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107화 (107/252)

EP. 23 : 카게무샤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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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우리는 역 근처의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카츠라기씨와 함께 행동하는 근육질의 카메라맨이 굉장히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아무튼 우치무라씨의 소동에 방송국까지 달려올 정도라니,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언론 매체의 반응이 실감나는 순간이었다.

그때 준페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 분이 게임 안에서 미유키의 목소리를 담당했던..”

“이시카와 유키입니다. 그런데 저 모르시겠어요? 그때 드래곤 엠블렘 행사 때 진행 맡으셨잖아요.”

그러자 준페이는 불현 듯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소스라치게 놀라며 나와 유키를 번갈아 보았다.

“억!! 어억!! 맞아. 그때!! 준혁이에게 카트리지 받아 가셨던 여성 유저 분!!”

“오랜만이에요.”

“아, 네!! 그런데, 준혁이 녀석이랑은 무슨 관계신지..”

“사귀는 사이인데요?”

“으아아~!! 이 배신자!! 나한텐 지금까지 여자 친구 없는 척 다해놓고!!”

그러자 나를 바라보던 유키의 눈빛이 번쩍 빛났다.

“준혁씨가 다른데서 여자 친구 없는 척 하고 다녀요!?”

준페이의 말에 당황한 나는 마시던 커피를 뿜어내며 소리쳤다.

“야, 인마!! 무슨 근거 없는 헛소문을.. 내가 너랑 한 달에 몇 번이나 만난다고!!”

“킥킥킥. 부러워서 장난 한 번 쳐봤다. 너 이 자식. 감히 미유키의 성우분이랑 사귀다니. 지금 일본 열도에서 목소리 하나로 휘어잡으신 분인데~!!”

준페이의 장난이라는 말에 상처받은 유키는 그의 칭찬에도 입을 삐쭉 내밀며 준페이를 다그쳤다.

“저 그런 장난 별로 안 좋아하거든요?”

“미안해요. 요새는 바빠서 잘 못 만나지만, 그래도 저 녀석이랑 제법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뜬금없이 여자 친구라니 질투가 나서.”

그러자 담담히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카츠라기씨가 입을 열었다.

“전 그냥 잠깐 인터뷰만 했으면 하는데, 제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지 모르겠네요.”

상당히 딱딱한 말투에 그녀 옆에 있던 준페이가 나에게 소곤 거렸다.

“이 분 방송국 기자 아냐? 저번에 TV에서 봤는데 성격 장난 아니더라.. 아주 인터뷰 싫다는 사람 멱살을 틀어쥐고..”

“저기 다 들리거든요?”

“히이익!!”

... 아주 둘이 쇼를 해라. 나는 마시던 커피를 내려놓으며 준페이에게 물었다.

“그런데 카츠라기씨는 취재기자니까 이해하겠는데, 너는 여기 무슨 일이야?”

“아.. 그게.. 사실 우치무라씨를 전에 한번 만났거든. 갑자기 뉴스속보에 나오길래 서둘러 달려왔지.”

“네가 우치무라씨를 만났다고?”

이건 또 무슨 우연이냐?

“최근에 우리 편집장이 ‘내가 없는 거리’의 실제 거리를 조사하라고 해서 며칠 전까지 도쿄 바닥을 이 잡듯이 해매고 다녔거든. 그러다가 만났지. 히로인들의 영정사진을 거리마다 놓고 다니는 게이머를..”

그러자 카츠라기씨는 준페이의 말에 흥미가 이는지 그에게 물었다.

“그 게이머가 아까 전에 연행된 우치무라씨라는 거예요?”

“네. 맞아요. 마침 그를 찾던 중에 신주쿠 거리에서 만나게 되서 따로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어떻게 만난 거예요?”

“지난 달에 발매한 패미통신 독자 투고 사연에서 미유키의 신단을 모신 유저가 있었는데..”

그러자 준페이의 말을 들은 카츠라기씨가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집에 신단을 모셨다고요!?”

하긴 그 사연은 나도 처음 보고 기겁했으니 카츠라기씨의 저런 반응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아무래도 거리에 놓인 영정 사진들의 그림체가 신단에 놓여있던 사진의 그림체랑 너무 똑같은 거야. 그래서 일부러 찾아 다녔지.”

“그걸 또 눈치 채고 찾아다녔다고? 너도 참 대단하다.”

“그래서 따로 무슨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유키는 준페이가 만난 우치무라의 이야기가 궁금했는지 다그치듯 물었다.

“그게.. 진짜 완전 뼛속까지 골수 게이머더라고, 모든 루트를 전부 클리어 한 것도 모자라 한 루트를 반복해서 플레이한 모양이더라. 아주 어떤 거리에서 무슨 대화를 했는지 조차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던데? 그래서 도저히 일상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고 이제 그만 놓아주고 싶은데, 너무 힘들다며 내 앞에서 펑펑 울던데.. 이야~ 내가 다 오글거려서..”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정 그렇게 못 잊겠으면, 같이 여행이라도 떠나라했지.”

