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본캐 가져와.
다른 녀석도 아니고 첫 가시와 대장전이라니, 자신이 정신 나간 것도 아닌 이상 그럴 일은 조금도 없었다.
“도망치는 거냐! 수호자인 척은 다 하더니 우습구나!”
가볍게 말을 씹은 궁수는 상공에서 적들을 내려다보며 곧바로 실력 행사에 들어갔다.
적들의 머리 위로 거대한 화살 여섯 발이 등장했다.
그러나 화살은 당장 떨어지지 않고 잠시 멈춰서 찬란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었다.
“뭐지?”
당황한 가시가 눈꼬리를 치켜들고 화살을 노려보았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피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렇기에 그는 일제히 부하들에게 어둠을 두를 것을 명령했다.
곧바로 그들의 위로 검은 장막이 생겨났다. 그것은 조금의 빛도 허용치 않겠다는 듯 굳건하게 자신을 방어하고 있었다.
“쯧, 조금 더 빨리 쏠걸.”
- 별 수 없지, 그래도 저 정도는 뚫을 수 있을 거다.
괜히 궁수가 어물쩍어물쩍 천천히 마법을 준비한 것이 아니다. 힘껏 신성력을 모은 궁수는 그 위로 바람을 더했다.
휘이이잉!
관통하고 꿰뚫는 힘이 화살에 깃들었다.
소용돌이를 일으키며 회전하는 바람은 제법 섬뜩하여 가시조차도 꿀꺽 침을 삼켰다.
적들이 어둠에서 빠져나올 생각이 없자 궁수가 먼저 전투의 서막을 열었다.
어둠 위에 아른거리던 빛이 적에게 작렬했다.
쿠콰콰콰!
드릴로 벽을 뚫는 듯한 굉음이 전장을 울렸다. 이를 악문 가시와 궁수가 부딪혔다.
궁수는 오히려 더욱 마력을 일으켜 강하게 어둠을 짓눌렀다.
“아빠 도와줄까?”
“아니.”
그럴 필요 없다. 어둠에 그어진 금은 적들은 위태롭게 궁수의 공격을 버티고 있었다.
한 손으로는 화살을 조종하며 다른 한 손으로는 또 다른 거대한 화살을 만들었다.
“아빠 뭐해?”
길이만 몇 십미터는 될법한 거대한 화살을 마치 몽둥이처럼 손에 쥐었다. 궁수는 들어 올린 몽둥이… 가 아니라 화살을.
콰아아앙!
마치 대못이라도 박듯 그대로 격돌중인 화살을 후려쳤다.
쾅!쾅!콰앙!
“이런…!”
완전한 상태도 아닌 금이 간 어둠이 이 공격을 막기란.
콰드드드득!
묘연한 일이었다.
어둠을 관통하여 박힌 궁수의 화살이 눈부신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어둠을 과신하여 자신까지 갇혀버린 놈들은 피하지도 못하고 그 안에서 궁수의 빛을 완전히 맛봐야만 했다.
마왕들도 견뎌내기 버거운 궁수의 빛을 아무리 강력하다고 한들 고작 기사들이 받아낼 수 있을 리 없었다.
궁수의 공격에 깔끔하게 쓸려나간 기사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어둠을 원동력 삼아 살아가는 그들에게 신성력이란 극독이나 마찬가지였다.
순백색의 극독에 중독되어 쓰러진 그들을 뒤로하며 성큼 가시가 걸어 나왔다.
과연 놈은 갑주에 금이 좀 갔을 뿐 별다른 상처는 입지 않았다.
“흐음, 아쉽네.”
90프로에 가까운 수의 적들을 쓸어버렸음에도 아직 놈들의 사기는 꺾이지 않았다.
오히려 아군이 죽어 나간 것에 분노하며 더욱 진군 속도를 높였다.
“아빠….”
“그래.”
이번에는 광팔이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혀를 날름거렸다.
시야에 담긴 먹음직스러운 경험치들은 광팔이의 눈에 너무나도 탐스러워 보였다.
속성은 당연히 신성, 그러나 그 힘은 궁수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법을 지배하며 속성을 망라하는 드래곤, 모든 속성에서 압도적이지만 그들은 특히나 자신의 메인 속성 하나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광팔이의 메인 속성은 빛과 신성력. 그리고 눈앞의 적들은 신성력이 쥐약인 어둠속성 몬스터.
그 말은 곧 일반적인 유린을 의미했다.
“죽어!”
