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화. 이 검은 이제 제겁니다. 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겁니다.
“제가 왜요?”
“워낙에 위험한 물건이니 말입니다. 저희 쪽에서 맡아두는 게 좋을 겁니다.”
“아하 그러세요?”
눈빛 하나도 변하지 않고 마검을 빼앗으려는 그들이 태도에 궁수가 중지를 들어 올렸다.
“개같은 소리하네.”
“흐음…”
“아무것도 안하고 마검만 낼름 가져가시겠다?”
낮게 으르렁거린 궁수는 천궁을 쥐고 세이비어 놈들을 노려보았다.
마력이 거의 없다시피 했으나 이대로 마검을 뺏기는 것보다는 백방 나았다.
그는 곤란한 듯 인상을 쓰며 물었다.
“그 검을 가지고 어디에 쓰실 생각이죠?”
“네가 알아서 뭐하게.”
“그 검은 자아를 가지고 인간을 타락시키는 무서운 무기입니다. 저희 쪽에 넘기는 것이 아무래도 좋은 선택이라 봅니다만?”
“글쎄다? 무기라는 게 자아를 가진다고 다 나쁜 놈은 아니거든.”
- 흠, 그렇지.
어느새 궁수의 손에는 분쇄자가 들려 있었다. 화살을 만들 마력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에 별다른 수가 없었다.
“흐음, 자아를 가진 무기라니.”
그의 눈가가 가늘어지며 궁수의 천궁을 바라보았다.
더러운 시선을 느낀 궁수는 남은 마력을 쥐어짜며 분쇄자에 불꽃을 일으켰다.
“대가리 터트려버리기 전에 꺼지시지.”
“….”
당장에라도 전투가 일어날 듯한 천치 절명의 상황에서 궁수는 또 다른 수를 준비했다.
“거 좆될 거 같이 좆되 보자고.”
휴대폰을 킨 궁수는 방송 버튼에 손가락을 대며 놈들을 향해 말했다.
“방송 켜서 한번 시원하게 까발려 볼까? 같이 유명인이나 돼보자고.”
“크흐음….”
예상보다 거친 궁수의 태도에 잠시 둘 사이에서는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흘렀다.
아무리 말을 번지르르하게 한들 세이비어라니 그런 들어보지도 못한 곳에서 대뜸 마검을 내놓으라니.
그렇지 않아도 네 건 내 거 내건 내 거를 삶의 모토로 둔 궁수가 순순히 검을 내어줄 리가 없었다.
시한폭탄을 해체하듯 긴장감 넘치는 시간이 흘렀다. 궁수는 한 치도 물러설 생각이 없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저희가 그 마검을 사겠습니다.”
“비매품인데? 누가 팔아준데?”
“1000억 드리죠.”
“좆까 1000조는 가져와.”
애초에 이 빌어먹을 마검 때문에 이 난리를 부렸는데 괜히 잘 알지도 못한 놈들에게 또 마검을 줘서 일이 개판 되는 것은 원치 않았다.
타협이란 없는 궁수의 딱딱한 태도에 결국 꼬리를 내린 것은 세이비어 측이었다.
그들은 한숨을 푹 쉬며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듯 고개를 휘저었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헌터님이 조금 예민하신 것 같군요, 일단은 한국으로 먼저 데려다드리겠습니다.”
“내가 뭘 믿고 니들 비행기를 타는데?”
“그럼 한국까지 걸어오실래요?”
그는 능글맞은 미소를 지으며 궁수를 바라보았다.
‘이것까지 거절할 순 없겠지.’
그리고 그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먼 타국에서 한국까지 걸어가는 것은 궁수라 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허튼짓 하지 마.”
“아무렴요.”
***
“거 꼴이 말이 아니네?”
“닥쳐라.”
“어머 패배하고 왔으면서 으르렁거리는 거야?”
원탁의 방.
방의 중심을 차지하는 원탁에서 다른 가시들이 반호를 비웃었다.
“그냥 저거 폐기하고 차기 흑기사나 정하는 게 어떨까요? 아 이제 마검이 없어서 못하려나? 깔깔깔!”
으드득.
분노한 반호가 이를 악물었으나 이 자리에 있는 가시 중 아무도 외팔의 반호에게 겁먹은 이는 없었다.
심지어는 그보다 서열이 낮은 가시들도 은근히 반호를 비웃으며 손가락질했다.
동료 사이의 정 따윈 없는 곳이기에 반호는 지금 처한 상황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잘못하다간 이대로 ‘폐기’당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럴 순 없어. 어떻게든 내 쓸모를 증명해야만 한다.’
여기까지 어떻게 올라왔는데 고작 이런 실수 한번으로 나락으로 떨어질 순 없었다.
사실 지금 원탁의 회의도 반호의 처분을 위해 모인 자리였다.
“첫 번째 가시께서 입장하십니다.”
척!
영광스런 첫 번째 가시가 들어옴과 동시에 앉아있던 모든 가시들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예를 갖추었다.
실제로 그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지독한 혈기는 같은 가시들이라 하더라도 숨이 턱 막힐 수준이었다.
