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나무는 펑펑이고 적은 쾅쾅이다!
“아직까지 연락 안 왔어요?”
“네, 아직 별 답은 없네요.”
협회 앞 카페에서 모인 궁수와 은우는 멍하니 잠깐의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한명은 원판을 구하지 못했다는 설움을 다른 한명은 끝없이 쏟아져 내리는 일에 대한 도피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카페까지 와서 프로틴이라뇨.”
“남이사.”
“아하하, 띠꺼워라.”
그 뒤로 세이비어에 대한 연락은 일체 오지 않았다. 의문의 성검녀도 그 뒤로는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잔에 담긴 프로틴을 비운 궁수는 탁자 위에 늘어지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하아….”
“왜 그래요, 기껏 세계 랭킹 진입까지 했으면서.”
“가는 족족 사람들이 알아봐 하아….”
“그게 왜요, 유명하고 좋구만.”
이은우는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궁수를 바라보았다.
궁수는 멍하니 얼음이 담긴 잔을 바라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어휴….”
“왜요, 왜 한숨 쉬는데.”
“아뇨, 됐어요.”
헌터가 된 뒤로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간 수십 수백만 마리의 마물들을 처리하며 궁수는 수직적인 성장을 이어왔다.
그러나 이와 동시에 강렬한 번아웃이 궁수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아무것도 하기 싫어….”
“쓰흡, 국내 최고 헌터가 이러면 안돼죠.”
“지들 맘대로 감투 씌워놓고 국내 최고래.”
“왕관을 쓰려는 자 그 무게를 버텨라!”
“왕관으로 맞을래요?”
“죄송합니다.”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빛에 졸음이 쏟아졌다.
‘집에서 한숨 잘까….’
평화로운 상상을 하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기도 잠시 조용하던 궁수의 휴대폰이 비명을 질러대었다.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아이씨 누구야.”
척 봤을 때 모르는 번호였기에 궁수는 받지 않고 그대로 통화를 끊어버렸다.
“안 받아요?”
“귀찮아요.”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또 똑같은 번호인데요, 지인 아니에요?”
“저 친구 없는데요.”
“앗… 아앗…”
눈물을 머금은 은우를 뒤로하고 궁수는 계속해서 휴식을 즐겼…
띠리리리리링! 띠리리리리링!
“야이 씨.”
“그냥 받죠, 아는 사람 같은데.”
“하아…”
결국에는 궁수는 전화를 받아들었다.
“여보세요?”
“나궁수씨 맞나요?”
“아닌데요.”
“맞네요.”
들어본 적 있는 중년 남성의 목소리가 전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세이비어?”
“기억하시는군요.”
“제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죠?”
“다 방법이 있죠.”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껄껄껄 웃으며 궁수의 말을 받아쳤다.
궁수는 불쾌함에 한숨을 푹 쉬며 전화를 이었다.
순간 확 끊어버릴까 생각도 했으나 계속 귀찮게 할 것 같기에 통화를 이었다.
“용건만 말하시죠.”
“말하면 들어주실 겁니까?”
“맨입으로?”
“당연히 보상은 드릴 생각입니다.”
‘보상이라….’
궁수는 보상이란 말에 피식 웃으며 그에게 통보했다.
“나 돈으로는 안 움직이는 거 아시죠?”
“흐음…. 그런가요.”
당장에 게이트 몇 개만 돌아도 몇 억은 가볍게 벌 수 있는 궁수다.
실력이 꿀리는 것도 아니기에 궁수는 떵떵거리며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흐음…. 궁수님이 부족한 게 있습니까?”
“없는데요.”
노골적으로 흥미가 없다는 것을 표현했으나 그는 시종일관 여유로운 태도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필요하신 장비라도 있으신지요?”
“없는데요?”
“흠, 그러십니까….”
“예.”
잠시 정적이 흘렀다.
은우 또한 세이비어란 말에 조용히 궁수의 통화를 들으며 열심히 뭔가를 메모하고 있었다.
“실은 저희가 이번에 새로 개발한 영약이 있습니다만.”
“영약이요?”
영약이란 말에 궁수의 흥미가 동했다.
역시나 헬창인지라 건강 보조제같은 것에 관심이 가는 것은 본능에 가까웠다.
“예, 근력은 물론이고 마력까지 올려주는 영약입니다.”
“…꿀꺽.”
근력! 그것은 곧 중량!
중량은 곧 헬창의 자존심!
궁수가 군침을 삼켰으나 이번에는 바로 넘어가지 않았다.
영약의 효과가 얼마나 나올지도 모르거니와 몸에 좋다고 덥석 집어먹기에는 상대가 세이비어였기 때문이다.
“흐음…. 그래서요?”
“크흠, 영약이 한 개 한 개 만들기에 단가가 너무 비싸서 말입니다.”
‘이거면 되지 않냐’
“아, 그러세요?”
‘좆까는 소리 말고 더 가져와라.’
능글맞은 표정의 궁수는 어림없다는 듯 계속해서 그를 압박해왔다.
“저희 측에서도 고작 다섯 개가 한계라서 말입니다.”
