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3 : 다가오는 16비트 시대 (3)
“강군. 잠깐 자리에 좀 앉지?”
“네?”
평소 때와는 다른 무게감 있는 목소리에 깜짝 놀란 내가 카마우치 사장을 바라보자, 그는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맞은 편 자리를 권하였다. 뭐지? 살짝 불길한 느낌이 드는데..?
설마 내가 라이텍스를 인수한 걸 들킨 건가? 아니면 드래곤 엠블렘의 개발자 정체가 나라는 게 까발려 진건가? 아냐, 그럴 리가 없는데.. 대체 왜 이러지?
“강준혁군.”
“네, 사장님.”
“우리가 같이 일한 게 얼마나 됐지?”
“4년 정도 되었습니다.”
“그래 올해도 거의 끝나가니 햇수로 따지면 5년이 되어 가는군.”
“그러게요. 시간이 참 빨리 흘러가네요. 하하..”
“맞아. 그 5년 새에 우리 민텐도는 장난감 가게에서 게임 회사로 업종 자체를 바꾸어 버렸지. 또한 미국 게임 시장에서도 압도적인 성과를 이루고 있어. 이미 나는 내 증조부님이 세운 민텐도 그 이상을 해냈다고 생각하네.”
뜬금없이 웬 자기 자랑이지? 카마우치 사장은 테이블위에 올려져 있던 커피를 한 모금 삼키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 업적에는 군페이 녀석과 시게 녀석. 그리고 강준혁 자네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하고 있어. 그래서 말인데..”
“네, 사장님.”
“요즘 나에게 큰 고민 거리가 하나 있다네..”
“고민이요?”
현재 일본 게임 산업 부분에서 부동 1위를 지키고 있는 그가 고민이라니? 대체 뭘까? 하지만 고민이라면 오히려 같은 일본인인 군페이씨나 시게씨한테 이야기 하는 편이 나을텐데, 왜 하필 나를 지명했지?
잠시 동안 뜸을 들이던 카마우치 사장은 품 안에서 한 장의 사진을 꺼내 보였다.
테이블 위에 올려진 사진 안에는 결코 빈말이라도 예쁘다는 말이 안 나올 정도로 못생긴 여성이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내 조카일세. 어떤가?”
“아, 그.. 아름.. 다우.. 십니다.”
이렇게 스스로에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는 거짓말을 해본 적은 처음이다.
“마음에 드나?”
좆까.
“네? 하하. 그게.. 그런데 갑자기 조카분 사진을 왜 저에게..?”
“이 녀석이 혼기가 찼는데, 아직 짝을 찾지 못해서 말이야.”
못 찾지.
이정도 외모라면 이분의 인연은 아마 다음 생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다. 하지만 대놓고 그렇게 말할 순 없잖아!? 83년으로 타임슬립 이후 최대의 위기다. 이건 누가 봐도 카마우치가 중매 서는 거잖아!! 어떡하지!?
카마우치 사장은 사진을 바라보며 도저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이쁜데, 어째서 남자들이 아직까지 가만 놔두고 있는 거지? 열도의 젊은이들 눈깔이 어떻게 된 거 아냐?”
당신이나 병원 가서 시력 측정 좀 해보시지? 지금 나랑 장난 하냐?
“그래서 우리 회사에서 마땅한 녀석을 소개시켜주려고 했는데 말이야. 군페이는 이미 결혼을 해버렸고, 시게 녀석은 스미레를 소개해 주기엔 나이가 너무 많아. 그래서 말인데..”
나는 카마우치 사장이 마지막 말을 꺼내기 전에 먼저 치고 들어갔다.
“실례지만 조카님 나이가..?”
“올해로 24살이라네. 참 꽃다운 나이지.”
꽃은 무슨 개뿔이.. 시베리아 빙하 한복판에 잡초가 피어나도 이 꽃보단 예쁘겠다. 일본 나이로 24살이면 한국에선 26살. 1980년대에는 결혼을 좀 빨리하는 추세니까 결혼 적령기인 것은 맞지만, 왜 그 상대가 나냐고!!
“강군이 올해로 25살이지? 이거, 이거~ 스미레랑 나이도 비슷하니, 어울리기도 쉬울 테고”
“이분 성함이 스미레(제비꽃)입니까?”
제비꽃에게 지금 당장 사과하라. 카마우치..
“그래 이름도 예쁘지? 내 동생의 딸이라네. 어때 마음에 들면 한번 만나보는 거 어떤가?”
“전...”
“그래, 말해보게.”
“저는..”
카마우치 사장은 잔뜩 기대에 찬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머리를 굴려라 강준혁!! 이 위기를 헤쳐 나가야해!! 그런데 어떻게 빠져나가지? 차라리 평생 골방에 갇혀서 게임이나 만들고 말지 죽었다 깨어나도 이 분은 못 만나겠다.
