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6화. 대머리 무장 집단.
궁수가 다시 눈을 뜬 곳은 세이비어의 의료실이었다. 궁수의 옆에는 허가연이 고른 숨을 내뱉고 있었다.
“하아, 이러다가 진짜로 죽는 거 아닐까 몰라.”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세이비어의 치료사들이었기에 내상을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일어났어?”
“어, 허가연은 괜찮데?”
“흐음 어깨에 상처를 입은 것 빼고는 괜찮데, 곧 회복될 거니까 걱정 말래.”
궁수는 어깨를 돌리며 몸을 풀더니 이내 티아라에게 다시 물었다.
“아 나 있는 곳은 어떻게 알고 왔어? 휴대폰도 권외던데.”
“응? 그거 광팔이가 알던데? 아빠 냄새라느니 뭐라느니.”
“응? 그런 게 가능 해?”
궁수가 아리송하는 사이 천궁이 헛기침하며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 드래곤은 소중한 사람에게는 낙인을 새긴다. 보이지 않겠지만 네 몸 어딘가에 새겨진 낙인을 쫓아왔을 거다.
“흐음, 그렇구나.”
납득한 궁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곤히 잠들어 있는 허가연에게 다가갔다.
“어휴, 진짜 내가 너 때문에 고생한 거 생각하면 아주 치가 떨린다 치가 떨려!”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녀가 곤히 잠들어 있는걸 보니 어딘가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짜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 또한 참을 수 없었다.
“쯧.”
따악!
궁수의 중지가 그녀의 이마를 후려쳤다.
얼큰한 딱밤에 이마를 부여잡은 허가연이 울상을 짓고 일어났다.
“아아악! 야! 왜 때려!”
“뭐야 일어나 있었냐?”
“그럼 옆에서 말하는데 안 일어나고 배겨!?”
“너 잘됐다. 내가 거기 사기라고 말 했어 안했어? 어? 아주 내 말을 귓등으로 들어?”
핑크빛이라거나 달달함은 단 1미리도 존재하지 않았다.
정말로 딸에게 잔소리를 하는 엄마처럼 궁수는 허가연에게 투다다다 잔소리를 쏟아내었다.
***
원탁의 방은 전과는 달리 몹시 허전했다. 것도 그럴 것이 남은 인원 고작 두 명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세 번째 가시와 첫 번째 가시.
어두운 로브를 쓴 첫 가시와 달빛을 받아 빛나는 대머리가 한 자리에 모였다.
“….”
“….”
그렇지 않아도 과묵한 세 번째 가시와 있으니 대화는 더더욱 메말랐다. 참다못한 첫 가시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덟 번째는 뭐하다 죽었지?”
“패왕을 소환하려다 되려 마력을 빨려 죽었다 하오.”
“…뭐?”
“말 그대로라오.”
싸우다 죽은 것도 아니고 부릴 몬스터를 소환하다 죽다니. 헛웃음이 절로 나오는 상황에 첫 가시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평소의 모습과는 다른 힘이 빠진 한숨이었다.
“이번에는 내 차례라오.”
“승률은?”
“글쎄, 그런 걸 생각하면서 싸워본 적은 없는지라.”
“개죽음이냐?”
“그자가 나보다 강하면 지고 약하면 이기는 것이다오, 모든 것은 순리대로 흘러가는 법이니.”
첫 가시도 궁수와의 1대 1이라면 몰라도 주변의 모든 적들까지 함께 상대하라면 그것은 그것대로 무리가 있었다.
첫 가시는 의자에 걸터앉아 궁수와의 전투를 회상했다.
아직도 그때를 생각하면 다친 팔이 저려왔다.
“우리 쪽에는 ‘그것’도 있으니 충분히 해 볼 만 하오.”
“….”
별다른 대답은 하지 않았다. 침묵은 딱히 네 일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것을 뜻했다.
암묵적인 허락을 받은 그는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
쐐애애애애액! 콰직!
한국으로 돌아온 궁수는 프로틴 프로의 뒤뜰에서 오랜만에 궁술을 연마하고 있었다.
“다음, 100원은 너무 커.”
“50원? 10원?”
“10원으로 가자.”
300미터가 넘는 거리에서 총도 아닌 활로 10원짜리 동전을 맞춰야한다.
그것도 10원짜리 다섯 개를 말이다.
일반인은커녕 헌터가 듣더라도 터무니없는 소리라며 웃어넘길 일이었으나 궁수에게 있어서는 재밌는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콰직! 콰직! 콰직! 콰직!
