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4 : 미국산 공돌이들 (5)
“굳이 학교 안에 들어가 볼 필요가 없겠는데요?”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벌써 제가 원하던 사람을 찾았거든요.”
그렇다. 사실 내가 원하는 건 게임 개발자가 아니었다.
우리가 흔하게 인식하고 있는 폴리곤을 활용한 게임은 1994년에 등장한 NEGA의 버추어 파이터였다. 분명 그것은 우리에게 비쥬얼 적인 쇼크를 안겨주었지만 사실 88년에도 폴리곤을 이용한 게임은 있었다.
그것은 미국에서 거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는 아타리가 발표한 레이싱 게임 ‘하드 드라이빈’과 일본의 반코사에서 만들어낸 ‘위닝 런’이 있었다.
이 시기에 폴리곤을 이용한 레이싱 게임은 보기엔 신기했지만, 게임성은 꽝이었다. 차라리 도트로 표현한 그래픽이 훨씬 좋아 보였고, 치명적인 단점이 지면을 달리는 느낌보다는 자동차가 허공에 붕 떠서 날아다니는 느낌이 들어 이질감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거기다 폴리곤에 텍스쳐를 입히는 기술도 없었던 시기여서 단조롭기 그지없던 3D 그래픽은 결국 빛의 속도로 게이머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버렸다. 적어도 NEGA의 버추어 파이터가 등장하기 전까진 말이다.
“엘리스씨. 먼저 식사하고 있어요. 잠깐 저기 학생들이랑 이야기 좀 하고 올게요.”
“저기 부장님? 부장님!?”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건너편에서 대화중인 학생들의 테이블에 의자를 끌고 와 앉았다.
“누구세요?”
“식사 중에 미안합니다. 엿들으려고 한건 아닌데, 굉장히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시 길래 관심이 생겨서요.”
“우리 이야기를 엿 들으셨다구요?”
존이라고 불린 남자가 조금은 불쾌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멋대로 그들의 대화에 끼어든 내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나는 지갑에서 한 장의 명함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다. 그러자 명함을 집어든 존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민텐도라면 게임기를 만드는 회사 아닌가요?”
“맞아요.”
“저희는 게임 얘기를 하고 있지 않았는데요. 건축 공학에서 쓰일 입체 도면에 대한 이야기 중이었는데..”
“그것도 들었어요. 제가 흥미를 느낀 건 바로 당신이 말한 GPU라는 장치에 대해서입니다.”
“저기 아직 그건 정식적인 명칭도 아니에요. 그냥 중앙처리장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무심결에 나온 이야기에요.”
“이름 따윈 상관없어요. 문제는 그걸 만들 수 있느냐 없느냐 입니다. 실제로 입체 도면은 결국 만들지 못했잖아요.”
가볍게 상대방의 아픈 부위를 쿡하고 찔러보자 곧바로 반응이 왔다.
“그건 내 구현방식이 틀린 게 아니고 컴퓨터의 성능이 모자라서입니다.”
“당신이 말한 방식은 현재 슈퍼컴퓨터에서도 구현이 어려워요. 일반적인 화면에서 x와 y로만 구현 되던 세계에 z축을 도입하는 건 괜찮은 방식이에요. 당신은 게임이랑은 상관이 없다고 하지만, 당신이 만들어낸 입체 도형을 기반으로 집을 지어 사람이 살 듯이 그 안에 게임 캐릭터가 움직일 수도 있죠. 오히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완전히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낼 수 있어요.”
“입체 도면 안에서 플레이하는 게임..?”
존은 잠시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잠시 후. 그는 격하게 고개를 내저으며 반박했다.
“말도 안돼요. 그렇게 되면 MAP 자체를 어마어마하게 크게 만들어야하는데, 고작 폴리곤 4개로 버벅거리는 판국에 무슨 게임을 만듭니까.”
