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0화. 마! 왕성이가!
대 사원은 아니지만 그 나름대로 유구한 역사를 자랑했던 불용사가 멸문당했다.
불용사의 문하생들은 하룻밤 사이 일어난 사건에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렇게 큰 소란에도 문하생들이 눈치채지 못한 이유는 머리빔의 진법 때문이었다.
소리를 차단하고 일을 저지르려 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대사부가 그럴 리 없다며 고개를 저었으나, 간밤에 녹화된 궁수의 방송을 보고는 모두 할 말을 잃었다.
그러기에 지금 사원의 분위기는 장례식이나 다름없었다.
딱하긴 하지만 뭐 어찌하랴, 궁수는 건틀릿을 챙겨 티아라를 바라보았다.
“그러면 이제 가시 하나 남았네.”
“글쎄, 이제 시작일 것 같은데.”
“시작이라니?”
표정을 구긴 그녀는 폐허가 된 사원을 보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신의 고향이 이렇게 될 수 도 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치 않았다.
괜스레 주먹을 꽈악 쥔 그녀는 피식 웃으며 작게 속삭였다.
“뭐, 그걸 막는 게 일이니까.”
“응? 뭐가?”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해, 지금은 정리할게 많으니까.”
“흐음, 뭐 그래.”
***
콰앙!
무능한 가시는 치밀어 오르는 짜증에 책상을 부숴버렸다.
단단한 철나무 책상은 마치 나무젓가락 같았다.
“빌어먹을…”
그에게 뿜어져 나오는 살기와 마기가 오죽했으면 그를 보좌하는 사용인조차도 안색이 하얗게 질릴 정도였다.
“쓸모없는 녀석들 같으니, 이럴 줄 알았으면 거두는 것이 아니었어.”
첫 가시라 하더라도 궁수를 비롯한 전 세계의 헌터들을 홀로 상대하기에는 무리였다.
그런 것이 가능했다면 지구는 진즉에 멸망했을 것이다.
한참을 고민하던 그는 내키지 않는 듯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손에는 차원 주머니에서 가져온 나무 상자가 들려있었다.
몹시 위험한 물건인 듯 자물쇠만 4면이 모두 잠겨있었다.
그것을 잠가둔 이는 당연히 첫 가시였기에 푸는 것 또한 어렵지 않았다.
상자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새까만 수정구는 조심스럽게 책상 위에 얹어졌다.
가시는 마지막까지도 이걸 사용하는 게 맞는지 고민했다.
고민은 결정을 늦출 뿐.
결국, 그는 수정구에 마력을 흘려 넣고 있었다.
“후우….”
긴장이 되는지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먹구름이 걷히듯 수정구 내부의 모습이 서서히 비춰지기 시작했다.
처음 눈에 들어온 것은 왕좌였다. 왕보다는 황제나 사용할 법한 거대한 왕좌, 그 위에 앉아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사람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하고 괴물이라 하기에는 팔다리가 달린 것이 인간과 비슷했다.
가시는 고개를 푹 숙이고 그가 먼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내게 연락했다는 것은 실패했다는 걸로 간주해도 되겠지?”
“…면목 없습니다.”
“뭐, 괜찮다. 처음부터 네놈에게 기대한 적 없으니.”
신랄한 비난에 가시는 어금니가 부서지는 게 아닐까 할 정도로 이를 악물었다. 그 나름대로 작은 반항이었다.
“실패했으니 그곳도 마계화 시키겠다. 이견은 없다.”
“하, 하오나 이곳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은….”
“흠.”
“실언이었습니다.”
불편한 기색에 가시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수정구 속의 그는 ‘네가 그러면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비웃었다.
“마계화는 내일부터 시작한다, 지원을 보낼 테니 따르도록.”
명령이 아닌 협박에 가까운 어조였으나, 가시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대답은?”
“…예 아버지.”
“쯧, 저런 것도 아들이라고.”
***
침공은 곧바로 다음날부터 이어졌다. 먼저 지구 곳곳에 거대한 ‘성’이 한 채씩 나타났다.
말 그대로 거대한 게이트에서 성이 뚝 떨어진 것이다.
파도와 비견될 정도로 엄청난 파급력에 각 국은 난리가 났다.
나타난 국가도, 그렇지 않은 국가도 있었으나 국경을 맞대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 세계적인 위기였다.
그것은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필 한국이냐.”
이 좁은 땅덩이에 가져갈 것이 뭐가 있다고 저런다는 말인가.
