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72화 (72/252)

EP. 16 : 모리타와 하야시. (4)

“혹시 두 분.. 연애 해보신적 있으세요?”

그러자 모리타와 하야시는 둘 다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쯧쯧.. 내가 남 말 할 처지는 아니지만 이들을 보니 타임슬립하기 전에 내 인생이 떠오르는군.

“사실 새로운 프로젝트는 그 연애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지금까지의 게임과는 달리 스토리에 굉장히 신경을 써야하는 만큼 쉬운 작업은 아닐 거예요.”

그러자 일단 ‘연애’라는 말을 들은 모리타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연애라면 그럼 분명히 여성 캐릭터가 필요하겠군요!!”

“필요한 수준이 아니라. 말 그대로 메인이 되어야합니다. 유저들에게 연애 감정을 이입시켜 주는 대리만족 게임이랄까요? 굳이 장르를 붙이자면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이라고 해야 하나?”

“미.. 미소녀 연애 시뮬..? 무슨 장르 이름이..”

하긴 지금까지 들어본 장르라곤 액션, 롤플레잉, 어드벤쳐, 시뮬레이션, 슈팅이 전부인 지금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이라는 장르명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질 만도 하다.

하지만 내가 넘어온 시대에는 말이야. ‘폭유 하이퍼 배틀’이란 장르도 있었거든?

상상이나 가는가? ‘폭유’ 하이퍼 배틀이라니..

나도 처음엔 그 장르 명을 보고 눈을 의심했었지..

“부장님. 그 장르 저는 찬성입니다. 결론은 제가 그린 캐릭터와 연애를 하는 게임이란 말이죠?”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돼요. 저도 모리타씨의 캐릭터 디자인을 보고 떠올린 장르라서 아직 구체적으로 어떤 형식이 될지는 몰라요.”

“부장님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손이 근질거려 참을 수가 없겠는데요?”

이거 이거.. 예상대로 모리타는 완전히 불이 붙었구만, 하지만 초기 미연시부터 너무 섹시 컨셉으로 들이대면 반감을 살수도 있으니 유키 같은 여성 유저도 마음 편히 즐길 수 있도록 순애보적인 스토리 구성이 중요하다.

그때 우리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던 하야시가 입을 열었다.

“저는.. 잠시 생각을 해봐야겠습니다.”

역시나 냉철한 그의 성격답게 득과 실을 꼼꼼히 따져 보려는 건가?

카와구치씨 뿐인 펜타곤 소프트에 힘을 실어줄 기똥찬 프로그래머가 될 거라 생각하는데, 과연 잘 넘어올런지..

&

“그럼 저희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네. 모리타씨와 하야시씨도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카와구치씨는 모리타와 하야시에게 악수를 청하며 빙긋 웃어보였다.

아무래도 둘 다 카와구치씨의 마음에 꼭 들은 모양이었다.

“저는 강준혁 부장님의 이직 제의에 동의하기로 했습니다. 교토로 돌아가면 민텐도에 사직서를 낼 생각이에요.”

“아마노 선생님의 제자인 모리타씨가 와주신다면 영광이죠. 사이킥 배틀의 게임성도 게임성이지만, 무엇보다 그 게임을 돋보이게 만든 건 모리타씨의 캐릭터들이니까요. 우리 회사 직원들 중에 모리타씨 팬도 있는 걸요~”

맞는 말이다.

장담하건데, 사이킥 배틀에 근육 마초 남들이 튀어 나와 장갑이 하나씩 벗겨졌다면 판매량이 절반은 줄었을 거라고 확신한다.

확실히 남자들의 시선을 끌기에는 여성 캐릭터가 중요하지.

“그리고 그렇게 어려운 탄막 작업을 정교하게 코딩해준 하야시씨의 실력도 굉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펜타곤 소프트는 프로그래머가 부족한 형편이라, 하야시씨도 부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카와구치씨가 먼저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요청하자 하야시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마주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마쳤다.

이렇게 상급자가 먼저 나서서 하야시의 면을 세워주니 그 역시 싫진 않은 표정이었다.

&

펜타곤 소프트는 회사 차를 이용해 신주쿠 역까지 바래다주었기에 돌아가는 길은 굉장히 수월했다.

“오늘 부장님 덕분에 새로운 가능성을 찾은 것 같아요.”

돌아오는 내내 싱글벙글한 표정과 고심하는 하야시의 표정이 상당히 대비되었지만, 하야시 역시 어느 정도 이직 생각을 염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등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

“어? 유키..씨”

아직은 유키라고 이름만 부르는 게 어색해 뒤늦게 ‘씨’를 붙이자 다가오던 유키의 표정이 팍하고 찌그러졌다.

“그냥 유키라고 부르기로 했잖아요.”

“미안, 아직 익숙하지가 않아서 그런데 벌써왔어? 아직 약속 시간 한 시간 전인데?”

