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7 : 한국으로..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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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amba는 실존 인물이었던 리치 발렌스의 삶을 조명한 영화로 불의의 사고로 숨진 록앤롤의 황제의 짧은 생애와 그의 음악을 그린 청춘 영화였다.
영화의 스토리는 음악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미국의 이민촌 출신인 주인공이 가수의 꿈을 키워 나가며 할리우드에서 음반 발표로 성공하게 된다.
부잣집 딸인 아름다운 다나와 사랑에 빠진 리치는 그녀의 아버지의 반대에도 무릅쓰고 사랑을 키워 나가며 La Bamba와 Donna를 잇달아 발표해 록앤롤의 정점에 서게 되지만, 마지막 악천후에서 순회공연을 위해 올라탄 비행기가 추락하며 안타깝게도 죽음에 이르는 내용이었다.
Donna
Oh Donna, oh Donna, oh Donna oh Donna
(오, 다나, 오 다나, 오 다나, 오 다나)
I had a girl.
(여자 친구가 하나 있었지)
Donna was her name.
(그녀의 이름은 다나.)
Since you left me. I've never been the same
(그대가 떠난 후 난 전과 같지가 않아.)
'Cause I love my girl
(왜냐하면 나만의 그녀를 사랑하기에)
영화에서 남자 주인공이 여자 친구 다나에게 공중전화 부스에서 들려주었던 이 곡은 뭇 여성들의 취향을 제대로 저격했는데, 그것은 유키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오~ 다나~ 오~ 다나~ 오~~ 다나~ 리치 발렌스 정말 너무 멋지지 않아요? 결말이 슬프긴 했지만 너무 재밌었어요.”
영화관을 나오던 중에 유키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말했다.
솔직히 나는 We Belong Togeter가 더 좋았지만 굳이 입 밖에 내진 않았다. 사실 라 밤바에서 나오는 모든 음악은 단 한곡도 버릴 게 없을 정도로 훌륭했으니까.
하지만 이 영화를 개봉 시기에 맞춰 영화관에서 볼 줄이야. 그것 하나만으로도 나에겐 감회가 새로웠다. 바쁜 일상에 잠시 잊고 살았던 1988년의 향취가 진하게 느껴진 하루였다.
거기다가 ‘라 밤바’를 본 덕에 새로운 아이디어도 하나 얻었으니..
‘음.. 이별이 테마인 연애 시뮬레이션에서 남자 주인공의 사망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겠는데?’
사랑하는 사람을 남겨두고 떠나는 것은 남자에게도 여자에게도 꽤나 잘 먹이는 새드 엔딩이니까.
“무슨 생각해요?”
“응? 아.. 새로 만들 연애 시뮬레이션 스토리 좀 생각하느라.”
“진짜.. 조금은 몸 생각해서 쉴 때도 있어야죠. 어떻게 하루 종일 게임 생각만 하세요?”
“그야 뭐.. 직업병? 이라고 해야 하나.”
“음~ 그럼 저도 같이 고민해 줄까요?”
“뭐?”
“새로 만드는 게임 스토리.. 제가 잘 아는 시나리오 작가 선생님 계신데, 소개 시켜드릴까요?”
“시나리오 작가?”
“네. 드라마 작가님인데.”
하긴 그녀는 방송 쪽에 일하는 보조 작가니 그쪽 계통에 사람들을 좀 알겠구나.
하지만 가끔 TV를 봐도 딱히 끌리는 스토리를 가진 드라마는 없던데..
차라리 한국 드라마가 훨씬 낫지. 아니면 미연시 좀 한다는 게이머들에게 ‘백색 마약’이라 불리던 ‘화이트 메모리’의 스토리를 따오는 것도 나쁘지 않고..
잠깐.. 한국 드라마?
그 순간 걸음을 멈춘 내 머릿속에 타임 슬립하기 전 정말 재밌게 보았던 드라마 제목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생각하기엔 그 스토리가 정말 딱 일 거 같은데..
“저기요? 진짜 자꾸 그렇게 저 내버려두고 딴 생각만 할 거예요?”
“미안하다.”
“흠.. 진짜 오랜만에 데이트라고 잔뜩 긴장하고 나왔는데..”
“사랑한다.”
“네? 아.. 저기 그렇게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면..”
아무 생각 없이 떠오른 대로 내뱉은 말에 유키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돌렸다.
나 방금 엄청 희한한 방법으로 고백 아닌 고백을 한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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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교토로 돌아가기 위해 신주쿠 역에 다시 들린 나는 아까부터 훌쩍 거리는 유키를 돌아보았다. 항상 교토로 돌아갈 때면 그녀는 아쉬운 표정으로 역까지 배웅해 주었다.
“다음엔 언제와요?”
“음.. 글쎄. 다음 주말엔 가볼 데가 있어서.”
“그럼 다 다음 주에나 보는 거예요? 다음 주말엔 어디 가시는데요?”
“한국에 잠깐 다녀오려고.”
“한국에요?”
“금요일에 출발해서 일요일쯤 돌아올 거야.”
“흐음.. 몇 시 비행기인데요?”
“오사카에서 오후 2시 비행기. 뭐 한국은 가까우니까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거야.”