[맞아 얘 궁수지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캬… 진짜 봐도 봐도 미쳤다…]
[활 이만큼 쏘는데 굳이 몽둥이 들고 뛰어나감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그게 낭만이지.
[총보다 활이 우위라는 게 입증됐다.]
ㄴ 개머리판으로 처맞는 소리하네.
ㄴ ㄹㅇ 뚝배기 한번 깨져봐야 정신차리지.
[이게 어떻게 사람… 아 맞다 사람 아니지.]
ㄴ 그럼 뭔데 ㅋㅋㅋㅋㅋㅋㅋㅋ
ㄴ 아무튼 우리랑 같은 종족은 확실히 아님ㅇㅇ
순식간에 네 개의 동전을 정확히 맞춘 궁수는 이번에는 뜸을 들이며 자꾸만 시위를 풀었다 걸었다를 반복했다.
“흐으으음, 이쯤…. 아니 이쯤인가.”
“뭐해? 맞춰! 별거 아니잖아!”
“흐으으으음.”
궁수의 미간이 접히며 집중 상태에 들어갔다.
주변이 느려지는 느낌과 함께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듯한 기묘한 감정이 궁수의 뇌를 지배했다.
“여기로군.”
쐐애애애애액!
마지막으로 힘차게 날아간 궁수의 화살이 정확히 10원짜리 동전을 타격했다.
무엇하러 똑같은 10원짜리 동전인데 그렇게 공을 들이냐고 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궁수의 화살은 10원의 0 안을 정확히 타격했다.
그 뒤로는 완두콩, 바늘, 심지어는 얇은 실까지 있었지만 궁수가 마주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좋은 구경 했구만.”
“그러게요, 무슨 서커스라도 본 기분이네요.”
“원숭이 비스무리 한건 맞네요.”
“뒤질래?”
“우끼끼!”
궁술 연습을 마친 궁수는 이번에는 허가연과 대련을 붙었다.
더 이상 일반인이 아닌 각성자가 되버린 그녀는 평범한 삶을 위해서라도 지금의 힘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파아아앙!
“아 살살하라고!”
“힘 조절이 안되는 걸 어떡해!”
전에 머물렀던 놈의 마력이 그녀의 마력 회로에 흡수되었던 탓일까, 지금 허가연의 신체능력은 어지간한 헌터조차도 압도할 수준이었다.
그럼에도 궁수는 그녀의 주먹을 어렵지 않게 받아내며 수련을 이어나갔다.
허가연도 몸을 움직이는 것에 신이 났는지 가면 갈수록 속도를 높였다.
“하!”
퍼어어엉!
“아이씨 살살하라고 했잖아!”
“아 미안….”
오죽하면 그녀의 주먹을 받아주던 미트 글러브까지 터져나가고 말았다.
정신없이 그녀의 주먹을 받아주며 수련에 힘을 쏟아내다 보니 어느새 밤이 되었다.
한적한 퇴근길 궁수는 오랜만에 버스에 타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사실 궁수 정도면 버스가 아닌 버스 회사를 살 수 있을 정도였지만 구태여 버스를 탔다.
비좁은 창문 틈 사이로 비추는 서울의 야경이 궁수에게는 마냥 아름답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사람들을 위해 뼈 빠지게 클로징을 하다 보니 어느새 감정이 무뎌진 궁수였다.
버스에서 내린 궁수는 뚜벅뚜벅 집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고급스러운 입구를 지나 아기자기한 놀이터를 건너…. 건너….
“저거 뭐야?”
놀이터를 보고 한 말이 아니었다. 놀이터 한 가운데에 게이트가 보였기 때문이다.
혹시나 누가 장난친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다가갔으나 확실한 게이트였다.
괴물이 나올 만큼 큰 사이즈도 아닌 보통 현관문 수준의 크기였다.
“뭐 이런 게이트가 다 있어?”
이대로 두면 일반 시민들이 들어갈 수도 있는 노릇이었기에 궁수는 서둘러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느껴지는 기운도 그다지 크지 않아 홀로 처리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부로 들어오고 가장 먼저 마주한 것은 거대한 벚꽃 나무였다.
“하, 또 처음 보는 게이트냐.”
애초에 게이트가 나타났음에도 감지하지 못한 것부터가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 뒤로는 맑은 호수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뭐야?”
마치 무릉도원같은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그러나 궁수는 조금도 긴장을 풀지 않고 오히려 더욱 날카롭게 주변을 탐색했다.
