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52화 (52/252)

EP. 13 : 다가오는 16비트 시대 (1)

“우리 이거 스코어 내기 할래요?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어때요?”

어라? 이건 예상치 못한 도전인데? 뭐 그럼 나도 어린 시절 추억삼아 어울려줘 볼까?

우리는 사이좋게 50엔 동전 하나씩 집어넣고는 게임을 시작했다.

이윽고 거품을 타고 온 두 마리의 공룡이 스테이지 양쪽에 위치하고 게임이 시작 되었다.

총 100판이 준비 되어 있는 이 게임은 레벨 디자인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구조로 되어 있었는데, 솔직히 50판이 넘어가면 좀 질리는 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긴 사람 소원 들어주기 라면 얘기가 달라지지. 우리는 서로 더 많은 적을 물리치기 위해 열심히 버튼을 두들겨 대기 시작했다.

“어?”

유키의 플레이는 교활했다. 내가 애써 적들을 거품에 가둬두면 귀신같이 달려와 일순간에 터뜨려 모조리 처리해 버렸고, 스테이지에 떨어진 바나나와 딸기를 독식하며 스코어를 키우고 있었다.

“유키씨.. 이거 많이 해본 솜씬데요?”

“저희 동네 1등 스코어가 바로 저 거든요~”

게임센터에 온 게 첫 번째 함정이라면 이건 두 번째 함정이냐? 그렇다면 더더욱 질수 없지!! 나는 플레이 방식을 바꿔 유키가 처리하는 적들을 밟아 죽이며 스테이지를 누비기 시작했다.

버블보블의 공룡은 1프레임 안쪽으로 타이밍만 잘 맞추면 거품을 밟고 뛰어 오를 수도 있었기에 나는 거침없이 점프 버튼을 눌러대었다.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내 머리 위로 신발 아이템이 떨어졌다. 이걸 먹으면 스피드가 1.5배 향상 되지~!!

유키 역시 신발을 먹기 위해 서둘러 달려왔지만 내가 더 빨랐다.

“아, 치사해~!!”

“스코어 내기에 양보가 어딨습니까~”

재빨리 신발을 낚아챈 이후 나의 스피드는 더욱 빨라져 유키가 가둔 적들을 모조리 터뜨려 대었다. 와~ 나도 이젠 다 잊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보글보글 완전 재밌네~!!

어릴 때 오락실에서 50원 넣고 100판까지 가다가 주인아저씨한테 쫒겨 날 뻔했었는데 킥킥..

갑자기 떠오른 어린 시절의 추억에 나는 혼자 웃음을 터뜨렸다.

“아!! 사탕~!!”

“내꺼.”

“아아악!!”

이미 신발을 먹은 상태였기에 유키보다 늦게 출발했지만 순식간에 그녀를 앞질러 사탕을 주워 먹었다. 사탕은 거품이 쏘아지는 비거리를 늘려주는 효과가 있지~!!

그렇게 사탕과 신발까지 먹고 나자 내 푸른 공룡은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었다. 20 스테이지에서 이미 유키와 나의 스코어는 만점이상 벌어지고 있었다.

“그만 포기 하시죠~ 유키씨~”

“흥, 절대 포기 안 해요. 두고 보세요. 반드시 이겨줄 테니~!!”

원래 이런 성격이셨나? 마치 운전대를 잡으면 성격이 달라지는 사람처럼 레버를 잡은 그녀의 성격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그때 스테이지 위로 한 켤레의 신발 아이템이 사뿐히 떨어졌다.

“아!! 신발!!”

“내꺼.”

“준혁씨는 이미 먹었잖아요!!”

신발을 먹은 상태에서 또 먹으면 스코어가 1000점이 추가되니까~ 나는 잽싸게 달려가 유키의 신발을 뺏어 먹었다. 이거 내가 봐도 좀 얄밉긴 한데? 설마 게임 가지고 화내진 않겠지?

슬쩍 고개를 돌려 유키를 바라보니 그녀 역시 나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뭔가 싸한 느낌이 드는데? 그때 30스테이지에서 유키가 묘하게 레버를 조작하더니 비밀의 문을 열었다. 저 안으로 들어가면 단숨에 50 스테이지로 넘어갈 수 있었다.

“아직 포기 안했거든요?”

“아이템 없이 50스테이지는 힘들 텐데?”

“두고 봐요.”

이를 앙다문 채 화면에 집중하는 그녀를 바라보니 굉장히 귀여운 느낌이 들었다.

비단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주변에 지나가던 게이머들도 열심히 레버를 조작하고 있는 유키의 모습을 슬쩍슬쩍 흘겨보거나 아예 대놓고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와~ 남자가 게임을 엄청 치사하게 한다.”

“혼자서 아이템 다 처먹네. 뭐 저런 놈이 다 있냐. 양보를 몰라 양보를..”

“나라면 저런 여자랑 게임 하면 아이템 몰빵 해줄 텐데..”

남이사 아이템 다 쳐 먹고 배 터져 죽던 말건~ 이쪽은 진검 승부중이란 말이다~!!

그런데.. 내가 이기면 소원으로 뭘 해 달라하지? 생각해보니 별로 해달랄 게 없는데, 굳이 소원을 말하라면 아까 내가 생각해둔 그 곳에 가는..

에이, 에이~ 오늘로 두 번째 만나서 뭔 생각을 하는 거냐..

