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2 : 순례자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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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매 당일 ‘내가 없는 거리’ 를 구입한 어느 대학생 유저의 일기 -
1989년 11월 20일 월요일.
드디어.. 드디어 내일이다.
1년 동안 내내 기다려 왔던 슈퍼 패밀리의 발매일!!
정가 25000엔. 예상했던 것보다 비싼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반드시.. 반드시 손에 넣고 말리라..
더구나 내일은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일러스트 작가.
모리타 신페이씨의 펜 싸인회가 있다고 한다.
사이킥 배틀 류화영과, 아즈사 렌을 만들어 낸 신의 손을 직접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너무나 가슴이 설레인다.
아무래도 오늘 밤에 편히 잠들긴 힘들 것 같다. 빨리 내일이 왔으면..
1989년 11월 21일 화요일.
온몸이 녹초다.
사실 지금이라도 침대에 누워 잠들고 싶지만, 일기를 마치고 슈퍼 패밀리를 세팅 해야지~
대학교 휴학 중인 내가 아침 일찍 찾아간 아키하바라는 평일인데도 엄청나게 사람이 많았다. 자주 다니는 단골 가게 아저씨도 오늘만은 뭔가 남다른 각오가 느껴졌다.
혹시 내가 없는 거리가 들어왔냐고 물어 보았지만, 오늘은 펜타곤 소프트 행사장에서만 판매할 예정이란다.
잠시 한숨을 내쉬며 행사장 쪽을 살펴보니 민텐도 슈퍼 패밀리 런칭으로 인해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어떻게든 행사장 대기 줄을 찾아 맨 끝에 섰지만, 그것도 잠시 후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며 건물을 한 바퀴 휘감아 끝도 없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잠시 후. 민텐도 카마우치 히로시 사장의 인사와 함께 행사장 문이 열리고, 대기 줄은 빠르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워낙에 긴 대기 줄이라 그런지 중간 정도에 서있었음에도 내 차례가 오기까지 2시간은 걸린 것 같다.
다들 빨리 빨리 좀 사라고..
대기 줄에 선채로 사람들이 구입해 가는 타이틀을 살펴보니 태반이 ‘슈퍼 마리지 월드’를 함께 구입하고 있었다.
슈퍼 마리지 월드의 노란색 패키지는 패밀리 때보다 두 배는 더 커보였고, 두 배는 더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거기다 직 사각형의 슈퍼 패밀리 패키지는 보는 이로 하여금 기분 좋은 설레임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내 차례가 다가왔다.
계산대에 예쁘게 생긴 여직원이 나를 보며 방긋 웃어보였다.
너무 친절한 미소에 혹시 나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닌지 괴상한 망상도 해보았지만, 여직원은 다음 사람에게도 똑같은 미소로 반겨주었다.
쳇. 제기랄.. 가식적인 웃음으로 이몸을 홀리다니..
슈퍼 패밀리와 슈퍼 마리지 월드를 구입하는데 31,200엔이나 들었다.
너무 비싸다. 순식간에 한 달 동안 아르바이트 한 금액의 절반이 사라졌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1차 목표는 완수했으니까..
이제 2차 목표. ‘내가 없는 거리’를 사러 가자.
펜타곤 소프트의 행사장은 슈퍼 패밀리 구입 유저를 배려하기 위해 바로 앞에 행사장을 준비해 두었는데,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대기 줄이 끝도 없이 늘어서 있었다.
제기랄.. ‘내가 없는 거리’를 먼저 살걸 그랬나? 설마 모자르진 않았지?
건물 하나를 빙빙 돌아 겨우 행사장 끝에 서게 된 나는 무거운 슈퍼 패밀리를 내려놓고 어서 행사가 시작되길 기다렸다.
그때 엄청나게 귀여운 여성분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저기, 여기가 ‘내가 없는 거리’ 구매 대기줄인가요?”
나이는 내 또래 정도? 긴 생머리에 살짝 젖살이 남아 있는 게 굉장히 귀엽게만 느껴졌다.
“아, 네. 맞습니다.”
“다행이다. 맞게 찾아 왔네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내 말에 방긋 웃으며 내 뒤로 줄을 섰다.
세상에 이렇게 예쁜 여자도 게임을 하는 구나. 긴 대기 시간이었지만, 등 뒤에 느껴지는 그녀의 숨소리만으로도 이 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이런 저런 망상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는데 뒤에 서있던 그녀가 나를 불렀다.
“네~!?”
“게임 좋아하시나 봐요? 슈퍼 패밀리 구입하셨네요?”
“무.. 물론이죠~!! 게임 좋아합니다!!”
