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1 : 진화하는 게임기 (1)
&
1990년대는 게임의 역사가 격변하며 섣불리 콘솔 산업에 뛰어든 몇몇 기업들이 쓰디쓴 참패를 겪고 사라지는 혼돈의 시대였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이 만큼이나 재미있었던 시기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90년대 초에는 스프라이트 기술의 발전과 함께 비약적으로 2D 그래픽이 상승하게 되었고, 중반에서 부터는 가정용 콘솔로도 3D 그래픽을 활용한 게임이 줄지어 출시되기 시작했다.
그 중심에는 최초로 3D 그래픽을 사용한 RPG게임인 ‘파이널 프론티어 7’이 있었고, ‘아이언 피스트’ 와 ‘리얼 파이터’ 같은 3D 대전 격투 게임이 큰 인기를 끌었다.
게이머들에겐 황금의 시기였지만, 90년대 중반 콘솔을 만드는 기업들은 제법 골머리를 앓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기존에 만들어진 틀에 안주하기 위해 2D의 성능에 주력 하느냐, 그것이 아니면 새로운 3D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새로운 그래픽 칩셋을 설계하느냐에 대한 딜레마에 빠졌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기에는 기기의 제조 단가가 너무나 높았고, 어느 한 가지를 포기하자니 격변하는 시장의 상황이 너무나 불안했을 것이다.
내가 롭과 첸드라에게 보여준 새로운 콘솔은 1991년 발매를 목표로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2000년이 될 때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콘솔을 만들고 싶었다.
2D와 3D기술을 전부 아우를 수 있는 스펙을 가진 새로운 콘솔. 그것은..
“준혁씨?”
“응?”
“신호 바뀌었는데요.”
“아, 미안..”
잠시 딴 생각 하는 사이에 신호가 바뀐 줄도 몰랐네..
방금 전. 엘리스와 롭 일행이 한 달 동안 묵을 호텔에 내려준 나는 이번엔 유키를 바래다주기 위해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아~ 오늘 너무 재밌었어요. 마치 국제 교류회 다녀온 느낌이랄까?”
“재밌었다니 다행이네. 전부 모르는 친구들이라 어색해 할 것 같아서 걱정했는데.”
“처음엔 좀 어색했는데, 엘리스 언니가 너무 친절하게 대해주셔서..”
“엘리스씨에겐 지금도 신세를 지고 있긴 하지. 미국 쪽에서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은 대신 해주고 있거든..”
“어라? 엘리스 언니는 준혁씨에게 신세를 지고 있다고 하던데요?”
‘그건 뭐 내가 고용주니까.’
나는 유키의 말에 피식 미소를 지으며 저녁의 도쿄 거리를 달렸다.
유키가 사는 곳은 도쿄에 중산층이 많이 거주하는 키치죠지라는 곳이었는데, 신주쿠를 지나쳐 도쿄의 서쪽 외각에 있는 터라 라이텍스 공장이 있던 치바에서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전에 몇 번 가본 적이 있었는데, 동네 자체가 거의 개인 주택들로 이루어져 있어 굉장히 단정하고 예쁜 이미지였다.
“전 그냥 신주쿠 역에 내려주셔도 되는데..”
“그냥 오랜만에 드라이브도 할 겸 바래다줄게.”
“아이쿠~ 감사합니다.”
“아이고~ 무슨 말씀을~”
그렇게 소소한 농담을 주고받으며 그녀의 집으로 향하던 중 유키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준혁씨. 아까 보니까 첸드라라던 분과 롭이라는 분께 무슨 부탁을 한 거예요?”
“새로운 게임기의 제작을 부탁했어. 만약 1년 안에 만들어 내면 성과급으로 1억엔을 준다고 했지.”
“정말로 1억엔을 준다구요!?”
“왜?”
“아니 준혁씨에게 그렇게 큰돈이 있어요?”
“어... 응. 맞아.”
“세상에 저번에 비행기 탔을 때도 돌아와서 언니한테 얘기했더니 아무나 타는 좌석이 아니라고 부자들만 타는 좌석이라 그러던데, 그것도 진짜에요?”
나는 유키의 질문에 슬쩍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어떻게 저랑 나이차이도 얼마 안 나는데, 돈이 그렇게 많아요?”
나이랑 돈이 무슨 상관있지? 어떤 대기업의 손주는 태어나자마자 회사 지분의 5%을 가지고 있다던데, 그나저나 타임 슬립하기 전에 죽도록 노가다 게임을 해서 돈을 긁어모았다고 할 수도 없고..
결국 나는 유키가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범위 안으로 말을 돌렸다.
“예전에 드래곤 엠블렘을 판매한 수익이랄까? 하하..”
“아~ 하긴 중고 값이 엄청 비쌌었죠. 그거.. 거기다가 캐릭터가 죽으면 데이터가 사라져서 또 사게 만들고, 진짜 악마가 따로 없다니깐..”
‘사실 그거 카트리지 안에 들어가는 부품 단가가 너무 높아서 얼마 챙기지도 못했거든..’
나는 속으로 말을 삼키며 유키를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럼 대체 얼마나 가지고 있는 거예요? 1억엔이란 거금을 성과급으로 내놨다는 건 그 보다 훨씬 더 돈이 많다는 뜻이잖아요.”
“나도 몰라.”
“네?”
“음.. 유키, 너 지금 저축 통장에 얼마나 가지고 있어?”
“저요? 전.. 한 200만엔 정도?”