“뭐!? 여행?”

“그 왜 있잖아. 헤어지고 나서 마음 정리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 이별 여행이라고 하던가? 그렇게라도 하고 나면 마음이 좀 편해지지 않을까 해서 추천해줬지. 설마 진짜로 할줄은 몰랐지만, 하하~”

... 결국 이 소동의 범인은 너였냐..

준페이의 말에 나와 유키. 카츠라기씨 조차 싸늘한 시선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다들 눈빛들이 왜 그래?”

“그걸 몰라서 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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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차례 소동이 끝나고 카츠라기씨는 유키와 간단한 인터뷰를 따낸 뒤 짐을 챙겨 들었다.

“우치무라씨의 행동이 사실은 한 잡지 기자의 조언과 연결 되어 있었다니, 이거 재밌는데요? 덕분에 좋은 기사 내용도 얻었고, 커피도 잘 마셨어요.”

그녀는 우리를 향해 빙긋 웃음을 지으며 가방을 크로스로 둘러매었다. 그러자 가방끈이 그녀의 명치를 지나며 유난히도 가슴이 도드라져 보였다.

준페이는 그런 그녀의 가슴을 너무 노골적으로 바라보고 있었기에 나는 탁자 밑으로 녀석의 정강이를 걷어 차주었다.

“끄악~!!”

“잘했어요. 준혁씨~ 내가 할 것 대신 해주셨네요. 그럼 전 이만.”

그러자 정강이를 쓰다듬던 준페이가 떠나는 뒷모습을 향해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저.. 저기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식사라도 하고 가시지..”

“네? 아뇨. 8시 전까지 편집실에 촬영 테이프를 넘겨야 해서 지금 좀 바쁘거든요. 다음에 또 인연이 닿거든 봐요.”

철벽녀 카츠라기씨는 쿨하게 손을 흔들고는 카메라맨과 함께 카페를 나섰다.

준페이는 못내 아쉬운 듯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차라리 당당하게 연락처를 따지 그랬어.”

“아, 그럴까? 유키씨 연락처 좀 알려주세요.”

“싫은데요.”

“뒈질래?”

“1분 사이에 두 명한테 까였군.”

우리는 간만에 만난 기념으로 자리를 옮겨 저녁 식사 겸 맥주를 마셨다.

물론 나는 차를 끌고 왔기에 무알콜인 우롱차를 마셔야했지만..

술이 약한 준페이는 맥주 500cc 하나를 비우고 나자 기분이 좋아져서는 최근에 플레이한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해 주절주절 이야기를 시작했다.

“진짜, 내가 말이야~ 이 바닥에서 패밀리가 등장할 때부터 일해 왔지만, 보다보다 그런 악독한 게임은 처음 본다. 세상에 어떻게 그 많은 엔딩 중에 해피엔딩이 하나 없냐..”

“그래서 별로란 거야?”

“아니~ 그게 또 게임 성 하나는 기가 막혀요. 특히나 주인공이 아프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의도적으로 캐릭터 일러스트를 짓 뭉게는데, 난 처음에 카트리지가 불량인 줄 알았다니까. 진짜 어떤 놈 대가리에서 나온 아이디어인지 진짜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그러자 유키는 풉하고 웃음을 터뜨리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슬쩍 입 꼬리를 올리며 준페이의 반응을 살폈다.

“넌 누구로 했었는데?”

“나? 나는 세츠나였지. 다른 캐릭터에 비해 바디라인이 끝내주잖아.”

하긴 이 녀석 드래곤 엠블렘 행사 때도 섹시 마도사를 살리라고 발악했었지.

사이킥 배틀 때는 여왕님 캐릭터인 두 번째 스테이지 보스를 더 좋아했었고..

녀석 일관성 있는 거 보소?

“준페이씨는 섹시한 여성을 좋아하시는 구나.”

“물론입니다. 아, 그런데 유키씨..? 라고 불러도 되나요?”

“네, 괜찮아요.”

“혹시 미유키의 성우를 맡으셨다면 세츠나씨의 목소리를 담당했던 분도 알고 계시겠네요?”

“네, 제가 일 하는 방송국에서 자주 보는 언니에요. 애니메이션 성우신데..”

“혹시 어떤 작품의 성우셨는지..”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 마리 앙투아네뜨 역을 맡으셨던 분인데..”

“혹시 가장 최근 작품은?”

“지구방위대 후레쉬 맨에서 ‘앨로우 후레쉬맨’ 사라의 성우셨어요. 애니메이션은 아니지만, 특촬물에서도 목소리 더빙을 주로 사용하거든요.”

그 순간 방심하던 나는 ‘앨로우 후레쉬맨’ 사라에서 마시던 우롱차를 뿜어내며 유키에게 외쳤다.

“그때 만난 그 분이 앨로우 후레쉬 성우셨다고!?”

