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3 : 카게무샤 (2)
“눈앞에 계시지 않습니까. 86년부터 펜타곤 소프트를 만들어 내고 뒤에서 묵묵히 지원 해준 건 바로 여기 있는 강 준혁씨입니다.”
“네..?”
후세씨의 말에 카와구치씨는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속일 생각은 없었는데, 아무래도 민텐도 직원이면서 대놓고 회사를 운영하기가 힘들어서요.”
“그러니까.. 실제로는 강준혁씨가 이때까지 펜타곤 소프트에 자금을 대주고 계셨단 말씀입니까? 그럼 쿠도 사장님은요?”
“쿠도 사장님은 현재 일본에 돌아와 계십니다. 86년 당시 트라이앵글 소프트는 이미 부도직전에 놓여 있었거든요. 저는 그때 쿠도 사장님에게 채권을 모두 갚아주는 조건으로 회사를 양도 받았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서 계시지 마시고, 이쪽에 앉으세요.”
나는 옆에 있는 의자를 빼내주며 카와구치씨를 자리에 앉혔다.
“도깨비에 홀린 기분이군요. 하지만 이제야 준혁씨가 그토록 저희 펜타곤 소프트에 관심을 가져 주셨는지 이해가 가네요. 그리고 어째서 파이널 프론티어의 한글화 작업까지 추진 하셨는지도 이제 명확해졌습니다.”
“사실 제가 한 건 딱히 없어요. 그저 전 펜타곤 직원들이 아무 걱정 없이 게임을 제작 할 수 있도록 자금만 지원해 줬을 뿐입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합니다만, 그럼 저는 이제부터 무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카와구치씨의 질문에 나는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펜타곤 소프트 대표이사가 되어주세요.”
“네!? 제가요?”
“왜요? 싫으세요?”
“아니 그것보다 준혁씨는 지난주에 민텐도를 그만두지 않으셨나요? 그럼 이제 펜타곤 소프트를 직접 운영하셔도 괜찮지 않나요?”
“아니요. 오히려 그랬다간 카마우치 사장이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생각해 보세요. 자신이 데리고 있던 부하 직원이 회사를 그만두자마자 메이저 기업의 대표이사로 올라간다면 누가 봐도 수상하게 생각하지 않을까요?”
거기다 여기서 펜타곤 소프트의 사장이란 직함으로 발이 묶일 순 없었다. 지금이야 일본이 최고의 게임 시장을 가지고 있지만, 90년 중반을 넘어서면 한국 역시 온라인 게임의 강국으로 높은 수익을 올리게 되고, 미국 역시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차라리 이쯤에서 카와구치씨에게 정체를 밝히고 대표 자리에 앉혀 놓는 게 나에겐 훨씬 이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기사 듣고 보니 그렇네요. 그럼 이제 어쩌실 겁니까?”
“펜타곤 소프트에 개발 2팀의 부장 자리를 비워두세요.”
“설마 저희 회사로 이직을 하시려는 겁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구요. 조만간 큰 선물을 가지고 돌아가겠습니다.”
“큰 선물이요?”
“일단 지금은 그렇게만 알아 두세요.”
그리고 며칠 뒤.
게임 업계 소식에 따르면 펜타곤 소프트의 대표로 카와구치가 취임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동안 펜타곤 소프트를 실질적으로 이끌어 갔던 리더는 카와구치씨였기에 회사 내에선 아무도 불만을 제기 하지 않았다.
카와구치 대표의 취임식에서 나는 게스트로 참석해 박수를 보내주었다.
나는 축하 꽃다발을 건네며 카와구치씨를 향해 살짝 미소지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카와구치씨는 내 말 뜻을 바로 이해하였는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아~ 이제 좀 사람 사는 집 같네..”
이래저래 손 볼 일이 많아 이삿짐 박스를 그대로 쌓아두었던 나는 오늘에서야 모든 짐정리를 마쳤다.
그 동안 비좁은 민텐도 숙소에서만 생활하다보니 답답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전망이 확 트인 멘션으로 이사 오니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이집이 앞으로 부동산 투기로 인해 집값이 5배 정도는 뛰겠지?’
1990년 봄..
일본의 버블 경제는 이제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은행에서 흘러나온 어마어마한 대출 금액은 서민들의 내 집 마련을 부추기고 있었고, 그로인해 조만간 집값은 천정부지로 솟아오를 예정이었다.
기업들은 너도나도 안정적인 부동산 사업에 투자를 시작하려는 시기었기에 나는 도쿄 록폰기에 위치한 고층 멘션을 현찰로 구입했다.
현재 시가 약 8천만엔에 달하는 고급 멘션을 일시에 송금시키고 나서 계약서에 사인을 마치자, 부동산 매매 업자가 굳어진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기사 집하나 사는데 10분도 안 걸렸으니까. 순식간에 하늘에서 돈이 떨어진 기분이었겠지..
딩동~
맑게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현관문을 열어 젖히자 눈앞에 유키가 서있었다.
“왔어?”
“확실히 가까이 있으니 좋네요. 교토까지 안가도 돼고~”
“들어 와. 방금 정리 마쳤어.”
“실례 할게요~”
유키는 집들이 선물로 무언가를 바리바리 싸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건 뭐야?”
“음식이에요. 아무래도 혼자 있으면 식사 제대로 안 할 테니까.”
“그냥 나가서 사먹으면 되는데..”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지.”
유키는 집에 오자마자 식탁 위에 음식을 차곡차곡 쌓은 뒤 냉장고에 넣어 두기 시작했다.
“잘 상하는 건 위에 둘 테니까. 이건 빨리 먹어야 해요.”
“응. 고마워..”
나는 잠시 그런 유키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거다 네가 만든 거야? 힘들었겠다.”
“이거 다 우리 엄마 작품인데요? 준혁씨가 한국인이라니까 좋아할 거라고 이것 저것 챙겨주셨어요.”
“그럼 너는 요리 안했어..?”
“저는 사랑과 정성을 듬뿍 담아..”
“듬뿍 담아?”
“그릇에 옮겨 담았죠. 예쁘게.”
“아~ 예쁘게..”
유키는 나를 향해 애교 섞인 눈웃음을 지으며 살짝 혀를 내밀었다.
잠시 후 텅텅 빈 냉장고가 유키 어머님께서 만들어주신 음식들로 가득 차고, 우리는 거실에서 함께 커피를 마셨다.
“그런데 집 엄청 크네요? 몇 평이에요?”
“글쎄.. 몇 평이더라. 한 80평정도 될 걸?”
“80평이요? 이렇게 넓으면 청소하기도 힘들겠다..”
“일주일에 한 번씩 관리사 분이 오시기로 했어.”
“가정 도우미까지 부르신다구요? 진짜 사치스럽다. 사치스러워. 혼자 살면 청소정도는 알아서 하세요. 백수라 맨날 놀면서..”
“아냐, 사실 나 겁나 바쁘거든?”
“호오~ 그러세요? 킥킥”
유키는 내 말에 키득 거리며 웃음을 흘렸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그런데 방이 너무 썰렁해요. 가구가 없어서 그런가..”
“일단 숙소에 있던 짐만 옮겨 왔으니까. 이제 이것저것 들여놔야지.”
“그럼 준혁씨. 우리 쇼핑하러 갈래요? 준혁씨 집에 놓을 가구들 사러~”
“지금?”
“네. 집에 있으면 어차피 응큼한 생각만 할 거 잖아요.”
... 아따, 귀신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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