개의 검격이 서로 맞부딪히며 스크린에 타이틀명이 떠올랐다.

-DRAGON EMBLEM II-

“으어아아어억!!”

“세상에.. 드래곤 엠블렘이라고!?”

아니 ‘발렌타인 데이’ 홍보 영상도 아닌데, 왜 다들 비명을 지르고 난리지?

하지만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하나 같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1986년 유령처럼 등장해 게임 업계에 광풍을 일으킨 희대의 타이틀을 설마 이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겠지..

모두가 숨죽인 가운데 또 하나의 검격이 드래곤 엠블렘이라는 타이틀 명을 산산히 깨부수며 다음 문구가 떠올랐다.

-그녀의 희생으로 되찾은 이 세계의 평화를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신 서력 28년. 성왕 크로엘. 패배하다.- 전작에 등장한 주인공의 패배를 알리는 문구가 먼지처럼 흩어지고, 구슬픈 엔딩곡과 함께 미리 준비해두었던 짧은 애니메이션이 재생되었다.

가슴에 박힌 검을 부여잡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중년의 크로엘 그리고 그의 앞에 다시 나타난 최강의 적.

상처 입은 크로엘은 부러진 성검을 휘두르며 암흑 신에게 맞서보지만, 결국 최후의 일격을 허락하며 대지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DRAGON EMBLEM II 부러진 성검과 암흑신의 부활.-

-With PENTAGON soft-

-1991년 겨울 발매 예정.-

-출시 기종 : 미정-

“출시는 내년 겨울인가.. 끝내주네..”

“어라? 벌써 끝이야? 플레이 영상은 없는건가?”

“너.. 너무 짧아. 더 보고 싶다!!”

“세상에.. 펜타곤 소프트가 드래곤 엠블렘의 IP까지 가져갈 줄이야..”

그때 모두 끝난 줄 알았던 스크린 화면에 새로운 홍보영상이 떠올랐다.

그것은 지금까지 보여준 영상들에 비하면 볼품없는 캐릭터 디자인이었지만, 방금 드래곤 엠블렘 2를 보고 난 사람들은 금세 이 영상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아 차렸다.

“어? 카트리나다.”

“캬.. 오랜만이다.”

“마지막 장에서 카트리나 희생시켰을 때 진짜 슬펐는데, 저 그래픽이 벌써 4년 전이라니..”

스크린 안에 나타난 카트리나는 사제의 지팡이를 들고 전투자세만 취하고 있었을 뿐인데, 그 모습만으로도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의 향수를 자극하기엔 충분했던 모양이다.

패밀리의 낮은 스펙으로 저 해상도 도트로 표현된 그녀의 캐릭터는 솔직히 지금에 와선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어? 뭐지? 움직인다.”

단순한 도트 디자인으로 표현되어 있던 조그만 캐릭터가 갑자기 상체를 좌우로 움직이더니 두 손으로 힘차게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지팡이 끝에서 새하얀 빛이 뿜어져 나오며 화면 전체를 감싸고, 잠시 후 다시 모습을 드러낸 카트리나는 늘씬한 캐릭터 디자인으로 변해 있었다.

3등신으로 표현된 캐릭터의 옷차림은 단순히 하얗게만 보였던 전작과는 달리 화려한 도트 그래픽으로 세세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우와앗!!!!”

“설마.. 전작을 리메이크 한 건가!?”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 카트리나의 주위로 전작에서 함께 싸웠던 동료들이 차례차례 등장하기 시작했다.

“으아아!!! 폭염술사 미레아!! 완전 섹시해!!”

“오우~ 크로엘이다~!! 그럼 신궁(神弓) 녹티스도 나오려나? 난 그 캐릭터가 제일 멋지던데”

새로 디자인 된 동료가 한명씩 늘어갈 때마다 자신이 좋아했던 캐릭터의 이름을 외치며 열광하는 모습에 나의 가슴 한구석이 찡하게 울려왔다.

이미 4년이나 흘러 다 잊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아직도 드래곤 엠블렘은 이토록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었구나, 이렇게 다들 기다리고 있었구나..