“저도 엄청 좋아해요~”
커헉.. 내 심장. 내 심장이..
머릿속에서 그녀의 ‘좋아해요’라는 말이 계속해서 들려오는 것만 같았다.
그러고 보니 이 여자.. ‘내가 없는 거리’에 히로인중 하나인 ‘미유키’와 묘하게 닮았는데?
아아.. 게임을 좋아하는 예쁜 여자라니 이 무슨..
그래. 이건 신이 나에게 내려준 기회야.
21살까지 모태 솔로로 살아온 내 인생을 불쌍히 여기신 신께서 그동안의 외로움에 대한 보답으로 그녀를 보내주신 거야!!
용기를 내자..
용기를 내자..
그런데 뭐라고 말하지?
갑자기 좋아한다고 고백할 순 없잖아.
그래, 이름이다. 이름부터 물어보는 거야.
두 주먹을 불끈 쥔 채로 마음속으로 몇 번 예행연습을 거친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저기.. 이름이 어떻게 되세요?”
“네?”
역시 대놓고 이름 먼저 물어보는 게 아니었어! 자연스럽지 못하잖아. 바보 멍충이!!
하지만 그녀는 잠시 후. 웃으며 자신의 이름을 알려주었다.
“이시카와 유키에요.”
유키라니.. 내가 없는 거리의 여주인공 미유키와 닮은 것뿐만 아니라. 이름까지 비슷하다니!!
운명이다. 이건 운명이야. 이 운명을 손에 넣으려면 용기가 필요하다.
내 이름을 그녀에게 알려야 해..
“제.. 제 이름은..”
그때였다.
“유키!? 너 왜 여기 서 있어!?”
뭐지? 고개를 돌려보니 정장 슈트를 입은 남자 하나가 감히 유키씨의 이름을 함부로 낮춰 부르며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나를 더 슬프게 하는 건. 그녀의 반응 이었다.
“아, 준혁씨~!!”
그 남자를 향해 손을 흔들며 웃는 그녀의 미소는 나에게 보여준 미소 그 이상의 것이었다.
남자는 유키씨에게 달려와 다그치듯 물었다.
“바람도 많이 부는데, 여기서 뭐하는 거야?”
“저도 이 줄에 서서 내가 없는 거리를 사고 싶어서요.”
“뭐 하러 줄까지 서서 이러고 있는 거야. 너도 참 대단하다..”
"그래도 꼭 여기서 기다렸다가 사고 싶어요~"
이 남자는 게임을 사기 위해 줄을 서는 우리들이 이해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게임을 좋아하는 그녀의 마음을 몰라주는 어리석은 녀석.
너 따위에게 유키씨는 너무나 아까운 사람이다!
남자는 바쁜 일이 있는지 다시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혼자 남은 유키씨는 찬바람에 오들 모들 떨며 우리들과 함께 했다.
이미 주변에서 슬쩍슬쩍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나는 조금 발걸음을 옮겨 그녀 옆에서 묵묵히 찬바람을 막아주었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으면 내가 꼭 남자친구인 것처럼 보이겠지? 크큭
지루한 시간이 지나고, 내가 존경하는 모리타씨의 인사 멘트와 함께 펜타곤 소프트의 행사가 시작 되었다.
‘내가 없는 거리’는 발매 전 예고대로 3명의 히로인을 별개의 카트리지에 담아 출시되었는데, 행사가 시작되자 입구에 윗쪽에 설치된 전광판에 세 히로인의 재고 갯수가 떠올랐다.
왼쪽부터 주인공이 아르바이트하는 패밀리 레스토랑의 선배인 오오타니 세츠나.
주인공과 어릴 때부터 소꿉친구인 하세가와 미유키.
마지막으로 주인공이 다니는 대학의 신입생 오기소 나나세.
히로인 각각의 재고 개수는 1000개씩이었다.
도합 3천개의 재고라니. 너무 작은 것 같지만, 새로운 신형 기기의 런칭 당일이니 만큼 재고 수량을 조정한 듯하다..
젠장. 내 앞에 적어도 1500명은 서있는 것 같은데, 설마 미유키가 그전에 전부 동이 나진 않겠지? 제발.. 남아 있어주세요오..
아.. 이런 일기를 너무 오래 썼군.
현장에 있던 내 마음을 간절히 담아 써 내려갔더니 굉장히 실감나게도 썼구나..
아직 다쓰지 못했지만, 옆에 놓인 슈퍼 패밀리와 내가 없는 거리 패키지에 자꾸만 눈길이 간다.
TV에 연결하고 와서 다시 써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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