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등짝 등짝을 보자.
거대한 철문이 비명을 지르며 속살을 드러내었다.
내부는 횃불 하나 없는 시커먼 공간이었기에 궁수는 화살에 불꽃을 피워 주변을 비추었다.
“공터…?”
- 그럴 리가, 벽에 뭔가 있을 거다.
언뜻 보기에는 텅 빈 공터나 다름없었다. 궁수는 천궁의 말대로 주변을 둘러보며 무언가 수상한 것은 없나 살펴보았다.
울퉁불퉁한 돌이 궁수의 굳은살에 부딪히며 까칠하게 반응했다.
차차 벽을 짚어가며 가장 깊은곳에 도달했을 때, 그 끝에 무언가 이상한 것이 걸렸다.
“문양…?”
문양이라 하기엔 기호도, 특정하게 반복되는 것도 없었다. 궁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화살을 들어 그곳을 비추었다.
“오오…”
그곳만큼은 울퉁불퉁한 돌이 아닌 매끄럽게 펴진 대리석같은 돌이었다.
“뭐야 이게, 지도?”
- 마계 대지도로군.
“그게 뭔데.”
- 뭐긴, 그냥 지도지.
돌 위로 어지럽게 깎인 조각들에 궁수가 턱을 쓰다듬었다. 마계의 지도는 결코 흔하지 않다.
적에게 자신의 정보가 드러나는 것을 극히 꺼리는 마왕들 때문에라도 지도의 존재는 은닉되었다.
하지만 마계를 망라하는 마제에게 있어 그들은 한낮 관리하기 쉬운 찌끄레기일 뿐이다.
마왕성의 모든 위치는 물론 궁수도 알지 못하는 신전같은 것도 표시가 되어 있었다.
“으음, 근데 뭐 어쩌라는 거지.”
이미 마왕성을 대거 무너트리고 마제의 본진에 도착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마제의 핵이 어디 있냐는 거다.
하지만 눈 씻고 찾아봐도 지도에는 마제의 핵이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하긴, 누가 지 약점을 그렇게 쉽게 드러내겠어.”
- 흐음, 아까 쓰러트린 놈을 데려와봐.
“응? 이미 죽었는데?”
- 잔말 말고.
“아주 상전이야 상전.”
궁수는 투덜거리면서도 쓰러진 놈의 시체를 잡고 질질 끌고 왔다.
놈의 시체는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보는 것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자 이제 뭐 어떻게 할 건데.”
- 놈의 피를 저 지도에 뿌려라.
“뭐? 미쳤어?”
- 닥치고, 시간 없다.
“어으으, 진짜 내가 살다 살다 별일을 다한다.”
궁수는 오만상을 지으며 놈의 피를 쥐어짜 지도에 뿌렸다. 죽은 지 얼마 안되어 피는 흥건하게 지도를 적셨다.
[????????????]
[뭐여 네크로맨서?]
[어후 이건 좀.]
[야 밥 먹는데 진짜.]
ㄴ 이 방송을 보면서 밥을 먹는 놈이 있네 ㅋㅋ
ㄴ 취향 참 ㅋㅋㅋㅋㅋㅋㅋ
ㄴ 군침이 안도누…
시청자들의 만류에도 궁수는 꾸준히 피를 적셨다. 거즘 지도가 완전히 붉게 물들자 서서히 그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범한 돌판이던 지도가 빛이 나며 동서남북 4개의 어둠이 생겨났다.
콩알처럼 자그마한 어둠은 그 자리에서 일렁이며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었다.
“와, 기술력 보소.”
- 역시나, 문지기가 답이었군.
마제를 해치우기 위해서는 어떻게든 문지기를 처치해야 한다는 소리였다.
궁수는 지도를 유심히 바라보며 핵의 위치를 파악했다.
마제의 핵이라 그런지 몰라도 핵은 마계 곳곳에 넓게 분포되어 있었다. 어느 한 곳도 쉬운 곳이 없어 보였다.
궁수는 한숨을 푹 내쉬며 가장 위쪽에 있는 핵을 가리켰다.
“이거부터 칠까?”
- 글쎄다. 나도 처음 보는 거라, 잘은 모르겠군.
“그러면 그냥 저것부터 치자.”
어차피 모든 핵을 쳐야 한다. 사전 정보라도 있다면 모를까 지금의 궁수로서는 딱히 뾰족한 수가 없었다.
맨땅에 헤딩, 늘 해오던 방식 아니던가.
궁수는 지도를 캡쳐하고 스스럼없이 밖으로 나섰다.
지금도 동료들은 적들과 대립하여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한시라도 빨리 적장의 목을 따야만 했다.
궁수는 서둘러 벽을 터트리며 밖으로 나왔다.
쾅! 콰아앙!