심지어 지방도 아닌 서울 한복판에 저런 게 생겼으니 말이다.
기존의 건물들은 압도적인 크기의 성에 모두 뭉개져 버렸다. 출몰 시간이 새벽이었음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성에서 괴물이 나온 것도 아니고 고작 등장한 것에 불과한데 말이다.
전 세계가 난리가 난 통에 지원은 더더욱 받기 힘들었다.
- 마왕성이 벌써 등장할 시기인가….
“마왕성?”
- 그래, 말 그대로 마왕들이 거주하는 성이다.
“뭐야? 그럼 보스가 온 거야?”
- 그건 아니다만…. 상태를 보아하니 최대한 빨리 처리해야겠군.
“왜?”
- 벌써 주변이 침식당했다. 저 주변 땅이 보이느냐?
실제로 마왕성 주변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었다. 아스팔트가 아닌 땅이 썩어 들어가는 모습이었다.
“확실히, 빨리 처리해야겠네.”
- 그래, 한국은 그나마 지원이라도 받아서 다행이지.
“그건 그렇다만.”
각 국가들은 자신의 힘으로 이를 막아내야만 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중국은 워낙에 땅덩이가 거대한 탓에 그 피해를 돌려막을 수 있었다.
중국은 국경이 인접해있는 만큼 나름대로 A~B급 헌터들을 차출해 주었다.
이전 철갑산 파도에서 활약한 궁수에 대한 감사이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일본이었다. 하늘이 도왔는지 일본은 성이 나타나지 않았다.
한국에선 일본이 자국의 방어에 힘 쓸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일본에서는 이전 궁수의 마검 제압 사건을 언급하며 무려 S급 헌터들을 지원해주었다.
평소에는 아웅다웅하는 삼국이었지만 지금은 궁수라는 윤활제를 이용하여 굴러가게 하고 있었다.
티아라는 언제 도착했는지 슬그머니 궁수 옆을 지키고 있었다.
얼떨결에 원정대 대장이 된 궁수는 천궁을 어루만지며 은우에게 말했다.
“그래서 정해진 게 잠입이라고?”
“예, 국민들이 불안에 떨고 있습니다.”
처음 성이 등장했을 때 한국은 두 가지 의견이 갈렸다.
먼저 성에서 누군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자는 사람과 먼저 선수를 쳐야 한다는 의견이었다.
궁수는 당연히 후자였다. 이전 호주에서 등장한 성을 생각하면 절대로 선수를 내어주어선 안된다.
차출한 인원은 도합 200명, 개중에서도 궁수를 포함한 50명의 인원이 S급 헌터였다.
궁수와 법사, 그리고 광팔이는 특공대로 다른 헌터들은 각자 자신의 분대들을 지휘하는 것으로 이야기되었다.
혹시 모를 일은 총대장인 궁수에게 자문을 구하자는 것이었다.
“저거 문은 어딘지 알아요?”
“정문이 있긴 합니다만….”
이은우는 저 멀리 뚫린 정문을 바라보며 말끝을 흐렸다. 정문에 달린 다리는 당장에라도 무너질 듯 휘청거렸다.
한국에 나타난 칠흑의 거성은 주변에 깊은 호수를 만들어 그 안에 마수들을 풀어놓았다.
올 테면 와보라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마물들이 쩌억 입을 벌리고 있었다.
“흐음, 만들어서 들어가죠.”
“부술 수 있겠어요?”
“왜요? 단단해요?”
“예, C4로는 어림도 없던데요.”
실제로 벽 한편에는 폭발에 그을려 있었다. 이를 바라본 궁수는 고개를 절레절레 돌리며 은우에게 말했다.
“저건 A급 마물한테도 안 먹혀요.”
“그건 알고 있습니다만, 서울 한복판에 미사일을 떨어트릴 수는 없지 않습니까.”
“괜찮아요.”
궁수의 옆에는 어느새 본체의 모습을 되찾은 조광팔이 서 있었다.
“아들? 뚫어.”
“응!”
광팔이의 입에 순백의 마법진이 나타났다.
광팔이는 만족하지 않은 듯 그 위로 세 겹, 네 겹 더 마법진을 겹쳤다.
여섯 개의 마법진을 그리고 나서야 광팔이는 쩌억 입을 벌렸다. 그 안에서는 새하얀 광원이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다.
소리는 없었다. 아니면 엄청난 굉음에 귀를 먹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브레스라고 하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나도 거대했다.
