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2 : 게임 & 워치 (3)
‘이 봐 젊은이. 만약에 말이야. 자네가 과거로 돌아간다면 어느 시대가 좋겠나?’
설마 그 대화의 의미가 이런 것이었나? 나는 잠시 동안 화면에 깜박거리는 연도 표시를 움직여 보았다. 그 시작은 1983년. 미국에서 시작된 아타리 사의 몰락부터 시작 되고 있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한 시대를 이끈 아타리 기종의 몰락과 동시에 일본에서 새로운 희망이 탄생했는데 그것이 바로 민텐도사의 패밀리였다. 재밌는 것은 연도 표시를 움직일 때마다 그 해에 주목을 받은 게임계의 유명 인사들이 하단부 화면에 표시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아직도 현장에서 뛰고 있는 개발자도 있었고, 고인이 된 인물들도 여럿 있었다. 나는 그중에 지금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게임 & 워치의 창시자인 니세코이 군페이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민텐도 3GS의 조작 방식이 떠올라 버릇처럼 하단부 화면을 터치하자 그에 대한 간단한 소개 페이지가 떠올랐다.
“터치인식이라니.. 아예 기기 자체가 최신 트렌드로 바뀌어 버렸네?”
나는 손가락으로 하단부의 소개 페이지를 슥슥 넘기던 중 재밌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1983년 당시 그의 스케쥴 표였다. 각 도시의 이동 경로와 시간까지 자세히 기록 된 터라 만약 그 시대로 가더라도 그 사람을 만나 볼 수 있는 일종의 네비게이터 역할까지 수행하고 있었다.
“이거 잘만 사용하면 우연을 가장해 엄청난 인물들을 만나 볼 수도 있겠는데?
사실 돌아 갈수 있다면 조금 더 게임 산업이 안정화된 슈퍼 패밀리 시대가 좋긴 하겠다만, 진정한 게임 매체의 태동기를 느껴보고 싶었던 나는 노인에게 이야기 했던 대로 1983년의 시대에서 확인 버튼을 눌렀다.
-당신이 가고 싶은 나라는 어디입니까? 기기 하단 부의 마이크에 대고 말씀해 주세요.-
“마이크?”
화면에 표시된 명령에 따라 기기 밑을 유심히 살펴보니 좌측 하단 부에 작은 구멍이 보였다. 하긴 지금 게이머들은 잘 모르겠지만, 한때 패밀리의 컨트롤러에는 마이크가 달려있었던 적이 있었다. 비록 패밀리에서 마이크를 지원 하는 게임은 없었지만, 분명 기능은 달려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잠시 게임 & 워치의 마이크에 대고 후 하고 바람을 불어보았다.
-무슨 말씀을 하신건지 잘 모르겠네요.-
마치 스마트 폰의 음성 인식 시스템을 보는 듯하군.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일본.”
-어느 도시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도시라.. 민텐도 본사는 교토에 있지만, 만약 그 시대로 간다고 해서 당당하게 본사에 쳐들어갈 수는 없겠지? 어떻게든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하는데..
그러려면 방법은 한 가지. 차후 민텐도사의 중역이 될 사람과 우연을 가장해 만나도록 하자.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나는 게임 & 워치의 질문에 홀가분하게 대답했다.
“도쿄”
-1983년 일본 도쿄로 설정하셨습니다. 그곳에서 당신의 나이는 몇 살입니까?-
분명 1980년대는 민텐도의 천하지만 90년대로 넘어가서 센소니의 기어 스테이션에 의해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다. 그 모든 위기를 헤쳐 나가려면 아무래도 젊은 게 좋겠지? 하지만 너무 젊게 설정해 버리면 군대에 발목을 잡힌다.
“군대를 전역한 23살.”
-일본 나이 21세로 맞춰졌습니다. 동의하십니까?-
“그래.”
-그곳에서 당신의 직업은 무엇입니까?-
일단은 혼자 일본에 온 한국인 유학생 정도로 할까?
-습득하고 싶은 외국어를 두 가지 선택해주세요.-
“영어, 일본어.”
이정도만 해도 일본에서 살기에 큰 무리는 없겠지?
