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82화 (82/252)

EP. 19 : 내가 없는 거리. (2)

“준혁씨?”

“미안..”

미안하다는 나의 말에 나를 바라보던 유키의 눈동자에 불안감이 스쳤다.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빙긋 웃으며 입을 떼었다.

“안 그래도 내가 먼저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타이밍을 놓쳤네..”

그러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유키는 자신의 이마를 내 가슴에 대고 중얼 거렸다.

“거절하는 줄 알고, 가슴이 무너지는 줄 알았잖아요. 이 바보가..”

내 가슴에 기댄 채 작은 어깨를 들썩이던 유키는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이거 참.. 울릴 생각은 없었는데, 나는 멋쩍은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보며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때였다.

“어.. 눈 온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에서 새하얀 눈이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하지만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유키는 자신이 울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는지 더욱 파고들며 대답했다.

“거짓말..”

“아니.. 진짠데?”

“안 속아요.”

하지만 그녀의 말이 무색하게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금세 시끄러워졌다.

“함박눈이다~”

“와~ 이 정도면 금방 쌓이겠는데?”

유키는 주변 사람들의 환호성에 빼꼼 고개를 내밀더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빨갛게 부어 오른 눈이 내 눈과 마주치자, 부끄러운지 다시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의 행동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턱 끝을 부드럽게 끌어 올렸다.

자연스레 두 눈을 감는 그녀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살짝 벌려진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

“유키 탑승 시간 다됐어..”

“잠깐만요. 거의 계산 끝났어요.”

공항 면세점에서 부모님 선물과 직장 동료들의 선물을 사들고 나온 유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저희 아직 안 늦었죠?”

“지금 내려가면 터미널 버스 탈 수 있을 거야.”

나는 그녀의 쇼핑백을 나눠든채 재빨리 터미널로 달렸다.

유키 역시 나를 쫓아 있는 힘껏 달렸고, 결국 우리는 터미널 버스가 출발하기 1분 전. 비행기 탑승장으로 향하는 터미널 버스에 오를 수 있었다.

“하아.. 하아.. 다행이에요. 전 비행기 놓치는 줄 알고..”

“아침 비행기인데 너무 늦게 일어나는 바람에 큰일 날뻔했네..”

“치.. 밤새도록 잠 못 자게 괴롭힌 게 누군데..”

어.. 그러게, 그게 누구더라..

유키는 모른 척 하는 나를 잠시 흘겨보다가 방긋 웃어보였다.

나를 향해 웃고 있는 그녀의 목에는 조그마한 열쇠 목걸이가 걸려있었다. 그 것은 흔히 남산에 온 커플들이 철조망에 채우는 자물쇠를 채우고 버리는 열쇠였다.

“그거 진짜 차고 다닐 거야?”

“네.”

“그거 원래 난간 밑에 버리는 건데..”

“그래도 전 가지고 있을래요. 나중에 혹시라도 준혁씨랑 헤어지면 한국에 와서 자물쇠 풀어 버리려구요.”

“그게 지금 사귀고난 다음 날에 할 소리냐?”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알밤을 날리자, 그녀는 이마를 문지르며 혀를 쏙 내밀었다.

“하긴 그것도 그러네. 미안해요.”

잠시 후. 활주로에 대기 중인 비행기까지 그녀를 바래다준 나는 유키에게 나리타행 티켓을 건네며 물었다.

“잘 갈수 있지?”

“물론이죠.”

“집에 도착하면 연락할게.”

“기다리고 있을게요.”

가능하면 함께 돌아가고 싶었지만, 그녀가 사는 도쿄에서 또 다시 내가 사는 교토까지 신칸센을 타는 건 매우 비효율 적이었기에 나는 유키를 먼저 나리타로 보내기로 했다.

내가 탈 비행기는 한 시간 뒤에 오사카 공항으로 이륙할 예정이었다.

“한국에 데려와 줘서 고마웠어요.”

“뭘 제대로 구경시켜준 것도 없는데..”

“그럼 나중에 제대로 구경하러 다시 오면 되죠.”

“그래. 그러자..”

나는 유키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자, 그녀는 강아지 처럼 두 눈을 꼭 감은 채 살포시 웃어보였다.

&

다음 날.

금요일 연차 이후로 3일 만에 출근한 나는 책상에 올려진 결재 서류를 살피던 중.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와 함께 모리타가 들어왔다.

예전에 휴게실에서 봤을 때완 달리 홀가분한 표정의 모리타는 나를 보자마자 반갑게 인사를 걸어왔다.

“부장님. 한국은 잘 다녀오셨어요?”

“아.. 마침 잘 오셨네요. 안 그래도 떠나기 전에 식사나 같이 할까했는데.”

그러자 모리타는 특유의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한국에서 돌아오시면 컨셉 일러스트를 보여주신다고 하셔서..”

