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9 : 내가 없는 거리. (4)
“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겁니까?”
“진짜 잔인하다.. 부장님 혹시 제가 그리는 히로인에 악감정 있으세요?”
여 주인공 사망 설에 충격에 빠진 모리타와 하야시는 손에 쥐고 있는 젓가락으로 나를 찔러 죽일 기세였다.
역시나 ‘내가 없는 거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겐 다소 충격적인 스토리 전개방식 이었기에 어느 정도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었다.
나는 극도로 흥분한 그들을 진정 시킨 뒤 대답했다.
“모든 것은 2부에서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려있어요. ‘내가 없는 거리’는 멀티 엔딩 시스템이라 그녀의 죽음 역시 하나의 엔딩에 속하게 될 겁니다.”
“그.. 그럼 그 안에 혹시 해피 엔딩도 있나요?”
한 조각의 희망을 품은 채 조심스레 말을 꺼낸 모리타는 거의 울어버릴 듯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아뇨. 그런 엔딩은 계획에 없습니다.”
“으아아~!!”
대놓고 울리자고 만든 게임에 도망칠 구멍 따위 만들어 놓을 것 같으냐?
그딴 거 없을 거라고 전해라~
&
그로부터 며칠 뒤..
모리타와 하야시는 함께 민텐도를 퇴사했다. 이미 마음속으로 펜타곤 소프트로 이직을 결정한 그들은 인수인계를 끝내자마자, 곧장 실행에 옮긴 것이다.
그들은 잠시 휴식기를 가진 뒤 4월부터 펜타곤 소프트에서 미연시 프로젝트에 참여하기로 했다. 그 들이 떠나는 주말. 함께 이삿짐을 날라준 나는 모리타가 건네는 음료수를 받아들고 계단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힘들다..”
“부장님께서 직접 짐을 날라주실 필요까진 없는데..”
“뻔히 아래층 직원이 짐 빼는데, 가만히 있기도 뭐해서..”
내가 살짝 웃으며 음료수를 삼키고 있는데 하야시가 다가왔다.
“이 자식. 자기 짐 다 뺐다고, 여기서 농땡이 치고 있네. 어? 부장님도 계셨어요?”
“이거 마시고, 네 짐도 마저 빼자.”
“땡큐.”
하야시는 모리타가 건네주는 음료수를 받으며 입가에 담배를 물었다.
“다들 주말이랍시고 놀러 가던데, 부장님은 어디 안가십니까? 유키씨는요?”
“안 그래도 있다가 교토역에 도착한다고 해서 마중 나가보려구요.”
그러자 그들은 ‘역시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때는 3월 중순. 차가웠던 겨울이 지나고 봄의 계절이 오고 있었다. 숙소 근처의 벚나무에는 꽃망울들이 잔뜩 몸을 웅크린 채 만개할 준비를 하고, 우리들은 이삿짐 트럭이 세워진 숙소 앞 계단에 앉아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때 하야시가 새하얀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나에게 물었다.
“그나저나 부장님은 언제쯤 오실 겁니까?”
“네?”
“저희만 쏙 빼내서 펜타곤 소프트에 박아두신 건 부장님도 언젠가 펜타곤 소프트로 넘어 올 생각이 있으셔서 그런 게 아닌가요?”
역시 하야시가 모리타보다 눈치가 빠르긴 하군. 그러자 모리타가 깜짝 놀라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도 그럼 이직하실 계획이 있으신 건가요?”
“뭐.. 사실 계속 민텐도에 있을 생각은 없어요.”
“그래도 부장이라는 직급도 있으시고, 미국 시장 성공 경력에 게임 디렉터까지 앞길이 탄탄대로인데, 그걸 버리고 이직 하신다구요?”
모리타의 물음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모리타씨. 전 한국인이잖아요.”
“그게 어때서요?”
“카마우치 사장은 능력을 중시 하지만 직계가족 외에 사장직을 주진 않아요. 군페이씨만 봐도 거의 10년간 부장 직에 멈춰 있잖아요.”
특히나 내가 알고 있는 미래에서 카마우치는 2002년이 돼서야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차기 사장직으로 오른 인물이 바로 벌룬 파이트를 만들어 시게씨에게 영감을 주었던 카와타 사토루씨였다.
이 인사는 민텐도로서는 최초로 친족 승계가 아닌 외부인을 사장 자리에 앉힌 최초의 사례로 남게 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휴대용 게임에 장착한 터치펜 하나로 위기에 몰린 민텐도를 구원하겠지..’
그때 모리타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도 카마우치 사장님도 불사신은 아니니 언젠가 사장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까요?”
“뭐 그렇기야 하겠지만, 그렇다 해도 그 자리가 나에게 올 확률은 희박하죠. 차라리 내가 나가서 직접 회사를 세운다면 모를까?”
“부장님께서 직접 회사를요!?”
“왜요? 제가 못할 거 같아요?”
“아뇨. 그런 뜻은 아니라..”
“사실 민텐도를 떠나는 건 다른 이유도 있어요. 저번 사이킥 배틀을 제작 할 때도 느꼈지만, 민텐도는 전 연령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게임을 원합니다. 현재 기획중인 ‘내가 없는 거리’ 역시 민텐도가 원하는 스타일과는 거리가 멀죠.”
그때 조용히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하야시가 재떨이에 담배를 비비며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전부터 궁금했던 게 있는데..”
“말씀하세요.”
“이번에 ‘내가 없는 거리’의 컨셉을 보면서 느낀 건데, 혹시 드래곤 엠블렘.. 부장님이 만드신 것 아닙니까?”
“…….”
