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 : 다가오는 16비트 시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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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12월 20일. 크리스마스 5일 전. 도쿄 아키하바라.
늦은 오후부터 내린 기록적인 폭설로 소복하게 눈이 쌓인 거리 위에는 쓰레기 봉다리가 끝없이 줄지어 있었다. 웬 쓰레기 봉지가 거리 위해 이렇게 일렬로 늘어져 있냐고? 미안, 정정한다. 사실 사람이다.
“저기요. 이봐요.”
“네에..?”
“민텐도 직원입니다. 이거 따듯한 커피인데, 이거라도 좀 드세요.”
나는 보온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따라 그에게 건네주었다. 오리털 파카에 얼굴까지 파묻고 있던 청년은 나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며 손을 내밀었다.
“가..감하삽니다..”
감하산다니. 강추위에 말도 제대로 안 나오는 모양이네, 그러게 뭐 하러 이 시간에 나와 생고생들을 하시는지. 나는 길게 한숨을 내쉬며 폭설이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거리에는 나와 함께 현장에온 민텐도 직원들이 손님들에게 커피를 나눠주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진짜 온라인 쇼핑몰이 혁신은 혁신이야. 따듯한 집에서 클릭질만 몇 번하면 집으로 물건을 배송해주니까.
물론 인기 상품들은 단 몇 십초 만에 광속 판매 되어 허탈감을 주기도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얼어 죽을 만치 고생 안 해도 되잖아?
“저.. 저도 커피 좀 주세요.”
마치 인간의 살점을 갈구 하는 좀비마냥 여기저기서 손을 뻗쳐오는 바람에 보온병 안에 담긴 커피는 금세 바닥이 나버렸다. 나는 행사 임시 본부로 지정한 봉고차로 달려가 커피를 보충하려고 했지만, 이미 준비해온 커피는 모두 바닥난 상태였다.
“으~ 강 부장님. 너무 추워요..”
80년대 봉고차에 히터가 빵빵하면 얼마나 빵빵하겠냐.. 나는 파카를 두른 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여직원에게 주머니 난로를 던져 주었다.
“그거라도 손에 꼭 쥐고 있어요. 동상 걸릴라..”
“감사해요. 부장님.”
“예보에도 없던 폭설이라 준비가 너무 미흡한데..”
“그래도 저거 보세요. 역 앞까지 줄이 엄청 길어요. 부장님 말씀대로 한정 기간 가격 할인 효과가 큰 거 같아요.”
“젠장 2000엔 아끼려다가 약값이 더 들겠네. 괜히 우리 직원들 고생만 시키고, 미안해요. 미나씨.”
“아, 아뇨~!! 괜찮아요. 제가 자원해서 온 건데요. 뭐..”
그때 뒤에서 나를 부르는 군페이씨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군~!! 혹시 커피 남았나!?”
나는 멀리 있는 군페이씨를 향해 두 팔을 X자로 교차하며 소리쳤다.
“다 떨어졌어요!! 그게 마지막 입니다!!!”
이번 행사 총괄 담당인 군페이씨는 비어있는 보온병을 들고 털레털레 걸어왔다. 옷깃은 물론 눈썹까지도 눈이 하나 가득 쌓여 있었지만, 표정만큼은 매우 밝아 보였다.
“경영진 회의에서는 값 비싼 휴대용 게임기 제작에 대해 반응이 신통치 않았었지만, 일단 출발은 좋아 보이는군. 10일정도 가격 할인 행사로 초도 수량이 완판 되면 아이들을 통해서 추가로 광고 효과를 볼 수 있겠지?”
“아마 학교에 가져가는 아이들이 있을 테니까. 한 반에 한명씩만 구입한다면 자동으로 50명 정도에게 알려지겠지요.”
“그래 맞아. 그게 휴대용 게임기의 이점이지. 게임 & 워치처럼 전철에서 플레이하는 사람들에게도 효과가 있을 테고, 딱히 마케팅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알아서 퍼져나가게 될 거야.”
하긴 내가 국민학교 때에도 같은 반 친구 하나가 가져와서 자랑했던 적이 있었지. 한판만 시켜 달라면 그거 가지고 얼마나 유세를 떨었는지 못 봐줄 수준이었는데, 결국 3일도 못가 누가 훔쳐가 버리는 바람에 교실이 난리가 났었지..
“저기, 커피 더 없나요? 대기 중인 손님들이 찾으시는데..”
거리에서 커피를 나눠주던 홍보팀 사원 하나가 빈 보온병을 들고 와 우리에게 물었다.
