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59화 (59/252)

EP. 14 : 미국산 공돌이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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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아~ 여기가 치쿠린이구나!!”

싸아아아~ 바람에 나부끼는 대나무 소리에 나도 모르게 절로 미소가 그려지는 곳.

나와 유키는 지금 교토 아라시야마의 대나무 숲인 ‘치쿠린’에 와 있었다. 유키 역시 이곳이 처음 인지 오솔길 좌우를 가득히 매운 대나무 숲길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역시 도쿄보다는 교토가 훨씬 멋진 것 같아요. 도쿄에도 이런 곳이 있으면 참 좋을 텐데..”

은은한 대나무향을 느끼며 유키가 두 눈을 감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곁을 함께 걸으며 주말의 데이트를 즐기고 있었다.

“가끔 머리 식히러 오는 곳인데, 마음에 든다니 다행이네요.”

“준혁씨도 이곳에 자주오세요?”

“혼자서 생각하기 좋잖아요. 좋은 길이 있고, 대나무 향기도 좋고..”

“그러네요. 킥킥. 좋은 길이라니 왠지 할아버지 같아.”

“크흠..”

뭐 속은 이미 훌륭한 중년이지만, 나는 유키의 놀림을 가볍게 웃어넘기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월요일에 미국으로 가는 건가요?”

“네. 한 달 정도 체류하다 올 것 같아요.”

“와아. 전 아직 한 번도 외국을 나가본 적이 없어서 준혁씨 말만 들어도 엄청 설레네요.”

자기가 가는 것도 아닌데? 왜? 잠시 후에 유키는 굉장히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준혁씨.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뭔데요?”

“그게.. 음 친구한테 들은 얘긴데, 비행기 탈 때 정말 신발 벗고 타야하나요?”

헐.. 이 개그가 이 시대에도 존재했다니.. 나는 유키의 진지한 표정에 그만 웃음을 터뜨려 버렸다. 그러자 유키는 얼굴이 빨개진 채로 나를 보며 얼버무렸다.

“노.. 농담이에요~!! 물론 신발 신고 타아죠!!”

그 순간 나는 웃음을 딱 멈추고 정색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무슨 소리에요. 유키씨.. 당연히 신발 벗고 타야죠.”

“아..!! 그렇죠? 사실 아, 알고 있었어요~ 흥!!”

유키는 훽하고 고개를 돌린 채 혼자서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아 진짜 귀엽긴 귀엽네. 올해로 스물이라. 내 원래 나이를 생각 한다면 천벌 받을 나이구나.. 그래서 그런지 연인이라는 느낌보단 조카 같은 느낌이랄까?

으이구. 이렇게 생각하니 유키가 할아버지라고 하는 게 정말 틀린 말은 아니네.

저만치 걸어가던 유키는 내가 천천히 따라가자 고개를 돌리며 외쳤다.

“뭐 해요. 빨리 안 오구~!!”

“하하. 가고 있어요.”

대나무 숲과 오솔길. 그리고 미소녀라.. 단어 하나하나가 심금을 울리는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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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키와 함께 치쿠린을 빠져나와 다시 차에 오른 우리는 슬슬 배가 고팠기에 식당으로 향하고 있었다. 80년대에 일본은 도로에 차가 별로 없었기에 어딜 가든 매끄럽게 달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길게 뻗은 도로에서 엑셀에 힘을 가하자 내 차는 싸늘한 겨울바람을 가르며 쏜살처럼 달려 나갔다.

“300m 전방에서 좌회전입니다. 좌측 차선에 붙어 주세요.”

30년쯤 후에나 들를 법한 네비게이션 안내 음성이지만, 이건 교토의 맛 집을 찾아 나에게 길 안내중인 유키의 목소리였다.

“킥킥..”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재밌어요? 저도 알려 주세요. 같이 좀 웃게~ 네?”

“아뇨. 아무 것도 아니에요.”

“치이~ 치사하게 자기만 계속 웃고, 나는 하나도 안 가르쳐주고..”

당신이 지금 하는 행동이 30년 뒤에 네비게이션 기계에서 나온다는 걸 어떻게 설명해야할까? 나는 뾰루퉁하게 삐져 있는 유키를 바라보며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이렇게 삐진 것 같아 보여도 실상 유키는 그런 성격이 아니다. 잠시 내가 이렇게 아무 말도 없으면..

“그래도 이렇게 제가 안내 해드리니까 편하죠? 막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않아요?”

이렇게 치고 들어오니까. 사실 심심할 틈이 없었다.

네비게이션이 없던 시절에는 초행길에 들어서면 누구나 이렇게 지도를 펼쳐가며 조수석에 있는 사람이 길을 알려주곤 했는데, 이것도 나름 쏠쏠한 재미가 있네.

나는 잠시 후 유키의 안내로 한 음식점에 도착했다. 아무리 맛 집이라지만 교토에서 고베까지 오다니 솔직히 나 혼자라면 절대 혼자 올 리가 없는 곳이다.

고베는 교토에서 오사카를 거쳐 가야하는 곳으로 와규라는 일본산 소고기가 유명한 지역이었는데, 우리나라로 치면 횡성 한우와 비슷한 곳이었다.

“와아~ 가게가 엄청 커요!”

벽면에 거대한 소가 그려져 있는 가게 앞에서 유키는 마치 놀이동산에 온 어린 아이처럼 신나하고 있었다. 그녀는 집에서 가져온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어대기 시작했다.

2000년대라면 가게 앞에서 사진 찍는 게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지만, 가게 안에 있는 사람들은 건물 외관을 찍고 있는 유키를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기.. 죄송하지만 지금 무얼 하시는건가요?”