아무래도 새로운 프로젝트가 미소녀 관련 게임이다 보니 모리타는 개발 초기 단계임에도 엄청난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모리타는 이번 달 말일을 끝으로 민텐도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사이킥 배틀의 성공으로 그의 퇴직을 아쉬워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적극 적으로 회유하는 이는 드물었다.

그 이유는 민텐도에서 개발하는 게임 타이틀에 비해 개발자 수가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다.

시게씨는 양질의 게임을 제작하기 위해 개발기간을 점차 늘리고 있었고, 현재 민텐도 퍼스트 게임은 슈퍼 마리지, 동킹콤, 카린의 전설로 압축 되고 있었다.

그러한 라인업에서 미소녀 전문 일러스트 작가인 모리타가 설 자리는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그건 모리타 자신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곧 점심시간이니 같이 식사나 하죠. 자료는 거기서 보여드릴게요.”

“아, 네~!!”

잠시 후 서류를 정리하고 모리타와 함께 본사 건물을 나서는데,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모리타!! 강 부장님~!!”

다급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중앙 로비에서 하야시가 우릴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인사드리러 갔더니. 식사 가셨다고 하셔서..”

“하야시씨도 같이 가실래요?”

“물론이죠. 부장님께 드릴 말씀도 있고..”

급하게 달려오느라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고 있는 하야시의 표정에는 묘한 결의가 담겨있었다.

&

“뭐? 너도 그만 둘 거라고!?”

회사 근처에 내가 자주 이용하는 라멘 집에서 모리타의 외침이 울려퍼졌다.

“쉿!! 인마. 여기 본사 직원들 있으면 어쩌려고!!”

“아, 미안. 너무 놀라서.. 그럼 너도 펜타곤 소프트로 옮길 거야?”

그러자 하야시는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부장님. 저 아직 갈 수 있죠? 자리 남아 있는 거죠?”

“물론. 갈 수 있지만, 왜 이렇게 갑자기? 저번 주에 아무래도 이직은 힘들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그게..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시게루씨가 위에 있는 한 개발 팀장은 꿈도 못 꿀 것 같기도 하고..”

하야시는 옆에 있던 모리타를 바라보며 뒤에 말을 이었다.

“그래도 처음으로 마음이 맞아서 같이 사이킥 배틀을 만든 친구인데, 이 녀석까지 나가버리면 쓸쓸할 거 같아서요.”

결국 말은 이러쿵 저러쿵 해도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네..

하지만 나에겐 오히려 좋은 기회였다.

아무래도 파이널 프론티어의 막바지 작업 중인 인원을 끌어 오기 보단 한번 팀을 맞춰 보았던 이 들과 작업을 하는 게 한결 수월했기 때문이다.

“그럼 두 분 다 마음은 정해지신 것 같으니, 그럼 시작해 볼까요?”

나는 가방에서 컨셉 일러스트가 담인 기획서 한부를 꺼내 탁자에 올려두었다.

아직 초안에 불과하여 10페이지 내외이긴 했지만, 모리타는 기획서를 보자마자 두 눈을 번뜩이며 집어 들었다.

그러자 하야시 역시 모리타의 손에 들려있는 기획서 첫 장을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내가.. 없는 거리? 부장님 이거 제목이 너무 우울한 거 아닙니까?”

나는 가게에서 나온 따듯한 녹차를 한 모금과 함께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일단 한 번 살펴보세요.”

조금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기획서를 살피던 하야시는 잠시 후 묘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 거렸다.

“부장님. 여기 배경이랑 캐릭터 스프라이트 구현이 딱 봐도 수십가지가 넘는데.. 이건 아무리 특수 칩을 쑤셔 박아도 패밀리 스펙으론 불가능 할 거 같은데요..”

그러자 모리타 역시 배경 원화를 살피며 하야시의 말을 덧붙였다.

“이거.. 실제 도쿄 거리를 컨셉으로 잡으신 거 같은데, 패밀리의 색조 표현으로 이런 자세한 배경에 캐릭터까지 심을 수 있을까요? 거기에다 그리는 거야 쉽지만, 이걸 도트로 찍어내려면.. 배경 하나 작업하는데만 며칠은 걸릴 것 같은데..”

역시나 둘 다 현업 종사자라 그런지 10페이지 내외의 기획 컨셉만 보여줘도 불만사항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정작 이 사람들. 중요한 걸 안 봤네..

“저기.. 플렛폼 부분은 보셨어요?”

“플렛폼이요?”

나의 물음에 다시 첫 장을 살핀 두 사람은 대응 기종을 뜻하는 플렛폼 표시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 거렸다.

“SFC..? 처음 들어보는 플렛폼인데?”

“오늘 오전에 새로 만든 약칭입니다. 풀 네임은 슈퍼 패밀리 컴퓨터. 최초의 미연시 게임인 '내가 없는 거리'는 민텐도 차세대 개발기기의 런칭 타이틀로 만들 계획이니까요.”

“네에??”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