“그러니까 더욱 필요한 겁니다. 당신이 말한 GPU라는 장치가. 전 당신한테 게임을 만들어 달하고 하지 않았어요. 제가 필요한건 CPU를 도와 그래픽 연산을 처리해줄 장치거든요.”
“그러니까 당신 말은 그걸 지금 저보고 만들라는 말입니까?”
당연한 걸 뭘 물어.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말 꺼낸 사람이 만들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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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이라면 2D부터 3D를 넘어서 입체 영상까지 구현이 가능한 단일 그래픽 카드가 일반적이지만 3D 그래픽의 초창기 시절에는 따로 VGA 카드에 단자를 물려 3D 그래픽에 대해서만 연산을 도와주는 가속 장치로 만들어지던 시기가 있었다.
내가 지금 존 커티스에게 부탁하는 것은 VooDoo에서 만들어낸 3Dfx와 방식이 비슷한 보조 장치에 대한 의뢰였다.
식당에서 자리를 옮긴 우리는 MIT 대학에서 유명한 동아리 모임인 ‘hack’를 찾았다.
나를 따라 함께 대학 안으로 들어온 엘리스는 불안한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부장님? 저희 괜찮은 건가요? 뭔가 어마어마한 곳에 온 기분인데..”
“어마어마한 곳이긴 하죠. 여긴 천재들의 놀이터 같은 곳이니까.”
“놀이..터? 라구요.”
“하긴 일반적인 놀이터랑은 분위기가 조금 다르지만..”
존과 마이클의 안내를 받아 우리가 도착한 곳은 푸르스름한 모니터 조명만이 비추는 어두컴컴한 실내였다. 벽 쪽에는 2층 침대 몇 개가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가끔 꿈틀거리는걸 보니 누군가가 자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이 다들 좀 일어나 봐.”
존이 동아리방에 들어서며 실내등을 키자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야, 존. 너 미쳤어? 이 시간에 불을 왜 켜대고 지랄이야. 어제 새벽에 파트타임 때문에 몇 시간 못 잤단 말이야.”
“지금 아르바이트가 문제가 아냐 일어나 봐.”
존의 말에 침대에서 곤히 잠자던 공돌이 몇몇이 침낭을 거두며 일어나기 시작했다.
서양인들이라 그런지 다들 한 덩치 했지만, 내 눈에는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꼬마요정들처럼 하나같이 귀여워보였다.
판타지 세계에 도구를 만드는 장인인 ‘드워프’가 있다면 현실 세계에 드워프는 이 들일지도 모른다.
“존.. 무슨 일이야?”
막 잠에서 깨어나 눈도 제대로 못 뜨고 있던 후덕한 인상의 남자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덥수룩한 수염을 기르고 있었다.
‘수염 난 공돌이 하나’
“뭐야 존. 밥 먹으러 간다더니 내 건 안 사왔어?”
‘앞니가 튀어나온 키가 작은 공돌이 둘.’
“옆에 있는 사람은 누구냐?”
‘손가락으로 건드려도 툭하고 쓰러질 것 같은 스켈레톤 공돌이 셋.’
우리를 안내한 존과 마이클까지 다섯 명의 공돌이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내 뒤에 숨어 있던 엘리스가 살짝 고개를 내밀며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하세요. 민텐도 미국지사에 근무하는 엘리스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려요.”
“여자다!!! 오 마이 갓!!”
“왜지? 왜 우리 동아리실에 여자가 있지!?”
“누구야!? 누구 여친이냐!! 다들 움직이지 마!! 움직이는 놈이 범인이여!! 씨벌!! 배신자 새끼!!”
잠에서 깬 세 마리의 공돌이들은 엘리스의 모습에 색다른 반응을 선보이고 있었다. 그런 그들이 조금 창피한지 존과 마이클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나에게 친구들을 소개해주었다.
“저 끝에 있는 삐쩍 마른 녀석부터 톰, 행크, 롭이에요. 원래 몇 명 더 있는데, 방학 때는 보통 아르바이트로 용돈을 모아 컴퓨터 부품을 사고 있어서 학교에는 밤에만 와요.”