“뭐 좀 살게 있어서 왔는데, 먼저 와 계실 줄은 몰랐어요. 그런데 뒤에 계신 분들은..?”

“아, 같이 일하는 동료들이야. 모리타씨와 하야시씨.”

“안녕하세요. 이시카와 유키라고 해요. 만나서 반가워요.”

“아.. 그.. 저..”

연애 경험 제로라더니. 실제로 여자 앞에 서니 둘 다 티가 확 나는구나.

이래서야 이 둘을 데리고 미연시를 만들 수나 있을지 심히 걱정이 되는군.

“모리타 신페이라고 합니다.”

“하야시 요스케입니다.”

“모리타씨와 하야시씨로군요. 잘 부탁드려요~”

눈웃음을 살포시 지으며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에 모리타와 하야시는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조금 이른 시간이지만 다 같이 저녁 식사라도 할까?”

“와~ 좋아요.”

“저희도요? 두 분이 그 뭐냐.. 데이트 약속 있으셨던 거 아녜요?”

도쿄에 올라온 김에 유키를 만나기로 한건 사실이지만, 나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유키 역시 괜찮아 보이는 듯하고, 가끔은 부하 직원에게 식사 대접하는 것도 상사의 미덕중에 하나니까..

“어차피 교토로 내려가기 전에 밥이라도 살까 생각했던 차였어요. 유키도 괜찮지?”

“네. 전 괜찮아요.”

간만에 데이트라 그런지 붉은 코트를 예쁘게 차려입고 나온 그녀는 신주쿠의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단연 눈에 띠었다.

“혹시 신주쿠 쪽에도 알고 있는 맛 집이 있나?”

맛있는 음식점에 관해서는 어중간한 가게에 들어가는 것 보다 그녀에게 확실히 묻는 편이 나았다. 그러자 그녀는 센스 있게 다이어리를 꺼내들고 신주쿠 지역을 살피기 시작했다.

“꽤 여러 가지 가게가 있는데, 어떤 음식을 좋아하세요?”

그녀는 센스 있게 내 의사보다는 모리타와 하야시에게 먼저 물었다.

나하고만 대화를 한다면 그들이 불편함을 느낄 테니 그녀 나름대로의 배려랄까?

“저.. 저흰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음~ 그렇게 두리뭉실하게 말하는 것보단 확실히 메뉴를 정해주는 게 좋아요. 고르기 어려우시면 제가 선택지를 드릴게요. 일식이 좋으세요? 아님 양식이 좋으세요?”

그러자 하야시가 두 개의 선택지에서 하나를 골랐다.

“그럼 일식으로..”

“밥이 좋아요? 면이 좋아요?”

이번엔 모리타가 대답했다.

“면보단 밥이 낫겠죠? 아무래도 저녁이니..”

“그럼 준혁씨는 정식이 좋겠어요? 아님 전골이 좋겠어요?”

“음.. 난 전골.”

“오케이~ 그럼 모두 저를 따라 오세요.”

이것 참. 아무도 불만을 제기할 수 없는 방법이로군..

그때 뒤따라오던 모리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부장님이 말씀 하신 연애 시뮬레이션이라는 게 대충 어떤 건지 감이 올 것 같아요.”

“그.. 그래요?”

그것 참 다행이로군..

잠시 후 우린 유키를 따라 나베(냄비) 전골 요리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복잡한 신주쿠 골목을 요리조리 헤쳐 나가며 손쉽게 음식점을 찾아내었다.

GPS를 이용한다 해도 찾기 어려운 위치였지만, 그녀는 다이어리에 적힌 약도를 참고해 근처 사람들에게 물어 금세 식당을 찾아낸 것이다.

유키는 식당 안에서도 내 옆에 앉아 모리타와 하야시가 어색해 하지 않도록 이런 저런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때 말이죠~ 행사가 끝났는데, 준혁씨가 저한테 드래곤 엠블렘을 주는 거 있죠?”

“유키씨는 게임도 좋아하시는군요.”

“네~ 좋아해요. 이번에 민텐도에서 나온 사이킥 배틀도 벌써 샀는걸요.”

“푸흡!! 쿨럭.. 쿨럭. 사이킥 배틀을 샀다고?”

“준혁씨도 진짜.. 게임 발매하면 저 하나만 미리 연락 좀 주시지. 제가 그거 사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요?”

“아니 그게.. 흐음..”

컨트롤이 조금만 미숙해도 파츠가 다 날아간 므흣한 일러스트가 튀어나오는데..

그걸 유키한테 자랑하긴 아무래도 무리가 있었지..

“쪼금 야하긴 하지만, 캐릭터들이 굉장히 매력 적이더라구요. 플레이 하는 내내 즐거웠어요.”

“그 캐릭터 전부 모리타씨가 디자인 한 거야. 옆에 하야시씨는 사이킥 배틀 프로그램 짠 프로그래머고..”

