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50화 (50/252)

EP. 12 : 기묘한 마케팅 (4)

안돼!!! 절대 말할 수 없어~!! 섹시한 여자 캐릭터들이 하늘을 날아다니다가 필살기 맞으면 반쯤 옷이 벗겨져 쓰러진다는 걸 어떻게 말해~!!

결국 나는 가장 무난한 캐릭터 디자인 (그나마 가장 많이 가리고 있는) ‘류화영’의 이미지를 꺼내 보였다.

그녀의 설정 자료는 아직 누구에도 보여주지 않았기에 유키에게 최초로 공개하는 셈이었다.

류화영은 전신에 검은색 슈트와 얼굴 절반을 가면으로 가리고 있는 비밀의 캐릭터였다.

가면 아래 도톰한 입술과 타이트한 차림에서 돋보이는 훌륭한 몸매가 인상적인 류화영은 내가 사이킥 배틀중에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이다.

사이킥 배틀의 메인 주인공 캐릭터 세 명은 불꽃술사 ‘아즈사 렌’, 전격술사 ‘헬레나’, 폭풍술사 ‘아오이 츠바사’로 최종 결정 되었지만, 최종장까지 게임을 클리어하면 스토리 모드와 배틀 모드에서 적으로 등장했던 초능력자들을 사용할 수 있었다.

2번째 스테이지 보스 염동술사 ‘캐서린’, 5번째 스테이지 기폭술사 ‘제니퍼’ 그리고 마지막 8스테이지 최종 보스 캐릭터인 ‘류화영’ 특히 류화영의 컨셉과 설정은 내가 직접 만들어 모리타에게 전해주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주인공 ‘아즈사 렌’보다 훨씬 애착을 가지고 있는 캐릭터였고, 특수 성능 역시 최종 보스답게 사기 캐릭터 수준으로 세팅 될 예정이다.

“캐릭터가 굉장히 예쁘네요? 여 주인공인가요?”

“사실 이 게임의 조작 캐릭터들은 전부 여자입니다. 초능자들의 싸움을 메인으로 하고 있는 슈팅 게임입니다.”

“아, 그렇군요. 슈팅 게임이라면 막 날아다니면서 미사일을 쏘는 거죠?”

“음, 뭐 대충은 맞아요.”

“저 비행기 게임 엄청 좋아하는데~ 게임 센터에 있는 1942도 자주 하거든요. 준혁씨가 만든 게임이 출시되면 꼭! 해볼게요.”

나를 바라보며 단호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에게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 거렸다.

“하하.. 그렇게 꼭 해보진 않으셔도 되는데..”

“네?”

“아니에요. 혼잣말입니다. 그런데 전에 제가 드린 드래곤 엠블렘은 잘 가지고 계시나요?”

“아~ 맞다.”

유키는 가방에서 드래곤 엠블렘과 함께 확장 카트리지를 꺼내 탁자에 올려두었다.

“준혁씨 덕분에 재밌게 했어요.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확장 카트리지 안에 들어 있는 추가 시나리오도 덕분에 재밌게 즐겼습니다. 확장 카트리지는 제가 답례로 드리려고 샀어요.”

“다시 저한테 주시려구요?”

“네, 너무 즐겁게 했던 게임이라~ 혹시 바빠서 못해 보셨을까봐.”

“괜찮아요. 저도 이미 확장 시나리오까지 클리어 한 상태입니다. 제가 선물 했던 거니까 그냥 소중히 간직해 주세요.”

반지나 목걸이도 아니고, 게임 카트리지를 소중히 간직해 달라고 부탁하니. 왠지 기분이 이상하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그런데 유키씨는 무슨 일을 하고 계세요? 전에 보니 게임도 굉장히 잘하시던데? 그때 행사장에서도 얼마 없던 여성 유저 가운데 마지막까지 살아 남으셨잖아요.”