생각해내라 강준혁. 모두를 깜짝 놀라게 했던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이 위기를 빠져 나가!!
“독신 주의자입니다.”
“뭐..?”
이런 미친.. 내가 지금 뭐라고 한 거야?
그 순간 카마우치 사장은 번개같이 의자 등받이에 바싹 기대며 나에게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독신 주의? 그 말은 여자에는 별 관심이 없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허~ 이 녀석 밤낮으로 일만하다보니. 여자에 대한 매력을 모르는군. 모름지기 남자란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려야 진짜 남자가 되는 거야.”
그말은 내가 군대 갈때도 들어봤다. 대체 그놈의 진짜 남자는 언제 되는 건데?
“됐고, 그깟 독신 주의 우리 스미레를 만나면 단번에 생각이 달라질 걸?”
아니요. 더 확고해 질 것 같은데, 하지만 카마우치 사장은 내 입장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하다.
“안그래도 내년 초 사내 파티 때 스미레도 참석할 예정이니 그때 정식으로 소개 시켜주지.”
“아뇨. 사장님 전 정말 연애할 생각이..”
“자네? 정말 내가 연애 좀 해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스미레를 소개 시켜주는 거라 생각하나?”
"네?"
"앞으로 사내에서 좀 더 중역을 맡으려면 지금 한국인 신분으론 무리가 있다는 거 모르겠나? 난 지금 자네를 가족으로 맞으려는 것이야. 우리 카마우치 가문의 사람으로 말이지."
"하지만 저는.."
"아무튼 난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이만 돌아가도 좋아. 숙소에 가서 내가 한말의 뜻을 잘 생각해보게."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카마우치 사장에게 인사를 드리곤 사장실을 빠져나왔다.
창밖을 바라보니 늦은 오후 산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었다.
차라리 유키랑 사귄다고 할걸 그랬나? 하지만 정식으로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그런 말을 거짓으로라도 입에 담을 순 없었다.
2015년에도 그랬지만, 여자 관계쪽에서는 꽤나 고지식한 편이랄까..
아무튼 내년 초에 사내 파티기간에 어디 출장 계획좀 잡아야 되겠군.
&
다음 날. 민텐도 본사는 휴대용 겜보이의 발표와 함께 비상사태에 돌입했다.
2000엔의 가격 할인 한정 행사 덕분에 대형 판매점부터 소매상까지 민텐도 본사에 문의 전화가 쇄도 한 것이다.
덕분에 출하 목표로 잡아두었던 초기 생산 수량 30만대가 모조리 예약이 잡혀버리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현 가정용 콘솔 왕좌에 군림하고 있는 민텐도의 휴대용 게임기 발매소식에 차세대 NEGA 드라이브는 발표 하루 만에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 버렸다.
1년 뒤에 나올 차세대기 보다 당장 다음 달에 출시하는 기기에 관심이 몰리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군페이씨가 나를 찾아왔다.
“강군. 자네가 부탁한 대로 2인용 대전을 위한 추가 커넥터를 부착하긴 했다만, 과연 이 포트가 나중에 쓸모가 있을까? 내가 보기에 휴대용 게임기는 1인용 게임들만으로 충분할 것 같은데?”
완성 된 겜보이에는 다른 기기와 유선으로 연결하며 대전을 할 수 있는 추가 포트가 달려 있었다. 원가 절감을 위해 모두가 반대 했지만, 내가 꿋꿋하게 대전용 포트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력히 피력하여 얻어낸 결과물이었다.
나는 군페이씨의 물음에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필요해요. 반드시.”
“허~ 평소에 조용하던 자네가 대전 포트에 관해서 유독 고집을 부리길래 편을 들어주긴 했지만, 정말 괜찮은 걸까?”
“글쎄 두고 보세요. 그 포트가 군페이씨가 만들어낸 겜보이를 희대의 괴물 머신으로 만들어 줄 겁니다.”
아무리 형제가 있다고 해도 값 비싼 휴대용 게임기를 두 대나 사주진 않을 거라 판단한 경영진은 휴대용 겜보이가 잘 나가봐야 100만대 정도 팔릴 거라 예상했다. 하지만 이 휴대용 겜보이는 한 RPG 게임의 등장으로 전 세계 1억 1869만대라는 어마어마한 기록을 세우게 될 녀석이었다.
대체 그 RPG가 뭐냐고? 그 왜 90년대에 띠부띠부 실이라는 스티커 때문에 스티커만 갖고 빵은 버려서 뉴스에 화제가 되었던 몬스터가 그려진 빵 기억하나?
그래도 모르겠다면 조금만 기다려 봐라. 그게 뭔지 내가 기억나게 해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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