그 순간. 나는 큰 실수를 저지른 걸 깨달았다. 갑자기 떠오른 어린시절의 추억에 너무 놀랐다.

아차 싶은 마음에 준페이를 바라보니 그 녀석 역시 어이없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네가 유키씨가 말한 성우 분을 어떻게 알고 있냐?”

간만에 바보 짓했네.. 방심하다가 후레쉬 맨에게 당할 줄이야..

“아, 그게..”

“솔직히 말해라. 나 지금 좀 열 받으려고 한다?”

“에휴.. 그래 나다 나. 내가 시나리오를 맡은 k야.”

“너.. 너, 너!! 너 너!!”

그러자 준페이는 맥주잔을 꼭 쥔 채로 ‘너’만 반복해서 중얼 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친구야.. 한정판 하나만 팔아라..”

“…….”

“제발..”

“대신 잡지사엔 비밀이다.”

“물론이지.”

잠시 후. 술집은 나온 나는 준페이와 유키를 태우고 집에 바래다주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트렁크에 넣고 다니던 ‘내가 없는 거리’ 한정판을 받아든 준페이는 거리에서 덩실덩실 춤을 추며 기뻐했다.

“으하하~ 나처럼 운 좋은 녀석은 없을 거야~ 으하하하~~”

“그렇게 좋냐?”

“그럼 물론이지. 내가 이거 못 구해서 여태까지 방바닥을 얼마나 긁었는데, 너도 진짜 나한테까지 숨기지는 마라. 진짜 한편으로는 완전 섭섭했다.”

“내가 시나리오 맡은 거 아는 사람 한손에 꼽을 정도 밖에 몰라. 가뜩이나 좁은 업계인데 조심해야지.”

“알았다. 내가 이 비밀은 꼭 지키마.”

준페이는 연신 생글거리며 집에 도착할 때까지 한정판 패키지를 마르고 닳도록 쓰다듬었다.

“아~ 오늘 하루 너무 재밌었어요. 다행히 우치무라씨도 훈방조치 될 거 같고..”

“끔찍한 일이 일어나지 않아서 다행이지..”

유키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빙긋 웃으며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들었다.

“오늘은 준혁씨네 집에 처음으로 가보고, 같이 ‘침대’도 골랐고, 우치무라상도 만나고, 카츠라기씨랑 준페이씨까지 엄청 많은 일들이 있었네요.”

“그러게.. 덕분에 하루가 무지 길었던 것 같아.”

“전 내일부터 출근해야 하거든요? 백수면서 엄살은~”

“백수가 싫으면 다시 일벌레로 돌아가서 병원에 또 실려가 볼까?”

“아주~ 그러기만 해보세요.”

“농담입니다.”

“당연히 그러셔야죠.”

유키는 어두운 차안에서도 연필을 꺼내 무언가를 슥슥 그리기 시작했다.

“뭐해?”

“타마고상 그려요. 오늘은 많은 일이 있었으니 별 10개짜리 타마고상입니다.”

타마고상은 한국어로 하면 ‘달걀씨’ 정도 되려나? 한국에 갔을 때도 그녀의 가이드북에서 본적이 있었기에 잘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그녀가 타마고상을 전부 그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입을 떼었다.

“사실 전부터 말하고 싶은 게 있었는데..”

“음~ 뭔데요?”

“그 타마고상이라는 캐릭터. 나한테 팔지 않을래?”

“네에?”

“조금 재밌는 생각이 떠올라서..”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키를 살짝 바라보며 씨익 웃어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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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어제 있었던 우치무라씨의 자살 헤프닝이 각종 뉴스에 보도 되면서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신드롬은 더욱 확산 되었다.

덕분에 민텐도의 카마우치 사장과 펜타곤의 카와구치 대표는 기자회견을 통해 대 국민 사과를 감행했고, 차후 ‘내가 없는 거리’의 카트리지 안에는 다음과 같은 주의 문구가 들어갔다.

-본 작품의 이야기는 모두 가상의 이야기입니다. 스토리에 너무 심취하지 않도록 주의해주세요.-

아침에 뉴스를 보던 나는 햇살이 들어오는 테라스에 기대어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만약에 내가 펜타곤 대표로 있었으면 꼼짝 없이 저기로 끌려갔을 텐데, 이럴 땐 대리 사장을 두는 게 참 편하구만..’

우치무라씨의 사건은 일본 방송국을 통해 해외까지 전달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고, 그 반동으로 ‘내가 없는 거리’는 영문판을 메인으로 각국의 번역 작업이 시작되었다.

그 안에는 물론 ‘한국어’도 들어 있었다.

따로 요청하지도 않았는데도, 카와구치 대표가 알아서 지시한 모양이었다.

다음 달부터는 애니메이션도 방영할 예정이니 앞으로도 ‘내가 없는 거리’의 인기는 꽤나 오랫동안 지속 될 것 같다.

‘그럼 이제 슬슬 다음 작업을 시작해야지..’

나는 남아있는 커피를 마저 비우고 겉옷을 챙겨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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