광팔이가 쏘아낸 얇디얇은 브레스가 지면을 갈랐다.
신성력임에도 엄청난 물리력을 자랑했다. 브레스는 단순히 지면을 가르는 것이 끝이 아니었다.
마력을 일으킨 광팔이는 자신이 발사한 브레스를 직접 간섭하여 거대한 신성 폭풍을 만들었다.
살이 찢길 정도의 강렬한 물리력에 신성이 더해지니 적들은 추풍낙엽처럼 산산이 찢겨나갔다.
거대한 마기사단을 통째로 찢어버린 궁수와 광팔이는 천천히 내려와 땅을 밟았다.
명백하게 당황한 표정에 궁수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왜, 그간 아무것도 안하고 놀았을까봐?”
이전, 궁수가 놈에게 나가떨어졌을 때 그것은 패배를 모르고 살아온 자신에게 있어 상당한 스트레스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노력한 것이다.
절대 패배하지 않는 지구의 굳건한 방패가 되기 위해서 마족 수심만 마리를 학살했다.
깨지지 않고 굳건하게 버티는 방패가 되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게 만들어 진 것이 지금의 나궁수였다.
완성이 기대되는 성벽같은 방패, 나궁수가 드래곤에서 내려 가시에게 향했다.
오만한, 그렇지만 빈틈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 앞에 섰다.
“여전하네.”
마왕을 압도할 정도의 어둠이 스산하게 뿜어져 나왔다.
자신의 동료들이 학살당했다는 것에 분노한 걸까, 얼마 전까지 하더라도 상대가 안되던 놈이 괴물이 된 것이 짜증이 난 걸까.
“상관없나.”
카앙!
궁수의 주먹이 첫 가시의 검에 부딪혔다. 가시의 검은 베이지는커녕 조금의 생채기조차 내지 못했다.
심각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가시가 이를 악물었다.
이를 바라본 궁수는 또 다시 싱긋 웃었다.
“사태 파악이 되나?”
“쯧.”
카앙!
혀를 찬 가시가 검을 휘둘러 궁수로부터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오히려 궁수가 화살을 날려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텔레포트 애로우, 고속 이동이 아닌 순간이동이기에 가시조차도 반응이 느렸다.
“그럼 이제 존나 맞자.”
궁수의 무릎이 놈의 뒤통수에 처박혔다. 과연 궁수의 신성력조차 견뎌낸 갑주, 무릎만 아플 뿐 뒤통수는 멀쩡했다.
‘그게 뭐?’
곧바로 이를 악문 가시의 검이 날아왔으나 이미 궁수는 놈의 아래로 이동하였다.
허공을 가르는 검, 그에 반에 궁수의 무릎은 정확히 놈의 허리에 박혔다.
무거운 갑주를 입은 그가 하늘 위로 떠올랐다. 화살 한 발을 날려 보낸 궁수가 가시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메마른 궁수의 얼굴에는 희미한 분노가 서려있었다.
가시를 이끄는 대장이었으나 지금은 궁수의 사냥감일 뿐.
헌터는 사냥꾼, 가시는 사냥감.
그리고 숙련된 사냥꾼은 약한 사냥감을 잡을 때에도 최선을 다한다.
과연 가시의 대장답게 놈 또한 순순히 맞아주지 않았다.
곧바로 궁수를 향해 마검을 휘둘러 시커먼 검기를 쏘아내었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될 검격이었으나 애석하게도 상대는 궁수였다.
놈 주변에는 궁수가 깔아둔 텔레포트 애로우가 공중을 체공하고 있었다.
궁수의 인영이 흐려지며 놈 뒤에서 모습을 드러내었다.
가시는 궁수의 마력을 느끼며 마치 뒤통수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호오!”
계속해서 공중전이 이어졌다. 가시의 주변에는 궁수가 수십 번 텔레포트 하며 집요하게 괴롭혔다.
단 한 번의 검도 허락하지 않고 자신의 주먹만을 꽂아 넣으며 말이다.
워낙에 갑주가 단단한 탓에 큰 대미지는 없었지만 궁수는 멈추지 않았다.
검이 궁수의 머리 위를 지나갔다.
놈이 팔을 뻗었을 때 궁수는 팔째로 부숴버리기 위해 팔을 잡고 팔꿈치를 찍어눌렀다.
우드득!
비교적 방어력이 취약한 갑옷의 연결부이기 때문에 관절이 썩 좋지 않은 방향으로 꺾였다.
아니, 궁수에게는 좋은 방향일지도 모른다.