-DRAGON EMBLEM I 전설의 성검. 리메이크作-

-1991년 가을 발매 예정.-

-출시 기종 : 미정.-

드래곤 엠블렘에 대한 소식은 펜타곤 소프트 직원들에게도 비밀리에 제작된 영상이었기에 회장에 모여 있던 직원들도 혼이 나간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 자리에서 오직 평온함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단 네 사람.

카와구치씨와 모리타. 그리고 하야시 뿐이었다.

그때 스크린을 가득 메운 드래곤 엠블렘의 영웅들 머리 위로 괴상한 녀석이 떨어져 내렸다.

새하얀 달걀 모양의 캐릭터는 공중에서 떨어져 내린 충격에 껍질에 금이 가 있었다.

좌우로 데굴거리며 아파하는 달걀에게 대사제 카트리나가 회복주문을 외워 주자, 상처가 말끔히 사라졌다.

“설마.. 저거 타마고상?”

잠시 후. 카트리나 주위를 방방 뛰며 좋아하던 녀석은 갑자기 멈춰 서서 무언가를 골몰히 생각하더니 이번에는 손뼉을 치며 환호하기 시작했다.

녀석의 이상한 행동에 캐릭터들의 머리 위에 물음표 표시가 하나씩 떠오르고..

그 순간 달걀 녀석이 드래곤 엠블렘의 캐릭터를 향해 이상한 빛을 쏘았다.

그러자 펑 소리와 드래곤 엠블렘의 캐릭터들이 흑백의 귀여운 2등신 캐릭터로 변모하였다.

모두가 당황한 가운데 영웅들은 타마고상의 빛에 흡수되어 전부 빨려 들어갔고, 모든 캐릭터를 집어 삼킨 타마고 상은 ‘꺼억’ 소리와 함께 자신의 배를 두들기더니 새하얀 달걀이 검은 색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곧이어 ‘용의 문장’이 새겨진 크로엘의 망토를 착용한 타마고상이 어디론가 날아가며 홍보영상이 종료됨을 알렸다.

-타마고상의 두 번째 콜라보레이션 작품. 드래곤 엠블렘의 타마고. 현재 판매

중.-

그때 회장 안에 있던 사람 중에 한 명이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 나 저거 있는데..”

그 순간 회장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돌아갔다.

나 역시 깜짝 놀라 고개를 돌리니 가장 구석 자리에 앉아 있던 우치무라군과 미야자키씨가 어색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그때 궁금함을 참지 못한 준페이 녀석이 우치무라에게 물었다.

“저기, 지금 그거 가지고 있어요?”

“네.. 여기..”

우치무라가 주머니에서 검은색 타마고 상을 꺼내 보이자, 회장 안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진짜네.. 나는 지금가지 두 종류 뿐인줄 알았는데, 새로운 버전이 출시 됐구나.

나도 갖고 싶다.”

“그럼 저 타마고상에는 드래곤 엠블렘 캐릭터가 들어 있는 건가? 우와..”

세상에 저걸 뽑은 사람이 우치무라라니.. 이런 우연이 있나? 초기 생산으로 전국에 딱 100개만 뿌린건데.. 하하..

이윽고 드래곤 엠블렘까지 모든 홍보영상이 종료되자, 스크린에 한 줄의 문장이 떠올랐다.

[email protected]

“아, 저건 드래곤 엠블렘 때 나왔던 메시지 아냐?”

“맞아. 저거 엄청 궁금했었는데 무슨 뜻이지? 설마 이것도 오늘 밝혀지는 건가?”

그 순간 사람들의 바램대로 @ 뒤에 있던 알파벳이 사라지고, 화면에는 hjk0615라는 문자만이 남았다.

뒤이어 0615이란 숫자 역시 사방으로 흩어져 버리고, hjk라는 문자만 남게 되자.

알파벳은 좌우로 순서가 뒤바뀌며 ‘Kang Jun Hyeok.’ 이라는 문자가 완성 되었다.

“강..준..혁..?”

