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2 : 순례자들.. (4)
“손님. 죄송합니다. 방금 미유키의 시나리오가 전부 매진 되었습니다.”
... 나의 하늘이 무너졌다.
“손님..? 손님? 소오오온뉘니이임?”
하늘이 빙빙 돈다. 노래지는 하늘 너머로 미유키쨩이 나에게 작별을 고하고 있었다.
다 끝이야. 망했어..
나만의 미유키쨩을 눈앞에서 가로채간 자식 저주 할 테다. 평생 저주 할 거야!!
“우치무라씨? 괜찮으세요?”
유키씨의 목소리에 현실로 돌아온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억울하고 분한 마음에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크흑.. 빌어먹을 조금만 더 일찍 말했더라면.. 마지막에 방심했어요.”
“우치무라씨..”
그때 내 옆에 있던 행사 관계자 하나가 확성기로 대기 줄에 있는 사람에게 알렸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방금 하세가와 미유키의 카트리지 판매가 완료되었습니다. 미유키의 시나리오를 기다려 주셨던 고객님들께 진심으로 죄송한 말씀을 드립니다. 조속히 2차 판매 수량을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뭐야!? 말도 안 돼!! 2시간을 기다렸다고!!”
“맞는 말이야!! 빨리 수량 더 풀어라!!”
“죄송합니다. 고객님. 미유키 시나리오는 더 이상 남아 있지가 않은 관계로..”
군중의 분위기는 금방이라도 행사장을 씹어 삼킬 분위기로 달아올랐다.
하지만 이미 재고는 떨어졌기에 행사 진행자 입장에서도 사과 말고는 달리 조치를 취할 방법이 없었다.
이윽고 행사 관계자와 펜타곤 소프트 직원 전원이 사죄하고 나서야 어느 정도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기 열을 떠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잠시 행사장 바닥에 주저앉았던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켜 세웠다.
내 곁에는 유키씨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에게 물었다.
“좀 괜찮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손님. 정말 죄송합니다. 현재 남은 재고는 세츠나와 나나세 시나리오인데, 어떤 걸로 준비해 드릴까요?”
“아뇨. 전 미유키 시나리오를 꼭 구매하고 싶었거든요. 그냥 나중에 따로 구입하겠습니다.”
이제 와서 행사 사정에 맞춰 다른 히로인의 시나리오를 선택하고 싶진 않았다.
결국 바닥에 놓인 슈퍼 패밀리를 들고 쓸쓸히 행사장 밖으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유키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잠깐 만요!!”
“네..?”
“잠깐만 행사장 옆에서 기다려주세요.”
유키씨는 비장한 표정으로 어디론가 후다닥 달려 나갔다. 결국 나는 영문을 모른 채 행사장을 빠져나와 근처에서 그녀를 기다렸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왜 그래? 대체 어딜 가는 거야?”
남자 목소리?
“글쎄, 잠깐이면 된다니까요.”
이번엔 유키씨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란스러움에 고개를 돌리니 유키씨는 아까 전 대기 열에서 보았던 남자의 손을 잡아끌고 나에게로 달려왔다.
“준혁씨 솔직히 말해요. 미유키 시나리오 행사 사무실에 한 두개 정도 남아 있죠?”
“물론 혹시나 해서 몇 개 더 챙겨 오긴 했는데, 그건 정말 비상용이야. 판매 수량이 아니라고.”
“그럼 그중에 하나 만 이분에게 팔아주세요. 네?”
“뭐? 안 돼. 혹시라도 알려지면 행사장에 기다리는 사람들이 난리가 날거야, 방금 펜타곤 직원들 전원 무릎 꿇고 사과하고 내려온 거 너도 봤잖아..”
“그러니까 하나 만요. 네? 준혁씨~ 제발..”
“아.. 미치겠네..”
남자는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이 사람도 펜타곤 소프트의 관계자였나?
대충 상황을 파악한 나는 준혁이라 불린 남자를 향해 90도로 인사를 드렸다.
“부탁드립니다. 1년 전부터 오늘만을 기다렸어요. 꼭 미유키의 시나리오를 해보고 싶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절대로 알리지 않을 테니 꼭 부탁드립니다.”
그러자 남자는 당황한 듯 서둘러 내 어깨를 붙잡고 일으켜 세웠다.
“저기 여기서 이러시면 안돼요. 네?”
“제발!! 부탁드립니다!!”
“준혁씨 저도 부탁드릴게요..”
“진짜.. 환장하겠네. 알았다. 알았어. 손님 계속 그러시면 너무 티 나니까, 일단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강준혁이라는 남자와 함께 행사장 뒷편의 사무실로 향했다.
준혁씨와 유키씨를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자, 방금 행사장에서 유저들에게 사죄 후에 대기 중이던 모리타씨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라? 부장님.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 그게 모리타씨. 비상용으로 챙겨온 미유키 카트리지 하나만 줄래요?”