“오.. 그 나이에 200만엔이라니, 월급타면 꾸준히 모으는 모양이구나.”
“물론이죠. 항상 검소하게 생활해야한다고, 어머니가 말씀해 주셨으니까. 그런데 제 통장은 왜요?”
“너는 네 통장 안에 있는 돈이 얼마인지 정확하게 알 수 있지만, 나는 내 통장에 돈이 얼마만큼 들어있는지 잘 몰라.”
“왜 요? 준혁씨 돈이잖아요.”
“음.. 당장 운용할 수 있는 현실 적인 자금은 5억엔 정도? 그 외로는 전부 주식이거든. 그래서 난 내가 현재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정확히 몰라. 대충 가늠 해보라면, 아마 120억 조금 넘게 있을 걸?”
“120억이요!?”
전에도 내가 말했지만, 회귀 자는 실패하지 않는다. 아니 실패할 수가 없다. 더구나 나에게는 게임 & 워치가 있지 않은가?
게임 & 워치가 내 손에 있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나에게 투자 실패란 있을 수가 없었다.
일본 전역에 위치한 소프트 회사의 정보를 속속들이 알려주는 스폰서 게임.
나는 그 것을 이용해 수중에 5억엔이라는 돈만을 남긴 뒤 대박을 칠 소프트 회사들의 주식을 미리 매입해 두기 시작했다.
드래곤 워리어의 피닉스 소프트와 메탈기어, 혼두라의 폭스 소프트, 킹 오브 플레이어의 SMK와 스트리트 파이어의 CAMCO 같은 메이저 회사들과 함께, 소프트 긴코우(은행)와 같은 유명 기업의 주식도 미리 매입해 두었다.
그리게 돈을 묻어 둔 채로 시간이 흐르자, 각 업체에서 게임 발매 할 때 마다 내가 가진 주식들은 시한폭탄이 터지듯 차례차례 주가가 뛰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돈’이라는 인식보단 그냥 시간 마다 오르내리는 숫자로 밖에 보이질 않았다.
한순간에 몇 천만엔이 사라졌다가도 점심을 먹고 나면 억 단위가 불어난다.
‘이미 내가 혼자서 제어 할 만 한 액수를 넘어섰다고 볼 수 있지..’
“돈이 많다는 건 그런 거구나. 자기가 얼마를 가지고 있는지 조차 정확히 알 수 없을 만큼의 돈이라니.. 잘 상상이 안가요~”
“그래..?”
“갑자기 이상한 기분이 들어요. 항상 제가 생각하는 부자의 이미지는 굉장히 남을 깔보고, 욕심쟁이에다가 늙고 뚱뚱한 남자인줄 알았는데..”
... 너 부자랑 웬수졌니? 무슨 쌍 팔년도 시절 사고방식을.. 아, 지금 89년이지..
내가 잠시 어이없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유키는 ‘푸흡’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어쭈?”
“아, 믿을 수 없어. 준혁씨가 마치 딴사람 같아요. 꼭 스쿠루지 영감 같아. 킥킥~”
“뭐? 스쿠루지?”
“미안해요. 근데, 준혁씨가 부자라니까, 왜 이렇게 웃기지?”
이거 내가 너무 티를 안내고 다녔나..
&
다음 날부터 롭과 첸드라 일행은 1억엔의 성과급을 목표로 서로를 견제하기 시작했다.
롭 일행이 일본에 머무르는 기간은 약 한달.
나는 천천히 그들의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프로젝트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고, 남은 기간은 충분하기 때문이다.
우선 첸드라 녀석은 그동안에 실무경험을 바탕으로 빠르게 설계 도면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카트리지 공장에서 첸드라는 내가 건네준 슈퍼 패밀리의 스펙과 자신이 알고 있는 데이터를 수집해 단 일주일 만에 슈퍼 패밀리에 근접한 내부 도면을 완성하였다.
“어떠냐? 강준혁?”
“일주일 만에 이 정도까지 해낼 줄은 몰랐네.. 대단한데?”
“그렇지? 킥킥 이대로 라면 1년 뒤에 성과급은 우리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데 GPU 장치는 어디에 설계하게?”
“어? 어.. 그건..”
“롭이랑 이야기는 해봤어?”
“하지 않았다.”
“푸말라와 다른 인도인 친구들만으론 조금 힘들 텐데? 내가 원하는 건 카트리지 시스템 콘솔과 새로운 미디어를 인식할 수 있는 부가 기기 둘 다거든.”
“사실 나 역시 그 부분이 궁금하다. 카트리지 콘솔을 만들어 내는 건 알겠는데, GPU장치와 함께 아래쪽에 추가하는 두 번째 콘솔은 대체 무슨 역할을 하는 거냐?”
“내 예상대로라면, 90년대 중반부터 카트리지 시스템의 용량 부족으로 CD로 이동하는 시대가 올 거야.”
“CD? 그 음악을 듣는 광디스크 말이냐? 말이 안 된다. CD는 한번 데이터를 저장하면 다시 지울 수 없다. 거기다가 속도가 너무 느려서 데이터를 읽어 들이는데, 시간이 많이 소요 될 텐데.”
“알고 있어. 그래서 카트리지 콘솔을 먼저 선 발매한 후에 나중에 CD 롬을 탑재한 업그레이드 콘솔을 추가로 연결시키는 거니까.”
“그 말은 여기 나온 두 기기가 차후에 서로 합체 한다는 말이냐..?”
첸드라의 질문에 나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