“그럼 다섯 개 다 주시면 되겠네요.”
“애초에 처음밖에 효과가 없습니다.”
“괜찮아요, 동료들이 있으니까.”
그는 궁수의 당당한 태도에 기가 막혀 앓는 소리를 내었다.
고민하던 그는 결국에 한숨을 푹 내쉬며 궁수에게 제안했다.
“티아라를 함께 파견시켜 드리겠습니다. 3개 어떠신가요.”
“티아라가 뭔데요.”
“몇 번 보셨지 않습니까. 그 대검을 든.”
“아, 걔요?”
확실히 그녀가 있다면 전투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성격이야 둘째치고 그녀의 실력 하나만큼은 확실하니 말이다.
‘그래 뭐 도움도 받았으니까.’
에티오피아에서 한번, 그리고 이번 드래곤 토벌에서 한번.
궁수는 은혜를 모르고 살 정도로 뻔뻔한 인간이….
“아 그래도 4개 주세요.”
맞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 법이다.
“…3개.”
“4개.”
“3.5개!”
“4달라!”
“3.85개!”
“미치겠군! 오케이 네 개!”
“오케이 땡큐! 사달라!”
***
“그래도 이번에는 국내라 다행이네.”
“그런 걸 받았으니 말이야.”
“느헤헤헿! 좋다! 좋다!”
궁수와 일행들이 온 곳은 다름 아닌 나주였다.
셈과 힐 그리고 법사와 궁수 오랜만의 원년 멤버들이 모두 모였다.
“그래서 이번 일은 뭔가?”
“글쎄요, 무슨 변종 게이트가 등장했다던데.”
“변종 게이트?”
“일단 가보죠.”
미리 그녀가 찍어준 곳으로 가니 게이트 앞에서는 먼저 도작한 티아라가 검을 손질하고 있었다.
그녀는 도착한 궁수를 보자마자 낮게 혀를 찼다.
“쯧.”
“뭐?”
검을 손질하다 말고 그녀는 다짜고짜 궁수에게 다가갔다.
“발목 잡지마.”
“누가? 네가? 내 발목?”
“쯧.”
통성명 따윈 필요 없었다.
그녀는 준비해온 종이를 건네주며 짤막한 브리핑에 들어갔다.
“처음 발견된 변종 게이트야, 내부는 알 수 없어.”
“변종인건 어떻게 아는데?”
“처음 보는 게이트 파장이 나왔으니까.”
“흐음, 그런가.”
그녀는 그 말과 함께 자연스럽게 탱커인 셈 뒤로 들어갔다.
탱커 조나셈.
근거리 딜러 티아라.
원거리 딜러 나궁수.
마법사 나법사.
힐러 나만힐까지.
“필요한 거 다 챙겼으면 진입한다!”
“오케이!”
기록을 위해 궁수가 방송을 켜 먼저 카메라를 설정했다. 티아라는 어느새 새하얀 가면을 꺼내 끼고 있었다.
“간다!”
탱커인 셈을 필두로 멤버 모두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감각. 마치 수면에 들어가듯 기묘한 느낌이 전신을 훑었다.
“어?”
“숲…?”
게이트에 들어오고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태양이었다.
기존의 어두컴컴한 동굴과는 달리 내부는 마치 울창한 대산림처럼 숲이 우거져있었다.
“적은 없는 모양이군.”
몇 번이고 주변을 탐색한 셈은 그제서야 방패를 내려놓았다.
“숲…. 이겠죠?”
“흐음, 아무래도 그렇다만.”
[??????숲?]
[??이거 진짜 게이트 맞음?]
[뭐지?????????]
처음 보는 광경에 파티 멤버는 물론 시청자들마저 모두 어안이 벙벙하였다.
기존의 던전은 해봐야 두 갈래 세 갈래쯤 나눠지는 동굴이 전부였다.
결국 동굴을 따라서 그 끝에 있는 보스를 잡거나 코어를 부수면 되니 비교적 간단했다.
그러나 지금은 길이 나 있기는커녕 온통 주변이 나무였다.
그러나 한 가지 간과하고 있던 것이 있었다.
[아 얘네들 숲만 보면 환장하는데.]
[익스트림 환경 파괴범이 둘ㅋㅋㅋㅋㅋㅋ]
[저 저저 저 새끼 벌써 신나서 불 붙인거 봐.]
ㄴ 나궁수 - 빵긋
ㄴ 나법사 - 빵빵긋
[거 지구가 아픈거지 내가 아픈건 아니잖아!]
ㄴ ㅈ간이 미안해!
[나 아마존은 이날을 기억할 것입니다…]
ㄴ 허파 쉑 캍!
그 말대로 지금 법사와 궁수는 벌써부터 군침이 돌고 있었다.
아직 공략에도 들어가기 전 궁수가 헌터들을 보며 스윽 말했다.
“일단 길을 내죠.”
“흐음 ‘길’만 낼 거지?”
“네, ‘길’”
“불꽃은 자제해, 잘못하면 우리도 다 타죽어.”
