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86화 (86/252)

EP. 19 : 내가 없는 거리.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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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일단 C루트 엔딩으로 히로인의 죽음에 대한 엔딩을 들은 그녀는 감정조절이 쉽지 않은지 울먹거리며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솔직한 평을 듣고 싶었던 나는 잠시 그녀가 진정될 때까지 기다린 후에 물었다.

“어떤 것 같아?”

“준혁씨가 만든 시나리오에 토를 달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엔딩이 달라지는 거라면 혹시 이런 끝맺음은 어떨까요?”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

유키는 나의 물음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내가 정해 놓은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묘한 해결책을 제시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의 이야기를 모두 전해들은 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나쁘지 않아. 오히려 내가 만든 극단적인 시나리오 보다 어쩌면 유저들에게 더 큰 감동을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때요? 만약에 제가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 놓고 떠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저는 그 사람을 위해 이렇게 하고 싶은데..”

유키가 제시 한 시나리오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던 나는 웃으며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상당히 괜찮은데? 사실 너무 극단적인 스토리라 유저들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을까 걱정한 부분도 있었거든.”

사실 이 시나리오를 쓰면서도 걱정이 되는 부분이 몇 가지 있었다.

올해 초. 극장에서 개봉한 ‘역습의 샤아’라는 건담 애니메이션에서 주인공 아무로와 그 라이벌인 샤아의 죽음에 건담 팬 몇몇이 슬픔을 못 이겨 자살했다는 루머가 나 돌은 적이 있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황당한 소식이겠지만, 꼭 게임 뿐 만 아니라 좋아하는 영화배우나 스타의 죽음에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례는 과거에도 몇 차례 신문에서 본적이 있었다.

‘너무 극단적인 스토리는 강한 인상을 남길 수 있지만, 자칫 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주인공과 히로인의 슬픈 감정을 그대로 유저들에게 주입 시키면서 좋은 마무리를 이끌어 낼 방법을 찾기가 쉽지 않았기에 최근에는 시나리오 작업이 지지부진 한 상태였다.

“유키. 미안하지만 부탁이 하나 있는데.”

“네? 뭔데요?”

“네가 말한 엔딩. 혹시 시나리오로 써줄 수 있어? 다음에 모리타에게 시나리오를 건네줄 때 같이 전해주고 싶은데.”

그러자 유키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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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일주일 뒤.

모리타를 만나기 위해 신주쿠역에 도착하니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

나를 부르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멀리서 손을 흔드는 유키의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그녀는 나를 발견하자 쪼르르 달려와 내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요?”

“응. 그 날 이후로는 잠을 많이 자두는 편이거든.”

“다행이네요.”

“그런데 벌써 작업이 끝난 거야?”

“음.. 전부 끝난 건 아니고, 마지막에 연결되는 부분만 써두었어요. 모리타씨에게도 빨리 보여드리고 싶어서.. 그런데 과연 모리타씨도 제가 쓴 시나리오를 좋아할까요?”

“아마 모리타씨는 엄청 좋아할 걸? 하지만 하야시씨는 작업량이 늘어서 싫어 할 수도 있겠지만..”

“하야시씨는 조금 무서운데..”

일주일 전 ‘내가 없는 거리’의 시나리오 복사본을 가져간 유키는 그것을 토대로 새로운 엔딩을 기획했다.

집에 돌아가 시나리오를 처음부터 꼼꼼히 살펴본 그녀는 표현이 거친 문체를 부드럽게 다듬어 퇴고 작업까지 도와주고 있었다.

“하지만 게임을 만든다는 것은 참 매력적인 것 같아요. 드래곤 엠블렘이나 사이킥 배틀 때는 플레이하는 입장이라 잘 몰랐는데, 이렇게 직접 시나리오까지 쓰고 나니 유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너무 궁금하고 기대돼요.”

우리는 모리타와 하야시를 만나기 위해 약속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주말에 신주쿠 일대는 쇼핑을 하러 나온 사람들이라던가, 연인들로 북적였기에 나와 유키는 수많은 인파를 헤치며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거리에는 유키가 관심 있어 하는 맛있는 디저트 가게라던가 옷가게가 즐비했지만, 유키는 나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애써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모리타씨에게 시나리오를 넘겨주고 시간이 좀 비면 저녁엔 디저트 가게라도 들러볼까?

나는 속으로 빙긋 웃으며 그녀의 손을 붙잡고 열심히 걸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윽한 분위기를 가진 찻집 안에서 모리타와 하야시를 만날 수 있었다.

“어라? 유키씨도 같이 오셨네요?”