“끄흐으으윽!”
우드득!
꺾인 팔이 다시 꺾이며 원모습으로 돌아왔다. 고통스러워하는 가시의 모습에 궁수는 싸이코같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와 그걸 꺾네?”
아쉬움이 가득한 궁수는 이번에는 확실히 목숨을 끊어버리겠다는 듯 더욱 속도를 높였다.
이번에도 가시의 검이 궁수를 놓쳤다. 하지만 가시는 웃고 있었다.
그는 궁수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마계화!”
마왕성의 권능이 개인의 손에서 피어나기 시작했다. 칠흑의 구는 궁수를 간단히 집어삼켰다.
상황이 역전됐다고 생각했는지 가시는 자신만만한 표정이었다.
‘꼴에 검사라고 거리를 잡겠다는 건가.’
퍽 나쁘지 않은 발상이었다. 다만 그 대상이 잘못됐을 뿐이다.
궁수는 오히려 잘 됐다는 듯 구 안 가득히 화살을 뿌렸다.
“어?”
뿌리려고 했다. 그러나 화살은 조금도 생성되지 않았다. 천궁도 기본 리커브 보우의 형태가 되어 모습이 바뀌지 않았다.
“크흐흐흐…. 이제 깨달았나?”
이 안에서는 단 한발의 화살조차 만들어낼 수 없다. 궁수에게 화살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작지 않다.
거의 모든 스킬의 시발점이자 자신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기 때문이다.
궁수의 화살 생성을 막아버린 상황, 다시 말해서 포수에게 총알을 주지 않은 것과 똑같았다.
활로는 총검술도 하지 못하기에 큰 문제였다.
“이러면 이길 것 같냐?”
궁수의 손에는 가장 흔한 활인 리커브 보우가 들려 있었다. 다만 활 손잡이가 아닌 활 대 끝을 잡고 있었다.
- 잠깐.
“미안.”
- 씨발….
쾅!
가시의 마검과 궁수의 천궁이 격돌했다. 정산적인 상황이라면 단 한 합에 궁수의 활이 산산조각 나야 정상이다.
그러나 천궁은 어지간한 마검조차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엄청난 강도를 자랑했다.
- 나를 부러트리려면 신검 정도는 가져와야지!
격돌하면서도 천궁은 으름장을 놓으며 가볍게 검을 받아내었다.
마검 특유의 마기가 사납게 궁수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작렬했으나 그 마기가 궁수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뭐 이런 정신나간 인간이 다 있어?’
분명 자신은 검사다. 그것도 마계에서 힘깨나 쓰던 수준 있는 검사.
그런 자신이 궁수 하나를 근거리에서 꺾지 못하고 있다니, 말이 안되는 일이다.
‘저 활은 도대체 뭐란 말인가!’
얇고 가벼움에도 강도 자체는 자신의 검에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떨려오는 느낌이 자신의 검보다도 단단했다.
활을 저렇게 잡고 싸우는 것부터가 어이가 없었다. 세상 어떤 미친 궁수가 저런 전투방식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다만 세계 최고의 미치광이 궁수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뭐 그렇게 잡생각이 많아?”
놈이 정신이 팔린 사이 왼발을 거세게 밟은 궁수가 적의 검 안으로 파고들었다.
한 손으로는 있는 힘껏 천궁을 휘두…르지 않았다.
“뭣?!”
궁수가 천궁을 놔버리자 당황한 가시가 거리를 벌리려 했으나 이미 궁수와 거리가 너무 가까웠다.
“활 버리는 궁수 처음 봐?”
처음 보겠지.
자신도 처음 해보니까.
기회는 단 한번 뿐, 이런 얕은 수에 또 다시 당해줄 놈이 아니었다.
궁수는 놈의 자세가 무너진 틈에 각반의 틈에 손가락을 넣어 멱살을 쥐듯 놈을 들어올렸다.
“흐으으으읍!”
콰아앙!
그리고는 이를 악물고 놈을 머리부터 땅바닥에 처박았다.
목이 부러지거나 머리통이 터져나가는 것이 정상이지만 갑주의 능력이 생각보다 더 좋은 듯 놈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순식간에 자세를 회복했다.
“이런 비겁한 수를 쓰다니.”
“꼬우면 쳐들어오질 말던가.”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다시 궁수가 땅을 박차고 놈에게 덤벼들었다.
그러나 그때.
“어?”
마계화된 가시의 검은 공간 안에서 게이트가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