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화. 쇠창살 드래곤.
“와 피도 눈물도 없는 새끼.”
병사들에게 검은 안개가 내려앉음과 동시에 방금 전까지만 해도 팽팽하게 전투를 이어가던 놈들이 하나 둘 픽픽 쓰러지기 시작했다.
하나에서 둘.
열에서 백
백에서 천
천에서 만
이윽고 전부.
마치 놈에게 흡수되듯 새까만 연기들이 드래곤에게 흡수되기 시작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제길, 저런 걸 어떻게 이기라는 거야.”
“말도 안돼….”
동료들 사이에서 절망의 곡소리가 울려 퍼졌다.
인류의 정점에 서 있는 최상위 랭커들 마저 인상을 구길 정도로 놈의 모습은 압도적이었다.
이렇게 절망이 넘치는 전장에서 단 두 명만 다른 의미로 절망하고 있었다.
“안돼 내 경험치!”
“쾅쾅! 쾅쾅 줘! 내거!”
“씨발 이제 왔는데 내 경험치이이이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험치에 미처 전투광이 되버린 궁수와 법사였다.
“크흐흐흐흐, 가소롭구나! 감히 흑기룡인 내게 덤비려 하다니!”
“좆까! 내 경험치 내놔!”
“흐흐흐흐 용기와 만용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여…”
“내놔! 경험치 내놔 검은 도마뱀 새끼야!”
“그래 언제까지 그렇게 떠들 수 있는지….”
“닥치고 내놓으라고!”
“…하아.”
진심으로 분노에 차 아우성치는 궁수를 보며 흑기룡은 불편한 기색을 비추었다.
“조금 봐줬더니 미물 따위가 적당히를 모르는구나!”
“씨발 적당히가 누군데!”
“몰라! 몰라!”
[사람 이름이 어떻게 적당히임 ㅋㅋㅋㅋㅋ]
ㄴ 사람 아님ㅋㅋㅋㅋㅋㅋ
ㄴ 괴물 이름이 어떻게 적당히임
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지 이름은 흑기룡으로 해놓고 작명 센스 ㅆㅎㅌㅊ]
[이렇게 된 거 이름은 발기룡 어떠냐.]
ㄴ ㅋㅋㅋㅋ 불끈불끈하네 ㅋㅋㅋㅋㅋ
ㄴ 밤에 강해지는 타입ㅋㅋㅋㅋ
진지함이라고는 엿이랑 바꿔먹은 궁수의 채팅창은 그에 대한 조롱으로 채팅이 도배되고 있었다.
“모두 죽여주마!”
화아아아악!
주변의 대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점액질처럼 끈적이는 어둠은 창살을 이루었으며 순식간에 헌터들을 속박하기 시작했다.
“스펠 브레이커!”
“디스펠!”
“턴 매지컬!”
“언리미티드 스펠 어택!”
마법사들의 해주 마법은 쓸모가 없었다. 애초에 해주 마법은 자신보다 마법적 수준이 낮은 적에게만 먹힌다.
지금 이곳에 모인 마법사들의 수준도 절대로 낮지는 않다.
그러나 상대는 마법에 대해서는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는 용이다.
용족도 아니고 순혈 용에게 마법으로 인간이 이기기란 무리가 있었다.
“종족차이!”
“운빨 좆망겜 수준!”
“아뇨 게임이 아니거든요?!”
어느새 등장한 은우가 법사와 궁수의 말에 딴지를 걸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용의 마법은 계속해서 인간들의 목을 죄여오고 있었다.
인간 전부를 집어삼킨 검은 철창이 계속해서 그 크기를 줄이며 헌터들의 목숨을 노리고 있었다.
그러나 궁수는 일말의 두려움도 가지지 않고 천궁에게 물었다.
“천궁! 뭐 방법 없어?”
마물에 대해서는 백과사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여태까지 천궁의 정보력은 대단했다.
아무리 상황이 나쁘더라도 천궁의 정보력 이라면….
- 응, 모른다.
“…네?”
- 모르다고.
“에이 농담하지 말고.”
- 내가 마법사도 아니고 세상 모든 마법을 다 알고 있겠느냐.
“아.”
음. 어 이건 그거다.
‘음경’돼버렸다.
“끄아아아아아악! 살려줘어어어억!”
“싫어! 열어! 열어어어억!”
“할아범 뭐 좀 해봐!”
“크흐윽, 닥치게!”
마탑주도 그 나름대로 버티긴 하였으나 몇 천 년을 살아온 용을 상대로는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뭐라도 없어!? 이대로 가다간 다 죽는다고!”
캉! 카카캉! 콰아아앙!
헌터들은 계속해서 철장에 스킬을 사용하며 밀려드는 창살을 부수기 위해 노력했다.
