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그런 짓은 하지 말아야 했는데.
불용사에서의 합숙은 생각보다 더 편안했다. 궁수야 그렇다 하더라도 다른 멤버들은 마음 놓고 수련할 수 있는 곳이니 말이다.
실제로 허가연은 신나서 열심히 수련에 임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견습 수련생들과 대련을 했으나 당연히 허가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오히려 압도적인 신체 능력으로 찍어 눌러버리는 모습까지 보였다.
허가연은 최소 대사형 급의 수련생들과 자웅을 다투고 있었다.
기술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었지만 인간을 벗어난 신체 능력은 이를 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럼 그간 궁수는 뭘 했느냐, 수준은 맞지 않고 그렇다고 주인인 나진과 대련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기에 궁수는 오직 머리빔의 감시에만 힘을 쏟고 있었다.
오죽하면 화장실 가는 것까지 감시를 하니 말이다. 그것도 은밀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대놓고 말이다.
‘허튼 짓 하기만 해봐’라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하루, 이틀 6일이 지나도록 놈은 별다른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새끼 참을성 죽이네.”
“애초에 제대로 본거 맞아?”
“당연하지, 나 의심해?”
“흐음, 그건 아니지만….”
만약 아니라면 궁수는 갑자기 찾아와 남의 집 후계자를 두드려 패고 진상까지 부리는 꼴이다.
어떻게든 놈이 가시가 맞아야만 했다.
다시 날은 저물고 일주일이 다 돼가던 새벽, 이번에는 놈은 아무런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수련을 하고 밥을 먹고 수련을 하고 잔다.
“일반인 코스프레 너무 역겨운데.”
- 문 너머에 결계가 쳐져있다. 놈이 맞아.
“흐음, 죽일까?”
- 글쎄다. 결정적인 증거가 없으니 살인범으로 몰리기에는 딱 좋겠군.
“쩝…. 아쉽네.”
놈이 방에 들어간 것까지 확인한 궁수는 문 앞에 아주 자그마한 화살이라기보다는 바늘에 가까운 수준의 화살을 꽂아놓고 방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 밤 사건이 터졌다.
머리빔은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부르며 수련에 임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평소와 똑같은 시간에 방에 들어가 결계를 펼쳤다.
“후, 이제 좀 낫소.”
말은 안했지만 그도 궁수의 압박이 큰 스트레스였다. 식사부터 심지어는 화장실까지 사사건건 감시를 하니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랭킹 1위가 그러니 정말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 끝이다.
오늘은 드디어 ‘그것’을 사용할 날이다.
그는 꽁꽁 숨겨둔 상자를 꺼냈다. 황금빛 상자에 2중, 3중으로 봉인을 걸어두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이로 풍겨져 나오는 마기는 너무나도 독했다.
“크흐흐흐흐!”
화악!
봉인을 풀고 상자를 여니 그 안에서는 새까만 건틀릿 한짝이 잠들어있었다.
당장에라도 자신을 사용하라는 듯 섬뜩한 빛을 내비추고 있었다.
“흐흐흐흐! 이제 네 주인은 나다!”
철컥!
[호오, 인간도 아니고 마족이라니, 놀랄 일이군.]
파지지지직!
“크흐으으윽! 새로운 경지를 이룬 내게, 불가능이란 없다!”
[흐으음.]
그러나 건틀릿은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불만족스러운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는 이내 숨겨둔 어둠을 터트리며 말했다.
[날 사용하던 놈들 중 너보다 격이 낮은 자는 아무도 없었다.]
“흐그윽!? 무슨!?”
[뭐, 잠깐 사용하기에는 나쁘지 않군, 잘 쓰겠다.]
“안돼! 안돼애애애애애!”
비참한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결계 안쪽인 탓에 바깥에는 개미 한 마리 기어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
“아빠~ 헤헤헤 아빠 아빠…!”
“느헤헤헿…. 궁수…. 대가리 펑….”
“이 새끼는 무슨 잠꼬대까지 섬뜩하냐.”
방광이 저려왔기에 궁수는 자다 말고 일어났다. 건물이 낙후되어 화장실이란 바깥에 있는 공중변소가 전부였다.
- 계약자여, 나를 데리고 가라.
배를 벅벅 긁으며 나가려던 궁수는 천궁에 의해 저지되었다.
“응? 왜? 너도 화장실 가고 싶어?”