“뭐!? 하야시 그게 무슨 말이야?”
“그곳에서도 마지막에 두 명의 여주인공을 한 명을 희생 시키는 시나리오와 플레이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난이도로 유명했죠. 사이킥 배틀은 캐릭터의 사망은 없지만, 역시나 클리어한 사람이 극히 드물 정도로 극악의 난이도를 자랑합니다. 사실 여기서 조금 긴가민가했지만, 이번에 ‘내가 없는 거리’에 대한 컨셉을 보는 순간. 어느 정도 확신이 서더군요. 다른 곳에 까발릴 생각은 없습니다. 어차피 민텐도도 퇴사했으니까. 속 시원히 말씀해 주세요.”
“이거 참..”
나는 얼마 안 남은 음료수를 마저 비워낸 후 캔을 찌그러뜨리며 하야시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그러자, 모리타는 기겁한 표정으로 나와 하야시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하야시는 나의 대답에 싱긋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습니다. 사실 이 세 가지 게임 전부 현재 시장에 없는 새로운 장르였으니까요. 이제 속 시원히 펜타곤으로 넘어갈 수 있겠네요. 진심으로 부장님 같은 분과 함께 일해서 영광이었습니다. 저 드래곤 엠블렘 팬이거든요.”
“고맙습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릴게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죽을 때까지 부장님 쫓아다닐 테니까. 후딱 정리하고 펜타곤으로 넘어 오세요.”
“때가 되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레기통에 캔을 던져 넣었다.
“자~ 그럼 마저 짐 옮길까요? 사실 유키가 올 시간이 다 되어서 좀 서둘러야 해요.”
“네. 알겠습니다.”
모리타와 하야시는 나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그 후로.. 반년의 시간이 더 흘렀다.
1988년 9월 17일. 대한민국에서 88올림픽이 개최되고 역사상 길이 남을 비둘기 화형식을 시작으로 온 세계가 축제 분위기였지만, 나는 여전히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잠시 지난 날을 살펴보자면 지난 8월에 도쿄에서 열린 사이킥 배틀의 유저 초청 행사가 있었다.
500장을 뿌린 사이킥 배틀의 골든 티켓은 행사가 다가올수록 가격은 천정부지로 솟아올랐고, 당일 현장에서도 암표 거래가 있을 정도였다.
소문으로 사이킥 배틀의 골든 티켓은 10만엔 정도 거래 되었다고 하는데, 그만큼 사이킥 배틀은 일본에서 대박을 터뜨렸다.
올 클리어 데이터를 인증하고 들어선 유저는 약 천 명 정도로 행사장은 약 1500명의 유저로 가득 찼다.
이미 회사를 그만둔 모리타였지만,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해준 유저들에게 보답의 의미로 여러 굿즈를 만들어준 덕에 사이킥 배틀의 행사는 성공적으로 진행 할 수 있었다.
행사장에서 판매한 캐릭터 상품만 해도 어마어마한 수익을 올렸고, 카마우치 사장은 아예 해마다 이런 행사를 여는 것은 어떻겠냐며 수선을 떨었다.
“민텐도 게임쇼 어때!? 응? 해마다 우리 민텐도에서 출시하는 게임을 가지고 이런 행사를 여는 거야?”
취재를 나온 기자들 앞에서 호들갑을 떠는 통에 나와 군페이씨는 카마우치 사장의 입단속을 하느라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실력 있는 참가자들끼리 토너먼트로 진행한 사이킥 배틀 대전 역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컨트롤로 어마어마한 인기를 끌었다.
특히나 마지막 결승 장면에서 맞붙은 류 화영과 아즈사 렌의 대결은 게이머들에게 영원히 기억될 명장면을 남겼는데, 아즈사 렌의 체력 게이지가 1도트 남은 상황에서 가드 데미지를 노린 류 화영의 필살기를 패링이라는 특수기술로 막아낸 것이다.
패링이란 아즈사 렌이 가지고 있는 특수 베리어로 날아오는 탄막이나 공격을 타이밍에 맞추어 가드 버튼을 누르면 데미지를 입지 않고 적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는데, 이 미친 플레이어는 류 화영이 날린 연속 공격을 전부 패링으로 쳐낸 뒤 마지막 일격에서 카운터를 노려 한방에 역전해 버린것이다.
캉캉캉!! 캉캉캉캉!! 캉캉캉캉!!
류화영의 연속 난무를 죄다 받아치는 소리가 회장에 울리자 화면을 바라보는 사람들을 전부 그 자리에서 얼어 붙어버렸다.
“뭐야? 저거!? 설마 패링이야?”
“미친 저게 가능해?”
이윽고 마지막 일격으로 승리자가 결정되자, 거대한 화면에서 그들의 플레이를 지켜보던 게이머들은 회장이 떠나갈 듯이 소리를 질러내며 난리 법석을 떨어대었다.
대회 우승자 시상을 위해 단상에 오른 우승자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갸웃 거리며 물었다.
“혹시 한 5년 전쯤에 저한테 패밀리 사주신 분 아니세요?”
어? 설마.. 이 녀석?
“혹시 타카시군?”
“아!! 역시 맞죠? 설마 사이킥 배틀을 만든 사람이 형이었어요?”
생각지 못한 우연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설마 여기서 보게 될 줄이야. 우승 축하한다.”
“제가 그때 형보다 게임 잘할 자신 있다고 했잖아요. 골든 티켓이 없어서 올 클리어 하느라 엄청 고생했거든요?”
상패를 받으면서도 툴툴 거리는 타카시와 함께 기념 촬영을 마치고, 단 하루뿐이었던 사이킥 배틀의 성대한 행사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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