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응~ 안싸워~
“하아…. 진짜 돌겠네.”
궁수가 잡혀온 곳은 어디인지 알 수 없는 새까만 공간이었다.
땅이 밟히긴 하였으나 벽도 천장도 어디인지 알 수 없는 기이한 곳이었다.
“흐음, 왜 이런 공간은 처음인가?”
“뒤지기 전에 이거 풀지?”
“하하하 뒤진다니.”
화악!
공간이 일그러지며 저 멀리 있던 놈이 한순간에 궁수 앞으로 다가왔다.
타들어 갈 듯 붉은 눈에 검은 머리칼, 정돈된 옷차림의 그는 적어도 졸개로는 보이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살기를 담아 궁수를 노려보았으나 궁수 또한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죽여 버리기 전에 열라고.”
“하, 싫다면?”
“그래?”
콰아앙!
“하!”
궁수의 분쇄자가 놈의 왼팔을 후려쳤다.
“죽어야지 그럼.”
어느새 궁수는 이를 드러내며 사납게 웃고 있었다.
“호오, 이건, 길들이는 맛이 있겠군.”
“미안한데 난 엄마 말도 안 들어.”
“…그건 좀 듣도록.”
“크흠….”
마물한테 잔소리를 들을 줄은 몰랐는지 궁수는 머쓱해 애먼 휴대폰만 조작했다.
당연하지만 라이트처럼 휴대폰에 기본적으로 탑재된 기능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것도 사용할 수 없었다.
방송도, 문자도, 전화도 말이다.
남자는 당황한 궁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하지만 날 죽이기 전까지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다.”
“그래?”
“나는 칼리번, 그분의 여섯 번째 검이다. 자! 어서 나와 피의 향연을 펼쳐….”
- 흐음, 굳이 나갈 필요가 있느냐?
“나갈 필요라니! 당연히…. 어?”
- 그래, 그냥 여기 있기만 해도 이득 아니더냐?
“그러네!”
‘내가 왜 싸워줘?’
그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궁수는 귀찮았는지 벌러덩 바닥에 누워버렸다.
“지, 지금 뭐하는 게냐!”
“응? 누웠는데?”
“그러니까 지금 왜 눕냐는 거다!”
“아아.”
피식.
궁수는 새끼손가락으로 휘적휘적 코를 파며 말했다.
“너 저기 밖에 있는 놈들보다 더 쌔지?”
“흥! 당연한 소리를 하는군!”
“응, 그러니까 눕는 거야.”
궁수는 또 다시 피식 웃으며 파낸 코딱지를 후후 불었다.
전투는커녕 그냥 움직이지도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담겨있었다.
“네가 제일 쌘 놈이면, 그냥 내가 여기 잡아두기만 해도 이득이잖아?”
“뭐, 뭣!?”
칼리번은 정말로 당황한 듯 어버버 말을 절며 딱히 뭐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궁수를 상대하기 위해 준비했던 무기들이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거 난 싸워줄 마음 없으니까 그런 줄 아쇼.”
“무슨 이런 개망나니가…!”
“맞아~ 난 엄마 말도 안 들어~”
“그건 좀 들으란 말이다!”
칼리번은 전생에 기사였다.
약자를 지키고 강자를 존중하는, 그러나 그것이 악한 자라면 망설임 없이 처단하는 그야말로 기사의 귀감이었다.
비록 지금은 ‘그’에게 패배하여 어둠의 수하가 되긴 하였으나 칼리번의 가슴속 깊숙이 박힌 기사도는 쉽사리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지금 그의 기사도가 심히 위태로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무슨 저런 천하의 개망나니가 다 있는가!’
적어도 남자라면 걸어온 결투는 받아주는 것이 상책 아닌가!
고고한 칼리번의 두뇌로서는 조금도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캬, 어떻게 또 피곤한 줄 알고 이렇게 날 데려와주네, 고맙다.”
“하! 내가 먼저 공격하면 될 일이다!”
“하던가~ 내가 버티는 거 하나는 특기거든~”
“이이이익! 일어나서 검을 쥐란 말이다!”
“이이이이잉~ 이러나서 거물 쥐란 마뤼다아아~”
***
칠흑의 군단이 귀가 저릿할 정도로 쇳소리를 내며 헌터들과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싸이클론 히트!”
“광폭화!”
“그레이트 힐!”
“리 퀴어!”
“대지가르기!”
근거리 딜러들의 스킬이 작렬하며 꽤나 대등하게 전투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추가로 후방의 헌터들, 마탑주나 다른 최상위 헌터들의 지원에 힘입어 전투는 팽팽하게 치러지고 있었다.
좋게 말하면 밀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으나 현실은 적이 죽어나가는 만큼 아군도 그에 달하는 피해를 입고 있다는 것이었다.
성벽은 이미 너덜해질 대로 너덜너덜해져 더 이상 그 역할을 수행할 수 없었다.