잠시 딴 생각에 빠져 흐름을 놓친 그 순간 정말 기가 막힌 일이 벌어졌다.

“십자가다!!”

뒤에서 들려온 남자의 외침에 깜짝 놀라 화면을 바라보니 유키의 캐릭터 4칸 위로 푸른색 십자가가 떨어졌다.

“와, 진짜네. 나 버블보블에서 십자가 처음 봐~!!”

젠장!! 안 돼~!! 나는 재빨리 거품을 밟고 뛰어 올라 십자가를 향해 달렸다. 저걸 내가 먹어야 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여성분 힘내세요! 빨리 점프!!”

누가 보면 내가 무슨 대악마라도 되는 줄 알겠네!!

나는 이를 악문 채 레버를 기울여 십자가를 향해 달렸지만 간발의 차로 유키가 십자가를 먹어버렸다. 그러자 유키를 지켜보던 주위에 남성들이 환호성을 터뜨렸다.

“우와아~!!”

버블보블에서 가장 엄청난 마스터 피스 아이템중 하나인 십자가는 무려 4782 분의 1 확률로 등장하는 극악의 레어 아이템이었는데, 저걸 먹으면 지금까지 거품만 뿜어대던 고자 공룡이 불을 뿜을 수 있게 되었다.

불은 단 한방으로 적을 쓸어버리는 강력한 무기였기에 따로 적을 가둬서 거품을 터뜨려야하는 나의 플레이에 비해 효율이 엄청났다.

결국 십자가의 은총으로 유키는 순식간에 나의 스코어를 따라 잡았고, 마지막 보스까지 유키는 단 한 번도 죽지 않고 클리어 시켜버렸다.

최종 점수는 92만점 대 89만점. 물론 후자가 내 점수였다.

“이겼다아~”

스탭롤이 흐르는 화면에서 손뼉까지 치며 좋아하고 있었다.

거의 한 시간 가까이 플레이하고 나니 허리 아파 죽겠네. 소원이고 뭐고 어서 들어주고 호텔가서 잠이나 자야겠다.

결국 10시가 넘어 게임센터에서 나온 우리는 이제 정말로 집으로 가기 위해 역으로 향했다. 거의 막차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기에 서둘러 역으로 달려가는 이들이 하나둘 보였다.

“원하는 거 말해보세요.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요.”

그러자 유키는 가방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어 수줍게 나에게 내밀었다.

“전화 번호 알려 주세요.”

“소원이 이거에요?”

“네..”

아까 보글보글 하다가 음란 마귀 씌었던 게 부끄럽게 느껴질 정도로 소박한 소원이군. 나는 수첩을 받아들고 내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보통 5시쯤 퇴근하고 나면 집에 있으니까 언제든 전화해요.”

“오늘 정말 재밌었어요. 준혁씨.”

“저도요. 내일 교토로 돌아가기 전에 괜찮으면 식사나 같이 할래요?”

“네~ 전화 기다릴게요.”

어느새 시부야 역 앞에 도착한 나는 손목시계를 바라보며 유키에게 말했다.

“전 그냥 여기 근처에 호텔에서 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조심히 들어가요. 유키씨.”

“네, 근데 준혁씨 한테 하나 궁금한 게 있긴 한데..”

“뭔데요?”

“만약 준혁씨가 이기면 어떤 소원을 빌려고 했어요? 뭔가 굉장히 필사적이시던데?”

“아.. 그.. 음.. 비밀입니다.”

“아~ 그~ 음~ 비밀이군요. 하지만 대충 뭔지 알거 같아요.”

“흐음.. 흠..”

내가 모른 척 시선을 다른 곳으로 피하자, 유키는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푹 쉬시고, 내일 뵈요.”

“네, 조심히 들어가요.”

잠시 후. 유키가 시부야 역 안으로 사라지자, 나는 새빨개진 얼굴을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아~ 덥다. 더워..”

&

“으~ 역시 돈을 좀 더 쓰더라도 호텔은 고급 호텔이 좋군.”

간만에 호텔방에서 깨어난 나는 부스스한 머리를 정리하고 샤워실로 향했다. 반쯤 수면 상태로 입안에 칫솔은 물은 채 치카치카를 마치고 차가운 물을 얼굴에 끼얹자 조금 정신이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호텔 테이블 위에는 찌그러진 캔 맥주 몇 개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무료함에 티비를 보며 캔 맥주 몇 개 뜯은 게 조금 과음한 모양이다.

조금 늦잠을 자버린 나는 서둘러 옷을 챙겨 입은 후 체크아웃을 마치고 호텔을 빠져 나왔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니 카와구치씨를 만나기 전에 잠깐 식사라도 할까?”

나는 혼자서도 부담 없이 식사가 가능한 덮밥 집에서 규동 한 그릇을 비우며 호텔에서 챙겨온 신문을 펼쳐 보았다. 이 시대의 정보 매체라곤 뉴스나 신문밖에 없었기에 아침마다 틈틈이 챙겨보는 편이었는데, 오늘은 조금 재밌는 뉴스거리가 있었다.

-NEGA 첫 가정용 콘솔 머신 NEGA 디스크. 민텐도에 패배 인정. 차세대 16비트 게임기 NEGA 드라이브 선보여!!-

‘결국 기다리다 못해 먼저 16비트 시장을 선점하려는 거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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