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35화 (35/252)

EP. 9 : 볼 품 없는 회사 (3)

‘하지만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가지고 있는 회사지..’

나는 쿠도 사장의 표정을 잠시 지켜보다가 살짝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사장님. 그럼 이렇게 해보는 건 어떨까요?”

대화의 주도권은 이제 나에게 완전히 넘어 왔다. 대출 빚에 허덕이며 침울한 표정의 쿠도 사장은 이미 반쯤 포기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이 회사를 저한테 넘기시죠.”

“뭐라구요?”

“아차피 쿠도 사장님은 더 이상 게임 소프트를 개발할 여력이 없지 않습니까?”

“그.. 그래도 회사를 넘긴다는 건 조금..”

“이건 어때요? 트라이앵글 소프트가 가지고 있는 모든 채무를 제가 대신 갚아드리지요. 그리고 쿠도 사장님에게 삼천만엔을 더 얹어 드리겠습니다.”

“사.. 삼천만엔 씩이나!?”

3천만엔이면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3억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1980대에 3억이면 어마어마한 돈이지. 내가 알고 있기로 현재 트라이앵글이 지고 있는 은행 빚이 2천만엔 정도니까. 약 5천만엔에 회사 하나 꿀꺽하는 셈이지.

“하지만 민텐도 직원에다 유학생인 당신에게 그만한 돈이 있나요?”

“돈은 있지요. 대신 회사를 차리는 게 유학생 신분으로는 너무 까다로워서요.”

“허어..”

사실 1980년대의 일본으로 왔을 때 나는 두 가지 큰 실수를 저질렀다.

그것은 바로 나이를 너무 젊게 설정했다는 점. 그리고 이제 갓 일본에 유학을 왔다고 설정한 점이었다. 바로 이 두 가지 요소 때문에 나는 20억엔이라는 돈을 가지고도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 것이다.

왜냐고? 첫 번째는 아무리 돈이 많아도 일본에 거주하는 기간이 짧아 사업자를 낼 수 없다.

외국인이 일본에서 새로운 기업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최소 5년 이상 일본에 거주해야 하는 사항이 있었고, 관련 업체에 종사 경력이 필요하다.

거기에다 사업 아이템 역시 일본 정부가 승인을 내줄지 말지도 미지수였기에 이제 갓 21살의 한국인 유학생인 나에게 아무리 돈이 많아도 덜렁 사업 승인을 내주지 않을게 뻔했다.

‘어차피 당장 콘솔 사업을 시작한다고 해도 아타리 쇼크를 거친 시기에 한국인이 일본에서 설립한 기기가 성공할 수 있을까? 아무런 준비 없는 시작은 패망의 지름길이지.. 우선은 누구도 태클을 걸수 없을 정도로 커리어를 쌓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군페이씨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를 이용해 우선 80년대부터 90년대까지 게임업계를 일으킬 민텐도에 입사한다.

생각보다 입사 기준이나 공채가 까다롭지 않은 시기여서 그런지 일단 게임 & 워치의 흥행으로 어느 정도 민텐도 내에 입지가 있는 군페이씨와 친해지자, 입사는 쉽게 통과할 수 있었다.

또한, 그가 시게루씨를 데려온 건 나에게 있어 커다란 행운으로 작용하였다.

그 둘 덕분에 카마우치 사장에게 어느 정도 신용을 얻게 되었으니까..

이로써 나는 관련 업체 종사자라는 신분을 얻었고,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줄 문제였다. 그런데.. 이놈의 카마우치 사장이 뜬금포로 나를 미국으로 날려 보낼 줄은 몰랐다.

결국 미국에서 1년의 시간을 보내게 되었지만, 그것도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오히려 민텐도 내에서 군페이씨와 시게씨에 버금가는 핵심 인물이 되었고, 조금은 방향이 수정되었지만 결국 신형 콘솔 기획까지 하게 되었다.

신형 콘솔 개발 부서는 현재는 기기 스펙 상한선에 대해 시장 조사 중이었는데, 역시나 기존 패밀리를 만들어낸 인력 중에 고급 엔지니어가 선출 되어 나와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

즉, 가장 핵심 기술을 제대로 빼낼 부서를 내 스스로 만들어 그 자리에 앉아 버린 것이다. 만약 카마우치 사장과 군페이씨 시게씨와 함께 포커를 두고 있다면 내손에 들려 있는 카드는 로열 스트레이트에 버금가는 패를 손에 쥐고 있는 셈이었다.