“전 아직 한 번도 해외 나가본 적이 없는데, 부럽네요.”
하긴 지난달에 미국에 출장 갔을 때도 엄청 부러워 했었지.. 그때 찍어다준 사진을 받고 엄청 좋아했던 그녀의 얼굴이 떠올랐다. 아직 열차 시간까지 여유가 있었기에 우리는 근처 커피숍에서 차를 마시기로 하였다.
그때 커피숍으로 오는 내내 초조한 표정을 짓던 그녀가 무언가 결심한 듯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저도 같이 가요.”
“음? 교토에? 내일 출근은 어쩌고?”
“아뇨!! 한국에요!!”
“뭐라고!?”
“저도 나리타에서 비행기표 끊을 테니까. 한국에서 만나요!!”
“아니 저기..”
“저도 준혁씨가 태어난 한국에 꼭 가보고 싶어요. 여행비용 대달라는 말은 안 할 테니까. 같이 가요~ 네?”
사실 이번 한국행은 사무적인 일도 있지만, 어린 시절 살았던 동네를 찾아가보려던 차였다. 그렇기에 나를 따라다닌다 해도 놀러가는 게 아니니 그다지 재밌어 할 것 같진 않은데..
하지만 그녀의 눈빛을 보아하니 이대로 말린다 해도 쉽게 들어 줄 것 같지 않았다.
“놀러가는건 아닌데 괜찮아?”
“네. 괜찮아요.”
“사실 어릴 때 살던 동네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 가는 거라. 관광지 같은 곳에는 못가 볼 텐데?”
“준혁씨가 살던 동네요? 오히려 그럼 더 좋아요~!!”
... 오히려 그게 더 좋다는 그녀의 말에 나도 모르게 미소가 그려졌다. 하긴 그런 면이 오히려 그녀답다고 할까?
나는 잠시 동안 그녀와 눈을 맞춘 채로 가만히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그래. 같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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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일주일 후.
나는 비행기 티켓을 나리타공항으로 바꿔 유키와 함께 공항에 도착했다.
“아.. 저 너무 떨려요. 아까부터 심장 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거 있죠.”
“별거 아냐. 비행시간도 한 시간 정도면 도착할 테니까. 너무 그렇게 긴장 안해도 돼.”
“어젯밤부터 떨려서 잠도 설친 걸요. 어릴 때 학교에서 소풍 가기 전날에도 그랬는데.. 참 오랜만인거 같아요. 이런 기분..”
“혹시 모르니 멀미약이라도 마실래?”
“벌써 마셨는데요.”
“준비가 철저하네..”
유키의 말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가끔 나를 올려다보는 그녀가 귀여워 몇 번 쓰다듬어 주었는데, 그럴 때면 유키는 두 눈을 꼭 감은 채 강아지처럼 좋아했다.
잠시 후. 면세점에서 간단한 쇼핑을 마치자 슬슬 비행기 시간이 다가왔다.
“저희 빨리 가봐야 하는 거 아녜요?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괜찮아. 어차피 비행기 안이 좁아서 사람들 다 타려면 시간 좀 걸리니까 맨 나중에 타면 돼.”
“그래도 빨리 타보고 싶어요.”
유키는 첫 해외여행이 무척이나 설레이는지 내 팔을 끌며 재촉했다.
결국 평소보다 일찍 탑승 게이트에 도착한 우리는 탑승 대기가 풀리자마자 가장 먼저 비행기에 올랐다.
통통 거리는 이동식 통로를 지나 비행기의 탑승구에 다다르자 주변에는 우리를 환영하는 한국인 스튜어디스들이 나란히 줄지어 예쁘게 미소 짓고 있었다.
“와아.. 한국 미인~!!”
다소 키가 작긴 하지만, 유키의 외모도 그녀들에 비해 꿀리는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유키는 늘씬한 그녀들의 키가 부러운지 나와 그녀들을 살피며 중얼거렸다.
“어릴 때 우유 많이 마실걸..”
“어서오세요. 고객님. 자리 안내도와 드리겠습니다.”
우리를 향해 미소 지으며 손을 내미는 스튜어디스에게 티켓을 보이자 그녀가 허리를 숙이며 윗층 계단을 가리켰다.
“비지니스 클래스 이용 고객님은 위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짧은 비행시간이라 이코노미를 탈까도 했지만, 어차피 쓰라고 있는 돈이었기에 나는 유키 몫도 함께 비즈니스 클래스로 뽑아 두었다.
그때 뒤따라오던 유키의 목소리에 무심코 돌아보니 어느새 신발을 벗어든 그녀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스튜어디스에게 물었다.
“신발은 그냥 가지고 올라가면 되나요?”
“…….”
설마 그때 교토에서 했던 농담을 진짜로 믿었단 말야?
순간 주변에 모여 있던 스튜어디스들이 고개를 돌려 키득거리기 시작했다.
“아, 손님 신발은 그냥 신고 타셔도 되요.”
“네!?”
스튜어디스의 말에 얼굴이 빨개진 유키는 창피했는지 그대로 신발을 손에 든 채 후다닥 계단을 올라가 버렸다.
“아, 저 아가씨 엄청 귀여워 어떡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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