- 바깥에 기운이 느껴지지 않느냐?
“응? 기운이라니 무슨…. 어?”
문 밖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기운과 스멀스멀 들어오는 비릿한 피 냄새에 궁수는 있던 잠기운도 다 날아가 버렸다.
“차라리 잘됐어, 죽이기 좋게 먼저 날뛰어주네.”
분쇄자를 손에 든 궁수는 신발을 우겨넣고 바깥으로 나갔다.
“허?”
주변은 온통 피바다였다. 수없이 쌓인 불용사 수련생들의 시체가 산을 이룰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주변이 온통 새빨갛게 물들었다.
“단풍이 벌써 폈나.”
[생] - [불용사 산책.]
산책이라 하고 사냥이라 읽는다.
“야 나궁수!”
“뭐야, 일어났어?”
“밖에서 저런 기운이 날뛰는데 어떻게 자고 있겠어.”
발 빠르게 튀어나온 티아라가 대검을 어깨에 지고 궁수 옆으로 다가왔다.
‘잠옷 차림의 티아라라, 이건 귀하군요.’
그래봐야 트레이닝복이 전부였지만 말이다.
“뭘 봐?”
“옷.”
“뭐?”
“빨리 가기나 하자.”
“뭐? 야!”
***
“학살을 즐기는 편은 아니다만, 이건 이것대로 즐겁군.”
수많은 수련생들을 죽이고도 머리빔의 숨은 조금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머 머리빔 대사부! 어째서 이런!”
콰직!
심지어는 다른 대사형들을 모두 죽일 때까지도 그의 몸은 한없이 차분했다.
“흐으음, 남은 건 이곳의 보스인가.”
불용사 최심부에 있는 사당, 성큼성큼 걸어간 그는 문을 열어젖히며 안으로 들어갔다.
“왔느냐.”
“호오? 네 놈, 제법 신기한….”
“신발을 신고 들어오다니.”
불용사의 주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름이 자글자글하여 한없이 쇠약해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러나 그는 엄연히 후계자가 나오기 전까지 단신으로 다른 사찰들의 견제를 받아온 사람이었다.
전성기 때의 그는 30위권의 헌터들과도 견줄 정도였다.
화아아아아악!
“더 이상 내가 알고 있는 제자가 아니구나.”
푸른 기운이 몰아치며 그가 지팡이를 툴 떨어트렸다.
우드득! 우드드득!
노쇠한 그의 몸이 마치 회춘하듯 바뀌기 시작했다. 주름이 서서히 잦아들며 앙상한 몸에는 근육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호오….”
“흐으으으으으….”
푸쉬이이이이!
그의 입에서 뜨거운 증기가 촤악 내뿜어졌다. 환골탈태 같은 거창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아껴두었던 힘을 방출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웃통을 벗자 머리밈 못지않은 탄탄한 복근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자식처럼 생각했거늘, 어찌 그런 길에 빠져 있었단 말인가.”
탓!
소리 없는 돌진이었으나 그 속도는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한 나진이 머리밈의 머리를 향해 발을 후렸다.
콰앙!
“호오오오! 대단하군!”
“닥쳐라 마귀놈아!”
공격은 머리밈의 팔에 막혀 들어가지 못했다. 그러나 별 상관없었다.
그도 자신이 정성스럽게 키운 제자가 고작 이 정도에 쓰러질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불용사 전통의 무술이 꽃을 피웠다. 달빛 아래 마지막 푸른 꽃이 피어나는 순간이었다.
퍼퍼퍼퍼퍼퍼퍽!
그의 주먹이 복부 명치 팔 머리 모든 곳에 쏟아져 내렸다.
소나기가 아닌 폭풍우처럼 몰아치는 그에게서 푸른 마력이 정말 꽃처럼 피어났다.
소름 끼치도록 아름답지만 그에 반하는 가시 또한 날카로운 꽃이었다.
그의 주먹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내지르는 주먹은 거대한 바위와 같으며 날아오는 발차기는 거대한 태산과 같았다.
백년이 넘도록 쌓아온 그의 무공은 고작 서른도 되지 못한 애송이가 받아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콱!
“뭣!?”
하지만 지금 싸우는 것은 놈이 아닌 몇천 년의 세월을 살아온 에고 웨폰이다.
수많은 사용자들이 거쳐 가며 놈에게 누적된 무공의 양은 그를 가볍게 짓누르고도 남았다.