모리타는 나와 함께 온 유키를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안녕하세요. 모리타씨. 지난 주엔 감사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부장님 지난주에 유키씨랑 통화하다가 쓰러지셨다면서요? 몸은 좀 괜찮으세요?”

“네, 감사합니다.”

“그러게 제가 너무 무리 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그런데 유키씨는 무슨 일로?”

“사실 지난주부터 ‘내가 없는 거리’에서 시나리오 퇴고 작업을 비롯해 또 다른 엔딩 루트를 같이 기획하게 됐거든요.”

“또 다른 엔딩 루트? 설마.. 유키씨가 직접?”

그러자 모리타의 물음에 유키가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려요. 모리타씨.”

“아!! 네. 저야말로!!”

하지만 하야시의 반응은 그렇게 썩 좋지는 않았다.

“엔딩 루트가 또 늘어났다 구요? 루트 하나가 늘면 엔딩이 3개가 더 추가 돼야 하는데, 아무리 텍스트 분량이라지만, 모리타 녀석 작화 때문에 용량이 남아나질 않아요.”

“죄송해요. 하야시씨..”

“아뇨.. 그.. 유키씨가 사과할게 아니라. 모리타 너 인마. 작화 용량 좀 안 줄일래?”

“미안, 최대한 줄여볼게.”

차마 유키를 나무랄 수 없었던 하야시는 괜히 모리타에게 화풀이를 하며 툴툴거렸다.

하야시는 카트리지 시스템의 부족한 용량 때문에 골머리를 썩고 있는지라 엔딩 루트 하나에도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 하고 있었다. 차라리 CD 매체였다면 이런 문제는 없었을 텐데..

모리타 역시 그런 하야시의 눈치를 봐가면서도 16색 스프라이트로 가히 절정의 작화를 뽑아내고 있었다.

사실 여기까지 오다보니 모리타와 하야시중 누가 더 괴물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새로운 엔딩 루트라면.. 역시나 또 다른 새드 엔딩인가요? 부장님 이젠 더 이상 정신적으로 버틸 수가 없습니다.”

그러자 유키는 자신의 가방에서 갈색 서류 봉투를 꺼내어 모리타에게 내밀었다.

“제가 생각한 또 다른 엔딩 루트인데, 한번 봐주시겠어요?”

모리타와 하야시는 유키가 내민 시나리오를 받아들었다.

센스 있게 따로 말하지 않았는데도 유키는 나와 모리타, 하야시를 위해 각각 한부씩 시나리오를 준비해둔 상태였다.

유키에게 받은 시나리오를 넘기려던 찰나, 마치 시험을 치르는 학생처럼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준혁씨? 뭐 좀 마실래요..?”

“아, 그래. 뭐 마시고 싶어? 내가 주문하고 올게”

“아뇨!! 제가 주문 할래요. 눈앞에서 제가 쓴 시나리오를 읽으니 얼굴이 화끈거려서.. 준혁씬 커피 맞죠?”

“응.. 부탁할게”

이윽고 유키는 시나리오를 살피는 모리타와 하야시를 두고 서둘러 주문대로 향했다.

그리고 유키는 아예 음료수가 나올 때까지 자리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우리 셋은 의자에 기대어 유키가 준비한 시나리오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우선 메인 시나리오 자체를 바꿀 수가 없었기에 시나리오는 주인공이 사망한 시점에서 그녀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부장님.. 이 시나리오. 저는 무조건 찬성입니다.”

가장 먼저 시나리오를 전부 읽은 모리타가 입을 열자, 아직 다 읽지 못한 하야시가 소리쳤다.

“안 돼!! 아직 나 다 못 봤어. 아무 말도 하지 마!!”

이윽고 유키가 커피와 함께 과일 쥬스를 가져올 때까지 나와 모리타는 숨죽인 채 하야시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유키 역시 분위기를 읽고 가만히 하야시씨가 시나리오를 전부 읽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아, 젠장.. 가게 조명이 너무 어두워..”

하야시는 또 다시 조명을 탓하며 안경 밑으로 눈물을 훔쳐냈다.

“두 분은 어떤 것 같아요?”

그러자 모리타와 하야시는 잠시 서로를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솔직히.. 부장님 시나리오 보다 나은 것 같습니다.”

“…….”

나도 인정하고 있었지만, 살짝 빈정 상하려 하네..

나는 잠시 유키가 건네준 시나리오를 살피며 둘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인공이 사망한 후 혼자 남은 그녀를 위해 천국에서 오는 편지라.. 하긴 그러고 보니 예전에 한국 영화중에 비슷한 스토리가 있었던 것 같은데.. 제목이 ‘편지’였던가? 나도 그거 보고 많이 울었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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