“드래곤 엠블렘의 한국인 개발자가..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 부장이라고!?”

수많은 사람들로 모인 회장 안이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이윽고 우리가 준비한 제작 발표회가 모두 끝났다는 걸 알리기 위해 회장 안에 조명이 굉장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모두가 숨죽인 채로 나를 지켜보는 가운데, 단상으로 향하는 내 발걸음 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뚜벅.. 뚜벅.. 뚜벅..

잠시 후. 단상에 오른 나는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몰라 긴 한숨을 내쉬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는 사람들 역시 기가차긴 마찬가지 일 것이다.

어쩌면 민텐도 쪽 사람이 아무도 오지 않은 것이 오히려 다행인지도 모르겠군..

“후... 물어보고 싶은 게 많으시죠? 그럼 이제부터 오늘 공개된 홍보영상들에 대한 질문을 받겠습니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아무도 선뜻 질문을 걸어오지 않았다.

아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는지,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사람들도 더러 있었다.

그때 패미통신 관계자 테이블에서 손이 번쩍 올라왔다.

‘첫 번째 질문자는 준페이 너냐?’

나는 빙긋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말씀하세요. 준페이씨.”

“저.. 그냥 단도직입 적으로 몇 가지 질문 좀 하겠습니다.”

“그러세요.”

“혹시 내가 없는 거리의 시나리오 작가로 알려진 ‘K’가 준혁씨의 성씨인 ‘강’을 뜻하는 겁니까?”

... 와~ 이 녀석이 친구랍시고 명치부터 때리고 시작하네..

그래. 오늘 이 자리에서 내 모든 걸 다 까발려주마.

“네. 맞습니다.”

나의 대답에 회장 안이 또 다시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어디선가 ‘악마’란 이야기도 얼핏 들린 것 같다. 어떤 이는 ‘배신자’란 말도 거침없이 내뱉었지만, 사이킥 배틀까지 포함해 희대의 명작들을 만들어낸 ‘현 세대 최고의 디렉터’라는 찬사도 아끼지 않았다.

“그럼 두 번째 질문입니다. 드래곤 엠블렘을 제작할 당시 민텐도 소속의 직원이었을 텐데, 어째서 정식으로 민텐도의 이름으로 게임을 내지 않고, 중고 시장을 노린 겁니까?”

“당시의 기술력으로 제가 만들고 싶었던 시스템을 구현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이 중고 시장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분들이라면 모두가 아실 겁니다. 드래곤 엠블렘이 어떤 방식의 시스템을 차용하고 있는지. 동료가 실제로 사망하는 시스템을 넣기 위해선 ‘커스텀 칩’이라는 읽고 쓰기가 가능 한 데이터 칩이 필요 했지요. 하지만 단가가 굉장히 비싼 칩이었기 때문에 아마 기획서를 낸다고 해도 제조 단가 때문에 통과되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자 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하긴 그것도 틀린 말은 아냐. 처음 중고시장에 돌아 다녔을 때 아는 사람을 통해서 물어봤는데, 어떤 미친놈이 그 가격에 팔았냐고 황당해 하던데?”

... 저기 미친놈이라니요.

그러고 보니 군페이씨도 처음 카트리지를 열어보고 비슷한 소리를 했었지.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다음 질문을 기다리고 있는데, 이번에는 피닉스 소프트의 유우지씨가 손을 들었다.

“질문 하세요.”

“파이널 프론티어와 드래곤 엠블렘의 출시 기종이 어째서 전부 미정인 겁니까?

설마 슈퍼 패밀리 말고 다른 기종으로 출시 할 예정입니까?”

유우지씨의 질문에 나는 잠시 대답을 망설였다.

“이 부분은 저희 회사 대표인 카와구치씨가 설명해드리는 것 맞지만, 이왕 단상에 올라온 김에 제가 대신 답해드리겠습니다. 우선 여러분께 보여드린 파이널 프론티어 4와 드래곤 엠블렘의 포팅은 슈퍼 패밀리용으로 제작 된 것이 아닙니다.”

< EP. 20 : 제작 발표회 (3)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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