- 흐음…. 이건 게이트라기보단 결계에 가깝군.
“결계라니?”
-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었다는 소리다.
“뭐? 그게 가능해?”
하긴 억지도 정도가 있지 동네 놀이터에 나타난 게이트라니 처음부터 말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조금 더 들어가 봐?”
결계를 만든 술사를 찾아야하니. 주의하면서 들어가보는게 좋겠군.
길을 따라 들어가니 저 멀리서 누군가가 검지 하나로 물구나무를 서고 있는 것이 보였다.
“셈…? 은 아니구나.”
대머리긴 하였으나 셈은 아니었다. 웃통을 벗고 헐렁한 바지를 입은 그는 언뜻 보기에는 수도승 같았다.
다만 수도승치고는 몸이 너무나도 좋다는 것을 제외하면 말이다.
따악!
놈의 관심도 끌 겸 궁수는 검지와 엄지를 맡 부딪히며 일부러 소리를 내었다.
궁수의 양옆에 모습을 드러낸 두 발의 화살이 적을 노려보았다.
“어차피 다 알고 있으면서 그만하지?”
“생각보다 성격이 급한 사람이오.”
“응, 급한 거 알면 빨리 이거 풀지?”
적이 술사인 점을 생각하면 그는 궁수가 결계에 들어왔을 때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대머리에 실눈캐라고 하던가.
언뜻 보아도 강해보이는 놈이었다.
그렇다고 전에 느꼈던 패왕의 기운에는 한참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궁수는 추가로 화살을 늘렸다.
적 주변으로 스무 발의 화살이 모습을 드러내며 그를 감쌌다.
“5”
“4”
“3”
“허허허, 이렇게까지 성격이 급할 줄이야.”
“2”
적의 헛소리를 완전히 씹어버린 궁수는 정말로 죽여버리겠다는 듯 서서히 왼손을 들어올렸다.
“1”
“어차피 곧 보게 될 것이오.”
화악!
궁수는 확 주먹을 쥐었으나 이미 주변은 놀이터였다.
“응? 뭐야 이거?”
- 술사에게 퇴출당했군.
“뭐? 그게 가능해?”
- 결계 자체를 닫아버린 것이다.
“…도망쳤다 이거지?”
- 요약하면 그렇지.
거기까지 설명을 들은 궁수는 혹시나 주변에 뭐라도 있나 기감을 펼쳤으나 딱히 아무것도 걸린 것은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궁수는 다짜고짜 티아라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야?”
“너 혹시 대머리 수도승 아는 사람 있냐?”
“…뭐 잘못 먹었니?”
아침부터 대뜸 전화해서 하는 말이 대머리 수도승 아는 사람 있냐니, 충분히 당황할만한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궁수는 열렬하게 설명을 이어나갔다.
“대머리에 실눈! 수도승치고 몸은 제법 좋았어, 몰라?”
“흐음, 떠오르는 사람이 몇 있기는 한데….”
“오오! 누군데!”
“사진 보낼게.”
띠링!
궁수의 메신저 알림이 울리며 사진이 몇 장 도착했다.
“어우 대머리가 셋이라니.”
“뭐, 니가 부탁했잖아.”
“미안, 대머리를 보면 기겁하는 병이 있어서.”
“어휴, 그래서 왜 달라고 한 건데.”
사진을 한 장 한 장 찬찬히 살펴보던 궁수는 눈을 번쩍 뜨며 두 번째 사진을 확대했다.
대머리에 실눈, 얇은 입술에 두꺼운 귓불까지.
분명 어제 상대했던 놈이었다.
궁수는 다시 그녀에게 사진을 보내며 물었다.
“얘 누구냐?”
“응? 아, 얘 걔잖아, 불용사 후계자 나·머리빔.”
불용사라니, 들어본 적 없는 단어에 궁수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다시 그녀에게 물었다.
“불용사? 그게 뭔데.”
“음, 중국 무술인 양성소지?”
“흐음, 그러면 얘 혹시 결계술 같은 것도 펼치고 그러나?”
“응? 아니 못하지, 주술사도 아니고 무림인인걸.”
“역시 그렇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궁수가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끙끙대는 궁수를 바라본 그녀는 뭐가 문제냐는 듯 물었다.
“왜, 뭐라도 알고 있어?”
음흉한 미소를 지은 궁수는 티아라에게 선언하듯 말했다.
“나 불용사 좀 다녀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