“이런, 아직 행사가 시작하려면 10시간이나 남았는데, 새벽에 강추위를 어쩌지?”
“그렇다고 돌아가라고 할 수도 없고, 큰 사고가 안 나게 잘 대처 할 수밖에요.”
그러자 홍보팀 사원이 꽁꽁 언 손에 임김을 불며 말했다.
“편의점에서 핫 팩을 좀 사다가 돌릴까요?”
“핫 팩? 그것도 나쁘지 않지만, 이 많은 사람들에게 핫 팩을 돌리려면 편의점 몇 군데는 돌아야 할 텐데?”
“뭐 어쩔 수 없죠. 이대로라면 내일 아침 뉴스 기자들도 대거 몰려올 텐데, 손님 중에 동상이라도 걸려 봐요?”
“그렇군. 아무래도 할 수 있는 최대한 조치를 취해 봐야지.”
결국 우리는 봉고차를 이용해 최대한 몸을 데울 수 있는 물품을 찾기 위해 편의점이란 편의점은 전부 들러 핫 팩을 공수해 뿌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벽의 강추위는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크으.. 정말 대단들 하군. 나라면 그냥 포기하고 집에 갔을 거야..”
군페이씨는 빨개진 코를 부비며 봉고차에 올랐다. 그러나 구석에서 온몸을 떨고 있는 미나씨가 간절한 목소리로 군페이씨에게 말했다.
“저기 부장님 행사장에 미리 얘기해서 들여보내달라고 하면 안 될까요?”
“미안하지만, 장소가 너무 협소해서 저 인원이 다 들어오기도 힘들 거야. 누구는 들여보내고 누구는 밖에 놔둘 순 없지 않은가..”
“그래서 지금 우리도 여기서 이러고 벌벌 떨고 있는 거구요.”
내 마지막 말에 군페이씨는 껄껄 웃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래도 강군이 함께 와줘서 참 든든하군. 이것도 지나면 다 추억이 될 테니까. 다들 조금만 힘내게.”
도쿄 행사장으로 지원을 나온 사람은 나와 군페이씨를 포함해 5명. 그나마 봉고차 안에서 추위를 버티고 있었지만, 바깥에 있는 사람들은 진짜 얼마나 추울까?
차량의 틈 사이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 소리에 결국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날이 밝았다.
“으.. 개추워.”
“네에? 강 부장님 뭐라고 하셨어요?”
“아닙니다. 얼어 죽을 것 같다는 한국말 이예요.”
가만히 있어도 온몸이 부들부들 떨려와 차라리 몸을 조금 움직이고 싶었다. 봉고차 뒷문을 열어젖히자 대로에 불어오던 칼바람이 봉고차 안쪽을 헤집기 시작했다.
“부.. 부장님 문 좀!!”
“알았어요. 금방 닫을게요.”
쿵~!! 밤새 몸을 웅크리고 있었더니 키가 5센티는 줄어든 느낌이 들었다. 나는 팔을 이리저리 돌리며 근육을 풀어주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다행히 눈은 그쳤네.”
뽀득.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새하얀 눈길 위로 거의 발목까지 눈이 쌓인 상태였다. 새벽까지 엄청 내렸나 본데 사람들은 괜찮을까? 고개를 돌려보니..
“허억!!”
행사장으로부터 역으로 이어지는 대로에는 둥근 눈뭉치가 나란히 이어져 있었다. 그들 중에는 나처럼 굳어진 근육을 풀기 위해 서로 어깨를 주물러 주는 모습도 보였다. 영하의 강추위에 다들 살아있으니 다행이다..
“대단하다. 진짜..”
사실 보통 사람이라면 그깟 2000엔 더 내고 나중에 구입하겠지만, 지금 현장에 모인 이들은 결코 그 2000엔 때문에 모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도 사람인데 이런 폭설에 자기 몸을 희생하며 이렇게까지 휴대용 겜보이를 사려하진 않았겠지. 하지만 누구보다 먼저 새로운 기계를 경험해 보고 싶다는 얼리어답터의 정신으로 강추위를 이겨낸 것이다.
그들에게는 어쩌면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보다 초도 물량이 떨어져 재생산 될 때까지의 기다려야하는 고통이 더 크게 와 닿을 인종들이니까.