더군다나 단련된 그의 몸은 완벽히는 무리였지만 어느 정도 무공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나진의 발목을 붙잡은 그는 그대로 놈을 땅바닥에 패대기쳤다.
그리고는 한 번 더 힘을 모아 그를 하늘 위로 날려버렸다.
콰아앙!
그가 밟고 있던 땅에 쩌억 금이 가며 그 또한 날아올랐다.
“크흐으윽 네놈….”
“뭐, 나름 재밌었다.”
공중에서 힘을 모은 머리밈의 주먹이 나진의 복부 깊숙이 박혔다.
“흐윽!”
콰콰콰콰쾅!
꼴사나운 비명은 지르지 않았다. 주먹을 버티지 못하고 날아간 그는 사당을 깨부수며 벽에 처박혔다.
쿠콰콰콰콰!
그렇지 않아도 노쇠한 건물은 갑작스럽게 들어온 큰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고 말았다.
불상이 있는 중앙, 다시 말해 나진이 쓰러진 곳을 제외하고는 건물 양쪽이 완전히 와해되고 말았다.
“….”
B22
그는 고개를 푹 숙이고 일어나지 않았다.
천천히, 그리고 압도적으로 다가온 놈이 쓰러진 나진의 목을 잡고 들어올렸다.
“안색이 좋지 않군?”
“…흐흐흐.”
“웃어?”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미소 지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신이 키운 제자가 청출어람했으니 말이다.
“이런 죽음도…. 나쁘진 않구나.”
제자에게 죽는 스승이라니, 그건 그것대로 낭만있지 않은가. 그는 자신이 키워낸 괴물의 손목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잘 컸구나.”
“….”
잠시 침묵이 일어났다. 거북하지도 불편하지도 않은 침묵이었다.
혹시나 기적이 일어났나 착각할 수도 있는 짤막한 시간이었다.
“감성팔이는 끝났나?”
“홀홀홀, 그렇지.”
“그럼 이만 죽어라.”
머리빔의 주먹이 나진의 머리통을 박살내기 직전 뒤에서 날아온 궁수의 화살이 벽에 처박혔다.
“허?”
파앗!
화살과 위치를 바꾼 궁수가 놈의 머리통을 후려치며 날려버렸다.
콰아아아앙!
“자, 자네는!”
“거봐 내가 팬 이유가 있다니까?”
제법 힘이 실린 일격이었기에 놈은 그대로 벽에 처박히고 말았다.
궁수는 주먹을 털어내며 놈에게 다가갔다.
머리밈 또한 아무렇지 않은 듯 자리를 털고 일어나 궁수의 앞으로 다가갔다.
“쯧, 또 뭐하는 놈이냐.”
“나? DK.”
“뭐?”
“대머리 킬러 이 새끼야!”
[D대머리 K킬러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풍성충을 피해 도망치는 대머리 A씨.]
[THE 민둥산 폭격기 나궁수.]
[노헤어 살인마 나궁수.]
[국밥 할배 가발도둑 나궁수.]
ㄴ 그건 왜 훔치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ㄴ 가짜 풍성충은 처벌해야지 음!
ㄴ 못돼먹은 풍성충 새끼들…
최근 많아진 대인전으로 궁수도 난투전에서는 도가 텄다.
궁수는커녕 어지간한 상위 랭커들을 상대로도 근접전을 압도할 수준이 되어버렸다.
“죽어라!”
분노한 적이 곧바로 궁수를 향해 돌진했으나 놈의 주먹은 궁수의 털끝 하나도 건들 수 없었다.
고개를 틀어 놈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 궁수는 그대로 상체를 낮춰 놈의 복부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크흐으윽!”
몸이 붕 떠오른 놈이 그대로 뒤로 밀려나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격이 다른 존재가 빙의한 것도 아니고 놈은 본능에 따라 무기에 삼켜졌을 뿐이다.
애초에 놈의 주먹이 자신에게 닿을 거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재밌는 거 보여줄까?”
“응? 이 상황에서?”
궁수는 티아라에게 피식 웃어주며 수십 발의 화살을 띄웠다.
속성도 익스플로전도 띄워지지 않은 화살이 적들의 머리 위로 쏟아졌다.
“뭐야, 못 맞췄잖아.”
“지켜봐.”
그 말과 함께 티아라 옆에 있던 궁수의 모습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