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99화 (99/252)

EP. 22 : 순례자들.. (5)

오늘 찾아간 병원에서 주인공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그 순간 마치 내 안에 무언가가 쩌억하고 갈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왜?

그 순간부터 게임 속의 주인공은 미유키와 정상적인 연애를 할 수 없었다.

정말로 아픈 사람처럼 눈앞이 갑자기 흐릿해지거나, 어느 순간에는 미유키의 모습이 심하게 일그러져 보일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화면에는 버튼을 연타하거나, 간단한 커멘드를 입력해 주인공의 정신을 온전히 유지 시켜야 했다.

나는 선택을 강요당하고 있었다.

이대로 미유키에게 병을 숨겨야 할지. 아니면 그녀에게 병에 대하여 사실대로 말을해야 할지..

&

어두컴컴한 내 방에서 나는 컨트롤러를 부여잡고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안에는 미유키가 주인공의 집으로 찾아온 상태였다.

어쩌지? 지금 몸상태가 굉장히 안 좋은데.. 이상태에서 커멘드 표시가 나오면 단숨에 게임이 끝날지도 몰라..

시한부 선고를 받고 나서 화면에 나타난 상태 게이지에 붉은 빛이 깜박거리고 있었다.

붉은 빛이 반짝이면 주인공의 시야는 급격히 흐려지며 사물을 제대로 볼수 없었다.

“우치무라군.. 안에 있지?”

‘그녀의 목소리를 무시한다.’ 라는 선택지를 고르자, 미유키는 현관문을 두드리며 내 이름을 불렀다.

“대체 갑자기 왜 이러는 거야 우치무라군. 내가 싫어진 거야?”

“크흡.. 미유키.. 난.. 크흑.. 이제 널.. 으읍..”

억지로 울음을 찾아내며 버튼을 누르자 미유키는 현관문 앞에 주저앉은 채로 계속 해서 내 이름을 불렀다.

“으헝헝헝 나보고 어쩌라는거야아~~ 으아아아!!!”

“우치무라군. 혹시 우리가 처음 사귀기로 했던 공원 기억나?”

미유키는 내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아도 이야기를 계속 해 나갔다.

“나 어릴 때부터 우치무라군을 좋아했어.. 유치원 때 집에 돌아오는 길에 언제나 내 손을 잡아 주었잖아. 그런 우치무라군이 나에게 고백했을 때. 얼마나 가슴이 두근거렸었는데..”

[문을 열고 미유키를 만나겠습니까?]

나는 떨리는 손끝으로 방향키를 이동해 버튼을 눌렀다.

[아니오.]

“나 너무 힘들어... 상냥했던 네가 갑자기 왜 이렇게 날 차갑게 대하는지. 이유도 모른 채 헤어지긴 싫어. 제발 우치무라군.. 대답 좀 해줘.. 응?”

“어윽.. 으으윽..”

잘 못했어요.. 제발.. 미유키가 아프지 않게 헤어질 수 있도록 해주세요.. 으윽..

제가 걸린 병을 알고 슬퍼할 그녀의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요..

하지만 이 잔인한 게임은 절대로 이 가슴 아픈 이벤트에서 나를 놓아 주지 않았다.

게임 속의 계절은 12월.. 굉장히 추운 날씨에 미유키는 거센 바람을 맞으며도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점점 조그맣게 잦아드는 그녀의 목소리와 언제부터인지 몰랐지만 새차게 불어 닥치는 눈보라에 퍼뜩 그녀가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치.. 무라.. 군.. 하아.. 하아..”

[문을 열고 미유키를 만나겠습니까?]

안 돼.. 미유키. 안 돼!! 내가 잘 못했어!!

“미유키이이이!!!”

거의 주인공과 혼연일체가 된 나는 다급하게 패드를 연타하며 좁은 내방에서 그녀의 이름을 외쳤다.

그 순간 현관문으로 향하던 주인공의 시야가 급격히 어두워지며 그래픽이 뭉게지기 시작했다. 젠장!! 하필 이럴 때에..

나는 빠른 속도로 화면에 지나가는 커멘드를 입력 하며 주인공을 현관문으로 이동시켰다.

끼이익.. 두터운 현관문을 열어젖히는 소리와 함께 화면 안에는 눈을 맞은 채 쓰러져있는 미유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내 눈에 이미 다 흘려버린 줄 알았던 눈물이 또다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미유키에게 병에 대한 사실을 알렸고, 미유키는 주인공의 가슴을 때리며 왜 아직까지 말을 안했냐며 울면서 매달렸다.