성문은커녕 성을 날려버리는 것이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압도적인 파워에 헌터들은 다시 한번 궁수가 아군이라는 것에 감사했다.
콰콰콰콰콰!
성 위로 모습을 드러낸 검은 보호막이 광팔이의 브레스를 막으려 했으나 드래곤의 공격은 그 격이 달랐다.
유리처럼 깨진 보호막을 뚫고 광팔이의 브레스가 작렬했다.
마왕성이고 뭐고 가루가 되지 않는 것이 용할 뿐이었다.
“아빠! 뚫었어!”
“잘했어, 이제 눈 좀 낮춰.”
“응!”
맡은바 임무를 완수한 광팔이는 다시 인간으로 변했다.
그와 동시에 헌터들은 무기를 꼬나 쥐고 서서히 마왕성 안으로 돌입했다.
“고요하군요.”
“쉿, 방심하지 마.”
“당연하죠. 이 짓도 원 투데이 해봅니까.”
대방패를 든 셈을 대장으로 하여 탱커들이 성 안으로 들어갔다.
혹시 모를 상황에 도적 클래스 헌터들이 함정을 확인했다.
애초에 정문도 아닐뿐더러 만약 있었다고 하더라도 방금 전 광팔이의 브레스에 모두 쓸려나가고 말았다.
성 내부는 마치 다른 세상인 것 마냥 공기부터가 달랐다.
땅은 까맣게 썩어 문드러졌으며 붉은 까마귀들이 섬뜩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언제든 마물이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을 분위기와 걸맞게 코너를 돌자 수많은 마물들과 맞닥뜨렸다.
“스켈레톤…?”
“신성 마법 준비해! 바로 전투 들어간다!”
“평범한 놈들이 아니야! 방심하지 마!”
평범한 백골의 스켈레톤과는 달리 놈들은 온몸이 새까만 칠요석 스켈레톤 이었다.
이마저도 그 위의 클래스인 스켈레톤 병사, 아처 들이었다.
그나마 데스나이트나 리치 같은 마물이 없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사실 조금만 들어가더라도 더한 놈들이 도사리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빠 나는?”
“갑자기 커지지 말고 인간형으로 활동해.”
“알겠어!”
인간형만 해도 압도적인 출력을 자랑하기에 큰 상관은 없었다.
순식간에 열 개가 넘는 신성 마법진을 구사해 공격을 난사하고 있었다.
‘쟤도 곧 진화할 때가 됐는데.’
드래곤이라 느린 건가?
속으로 의문을 삼키며 궁수는 천궁에 화살을 걸었다.
본디 뒤에서 화살만 날리는 것은 궁수의 취향이 아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지금은 맡은바 임무를 다해야 했다.
사실은 헌터들도 궁수가 날뛰어주길 바라고 있었다.
광팔이 옆에서는 법사도 승부욕이 붙었는지 라이트닝 스피어를 난사하며 적들을 압도적으로 짓눌러버렸다.
‘이거 내가 손 쓸 필요 있나?’
궁수는 동료들이 날뛰는 것을 보고는 시위를 풀었다.
지금 상황만 보더라도 명백한 오버킬이기에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서라도 힘을 아끼는 것을 택했다.
길을 가득 채운 검은 스켈레톤들은 두 미치광이의 활약에 깔끔하게 씻겨 나갔다.
궁수의 방송에서도 헌터들의 무사 귀환을 빌고 있었다.
[이사 왔더니 이웃들이 가족을 학살함.]
ㄴ 불법 거주자가 왜 이사냐?
ㄴ 밀입국에 불법 거주에 사유지 침범에 불법 건축물에 살인에 어후.
ㄴ 저거 때문에 사람 존나 죽어나간거는 알고 하는 소리냐?
채팅창은 궁수를 응원하면서도 동시에 다른 국가들의 정보를 가져와주었다.
다른 나라도 아직까지는 별 다른 일 없는 듯 큰 사건은 없었다.
“지금부터 본 성으로 들어갑니다.”
방금 전까지는 성벽 주변을 돌며 적들을 정리했다면 이제는 성 내부로 들어가야 할 때다.
콰앙!
보호막이 깨진 성은 생각보다 쉽게 부술 수 있었다. 거대한 입구를 만들고 헌터들은 대열을 갖춰 침입했다.
달그락.
“제길.”
“탱커들 방패 들어!”
“선제 타격 들어간다!”
그들이 성으로 들어오고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이백이 넘는 수의 데스나이트 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