성벽에서 내려온 헌터들은 후방에서 마법을 날리며 적의 힐러와 서포터들을 노렸다.
“더 몰아쳐! 충분히 이길만 하다!”
전투에서도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은 적진 한가운데에 들어가 무쌍을 찍고 있었다.
예를 들어 창의 쿠. 홀린.
격투가인 리이 신.
검사인 아서 존나 팬 드래곤.
광전사인 모트 말러.
이 외에도 여러 헌터들이 분주하게 무기를 휘두르며 적들을 격퇴해나갔다.
“부상을 입은 분은 이쪽으로!”
“여기 포션 좀 더 가져와요!”
“한 놈도 보내면 안된다!”
흑기사들 또한 날개를 이용하여 변칙적인 공격을 활용하여 꾸준히 적들을 물리치고 있었다.
그 모든 사람들 뒤.
이를 빤히 바라보는 사람이 한 명, 아니 두 명 있었다.
다름 아닌 나법사와 베로니카였다.
“심심하다!”
“잉? 마법이라도 쏘면 되는 거 아니셈?”
“못 쓴다! 대단위! 심심하다!”
“아, 뽕맛이 부족하다 그거셈?”
“맞다!”
“흐으음….”
확실히 다른 곳도 아니고 이렇게 시야가 제한된 곳에서 대단위 마법을 남발했다간 자칫하면 아군까지 피해를 입을 것이다.
안전한 마법을 시전하기 위해서라도 시야가 탁 트이는 고지대를 선점할 필요가 있었다.
“흐음, 나 좀 따라와보셈!”
“어디 간다?”
“마법! 마음대로 가능한 곳이셈!”
“와아아아아!”
법사의 눈이 확 커지며 양손을 꼭 모으고 연신 위아래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원하던 장난감을 발견한 아이처럼 법사의 눈은 너무나도 밝았다.
슬금슬금 몰래 뒤로 빠진 베로니카는 헌터들이 눈치 채기 전에 법사와 자신의 아래에 10미터가 넘는 높이의 벽을 세웠다.
“화아아아! 쾅쾅! 콰콰아아아앙!”
“후후후! 마음껏 쓰셈!”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이 법사는 이미 캐스팅에 들어간 상태였다.
“ᚵᛅᛤᛤᛥᚯ - ᚹᛃᛄᛢᛒᛡᛈ”
법사의 마력이 들끓어 오르며 그 앞에 다섯 개의 마법진이 생겨났다.
빨간색 마법진이 세 개 그리고 노란색 마법진이 두 개.
이내 법사의 마력을 머금은 마법진들은 각자의 속성별로 환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맨 뒤에서 법사의 마력이 알갱이처럼 모이며 빛나는 마력의 구를 만들었다.
평소의 장난기 넘치는 모습과는 다른 대조적인 모습에 베로니카는 순간 침을 꼴깍 삼켰다.
‘이게 법사의 본 실력인 거셈!?’
그도 마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알 수 있었다.
지금 이 전장에서 나법사는 더 이상 미치광이 마법사가 아닌 전장을 가르는 희망이라는 것을 말이다.
“후으으으으….”
마법진 다섯 개.
타 속성 두 개.
마법진 별로 공진 효과 계산.
각 마력 회로 정돈과 메인 마력의 수집.
그 모든 것을 마친 법사가 고요하게 눈을 떴다. 끝에 모아진 둥근 마력이 점차 마법진에 빨려 들어가기 시작했다.
마치 총을 발사하듯 검지와 엄지로 권총 모양을 만든 법사는.
“느헤헿.”
바보같은 웃음소리와 함께 마법을 발사했다.
콰아아아앙!
“끄아아아아악!”
엄청난 마력이 집약된 법사의 마법은 적들의 후방이 아닌 중간에 나타난 거대한 물체에게 막히고 말았다.
“저건 또 뭐야!”
“드래곤! 드래곤이다!”
“드래곤이…. 어!?”
웬만한 마물 정도는 가뿐히 보내버릴 정도로 강력한 마법이었으나 아쉽게도 드래곤을 일격에 죽이지는 못했다.
콰아아아앙!
“크흐으윽! 기습이라니!”
법사의 마법을 정통으로 맞은 드래곤은 벽에 처박혀 성벽을 완전히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
다시 칠흑의 결계 안.
궁수는 놈을 상대해줄 가치조차 느끼지 못하고 멍하니 누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결국, 궁수가 싸울 의지를 없다는 것을 알아차린 그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싸울 생각이 없다면 까짓것 200년쯤 잠들어버리면 되겠군.”
“…뭐? 200년?”
“약간의 낮잠일 뿐이다.”
순간적으로 궁수의 등골에 식은땀이 흘렀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무려 200년을 이 결계에 갖혀 있다간!
“씨발…. 덤벼 개잡놈아.”
“호오? 드디어 싸울 마음이 들었나보지?”
“여물고 덤벼 죽여 버릴 거니까.”