밖으로 나서고 가장 먼저 들은 것이 전장의 폭음이다. 제법 화려한 것을 보니 법사의 작품인 듯했다.
궁수는 조용히 기척을 죽이고 사슬을 붙잡고 있는 광팔이에게 다가갔다.
“아빠!”
“쉿.”
쇠사슬의 형태는 금이 가 당장에라도 깨지기 직전이었다.
불안하게 떨리는 사슬을 광팔이는 당장에라도 부술 듯 으르렁거렸으나 그 역시 힘이 별로 남지 않았다.
“수고했다.”
웬만하면 광팔이에게 양보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럴 상황이 아니었다.
궁수의 손에 들린 아스트라가 찬란하게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전장에 나타난 태양은 적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감히 궁수에게 공격을 할 수 있는 적은 없었다.
먼저 끊임없이 몰아치는 헌터들의 공격도 버거운데, 궁수까지 적으로 두게 된다면 그때는 상황이 더욱 심각해진다.
적들은 울며 겨자 먹기 하는 기분으로 궁수를 모르는 척할 수밖에 없었다.
콰아아앙!
강대한 화살이 이리저리 엮인 쇠사슬과 격돌했다.
언뜻 보기에는 비등비등하여 어느 한쪽이 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지만 사슬은 이미 한계에 봉착했다.
진화한 카이저 드래곤과 인간을 뛰어넘은 궁수를 막아내기란 너무나 오만한 발상이었다.
결국에는 사슬은 철이 찢기는 소리와 함께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다.
연결된 모든 사슬에 금이 가며 펑 터져나가고 만 것이다.
그러나 궁수의 화살은 아직도 힘이 죽지 않아 그대로 땅에 처박혀 적들을 휩쓸었다.
“광팔아, 힘들어?”
“아니!”
태연한 대답과는 달리 광팔이의 전신은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마력을 과다하게 사용하여 상당히 지친 모양이다.
궁수도 쉬게 하고 싶었으나 지금은 한계까지 몰아쳐야 할 상황이다.
“날 수 있겠어?”
“나는 것 정도야 할 수 있어!”
“그거면 됐어.”
궁수는 광팔이의 입속에 마력 포션을 쏟아 부으며 등에 타올랐다. 캡처한 지도를 보며 궁수가 소리쳤다.
“이쪽으로!”
광팔이는 마력을 비축하며 부지런히 날개를 흔들었다. 한시라도 빠르게 초각을 다투는 만큼 마음이 더 급해졌다.
그러나 드래곤은 드래곤.
그 속도는 드넓은 마계를 평정할 정도로 살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신전이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이 떠오르는 모습이었으나 그 내부가 온통 새까매 신성한 느낌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썩어 문드러진 듯한 모습에 궁수는 표정을 구기며 착륙했다.
“넌 여기에 있어.”
“응? 나 괜찮은데!”
광팔이는 무리하는 궁수가 안쓰러워 애써 괜찮은 듯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그러나 궁수는 피식 웃으며 광팔이의 이마를 툭 건들었다.
“혹시 모를 때 도망쳐야 하니까, 있으라는 거야.”
“아, 그런 거라면 알겠어!”
“그래, 항상 대기하고 있어.”
순진한 광팔이를 뒤로하고 궁수는 뚜벅뚜벅 신전 내부로 들어갔다. 소름끼치는 바람이 궁수의 뺨을 스쳤다.
어둠이 가지는 고요하면서도 침식되는 듯한 느낌에 궁수가 불꽃을 일으켰다.
끈적하게 달라붙는 어둠에 궁수는 발목을 붙잡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결국에는 화살을 만들어 신성력에 불꽃을 넣어 백염을 뽑아내었다.
“그래, 소독부터 해야지.”
수백의 화살이 일제히 신전에 박혀 타오르기 시작했다.
건물은 조금도 타지 않았으나 신전에 뿌리 깊게 박힌 어둠을 계속해서 갉아먹고 있었다.
타오르는 신전 내부는 평범했다. 가장 앞의 중앙에 박힌 석상과 제단, 그 이외에는 딱히 별다를 것이 없었다.
“딱 봐도 저거네.”
석상은 해골의 얼굴에 낫을 들고 있는 사신의 모습이었다.
다른 점은 등 뒤로 솟아난 여덟 개의 촉수들이 불안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이다.
[존나 누가 봐도 ‘저 움직여요~’하게 생겼네.]
[저거 100% 움직인다.]
[ㄹㅇ 살아있다에 내 왼쪽 건다.]
ㄴ 아무짝에도 쓸모 없죠?
ㄴ 팩트 밴이요.
궁수도 물론 그렇게 생각하여 벌써 시위를 당기고 있었다. 설사, 정말 평범한 석상이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이곳에 올 때부터 건물은 개박살이 날거라 생각했던 참이다.