- 계약자여 그간 즐거웠…
“여물어!”
궁수의 두뇌가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적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하다못해 약점이라거나 머리에 박힌 보석이라도 있으면 모를까 저 용은 그런 것도 일체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어딜 노려야하지? 어딜….’
“…에라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한가롭게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궁수는 장궁에 화살을 겨누었다.
“법사야 이리 와봐.”
“뭐냐!”
“빨리 와!”
철창의 틈은 너무나도 얇았다. 처음부터 인간을 가두기 위해 짜둔 것처럼 그 틈은 채 10센치가 되지 않았다.
저 얇은 틈 사이를 뚫고 적읠 맞춰야 했다.
틈이 너무 얇기 때문에 마법사는 당연히 불가능, 남은 건 궁수인데 저 창살을 뚫고 적을 맞출 정도의 실력을 가진 궁수는 나궁수 밖에 없었다.
휘이이이잉!
뾰족하게 벼린 바람이 궁수의 화살촉에 머물기 시작했다.
“아냐, 아직 부족해.”
더욱 뾰족하게 더욱 날카롭게, 어떤 적이라도 뚫어버릴 듯 더욱 강렬하게.
“법사!”
“알았다!”
궁수가 하려는 것이 뭔지 대충 파악한 법사는 화살촉에 자신의 마력을 불어넣었다.
휘이이이이잉!
“더! 이 정도로는 부족해!”
궁수는 인벤토리에 넣어두었던 포션을 마시며 계속해서 화살에 마력을 쑤셔 박았다.
쿠콰콰콰콰!
바람이 거세지며 궁수의 손이 떨리기 시작하였으나 궁수의 팔 근육은 이를 간단히 버텨내었다.
상대는 여태까지 상대해본 적 없는 드래곤, 그것도 상위 개체로 추정되는 녀석이었다.
그런 적에게 적당히 봐주면서 싸우는 것은 나 죽여주쇼~ 하는 것과 같았다.
“크흐으으윽!”
“더! 더 넣는다 더!”
“쓰으브으을…. 브틀 수 읐으…! 즈금 드!”
“알았다!”
마치 궁수의 활 끝에서 토네이도가 몰아치는 게 아닌가 할 정도로 바람은 그 기세를 키웠다.
그러면서도 화살의 끝은 한없이 뾰족하고 날카로워 스치기만 하더라도 완전히 갈려버릴 지경이었다.
“트루 스나이핑, 섀도우 파트너.”
궁수의 눈이 빛나며 눈앞의 적을 노려보았다. 역시나 약점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본체를 드러낸 드래곤에게 약점이 보일 거라 생각하지도 않았던 터라 궁수는 깊게 생각지 않았다.
그저 묵묵히 궁수 옆을 지키는 그림자 또한 활을 겨누고 있을 뿐이었다.
- 계약자여, 제대로 컨트롤할 수 있겠느냐.
법사의 마력을 집어먹은 바람은 더욱 그 힘을 키워 이제는 궁수조차도 견디기 버거울 수준이었다.
그러나 궁수는 눈 하나도 깜짝하지 않고 지그시 활을 노려보았다.
“그럼 내가 하지 누가 해?”
마치 전장에서 이 힘을 다룰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라는 듯 궁수가 이를 악물었다.
책임감이 느껴지는 그 말에 주변에서 궁수를 향해 버프를 걸기 시작했다.
“디바인 어택!”
“솔라리 프레셔!”
“세이크리드 인첸트!”
“분노!”
….
수천 개에 달하는 버프들이 일제히 궁수를 향해 쏟아졌다.
씨익.
스테이터스의 증가 폭이 얼마나 큰지 궁수는 순간 몸이 붕 뜬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버거워하던 바람이 너무나도 가벼웠다.
오히려 몇 배는 더 들 수 있을 것 같았기에 궁수는 남은 마력을 몽땅 화살에 때려 박았다.
“너도 남은 거 다 때려 박아!”
“알았다!”
“크흐으으윽! 조금만 더 빨리 해줄 순 없는가!”
“기다려요!”
괜히 불완전한 상태로 화살을 날렸다가 빗나가기라도 하면 대참사가 일어날 것이다.
드래곤은 계속해서 눈을 감고 스펠에 집중하느라 궁수의 움직임을 눈치 채지 못했다.
최상위 헌터 수천을 상대로 한만큼 그 캐스팅 또한 어마어마하게 어려울 것이다.
바람을 압축하고 더욱 압축한다.
단 한 올의 바람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궁수가 눈을 부릅뜨고 활 끝을 노려보았다.
“아직….”
활 끝의 바람이 아직 불완전하다. 조금 더 아니 훨씬 더 치명적으로 바람을 갈아야 했다.
- 쯧, 조금 도와주지.