“어릴 때부터 체스 두는 걸 좋아해서 아버지랑 자주 두곤 했는데, 드래곤 엠블렘이란 게임을 보는 순간 혹해서 사버렸지 뭐예요. 아~ 그리고 저는 방송국에서 일하고 있어요.”

“방송국이요??”

“네, 아직은 심야 방송 프로그램의 보조 작가지만요.”

“실례지만 나이가..?”

“열 아홉이요. 지난주에 생일이 지났거든요.”

“아, 늦었지만 생일 축하드려요.”

열아홉이면.. 한국 나이로 치면 21살인가? 분명 성인이긴한데, 19살이라는 나이가 굉장히 당혹 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커피 잔을 입으로 옮겼다.

“준혁씨는요?”

“저는.. 스물다섯이요.”

나는 얼추 머릿속으로 내 나이를 다시 계산해보고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일본 나이 21살로 세팅하고 83년에 온 후로 4년의 시간이 흘렀구나.. 세월 참 빠르네.

“와아.. 생각보다 어리시네요?”

“풉.. 제가 나이가 많아 보여요?”

“뭔가 느낌이 제가 아는 20대랑은 조금 달라서..”

“어떻게 다른데요?”

“본래 20대라면 대학을 갓 졸업해서 뭐든 어리숙한 사회 초년생 느낌인데, 준혁씨는 굉장히 어른스럽다고 할까? 솔직히 말해 아무리 젊어도 20대 후반이실 줄 알았어요.”

아무래도 2015년 때의 말투나 습관이 그렇게 보이게 하는 건가? 겉으론 25살이어도 속으론 38살이니. 유키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올해도 12월 한 달밖에 안 남았네요. 내년에는 한국에서 88 올림픽이 열리는데, 혹시 한국에 돌아가시나요?”

“글쎄요. 직장이 일본에 있으니 아주 돌아가는 건 아니고, 잠깐 휴가차 다녀올 생각입니다.”

“부모님은 한국에 계시는 거죠?”

유키의 물음에 커피잔을 들어 올리던 내 손이 멈추었다. 부모님. 잘 계시려나..? 내년에 휴가를 내면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에 가보는 건 어떨까? 88년도에 7살이었으니까.. 아마도 서울 서대문 쪽에 살았던 것 같은데..

“준혁씨..?”

“네. 부모님은 한국에 계세요. 내년에는 한번 만나 뵈러 가야겠네요. 서울 올림픽도 보러갈 겸..”

대답을 흘리며 싱긋 웃어 보이자. 유키는 더 이상 가족에 관해선 묻지 않았다. 대신 가방에서 다이어리를 꺼내어 무언가 적기 시작했다.

“그건 뭐예요?”

“잠시 아까 다녀온 음식점에 대해 써두려 구요. 잊어버리기 전에..”

“잊어버리기 전에?”

“이번에 신입 작가들 대상으로 정규 프로그램 아이디어 공모전이 있거든요.”

“공모전이요?”

“네, 새로운 방식의 버라이어티 프로그램이나 2~30분 정도의 짧은 드라마 기획이긴 한데, 공모전 출품작으로 음식을 소재로 하려고 하거든요.”

음식? 2010년대에 유행하던 먹방 드라마 같은걸 말하는 건가? 유키는 다이어리를 반듯하게 펼쳐 놓고는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들을 하나씩 그리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탁자에 몸을 기댄채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시후. 유키는 식당 테이블에 놓여있던 음식들을 순서대로 하얀종이 위에 옮겨담기 시작했다.

“굉장하다. 그 많은걸 한 순간에 기억했어요?”

“어릴 때부터 기억력이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어요.”

유키는 베시시 웃으면서도 쉬지 않고 손을 놀렸다. 어느정도 그림이 완성되자 유키가 내게 물었다.

“준혁씨. 아까 우리가 먹은 시루(국)는 뭔가요?”

“된장찌개요.”