-모든 설정을 마쳤습니다. 이제 당신은 현재 가지고 있는 모든 지식과 함께 1983년 도쿄에 거주하는 21세 한국인 유학생의 삶을 살아가게 됩니다. 이에 동의하십니까? 질문 사항이 있으시다면 마이크를 사용해 물어보실수 있습니다.-
어쩌지? 정말 여기서 내가 동의해 버리면 1983년으로 돌아가 버리는 건가? 나는 깜박거리는 YES와 NO의 표시등 사이에서 고민을 하고 있었다. 그나마 미혼이기에 돌봐야할 가족은 없었지만, 그래도 시골에 계시는 부모님을 떠올리니 쉽게 YES 버튼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내 1983년으로 가게 되면 지금의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당신이 과거에서 현재 이 시간으로 돌아올 때까지 당신의 시간은 멈추게 됩니다. 그때 당신은 한 가지 선택을 해야 할 것입니다.-
“선택? 무얼 선택해야한다는 거지?”
“과거로 시간여행을 거쳐 온 당신과 지금의 당신 중 어떠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선택하셔야합니다.”
‘과연.. 1983년에 23살인 채로 2015년에 돌아오면 55세니까. 이런, 완전 늙어 버리잖아!!’
나는 잠시 어지러움 증을 느끼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어쩌지? 잠시 게임 & 워치를 앞에 두고 망설이던 나는 핸드폰을 들어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동안 신호음이 울리고 반가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이니?”
“네, 어머니..”
아무것도 모른 채 반가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시는 어머니의 반응에 괜스레 목이 매어왔다.
“잘 지내시죠?”
“그럼~ 아빠가 술만 안마시면 아주 잘 지낼텐데 말이다.”
“요새도 아버지 약주 많이 드세요?”
“말해 뭐하니. 내 입만 아프지..”
“하하.. 여전하시네요.”
“그런데 갑자기 왠일이니? 우리 아들이 전화를 다하고?”
“저 사실 지난주에 회사 그만 뒀어요.”
“뭐? 왜..? 무슨 일 있었어?”
“음.. 그냥 좀 새로운 일을 해보려구요. 잘 될지 모르지만, 당분간 여행을 좀 다녀올까해요..”
“여행 좋지.. 그래 네 나이도 34살인데, 알아서 잘 결정했을 거라 믿는다.”
“고마워요. 어머니.. 아~ 있다가 통장 확인해보시면 돈이 좀 있을 거예요. 이번에 퇴직금 받은 걸로 좀 많이 넣었어요.”
“그래? 그냥 뒀다가 여행갈 때 쓰지 그러니?”
“아녜요. 15년 동안 다닌 회사라 그런지 퇴직금이 좀 나와서 충분할 거 같아요.”
“그래, 고맙다. 매달 용돈 보내주는 것도 고마운데, 아들~ 여행 조심히 다녀오고 돌아오면 집에 한번 들러~ 맛있는 거 해줄게..”
“네, 어머니..”
“올 때 며느리도 데려오면 더 좋고~”
“하하.. 노력해 볼게요.”
“그래.. 우리 아들 여행 잘 다녀오렴..”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것만 같은 어머니의 따스한 목소리에 눈물이 주륵 흘러내렸다. 더 이상 통화했다간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킬 것 같아, 나는 어머니께 몸 건강하시라는 인사를 마치고 전화를 끊었다.
나는 잠시 마음을 가라앉히고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만약 시간 여행을 하고 돌아온 내게 선택지가 있다면 그때 가서 생각을 해보자. 과연 돌아온 나와 지금의 내가 어떻게 다를지.. 어떤 걸 이루게 되었을지..
나는 모바일 계좌로 어머니께 퇴직금에 해당하는 금액을 송금해드렸다. 너무 많은 돈을 보내면 오히려 출처를 캐물어 보실 테니 적당히 금액을 떼어 보내드린 나는 이윽고 게임 &워치의 확인 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래!! 한 번 가보자. 게임 역사상 가장 뜨거웠던 시대로.. 스마트 폰은 고사하고 핸드폰조차도 없는 시대지만, 가장 빛나던 그 시기로 조금 긴 여행을 다녀오자..’
“부모님.. 제가 돌아올 때까지.. 항상 건강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게임 & 워치의 확인 버튼을 누르자 눈앞에 부옇게 흐려졌다. 그리고 잠시 후 내 방 거실의 모든 사물이 2D 도트로 표시가 되며 마치 레트로 게임 안에 들어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켰다.
“와.. 신기 한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도트 덩어리는 마치 벽돌처럼 나를 향해 쏟아져 날아오기 시작했다. 처음 한 두개야 어떻게든 피할 수 있었지만 점차 그 수가 많아지자 피할만한 공간이 없었다. 어? 어어?