“어때요? 제 제안이 마음에 드십니까? 사장님이라면 그 돈으로 지금과 비슷한 회사를 차릴 수도 있지 않나요?”

“조.. 좋습니다. 그 정도 금액이라면 저희 트라이앵글 소프트를 준혁씨에게 넘기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런데 대신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조.. 조건이요?”

내 말 한마디에 사색이 되어가는 쿠도 사장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동안 재정 때문에 스트레스가 장난 아니었나보군. 나는 그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서류 작성 후에 어디 해외로 여행 좀 다녀오시겠어요? 음~ 한 1년 정도? 아, 그에 대한 여행 경비 역시 제가 지불하도록 하겠습니다.”

“가.. 갑자기 해외는 어째서..?”

“카게무샤라고 아시죠? 사실 쿠도 사장님께서 앞으로 1년 정도는 유령 사장으로 등록이 되어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림자 무사.

에도 시대 때 적의 암살을 방지하기 위해 영주와 똑같은 옷차림과 생김새를 가진 가짜 영주를 지칭하는 말이다. 만약에 일본인이 설립한 회사를 양도 받을 경우에는 외국인이라도 상관없다. 단지 일본 내 거주 기간이 3년이 넘으면 돈으로 살 수 있으니까..

&

1987년 1월. 나는 골판지 박스로 가득 차 있던 트라이앵글 소프트의 사무실을 말끔하게 치워냈다. 그리고 새로운 사명을 사무실 앞에 걸어두었다.

-펜타곤 소프트-

나는 기존에 트라이앵글이라는 이름에서 점 두 개를 더 찍어 오각형이란 뜻의 펜타곤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나는 손에 묻은 먼지를 털어내고, 반듯하게 걸어진 사명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밀린 임금을 지불해 줬으니, 슬슬 나타날 때가 됐는데?’

그때 등 뒤에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누구신지?”

고개를 돌리니 카와구치씨가 의문이 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혹시 드래곤 워리어 행사장에서 만났던 민텐도 직원분?”

“안녕하세요. 카와구치씨.”

“여긴 어떻게..?”

“기술 지원을 나왔습니다. 트라이.. 아니지. 펜타곤 소프트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도와드리려 구요.”

“쿠도 사장님은 안에 계신가요?”

“아~ 사장님은 당분간 해외여행을 떠나신다고 해서.. 실질적으론 카와구치와 저 둘 뿐입니다.”

쿠도 사장은 지난달에 지급한 선금으로 채무를 정리하고, 함께 변호사를 만나 계약 서류를 작성한 뒤 유럽으로 떠났다.

“뭐라구요??”

“그래서 당분간은 카와구치씨가 이 펜타곤 소프트를 맡게 되셨습니다.”

“제가요..?”

카와구치씨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가 가볍게 사무실 문을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서자 뒤따라온 카와구치씨는 달라진 내부 인테리어에 혀를 내둘렀다.

“여기가 정말 트라이앵글 소프트입니까?”

“아뇨. 펜타곤 소프트입니다. 상위 사회를 조장하는 삼각형이 아닌 사장과 사원 모두가 동등한 오각의 틀 안에서 개발자 입장으로 최고의 게임을 만들어 내는 곳이죠. 물론 당분간 이곳을 맡아 주실 분은 메인 디렉터인 카와구치씨입니다.”

“쿠도 사장님은 언제 돌아오십니까?”

“그게 좀 길어질 듯하네요.. 한 1년?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걸리려나?”

“저는 단지 밀린 급여가 입금 돼서 회사 사정이 조금 나아졌나 찾아왔을 뿐인데..”

“기존에 있던 악성 재고는 전부 처분했습니다. 이제 펜타곤으로서 새로운 게임을 만들어 낼 여력은 충분히 있다고 하더군요. 어때요? 당신이 마지막으로 만들어 보고 있었던 판타지 게임. 이곳에서 한번 만들어 보시는 건 어때요? 저 역시 있는 힘을 다해 도와 드리겠습니다.”