“와아~ 그럼 이렇게 세 분이 사이킥 배틀을 만든 거군요~!!”

“뭐 그렇다고 볼 수 있지.”

“대단하다.”

진심으로 감탄하는 유키의 목소리에 모리타와 하야시는 붉어진 얼굴로 괜스레 냄비 전골을 휘휘 저어 대었다.

“아~ 그릇 주세요. 제가 담아 드릴게요.”

유키는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작은 그릇에 요리를 맛있게 담아 그들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행동 하나 하나에 모리타는 부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중얼 거렸다.

“부장님께서 다음 프로젝트를 왜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으로 하자고 했는지 알겠네요.”

“모리타씨 그건 오해에요.”

그때 모리타의 이야기를 들은 유키가 나에게 그릇을 건네주며 물었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그것도 게임이에요??”

“그냥 구상 중이야..”

“와아~ 그거 재밌겠는데요?”

게임을 좋아하는 그녀는 장르에 대한 이야기만 듣고도 급격히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다른 건 제쳐두고 일단 ‘게임’ 이라는 공동된 관심사가 생기자, 모리타와 하야시 그리고 유키는 금세 미연시를 화두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인공 지능을 넣어서 플레이어의 판단에 따라 실제로 여자 친구처럼 행동하는 건 어때요?”

“그거 괜찮은 생각인 것 같아요!!”

유키는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이는 모리타의 아이디어에도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러자 옆에서 그 대화를 듣고 있던 하야시가 기가 차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인공 지능이래 봤자. 어차피 그런 종류의 게임은 어드벤쳐랑 비슷해. 선택지에 따라 결말이 갈리게 되어 있다고. 인공 지능이라고 해봐야. 내가 짜놓은 코딩 안에서 일어나는 0,1의 선택지 중에 하나일 뿐이다.”

꿈도 희망도 느껴지지 않는 하야시의 말에 불타오르는 중이던 모리타와 유키는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하야시씨.. 무섭다.”

“아니 전 그냥 현실을 얘기한 것뿐입니다.”

그런 그들을 바라보니 나도 모르게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나왔다.

어느새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주변이 어둑해져 있었다.

잠시 손목시계를 살피던 하야시는 열차 시간이 다가오는지 서둘러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곧 열차가 올 시간이 돼서 저희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네. 다음 주에 회사에서 봐요.”

“부장님 여러 가지로 감사했습니다. 유키씨도 만나서 반가웠구요. 어이~ 모리타 서두르자. 열차 늦겠다.”

“잠깐만..”

음? 언제나 하야시의 말이라면 재깍 재깍 응답하던 모리타가 웬일로 하야시를 불러 세웠다. 그리곤 유키를 바라보며 할 말이 있는지 머뭇거리기 시작했다.

“저한테 할 말 있으세요?”

“그게.. 저기 혹시 말이죠. 유키씨만 괜찮으시다면..”

“저요?”

모리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뜸을 들이자, 옆에 있던 하야시가 답답한지 그를 재촉했다.

“뭔데? 모리타 빨리 말해. 이번 열차 놓치면 2시간 기다려야한다고.”

그러자 모리타는 결심이 섰는지 이를 악문 채 외쳤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희 차기작 미연시 게임에 유키씨의 이미지를 참고 해도 될까요?”

... 난 솔직히 모리타가 유키한테 첫눈에 반해서 고백이라도 하는 줄 알았다.

유키 역시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긴장했었는지 잔뜩 움츠렸던 어깨를 풀며 대답했다.

“네. 전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대신 예쁘게 그려주세요~”

“물론이죠~!!”

“야이~!! 난 또 뭐라고 모리타 빨리 와. 너 때문에 달려야하잖아!!”

“미안, 하야시. 부장님 그럼 다음 주에 회사에서 봐요~!!!”

“네.. 하하..”

모리타를 끌고 번개 같이 사라지는 하야시를 바라보며 유키 재밌는지 깔깔거리며 웃었다.

“재밌네요. 저 두 사람. 뭔가 굉장히 잘 어울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모리타씨가 제 모습을 게임 주인공으로 그려준다니 기대가 되는데요? 하지만..”

유키는 살짝 얼굴을 붉히며 뒤에 말을 이었다.

“사이킥 배틀처럼 너무 야하게 그리면 안 되는 데에..”

이거 괜히 가슴이 찔리네..

“뭐 그건 준혁씨가 잘 컨트롤 해주세요. 너무 높은 수위는 안돼요~!!”

“알았어. 그렇게 전할게.”

“킥~ 그럼 방해꾼들은 물러갔으니 이제 우리 데이트 할까요?”

“뭐하고 싶은데?”

“사실 예전부터 보고 싶은 영화가 있어서 미리 예매해 뒀거든요. 오빠가 좋아할 진 모르겠지만..”

“제목이 뭔데?”

“라 밤바요..”

... 그거 참 오랜만에 듣는 제목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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