“덴잔치게.. 고기는요?”

“그건 연탄 불고기라고 해요.”

“욘탄 부루고기..”

굉장히 신중한 표정에 비해 발음이 엉성한 게 너무 귀여워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유키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저 발음 이상하죠? 헤헤”

“아니에요. 귀여워요.”

이윽고 각각 밑반찬의 이름들까지 전부 써내려간 유키는 개운한 표정으로 다이어리를 덮었다.

“그거 잠깐 봐도 되요?”

“부끄러운데, 아직 누구한테 보여줄 만한 게 아니라..”

“아이디어는 나눌수록 좋아진다는 거 모르세요?”

“그런 게 아니라..”

유키는 부끄러운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나에게 다이어리를 내밀었다. 유키에게서 다이어리를 넘겨받은 나는 한 장씩 넘기며 내용을 살펴보았다.

그녀의 다이어리 안에는 도쿄 곳곳의 음식점이나 디저트 전문점의 요리들이 자세하게 그려져 있었는데, 보는 것만으로도 입안에 군침이 돌 정도로 특색 있게 그려져 있었다.

어떤 것에는 참고용으로 사진까지 오려 붙여 놓아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그런데 이 시대에 필름 카메라로 음식 사진 찍는 사람이 흔치는 않을 텐데?

어떤 파르페의 그림에는 재료와 컵의 모양, 아이스크림의 높이까지 자세히 쓰여 있어 굉장한 참고 자료가 될 것만 같았다.

그중에 재밌는 것은 모든 음식 옆에는 삶은 달걀 모양의 캐릭터가 데굴데굴 굴러다니며 기묘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와.. 진짜 자세히도 적혀 있네요.”

“그만 돌려 주세요~ 네?”

“잠시 만요. 조금만 더..”

그렇게 그림을 넘기다가 나는 한 장의 그림에서 손을 멈추었다. 거기엔 음식 대신 민텐도의 카트리지가 그려져 있었다. 게임의 제목은 ‘드래곤 엠블렘’ 그 옆에는 깜짝 놀란 표정의 달걀 캐릭터와 말풍선이 그려져 있었다.

-만든 사람 진짜 천재~!!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이 게임을 클리어 한 준혁씨도 굉장해~!!-

“아~!! 그건!!”

유키는 내가 보고 있던 다이어리를 재빨리 낚아채 가방에 도로 넣어 버렸다.

“뭘 그리 놀라요?”

“그냥 부끄러워서요. 아~ 덥다.”

유키는 얼굴이 화끈 거리는지 빨개진 얼굴에 부채질을 하였다.

“그림을 굉장히 잘 그리시네요? 음식들마다 옆에 그려진 계란형 캐릭터는 유키씨가 직접 만든 건가요? 뭔가 표정이 여러 가지던데?”

“아~ 타마고상(달걀씨)이에요. 제가 만든 캐릭터인데, 표정으로 음식 맛을 평가해주고 있는 거예요. 어때요?”

“재밌어요. 독특한 방식인데요?”

소위 이모티콘처럼 표정으로 맛을 평가해주는 거였구나, 지금 시대에선 굉장히 독특한 방식인데? 그러나 유키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가 않았다.

“유키씨. 혹시 무슨 고민거리 있어요?”

“사실, 공모전이 며칠 안 남았는데, 프로그램 컨셉에 대한 구상이 아직 덜 끝났거든요. 장르는 도쿄의 맛 집 탐방으로 정했지만, 그냥 가게를 소개만 하는 건 너무 밋밋해 보여서..”

“맛 집 탐방이라..”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아까 점심때쯤 떠올린 드라마 한편이 생각났다. 80년대에 과연 그런 컨셉이 먹힐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한번 시도는 해보는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정규 편성도 아니고 공모전인데, 나는 두 손을 턱에 괸 채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키에게 말했다.

“유키씨. 혹시 이런 컨셉은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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