“허, 무엇이 네놈을 그리 만들었는지는 모르겠다만.”
카아앙!
궁수의 분쇄자와 그의 날카로운 손톱이 부딪혔다.
궁수는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으로 놈을 노려보며 외쳤다.
“근손실 난다고!”
다른 건 다 참아도 근손실은 못 참는 궁수가 각성해버린 순간이었다.
쾅! 콰아앙! 쾅!
“오호! 제법이구나 네놈!”
“닥쳐! 죽어! 더 빨리 죽어!”
타앗!
땅을 박차고 오른 궁수는 전력으로 놈을 향해 분쇄자를 내리쳤다.
콰아아앙!
마치 천둥이 내려친 듯 강렬한 타격음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의 손톱에 막히긴 하였으나 궁수는 계속해서 놈을 몰아쳤다.
콰앙!
먼저 마력을 담은 왼발로 땅을 거세게 밟았다.
그러나 놈은 가볍게 궁수의 마력을 피하며 오히려 궁수를 향해 달려들었다.
캉! 카카카카칵!
날카로운 손톱이 분쇄자와 부딪히며 불똥이 튀었다.
‘이번에는 왼손…!’
궁수는 이를 의식하고 피하려 했으나 애석하게도 날아온 것은 그의 오른손이었다.
“크흐으윽!”
간신히 피하긴 하였으나 궁수의 뺨에 옅은 상처가 났다.
그러나 궁수도 오히려 자신의 얼굴을 지나친 그의 팔을 잡아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 처버렸다.
콰아앙!
“흐윽!”
“끄으으윽!”
휘이이잉!
곧바로 분쇄자로 놈을 날려버린 궁수는 공중에 뜬 놈을 죽이기 위해 화살을 겨누었다.
“하, 내 등에 있는 게 뭔지 모르나 보지?”
“아는데 병신아?”
궁수도 몰라서 놈을 날려버린 것이 아니다.
단지 궁수의 입장에서는 날아다니는 적을 맞추는 것이 더 쉬웠기 때문이다.
팔다리를 모두 이용하며 재빠른 공격을 해오는 것보단 차라리 저 날개를 이용하여 활강하는 적을 맞추는 게 훨씬 쉬웠다.
그러나 그는 궁수에게 거리를 벌려줄 만큼 멍청하지 않았다.
“어림없다!”
놈은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궁수를 향해 날아들었다.
“흐으읍!”
“크허어억!”
궁수는 상체를 틀어 놈의 공격을 피함과 동시에 무릎을 들어 놈의 복부에 무릎을 꽂아 넣었다.
그리고 미리 준비해둔 화살을 놈의 미간에 박아버리려 했으나 아쉽게도 놈은 슬쩍 고개를 틀어 피해버렸다.
잠시 궁수와 놈의 거리가 벌어지며 서로를 노려보았다.
“하하…. 이거 오래간만이군.”
“닥치고 덤벼, 나 바쁘니까.”
사나운 궁수의 기세에 그는 만족한 듯 자신에게 걸려있던 마법을 해제했다.
“대등한 상태에서 싸워주고 싶었다만, 뭐 어쩔 수 없지.”
“…어어?”
순식간에 덩치를 키운 칠흑의 용이 궁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쩌어어억!
쩅그랑!
절체절명의 상황 다행히도 용의 강렬한 기운을 버티지 못한 결계가 깨지며 궁수는 바깥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궁수를 맞이한 것은 적도 아군도 아닌 나법사의 대마법이었다.
***
“흐어어어어억!”
고작 1미터 차이로 법사의 공격을 피한 궁수는 아직도 깜짝 놀라 심장을 벌렁이고 있었다.
다행히도 아슬아슬하게 허물어진 성벽에 착지한 궁수는 깜짝 놀라 법사를 나무랐다.
“야 이 죽을 뻔했잖아 이 미친놈아!”
“느헤헤헿!? 궁수 나왔다!”
“니 때문에 다시 들어갈 뻔했다 이 새끼야!”
“살았으면 됐다!”
[오 궁수 ㅎㅇ?]
[서버 터짐?]
[씨바 방송 돌아오자 마자 죽을뻔ㅋㅋㅋㅋ]
[바퀴벌레랑 나궁수는 걱정하는거 아니랬음.]
ㄴ 안 죽어서?
ㄴ 아니 죽어도 별 상관 없어서.
ㄴ 인성 수준 ㅋㅋㅋㅋㅋㅋㅋㅋ
궁수는 혹여나 저 미친 드래곤…. 아니 칼리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후다닥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도망쳤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크와아아아아아!”
분노에 찬 드래곤의 포효와 함께 순간적으로 전투에 정적이 흘렀다.
드래곤의 양손에 모인 칠흑의 안개가 적들에게 내려앉았다.
“버프인가?”
드래곤이 부하들에게 버프를 주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그 다음 벌어진 일은 버프와는 제법 거리가 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