지구도 아니고 까짓 마계, 박살이 나던 세계가 무너지던 자기 알바 아니다.
“까짓 거 개박살 나면 더 좋고.”
아스트라의 끝이 창백하게 빛나며 어둠을 향해 어금니를 드러내었다. 궁수도 피식 웃으며 살기가 다분한 미소를 지었다.
“안 움직여?”
궁수의 손아귀에서 날아간 화살이 포효하며 석상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럼 뒤져야지.”
콰아아앙!
지진이 일어난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격렬한 진동이 신전을 뒤흔들었다.
궁수는 혹시 모를 상황에 화살을 땅에 처박고 진동이 끝나길 기다렸다.
흑과 백의 강렬한 격돌도 잠시, 서서히 먼지가 걷히며 적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돌로 뒤덮인 석상 전체에 금이 가 파편들이 툭툭 떨어졌다.
&*#▩▧▦-
기괴한 언어를 뱉으며 사신이 강림했다.
“다르다.”
강대함의 기준이 아니다. 이전의 상대했던 녀석들과는 달리 기운 그 자체가 너무나 이질적이다.
“설마 이 미친놈이.”
- 맞군.
궁수는 아니길 빌었으나 천궁은 그 말이 맞다는 듯 쐐기를 박았다.
“자기 핵을 몬스터로 만드는 미친놈이 어디 있어!”
저 사신 그 자체가 핵이었다.
***
“느헿 느헤헿?”
“승기가 보인다! 사슬도 터졌어!”
“닥쳐! 플래그 세우지 마!”
헌터와 마족의 전투에서 이제는 조금씩 적들이 밀리고 있었다. 마계의 어둠가 짙은 마력에 헌터들이 적응했기 때문이다.
법사는 가슴 깊게 마력을 빨아들이며 끊임없이 영창을 이어나갔다.
어중간한 마법은 무영창으로 끊어버리는 법사에게 영창까지 필요한 대마법이다.
그 위력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수많은 속성들이 적들 위에 군림하며 압도적인 힘으로 찍어 누르고 있었다.
오죽하면 콧대 높은 마탑의 인원들이 법사의 강력함에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고삐가 풀린 망아지도 아닌 고삐 풀린 백두산 호랑이가 날뛰고 있었다.
게다가 주변에 쌓인 마력 포션은 법사의 등에 날개가 아닌 제트팩을 달아주었다.
“느헤헤헤헿! 행복! 행복!”
전장 한 가운데에서 행복을 부르짖는 법사, 그에 반해 적의 마신관들은 죽을 노릇이었다.
틈만 나면 쏟아지는 초광역 마법은 물론이요, 암살 시도만 수백 번씩 당했다.
지금이야 어떻게든 적들의 마법을 견뎌내며 아군을 치유하고 있지만 이것도 시간문제다.
하루 빨리 그분이 강림하지 않는다면 곧 모두 쓰러질 것이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돼!”
“곧 ‘그’께서 우리를 인도하실 거다!”
“느헿?”
무한 행복회로 가동을 돌리던 적들이 적의 웃음 한마디에 입을 악물었다.
방금 전까지 헌터들이 만든 벽 위에서 마법을 난사하던 법사가 직접 내려온 것이다.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다른 한 손에는 마력 포션을 들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면 진작에 마력이 역류하여 죽을 정도로 농축된 포션을 법사는 아무렇지 않게 한 통을 비웠다.
“치워! 치워!”
법사는 지팡이를 치켜들고 자신의 앞을 막는 근접 딜러들에게 고개를 흔들었다.
갑작스럽게 적에게 앞을 터주라니, 갑작스러운 법사의 자살행위에 근거리 딜러들이 펄쩍 뛰었다.
그러나 오직 셈만이 안색이 보랗게 떠 소리 질렀다.
“피해! 피하라고 병신들아!”
안쓰던 쌍욕까지 내뱉어서 그런지 헌터들은 일단 법사의 앞에서 서둘러 사라졌다.
법사는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듯 셈에게 엄지를 척 들었다.
법사의 앞에 새하얀 마법진이 생겨났다. 육망성과 복잡한 기호들이 잔뜩 새겨진 마법진이었다.
그리고 그런 마법진이 한 개, 두 개, 세 개, 이윽고 열 개.
도합 10개의 최고술식 마법진이 법사의 앞에 등장했다. 보는 것만으로 알 수 있었다.
“뭐, 끝났네….”
“느헤헿!”
법사의 지팡이 끝에서 피어난 순백 광선이 마법진을 타고 더욱 위력을 키웠다.
그 높이만 수십 미터에 달하는 엄청난 크기의 빔이 적들을 향해 날아갔다.
허나.
“이건, 조금 위험하군.”
짙은 목소리와 함께 법사의 공격이 어둠 장막에 막혔다. 반격은 생각조차 못 할 완벽한 방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