“으아아아!!!”
날아오는 도트 덩어리에 쫄아서 잔뜩 몸을 웅크리고 있는데, 어디선가 익숙한 안내음성이 들려왔다.
삐리리리리~
-잠시 후 우에노. 우에노로 향하는 열차가 들어올 예정입니다.-
“아?”
주변을 둘러보니 나는 한 지하철역에 서있었다. 난데없이 소리를 지른 탓에 주위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 같이 나를 이상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하하.. 이런 나 정말 와버린 거냐? 1983년으로..?”
멀리서 들어오는 전철은 오래된 한국영화에서나 보아왔던 꾀죄죄한 모양의 그것이었다. 아무런 디자인도 없이 오로지 교통수단만을 위해 투박하게 제작된 열차는 잠시 후 내 앞에 멈춰서 더니 문이 열렸다.
잠깐의 헤프닝이 있었지만 내 주변의 일본인들은 이내 나를 무시한 채 전철에 오르기 시작했다. 2015년과는 판이하게 다른 촌티 나는 옷차림과 헤어스타일에 현실 적응이 어려웠지만 나는 그들과 함께 전철에 올랐다.
나리타 국제공항이라.. 1983년에도 나리타공항이 있었구나. 신기한 기분에 주변을 두리번거리자 아까부터 나를 의심스럽게 바라보던 일본인들의 눈빛이 더욱 가느다랗게 떠졌다.
“흠흠..”
너무 튀는 행동은 하지 말자.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비어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러고 보니 가방을 매고 있군. 혹시 필요한 것이 들어 있을까 싶던 나는 의자에 앉아 등에 맨 백팩을 열어보았다.
유학 비자 도장이 찍힌 여권이랑 도쿄JBC은행의 통장 하나. 그렇지 돈이 중요하지.. 나는 내가 가진 재산을 확인하기 위해 통장을 펼쳐 보았다. 그리고 표시 된 금액을 바라보며 빙긋 웃음을 지었다. 2015년에 있었던 200억 가량의 돈은 고스란히 지금 시대로 옮겨져 있었다.
“21억엔이라.. 출발이 빵빵한데? 이정도면 아예 회사를 차릴 수도 있겠다.”
나는 여권과 통장을 다시 가방 안에 넣은 뒤 안쪽을 좀 더 살펴보았다. 그러자 묵직한 느낌의 플라스틱 기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나와 함께 시공을 초월해서 날아온 게임 & 워치였다.
“그래도 너와 함께 오니 든든하구나.”
나는 슬쩍 미소 지으며 가방 안에서 게임 & 워치를 꺼내들었다. 그 순간 전철에서 나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작은 기계로 옮겨졌지만 이내 관심을 돌렸다.
사실 전철 안에는 이미 나와 비슷한 게임기를 들고 있는 사람들이 여럿 있었다.
그들이 플레이 하고 있는 것은 1980년 최초로 출시된 게임 & 워치 BALL이었다. BALL 역시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굉장히 간단한 게임 방식을 차용하고 있었는데 단순히 왼손에서 오른손으로 화면에 표시된 볼을 옮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에겐 그 것 마저도 훌륭한 게임이었다.
물론 내가 가진 회사원 게임이 그것보다 훨씬 진보된 시스템이긴 하지만 겉보기에는 그들이 가진 게임 & 워치와 별반 다를 게 없었기 때문에 금방 관심을 꺼버린 듯했다.
달칵. 일단 자세한 연도를 확인하기 위해 게임 & 워치를 펼쳐 들었다. 기기 이름에서 대변하듯 이 모델은 당연히 시계 기능을 겸하고 있었다.
-1983년 6월 15일.-
일본에서 패밀리가 출시되기 딱 한 달 전이로군.. 딱 좋은 시기다. 덜컹거리던 전철은 이내 어두운 터널을 뚫고 밝은 햇살이 비추는 밖으로 나와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창밖에 스치는 풍경을 바라보니 절로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이런 2015년에 살다보니 이런 클래식한 느낌도 나쁘지가 않구나..
그러고 보니 1983년이면 내가 원래 82년생이니까 태어나고 다음해였어야 했는데, 바로 23살이라니.. 살짝 손해 보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어제 나이보단 11년이 젊어졌기에 퉁치기로 하자~ 일본에서 맞이하는 새로운 삶.. 이번엔 좀 재미있게 살아보자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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