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2 : 순례자들..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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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일담의 시작과 함께 등장한 미유키의 모습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주인공이 사망하고 2년 뒤.
우선 긴 생머리였던 그녀의 헤어스타일이 짧은 단발로 바뀌어 있었다.
생기를 잃은 눈동자와 수척해진 모습에 정말로 내가 알고 있던 미유키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였다.
‘내가 없는 거리’의 후일담은 이 게임의 제목 그대로 내가 없는 거리에 혼자 남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였다.
“…….”
미유키의 후일담은 남자 주인공으로 플레이 했을 때와는 다르게 전혀 선택지가 없었고, 다른 누군가와 대화조차도 없었다.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거지?”
처음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모든 상황에 대한 그녀의 감정은 독백으로만 표현되었고, 그녀는 주인공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었다.
지도에 표시된 붉은 표시는 모두 나와 함께 걸었던 거리가 표시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녀와 함께 했던 거리를 하나씩 걸어가며 나는 깨달았다.
“실어증에 걸린 거구나..”
주인공의 죽음에 대한 쇼크로 말을 잃어버린 그녀는 중간에 꼬마 아이와 부딪히는 바람에 아이 손에 들려있던 풍선을 놓치는 이벤트가 있었는데, 그녀는 아이에게 사과 한마디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빌어먹을.. 내가 원한 건 이런 이야기가 아닌데..”
주인공 없이도 예전 모습 그대로 행복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이게 뭐야..
후일담의 스토리 진행은 그녀와 함께 했던 이벤트 순서 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처음 사귀게 된 계기였던 언덕길..
“그래 여기서 내려오는 자전거를 피하려다가 미유키가 다쳤었지.. 나는 그녀를 업어 줬었고..”
두 번째로 항상 같이 거닐던 귀가 길.
우리가 처음으로 손을 잡았던 곳.
세 번째.. 용기를 내어 고백 한 그녀 집 앞의 공원..
바로 이틀 전만 해도 즐거운 마음으로 플레이 했던 거리 하나하나가 이제는 전부 나에게 아픔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나와의 추억을 회상할 때마다 살포시 웃으며 미소지었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 자신이 혼자라는 것을 깨달은 미유키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그만.. 진짜 더는 못 보겠다.”
이제 남아 있는 추억의 장소는 단 3군데.. 그중에 마지막 장소는 바로 주인공이 숨을 거둔 유원지를 향해 있었다.
“저기까지 가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화면에 집중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정신적으로 피로한 상태였지만, 여기까지 온 이상 도저히 게임을 종료 시킬 수가 없었다.
결국 마지막 데이트 장소였던 도쿄 타워에서 아경을 바라보고 다음 날 찾아간 유원지.
그녀의 손에는 한통의 편지가 들려있었다.
그리고 다른 손에는 갈색 유리병이 하나..
“뭐야!? 뭐야!! 뭔데 저거!!”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자살’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미친 그것만은 안 돼!!”
나는 마지막 장소로 이동 중인 미유키의 캐릭터를 다른 장소로 이동 시키기 위해 방향키를 눌렀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 웃긴 일이 벌어졌다.
“방향키가 안 먹혀...”
그랬다.
바로 전 이벤트만 해도 맵에 표시된 장소로 직접 캐릭터를 이동시킬 수 있었는데 반해 추억의 장소가 하나만 남게 되자 그녀는 알아서 자동으로 마지막 장소로 걸어가고 있었다.
“설마.. 안 돼. 제발!!”
그녀는 결국 주인공이 숨을 거둔 벤치에 앉아 편지지에 무언가를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나는 불길한 예감에 이불을 뒤집어쓰고 애써 울음을 삼켰다.
대체 어제 밤부터 날이 새도록 이게 뭐하는 짓이냐..
그리고 잠시 후.. 편지를 모두 적고 나자, 그녀의 옆모습 클로즈 업 되며 도톰한 입술이 보였다. 이어서 그녀의 독백이 떠올랐다.
‘모두가 시간이 지나면 잊을 수 있을 거라고, 괜찮아질 거라고 위로해주셨지만.. 세츠나씨. 그리고 나나세.. 이런 선택을 하게되어 죄송합니다.’
그때였다.
멍하니 바라보던 TV에서 그녀 목소리가 들려왔다
-역시 전.. 아직도 그 사람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 어? 방금 내가 뭘 들은 거지? 게임 캐릭터가 말을 하다니, 설마..
생전 처음 들어보는 캐릭터 음성에 얼떨떨한 기분이들었다. 환청?
그러자 보란 듯이 두 번째 대사가 들려왔다.
-지금.. 당신을 만나러 갑니다.-
그때 느껴지는 전율이란..
진짜 온몸에 소름이 돋아날 지경이었다.
“음성 데이터!!? 말도 안 돼!!”
환청이 아니다.
이 미친 시나리오를 쓴 디렉터 놈이 카트리지 안에 음성 데이터를 심은 게 틀림없었다.
여태까지 상상 속으로 느껴왔던 그녀의 목소리가 실제로 들려오자 내 가슴은 또 한 번 무너졌다.
긴 대사도 아니고 딱 저 두 문장뿐인데도 그 어떤 대사보다 치명적이었다.
“으아아아!!!”
나의 비명에 옆집에서 시끄러웠는지 벽을 쿵쿵 쳐대었다.
결국 나는 이불을 악문채로 울음을 삼키며 끅끅 댈 수밖에 없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화면에는 벤치에 기대어 쓰러진 그녀의 손에서 갈색 병이 굴러 떨어져 있었다.
“자살이라니.. 말도 안 돼. 미유키가 죽다니.. 이건 게임이잖아.. 응? 이런 게 어딨어.. 이런 게 어딨어!!”
잠시 후 후일담의 엔딩 스탭롤이 지나고 겨우 정신을 차린 나는 다시 한 번 패드를 쥐어 들었다.
“그래 맞아.. 내가 잘 못 플레이 한 거야.. 내가 잘 못해서 가장 최악의 엔딩을 본 걸 거야.. 다시 처음부터 해보자. 다시 처음부터 해보면 분명히 해결책이 있을 거야.”
게임을 시작하자마자 병원부터 가볼까? 조기에 병을 알아차리면 치료가 가능할 수도 있잖아. 그래.. 그거야. 그게 해피엔딩으로 가는 길일지도 몰라.. 하하..
스스로 정신을 차리기 위해 양쪽 볼을 수 차례 쳐대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좋아. 다시 처음부터 해보자.”
스탭 롤이 끝나고 나는 메인 화면에서 NEW GAME 란에 커서를 대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어..?”
그리고 난 이제야 깨달았다.
내가 없는 거리의 세이브 파일이 왜 하나 밖에 없었는지..
결국 다시 처음부터 플레이하기 위해선 기존의 세이브 파일을 지우는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지. 미유키를 살리려면 이방법 밖엔 없어.”
나는 이를 악물고 세이브 파일의 삭제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정말로 세이브 파일을 삭제할 거냐는 선택지 화면을 보고 난 후..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이거 만든 디렉터 녀석.. 천벌 받을 거다. 너..”
화면의 선택지에는 그동안 나와함께 했던 이벤트씬이 폴라로이드 사진화 되어 수북히 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이렇게 써 있었다.
[하세가와 미유키와의 추억을 잊으시겠습니까? 이벤트 클리어 95%]
.... 이걸 어떻게 지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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