“그런 게 있으면 미리미리 도와주라고.”
- 흥, 기대려하지 마라. 도와 주는 건 이번뿐이다.
바람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태풍이 평범한 바람으로, 그리고 그 바람이 더욱 덩치를 줄였다.
“아.”
마치 궁수의 화살촉에 투명한 막이 씌워진 듯했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바람은 건물 따위는 간단히 날려버릴 압도적인 힘이었다.
이거다.
순간 세상이 멈춘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천재들만이 허락된 권능, 주변 요소를 완전히 무시하는 초집중 상태.
그것은 궁수에게 찾아온 인생의 위기를 완전히 뒤집어주는 열쇠였다.
핏!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발사.
그것은 주변의 헌터들이 궁수가 화살을 쏜 것도 모를 정도로 은밀했다.
얼핏 보면 그냥 길이가 긴 화살.
화살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드래곤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갔다.
마법에 집중하고 있던 드래곤은.
“하, 이런 걸 맞아줄 거라 생각한 건가.”
너무나도 간단하게 고개를 틀어 궁수의 화살을 피했다.
“아아아!”
“안돼!”
“제길!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화살이 빛나감과 동시에 헌터들의 표정에 절망이 내려앉았다.
그러나 오직 궁수만은 유심히 적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리고 피식.
모두가 절망에 울부짖을 때 궁수 혼자 입가에 호선을 그었다.
미쳐버린 나머지 나온 웃음이 아닌 먹잇감의 최후를 예감한 사냥꾼의 웃음이었다.
쿠콰콰콰콰콰콰!
“으잉?!”
“저, 저게 뭐야!”
정확히 드래곤의 뿔 옆을 지나가던 화살이 터지며 그 안에 잠들어있던 폭풍이 울부짖었다.
풍압만으로 도시 한 개쯤은 간단히 날려버릴 수준의 폭풍이었다.
기회를 잡기 전까지 조용히 적을 노리던 폭풍은 우악스럽게 드래곤의 뿔을 물어뜯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 하더라도 전신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엄청난 공격이었다.
콰아아아앙!
“끄아아아아악!”
칼바람이 터져 나오며 드래곤의 뿔 하나를 간단히 갈아버렸다.
드래곤에게 있어 뿔은 심장과도 바꿀 수 없는 중요한 기관이다.
마력 연산, 마력 회로, 마력 비축, 마법사라면 목숨이라고 할 수 있는 세 가지 요소가 모두 존재하는 것이 바로 뿔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저 드래곤은 지금 한쪽 뿔이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결계를 이루던 마력이 약해지며 마법이 한층 약해졌다.
그러나 아직 드래곤은 말도 안되는 정신력을 발휘하여 이를 견뎌내었다.
잘려나간 뿔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흘러나왔으나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 흑기룡을 막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느냐!”
오히려 인간에 대한 증오감에 더욱 이를 악물고 끝끝내 결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씨발 저 독한 도마뱀 새끼!”
상대는 용이다.
똑같은 마법을 준비한다고 한들 절대로 맞아줄 것 같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화아아악!
“…어?”
밤하늘을 가득 채운 구름이 화악 밀려나며 거대한 검이 그 모습을 드러내었다.
밤하늘의 달, 아니 대낮의 태양처럼 밝은 빛을 발산하는 검은 그대로 드래곤을 향해 떨어졌다.
“이건 또 무슨…!”
콰아아아아앙!
“끄아아아아악!”
마지막 남은 드래곤의 뿔을 부숴버리며 검은 그 모습을 감췄다.
“나 저거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마…. 마법이 풀렸어!”
“살았어! 살았다고!”
양쪽 뿔이 잘린 드래곤은 더 이상 그 거대한 형체를 유지하지 못하고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본체가 드래곤인데 인간으로 돌아와?”
- 지금의 빈약한 마력으로는 진체를 유지하기 힘든 거다. 원래 살던 곳이라면 몰라도 이곳은 마력의 농도가 낮으니까 말이다.
“흐음, 그런가.”
- 그래, 진체란 힘을 사용하기에 최적의 전투 상태니까 말이다.
더 이상 그의 머리에 달려있던 두 개의 뿔은 존재하지 않았다.
“크흐흐흐흐흐….”
이미 승기는 이쪽에 기울어 있는 상황, 그럼에도 그는 웃음을 놓지 않았다.
그걸 바라보며 궁수는 못마땅하여 분쇄자를 들고 놈에게 돌격했다.
돌격한 궁수와 드래곤의 눈이 정확히 마주쳤다. 과연 드래곤, 순간 궁수의 전신이 저릿했다.
그러나 찌리리릿도 아니고 고작 저릿으로는 궁수를 막을 수 없었다.
“뭘 쪼게 씨발련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