“네? 근데 이거 불량품 교환용으로 준비한 건데.. 판매하시게요?”
“그게 사정이 좀 생겨서 이분께서 꼭 미유키 시나리오를 구입하고 싶으시다고 하셔서..”
“아~ 혹시 마지막에 구입 실패하신 분?”
행사장에 함께 있던 모리타씨는 나를 기억했는지 말을 걸어왔다.
“네.. 네!! 모리타님. 저 사이킥 배틀부터 작가님 팬입니다.”
나는 서둘러 가방을 풀어 사이킥 배틀 굿즈와 화보집을 꺼내보였다.
그러자 모리타씨 뒤에 있던 인상이 날카로운 남자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여~ 모리타 인기 좋네~ 남자한테만, 킥킥”
“놀리지 마 하야시. 내 그림을 좋아해주시는 분이시잖아.”
“아~ 이거 실례.”
잠시 후. 모리타씨는 사무실 안쪽에서 ‘내가 없는 거리’의 미유키 편을 꺼내어 들었다.
“여기 있습니다. 계산은 그냥 저희한테 주시면 돼요.”
“저, 저기.. 모리타씨. 패키지에 싸인 좀 해주실 수 있으세요?”
“어? 이거 새 건데 괜찮으세요?”
“괜찮습니다. 오히려 영광입니다!!”
“아.. 네 그럼.”
잠시 후. 모리타씨는 패키지 전면에 싸인을 마친 뒤 나에게 건네주었다.
“재밌게 플레이 하세요.”
그러자 또다시 옆에 있던 하야시 라는 남자가 끼어들었다.
“재밌게? 킥킥킥. 말이 되는 소릴 해라..”
그의 반응이 의아했지만 지금 그런 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지금은 미유키짱의 뒷모습이 그려진 패키지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죽을 때까지 간직하겠습니다.”
“저기.. 대신 여기서 구입하신 건 비밀 꼭 지켜주세요.”
“그럼요!! 물론이죠!!”
“잘됐네요. 우치무라씨.”
“감사합니다. 이시카와씨. 정말 감사해요.”
나는 몇 번이나 사무실 직원들에게 인사한 후 집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겨우 겨우 얻은 모리타씨의 싸인판 ‘내가 없는 거리’는 지금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다.
자 그럼 이제 내일 맑은 정신으로 플레이를 해볼까?
&
1989년 11월 22일 수요일.
낮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는 내내 집에 있는 ‘내가 없는 거리’ 생각만 하다가 점장님에게 혼났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이렇게 집에 와서 방금 전까지 미유키쨩과 함께 했으니까~
주인공과 소꿉친구인 그녀는 굉장히 활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약간 유우부단한 면이 있는 주인공은 내 성격과 굉장히 닮아 있었다.
게임 안에서 주인공은 대학 수업을 마치면 패밀리 레스토랑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세츠나씨와 함께 일했다.
세츠나씨는 연상인 만큼 굉장히 상냥하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특히나 세 명의 히로인 중 가장 어른스러운 몸매를 소유하고 있었다.
대학 수업 중에는 나의 히로인 미유키와 함께 나나세 쨩이 ‘선배~’ 라고 부르며 달려올 때마다 심장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귀.. 귀여워..”
모리타님의 초 고 퀄리티의 작화와 더불어 슈퍼 패밀리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음질의 BGM으로 나는 단 번엔 ‘내가 없는 거리’의 시나리오에 빠져들었다.
항상 아르바이트가 끝날 때마다 기다려주는 히로인 미유키와 함께 귀가 길에 나누는 이야기가 이벤트가 쌓일수록 조금씩 달라지는 걸 느낀 순간 온몸에 전율이 흐를 정도였다.
정말로 여자친구를 사귀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
이 게임은 정말로 나 허전한 마음 한구석을 채워주는 행복한 이벤트로 가득했다.
초반부를 조금 넘기자 본격적으로 미유키와 교제를 시작하면서 주말엔 그녀와 함께 오다이바에 가거나, 도쿄 타워에서 주말을 보낼 수 있었다.
작화 하나하나가 도쿄의 거리를 배경으로 하는 만큼 눈에 익은 장소가 나올 때 마다 나는 탄성을 내질렀다.
오늘도 미유키 쨩과 함께 데이트를 즐기고 방금 게임을 종료했다.
이제는 나를 완전히 믿어주는 미유키쨩..
꿈속에서 봐요~
1989년 11월 23일 목요일.
... 이 게임. 뭔가 크게 잘 못 되어있다.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미유키 쨩과 즐거운 데이트를 나누었는데, 게임속에서 주인공의 상태가 이상하다.
작화가 흔들리거나 그래픽이 깨져 보일 때가 있어 혹시 슈퍼 패밀리가 불량품이 아닌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것은 모두 게임 안에서 일어나는 연출의 한 부분이었다.
오늘 게임 안에서 찾아간 병원에서 주인공이 시한부 판정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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