“파이널.. 프론티어.”

“네?”

“새로운 게임의 제목을 파이널 프론티어라고 정했습니다. 게임 기획자로서 마지막으로 혼신의 힘을 실어 보겠습니다.”

파이널 프론티어.

그렇게 게이머라면 누구나 기억할만한 시대의 명작이 그 탄생을 알렸다.

&

그 후로 나는 카와구치와 함께 파이널 프론티어의 제작을 서둘렀다.

물론 도쿄에 사무실을 두고 있었기에 매일 들를 순 없었지만, 적어도 도쿄에 출장을 올 때면 꼭 한 번은 들렀다.

카와구치씨는 내가 빌려주었던 드래곤 워리어를 플레이 후 나름 돌파구를 찾은 모양이었다. 그 당시 게임 제작사는 BGM에 대해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카와구치씨는 게임의 재미를 배가시키기 위해서 극적인 연출에 어울리는 BGM이 필수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게임 타이틀을 키자마자 웅장한 대서사시 느낌이 나는 드래곤 워리어의 BGM은 마치 유저에게 모험을 떠날 준비가 되었냐고 묻는 것만 같았다. 필드에서 흘러나오는 음악 역시 실제로 동료들과 모험을 떠나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거기에서 영감을 카와구치씨는 아예 게임 음악을 전문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신인 작곡가를 회사에 입사 시켰는데, 황당하게도 그가 뽑은 작곡가는 클래식. 그중에서도 피아노를 전공으로 하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토리야마 아키라라는 일러스트 작가에 맞서 우리에겐 ‘독수리 오형제’로 유명한 타츠노코 프로덕션의 아마노 요시타카의 그림을 기용했다.

“파티 구성을 보니 카와구치가 노리는 연령대가 감이 오네요.”

파이널 프론티어의 기획서를 검토하던 내가 카와구치씨를 바라보며 살짝 웃어보였다.

“드래곤 워리어에 시비 거는 게 너무 티 나나요?”

“뭐 나쁘지 않은 작전입니다. 드래곤 워리어가 아이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단순한 스토리라면, 파이널 프론티어의 연령대는 그보다 조금 더 높은 중고생부터 어른들의 취향이군요.”

“바로 맞았습니다. 전투 씬은 적과 마주해 싸우는 느낌으로 캐릭터와 몬스터를 한 화면에 등장 시켜봤는데 어떤가요? 얼마 전 NFL (미식축구 을 보는데, 쿼터백에게 공을 넘기기 전에 마주보는 선수들의 긴장감이 어마어마하더군요.”

“긴장감이라.. 단순히 마주보기만 해서 전투에 긴장감이 극대화 되진 않을 텐데..”

“그래서 이런 식으로 전투를 꾸며 보았습니다.”

카와구치씨가 나에게 보여준 몬스터와의 전투는 엑티브 배틀 시스템을 차용하고 있었다.

몬스터와 플레이어 캐릭터 간에 행동을 선택할 수 있는 게이지를 두고, 그 게이지가 차오르는 순서에 따라 몬스터와 플레이어가 번갈아 공격하는 전투 방식은 앞으로 파이널 프론티어의 근간을 이룰 획기적인 전투 방식이었다.

“그런데 준혁씨. 전부터 궁금했는데, 게임 기획과 코딩에 대해 엄청 독특한 지식을 가지고 계시더군요. 덕분에 파이널 프론티어의 개발이 굉장히 순조로웠습니다.”

“그래요? 도움이 됐다니 다행이네요.”

“이정도 실력이라면 민텐도의 시게루씨와도 견줄만한 센스인데, 어째서 게임 개발은 하지 않으시나요?”

“음.. 실은 취미 삼아 하나 만들고 있긴 해요.”

“취미삼아 게임을? 대체 어떤 형식의 게임입니까?”

“아직은 비밀이라. 말씀 드리기 곤란하네요. 하하”

나는 카와구치씨를 향해 웃어 보이며 대답을 피했다. 작년 초 미국에서 돌아오고 나서 조금씩 만들어 왔던 게임이 곧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한 건 나는 이 게임을 민텐도 이름으로 낼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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