결국 보다 못 한 가게 지배인이 건물 앞까지 나와서 유키에게 묻자. 그녀는 금세 얼굴을 붉히며 사정을 설명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작가인데요. 제가 전국에 맛있는 음식점을 찾아다니는 프로그램을 기획 중이거든요.”

“오호.. 음식점을요?”

“네. 그래서 자료 조사차 고베에서 소고기가 가장 맛있다는 가게 사진을 찍고 있었어요. 미리 말씀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러자 가게 지배인은 잠시 고개를 갸웃 거리다가 불현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소리쳤다.

“그런 일이 있으면 미리 말씀을 하셨어야죠!!”

그리곤 쏜살 같이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순식간에 옷을 쫙 빼입은 채 주방장과 함께 달려 나왔다.

“자~ 이제 찍으시죠.”

“저는 좀 더 자연스러운 모습을 담고 싶은데..”

“그럼 기념으로라도 한 장 찍어주세요. 혹시 나중에 그런 프로그램이 생긴다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고베산 와규하면 저희 가게가 떠오를 수 있도록~!!”

“네. 감사합니다.”

찰칵. 유키가 사진을 찍자 지배인은 유키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말했다.

“두 분 연인이시죠? 카메라 주세요. 제가 사진 한 장 예쁘게 찍어 드릴게요. 이래 뵈도 제가 사진학 전공이거든요.”

여, 연인이라고? 뒤에 서 있던 내가 손 사례를 치려 하자, 유키가 얼른 지배인에게 카메라를 넘기며 말했다.

“네, 맞아요. 감사합니다~”

지배인에게 카메라를 넘긴 유키는 재빨리 나에게 돌아와 팔짱을 끼며 말했다.

“웃어요~ 준혁씨.”

“아.. 네.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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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인의 서비스 덕에 점심부터 배부르게 소고기로 배를 채우고 나자, 바로 차에 올라타기보단 조금 걷고 싶어졌다. 다행히 가게 옆으로 산책로가 있어 유키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숲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 너무 배불러요.”

“그러게요. 너무 과식한 거 같은데..”

“그래도 진짜 맛있었어요.”

“그런데 너무 비싼 거 얻어먹은 거 아녜요?”

공모전 상금을 탄 걸로 한턱 쏜다고 일부러 교토까지 찾아와 준 것도 고마운데, 비싼 소고기를 얻어먹을 줄이야.. 그러나 유키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뇨~ 저도 한 번 와보고 싶었던 곳이거든요. 직장 선배 언니가 고베 출신인데, 여기 가게 고기가 맛있다고 어찌나 자랑하던지. 그래도 준혁씨 덕분에 편하게 왔네요. 역시 차가 있으니 좋긴 좋구나~”

가볍게 뒷짐을 진채로 겨울 숲길을 걸으니 조금은 쌀쌀하지만 기분이 상쾌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준혁씨.”

“네?”

“미국 잘 다녀오세요.”

“아.. 고마워요.”

“그리고 돌아오시면.. 그때는 유키‘씨’ 말고 그냥 유키라고 편하게 불러줬으면 좋겠어요.”

나를 올려다보며 활짝 웃는 유키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 그래요. 그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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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7일. 미국행 비행기 안.

비지니스 클래스에서 기지개를 켜던 나는 마침 내 앞을 지나던 스튜어디스에게 물었다.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죠?”

“30분 정도 남았습니다. 손님. 긴 여행 수고 많으셨습니다.”

“아뇨. 스튜어디스님이야 말로 수고 하셨어요.”

“무척 잘 주무시던데, 좋은 꿈이라도 꾸셨나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랬던 것 같아요. 저기, 미안한데 물 한잔만 주시겠어요? 목이 좀 마르네요.”

“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스튜어디스는 살짝 고개를 숙이며 밝은 미소로 대답하고는 물을 가지러 떠났다. 칼칼한 목을 다듬으며 가려진 창문을 위로 젖히자 우린 이미 미국 한복판 위에 도착해 있었다.

잠시 후. 뉴욕의 JFK 공항에 착륙한 비행기는 곧 우리를 내려 주었고, 나는 착륙하는 그 순간까지 잠들어 있던 군페이씨를 흔들어 깨웠다.

“군페이씨. 도착했어요. 공항이에요.”

“벌써..?”

벌써라니.. 이 사람아. 거의 20시간을 비행기 안에서 보냈는데, 누가 보면 교토에서 도쿄 가는 버스 탄 줄 알겠네.

나는 비몽사몽인 군페이씨를 일으켜 짐을 챙겨 드린 뒤 출국장으로 향했다. 물론 간단한 입국 심사와 비자 문제가 있었지만, 이미 일본에서 취업하여 비즈니스 비자를 가지고 있던 터라 문제가 될 건 없었다. 1년 동안 미국에서 체류한 경험도 있고..

기내식도 거의 먹지 않고 잠만 자던 군페이씨는 허기가 지는지 지친 기색이었다. 결국 군페이씨의 캐리어까지 대신 끌고 출국장으로 나오자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장님~!! 여기에요!!”

엘리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야마시타씨와 함께 윌슨씨까지 공항에 마중 나와 있었다. 3년 만에 만나는 그리운 얼굴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윌슨씨! 야마시타씨!! 엘리스!!”

그러자 옆에 있던 군페이씨가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군은 역시 미국에서도 인기가 좋은데?”

“가시죠. 배고프실 텐데 우선 식사부터해요.”

“그러지. 사실 엄청 배가 고파.”

“그러게 누가 기내식도 안 먹고 잠만 자래요?”

“이상하게 비행기에서 뭐만 먹으면 속이 좋지 않아서 말이지.”

“어련하시겠습니까. 가시죠.”

군페이씨는 웃으며 묵묵히 내 뒤를 따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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