“네~ 네~”
궁수와 법사는 주변을 둘러보며 입맛을 다셨다.
보통은 나무와 수풀을 피해 들어가기 마련인데 궁수와 법사는 이미 길을 뚫어버릴 생각이었다.
“어디를 날려버릴…. 뚫을까?”
- 이제는 그냥 날려버릴 생각뿐이군….
“나무! 많은 곳! 제일!”
“다 많은 것 같은데?”
“그럼 좋다! 아무데나!”
쿵!
발리스타를 소환한 궁수는 거대한 화살을 장전시켰다.
마치 드릴처럼 발리스타에 박힌 화살에 강렬한 바람이 회전하기 시작했다.
“법사야!”
“알고 있다!”
발리스타의 앞에 초록빛 마법진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복잡한 마력 기호가 잔뜩 적힌 마법진은 선서한 바람 소리를 내는 것이 마치 폭풍 전 고요함을 보는 듯했다.
법사가 캐스팅하는 와중에도 궁수는 계속해서 마력을 우겨넣었다.
‘더, 아직 이 정도로는 모자라 더 날카롭게.’
대장장이가 검의 날을 세우듯 궁수 또한 최대한 세밀하게 화살의 바람을 살폈다.
궁수는 마치 조각가가 조각을 하듯 가장 강력한 바람을 만들어내었다.
“나도! 끝났다!”
법사도 캐스팅이 완료된 듯 이마에서 흐르는 한방울 땀을 닦아내며 엄지를 척 들었다.
“오케이! 간다!”
궁수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화살을 발사했다.
쿠콰콰콰콰쾅!
그렇지 않아도 섬뜩한 바람을 지닌 궁수의 화살이 나법사의 마법을 만나 한층 강화되었다.
이 전에는 그래도 화살에 바람이 몰아치는 것이 보였다면 지금은 마치 토네이도가 가로로 몰아치는 듯한 모습이었다.
“캬! 길은 이렇게 내야지!”
“우지끈! 쾅! 느헤헤헤헿!”
[믹서기 가즈아ㅏㅏㅏㅏㅏㅏ]
[더 미친놈 + 덜 미친놈 가즈아ㅏㅏㅏㅏㅏ]
[지구가 아파해크헤우훼에엑!]
ㄴ 이 새끼 지구네.
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그래도 지구는 돈다.
궁수의 화살은 조금의 막힘도 없이 나무를 갈아버리며 날아갔다.
발사한 화살이 더 이상 궁수의 시야에 들어오지 않자 궁수는 진지한 표정으로 턱을 짚었다.
시원하게 길도 뚫었겠다. 동료들은 어째서 궁수가 저런 심각한 표정을 짓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궁수는 동료들을 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이쪽이 아닌 것 같은데 한 번 더 가시죠.”
“…어휴”
그리고 이는 당연히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
“흠 뭐가 없어도 너무 없는데요?”
“그러게요, 딱히 느껴지는 것도 없습니다.”
이곳의 헌터들은 최소 A급의 실력을 자랑하는 헌터들이다.
어지간한 수준의 게이트로는 절대 그들을 막을 수 없었다.
주변은 아무리 보더라도 그냥 숲이었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고 나뭇잎 사이로 햇빛이 내리쬐는 그 모습은 도저히 게이트로는 보기 힘들 수준이었다.
그렇게 들어가길 2시간.
“하아아암…. 심심하네요.”
“흐음, 코어든 보스든 뭐라도 나와야 할 텐데.”
모두가 방심한 그때.
콰아아아앙!
“뭐야!?”
거대한 주먹이 궁수와 일행들을 후려쳤다.
그러나 아무리 늘어진다 하더라도 그들은 최상위 클래스의 헌터다.
적의 주먹을 간단히 막아낸 셈은 그대로 방패에 마력을 담아 적의 주먹을 밀어내었다.
“나무…! 살아있는 나무! 엔트에요!”
“내 뒤로 모이게!”
쿵! 쿵!
주먹을 부딪히며 큰 소리를 낸 엔트가 헌터들을 노려보았다.
거의 10층 건물에 버금가는 크기의 놈은 쩌렁쩌렁한 목소리로 헌터들을 향해 소리쳤다.
“나 위대한 나무 위그드! 침입자들! 모두 죽여주마!”
“와, 좀 들어왔다고 성질내는 거 보소.”
[뭘 들어와 다 깨부숴놓고ㅋㅋㅋㅋㅋ]
[씨발 화낼만 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노크 몰라 노크?”
[선생님은 노크를 손가락이 아니라 탱크 탄환으로 하시는군요.]
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ㄴ 똑똑보단 쾅쾅이지 ㅋㅋㅋㅋㅋㅋ
그러던 말던 푸른 기운을 내뿜는 거대한 엔트는 전장을 향해 포효하며 소리쳤다.
“이 모든 숲이 내 무기이자 힘이다!”
그와 동시에 평범한 나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주변에만 수백의 적이 깔린 상황.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에서 궁수는 조용히 방송 제목을 바꿨다.
[SSS급 나무꾼 벌목 방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