진짜.. 이 게임 누가 만들었는지. 면상 한번 보고싶다.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잔인한 시나리오를 쓸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후.. 나는 다시 미유키쨩과 함께 남은 인생을 보낼 수 있었다.

그녀는 내가 비틀거릴 때마다 내 손을 붙잡아 주었고, 어딜 가든 나와 함께해 주었다.

함께 했던 오다이바의 해변가.. 후지 TV 방송국..

도쿄 타워 전망대.. 우에노 공원.. 수많은 곳은 함께 걸으며 그녀와의 추억이 쌓여간다.

차라리 애초에 처음부터 내 병에 대해 알렸으면 좋았을 걸..

점점 작별의 순간이 다가 올수록 내 오기 때문에 그녀와 조금 더 오래하지 못했다는 것에 너무나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이 게임이 진심으로 잔인하다고 느끼는 것 중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은 대체 내가 언제 죽을지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처음 이 게임을 플레이 했을 때 체력이라는 수치를 보고 고개를 갸웃 거렸는데, 초반에 이 체력이란 스텟을 대체 어디에 쓰는지 알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알 수 있다.

체력으로 버티는 거다. 의사가 말한 기간이 다가오면 체력의 수치에 따라 한달을 더 살지 아니면 그 전에 죽어 버릴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마치 지옥 불길에 타죽어 마땅할 악마가 써내려간 시나리오.

덕분에 나는 적어도 그녀 곁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항상 긴장한 채로 플레이에 임해야했다.

난생 처음 해보는 연애 시뮬레이션이란 장르가 이토록 지옥 같은 난이도를 경험하게 할 줄이야.. 편하게 A 버튼만 누르면 될 줄 알았는데, 함정에 빠진 기분이다.

통수도 이런 통수가 없다..

다행히 초반에 멋 모르고 체력을 어느 정도 올려둔 덕에 나는 의사가 예고했던 시간보다 조금 더 오래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어느 날 그녀와 함께 한 유원지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러 그녀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주인공에게 죽음이 찾아왔다.

그것은 마치 잠에 빠지듯 잔잔한 죽음이었다. 벤치에 쓰러지듯 기대어 숨을 거둔 주인공의 체력은 0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벤트 컷신으로 미유키가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안녕.. 함께 있어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해..”

마지막 주인공의 대사와 함께 바닥에 떨어진 아이스크림을 비추며 천천히 스탭롤이 올라왔다.

“으윽... 끄윽... 으으윽..”

마치 뇌가 푸딩에 된 느낌이다. 으깨진 두부처럼 바스러져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저 패드만 부여잡고 한참을 울었다. TV에서 흘러 나오는 잔잔한 BGM은 내 아픈 마음을 더욱 후벼 파고 있었다.

정말 중반부터는 패드를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다. 고개를 들어보니 시간은 어느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제 자야하나. 어쩌지..”

왠지 이대로는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모든 스탭 롤이 지나고 마지막으로 도움을 준 사람을 표시하는 곳에서 나는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이시카와 유키?’

그리고 그 옆에는 오기소 나나세의 시나리오 디렉터라고 적혀 있었다.

그 순간 대기열에서 유키씨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저요? 음~ 전 오기소 나나세 시나리오요.-

설마.. 자신이 직접 쓴 시나리오 카트리지를 구입하러 왔던 건가?

“에이.. 설마..”

그런데 관계자들이 랑도 아는 사이인 것 같고, 설마!?

그때 모든 스탭롤이 지나간 후. 새로운 시나리오를 알리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하세가와 미유키의 후일담? 이건 뭐지?”

이건 또 뭐지? 나는 새로운 이야기를 알리는 메시지 버튼을 눈앞에 두고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뇌가 녹아내리는 이야기를 견뎌낸 것에 대한 보답인가?

후일담이라면 주인공인 내가 사라진 후의 이야기잖아?

그렇다면 혼자 남은 그녀에 대한 이야기란 말인가?

이건 위험하다.

정말 위험해.

후일담이라는 메시지를 보는 순간 두부처럼 으깨진 정신력이 강력하게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걸 누르는 순간. 대체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너무나 두려웠다.

하지만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래 어디, 갈 때까지 가보자. 끝까지 버텨내 주겠어!!

그리고 그것이 정말 어리석은 선택이었다는 걸 깨달은 것은 다음 날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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