“음? 옆에 있는 동양인 남자는 누구야?”
뭐야? 저 녀석들 눈에는 엘리스만 보이고 나는 안중에도 없었나? 하긴 뭐 남자들한테 관심 받는 것도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지만..
미국에 올 때 첸드라도 데려왔으면 좋았을 걸. 녀석이랑 같이 왔으면 얘기가 아주 잘 통했었을 텐데..
잠시 동안 존과 마이클은 친구들에게 식당에서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간략하게 전달해주었다. 어느 정도 대화가 오가자 대충 알아들었는지 후덕한 털보 롭이 입을 열었다.
“존. 그러니까 네가 말하는 건 CPU의 그래픽 연산을 도울 가속 장치를 만들자는 거야?”
“맞아. 주 메모리를 건드리지 않고 따로 그래픽 연산을 위한 메모리 설계를 할 수 있다면 충분히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뭐 공장에서 찍어내는 양산 제작이 아니라면 한 두 개 정도는 만들 수 있겠지. 하지만 문제가 있어.”
피곤한 표정의 롭은 덥수룩한 수염을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잖아. 우리가 하는 일에는 응당 보수가 따라야하지 않겠어?”
그러자 존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한 발 뒤로 물러나 나를 바라보았다.
“롭의 말이 맞아요. 연구비 지원에 대한 당신의 제안은 달콤하지만, 아무런 수익도 없이 움직여 줄 녀석들이 아니거든요.”
흐음.. 이제 내 차례인가? 나는 롭이라는 남자에게 한 걸음 다가서며 물었다.
“저 역시 게임 업계에서 일하는 만큼 여러분이 하는 작업 자체가 굉장히 어렵고 시간이 많이 들 거라는 걸 알아요. 그렇기에 매달 지급 되는 연구비에는 여러분의 한 달 봉급이 포함될 예정입니다. 말씀해 보세요. 얼마를 원하시죠?”
그러자 롭은 내 말에 코웃음을 치며 씨익 웃어보였다.
“부르는 대로 얼마든지 줄 것처럼 이야기 하시네? 나이도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데?”
어라? 세게 나오는데? 하지만 여기서 주눅 든 모습을 보일 순 없기에 나는 오히려 담담이 웃으며 대답했다.
“뭐 턱없이 높은 금액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는 수용해 드리죠.”
말도 안 되는 금액이라면 이론만 취득해서 첸드라에게 보여줘도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겠지.. 그때 손가락을 굽히며 열심히 대가리를 굴리던 롭이 기분나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우선 우리도 나름 개인 시간 투자를 해야 하는 거라. 보통 수업이 끝나고 밤에 작업을 할 텐데, 그러다보면 배도 고플 테고, 필요한 부품을 조달할 때 쓸 기름 값이랑 부품 구입비용에다가 각자 아르바이트도 포기하고 매달려야하니까..”
꼼꼼하게도 계산하네. 그래서 대체 얼마나 달라는 거냐..
롭은 잠시 뜸을 들인 뒤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적어도 인당 500달러씩은 더 줘야겠..”
“오케이~ 딜!!!”
나는 롭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딜을 외쳤다. 난 또 무슨 두당 10만 달러라도 달라는 줄 알았네. 소소한 녀석 같으니.. 이거면 오히려 내가 제시하려던 금액 보다 훨씬 싸네.
“엘리스씨. 계약서 챙겨오셨죠?”
“물론이죠. 부장님.”
“우선 계약서 작성하고 계좌 받아 놓으세요. 다음 달부터 이분들 급여랑 같이 송금해 드릴 테니 잘 좀 챙겨 주시구요.”
“알겠습니다. 부장님.”
다음 달 일본에 돌아가면 첸드라 녀석 비자 좀 확인해 봐야 겠군. 나는 바쁘게 펜을 움직여 계약서에 싸인중인 공돌이들을 바라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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