이들은 90년대 중반에 하나의 칭호를 얻게 되는데, 보라색 로봇에 죽어도 타기 싫어하는 아들 내미에게 가차 없이 돌아가라고 하는 내치는 아버지가 나오는 애니메이션에 열광하며 ‘오타쿠’라는 별호를 얻게 될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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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대로라면 휴대용 겜보이는 1989년 4월에 발매된 제품이다.
당시 민텐도는 1988년 여름에 출시 목표를 잡고 있었지만, 내부 사정상 출시 연기를 한번 거친 게임기였다.
그러나 오늘은 1987년 12월 21일.
최초의 교환식 카트리지를 탑재한 휴대용 게임기가 행사매장의 진열대에 올랐다.
“우와아~!!!”
카린의 전설과 드래곤 워리어2에 이어 발매당일 구매 행렬은 이제 더 이상 희귀한 구경거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콘솔기기로서는 최초로 구매 행렬 유도에 성공하였고, 값비싼 기기임에도 불구하고 오픈과 동시에 불티나게 팔려나가기 시작했다.
런칭 타이틀로 준비한 겜보이용 슈퍼 마리지 랜드 역시 열에 아홉은 반드시 구입하는 타이틀로 기기 견인 효과를 톡톡히 수행하고 있었다.
단순히 호기심에 행사장을 찾은 사람 역시 슈퍼 마리지의 퀄리티를 보고 대기 줄을 설 정도였으니까..
총 4가지 런칭 타이틀 중 슈퍼 마리지 다음으로는 야구게임이 잘나갔다. 넉넉히 준비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미 한나절 만에 준비한 초도 물량의 5분의 1이 사라지는 기현상을 겪자 군페이씨는 식사도 거른 채 여기저기 행사장을 누벼 다녔다.
“좀 쉬엄쉬엄 하세요. 나이도 있으신데..”
“오랜만에 현장에서 뛰니까 아주 기운이 펄펄 나는데?”
“그래요?”
군페이씨는 내가 건네준 캔 음료수를 받아 들고 뚜껑에 손을 대었다. 하지만 떨리는 손끝에 그는 음료수 뚜껑조차 제대로 따지 못하고 있었다.
틱.. 틱.. 식사까지 거른 상태에서 온종일 뛰어 다녔으니 손끝에 힘이 들어가겠나..
나는 군페이씨의 손에 들린 음료수를 뚜껑을 따서 건네주었다. 그러자 군페이씨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카마우치 사장님이 그러던데, 자네 독신주의자라면서? 사실인가?”
“푸흡~!! 아~ 진짜..”
입안에 담겨 있던 음료수를 반쯤은 뿜어낸 나는 서둘러 손수건으로 입 주위를 닦으며 말했다.
“그런 거 아녜요. 사장님이 갑자기 조카 분을 소개 시켜주신다 길래. 거절하려다가 말이 헛 나왔을 뿐입니다.”
“사장님의 조카? 설마 스미레양??”
“어? 군페이씨도 알고 계세요?”
“알고 있지. 실제로 만난 적도 몇 번 있고..”
“그러시군요. 전 사진으로만 봤는데.. 그게.. 참..”
“미인이라기엔 거리가 너무 멀지?”
미인까진 바라지도 않아. 그냥 평범하기만 했어도 내가 이러진 않지..
“카마우치 사장님 성격상 어떻게든 엮어보려는 의도가 보여서 그만..”
“뭐 우리 사장님이라면 설령 자네가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무조건 만나보라 밀어 부쳤을 거야. 그만큼 끔찍하게 조카인 스미레를 아끼거든, 하지만 말이야..”
“하지만.. 뭐가 또 있나요?”
“어릴 때부터 원하는 게 있으면 뭐든 들어주며 오냐오냐 키운 스미레양은 포기를 모르지.”
군페이씨의 말에 등 뒤로 한줄기 소름이 스쳤다.
“차라리 조금 더 강경하게 나가지 그랬나? 내가 보기엔 독신주의자라는 변명으론 부족해보이는데, 년초에 사내 파티때 어떻게 하려고?”
“안그래도 내년 연초에 미국 지사쪽으로 출장 계획 잡아놨습니다.”
“역시 강군 답게 철저 하군. 하긴 옛 말에 이런 말이 있지. 아무리 뛰어난 미인도 5년만 같이 살면 쉽게 질린다고..”
“제가 너무 사람의 외적인 모습만 본다고 꾸짖어 주시는 건가요?”
“아니.”
“그럼?”
“못생긴 여자를 만나면 그 5년조차 없다는 거지. 그냥 처음부터 질려.”
... 인생 명언 터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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