첫 가시의 손짓 한 번에 다른 가시들은 긴장을 풀고 그제서야 다시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고 첫 가시가 입을 열었다. 근엄한 목소리가 회의실을 울렸다.
“패배했더군.”
단 다섯 글자였으나 반호에게는 마치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쓸모없는 도구는 내가 어떻게 한다고 했지?”
“폐기한다고 했죠~ 캬하하!”
“닥쳐라, 네놈에게 말한 것이 아니니.”
“아, 넵.”
첫 번째 가시는 썩 심기가 좋지 않은 듯 반호를 노려보았다.
포식자 앞에 얼어붙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되었다.
“반호.”
“예.”
“실망스럽구나, 마검도 뺏기고 임무도 실패하고.”
“…죄송합니다.”
“흠, 그래서 내가 너를 살려둬야 하는 이유가 있느냐?”
그것은 마치 사형이 내려지기 직전 최후변론을 하는 시간이었다.
쾅!
반호는 짙어져가는 혈기 속에서 원탁에 머리를 처박았다.
원탁이 부서지며 쩌억, 금이 갔으나 반호의 머리는 멀쩡했다.
“방심했습니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시면 실망시키는 일 없도록 하겠습니다.”
“흐음.”
흑기사 반호.
그의 처분이 정해지는 시간이었다. 잔혹한 첫 번째 가시의 성격상 반호를 살려줄 확률은 매우 희박했다.
따악!
손가락을 부딪혀 소리를 내자 반호의 전신이 가시로 휘감겼다.
반호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시 사이로 모습을 감췄다.
***
한국에 돌아오고 3일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미 각종 인터넷에는 궁수가 벌어둔 일을 대대적으로 알리고 있었다.
궁수 혼자서 한 일은 아니었으나 일개 헌터가 국가의 내전을 종식시켰다는 사실은 세계를 놀라 게 만들기 충분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가시라는 것이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되었다.
일본에선 찰나에 순간에 불과했으나 이번에는 제대로 궁수의 방송에 놈의 얼굴이 담긴 것이다.
일본에서 사용했던 마검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그의 모습은 다른 국가들이 위기감을 가지기 충분했다.
추가로 일본에서 검토를 핑계로 마검을 달라 했으나 궁수가 좆같은 소리 말란 말에 스윽 입을 닫은 일화는 이미 전설이 되었다.
너네 정부 쩔드라.
국가급 전력.
추가로 헬창 궁수까지.
인터넷에서는 매일 궁수의 별명을 찍어내며 주모가 몸살이 걸릴 지경이었다.
“힐.”
“왜?”
“전 한국이 좋아요.”
“음, 그건 나도 그렇군.”
셈, 힐과 함께 쇠질을 하는 궁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1200kg의 특제 덤벨을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올렸다.
“흐으으! 맛있어! 너무 맛있어!”
마치 궁수의 이두와 삼두가 행복하게 미소 짓는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렇게 순순하게 보내줄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뭐 지들이 어째요, 꼬우면 한판 뜨던가.”
“이길 순 있나?”
“못 이기죠, 불가사리 한방에 죽이는 거 못 봤어요?”
“흠, 아무래도 그건 괴물 같긴 했지.”
한국으로 돌아와 세이비어에 대해서 검색해봤으나 나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세이비어에 대한 의구심은 늘어가지만 정작 알아낸 것이 없으니 궁수의 입장에서는 답답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저번에 그 칼은 아직 인벤토리에 있는 건가?”
“왜요? 가지고 싶어요?”
“훠이 무서운 소리 말게.”
“농담이지만요.”
농담을 주고받으며 쇠질을 하기도 잠시 궁수의 휴대폰이 울리며 전화가 왔다.
“쇠질할 때는 개도 안 건든다는데 누구야?”
통화의 발신지는 다름 아닌 이은우였다. 맡겨둔 일도 있었기 때문에 궁수는 바로 그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몸은 좀 어떠십니까?”
“몸이야 늘 좋죠, 그래서 제가 드린 건요?”
“아 그거요?”
궁수가 한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은우에게 준 마검과 그의 팔.
혹시나 뭐라도 알아낼 수 있을까 하여 건넨 것이었으나 그는 난처한 듯 한숨을 푹 쉬며 말했다.
“팔은 인간의 것이 맞습니다. 근육의 밀도나 뼈를 볼 때 상당히 높은 수준의 헌터의 팔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흠, 그 외에는요?”
“DNA를 뽑아 정보를 확인했습니다만 끄응….”
은우는 골치 아픈 듯 키보드를 타닥타닥 두드리며 다시 말을 이었다.
“아무런 정보가 없습니다.”
“흠.”
“별로 놀라지 않으시네요?”
“뭐 그런 짓 하고 다니는 놈들이 퍽이나 정상이겠습니까.”
“하긴, 뭐 그렇네요.”
약간의 기대감을 품기는 하였으나 정말로 아무런 정보도 알아낼 수 없자 조금 김이 빠지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마검은요.”
“그것도 말인데요, 아무것도 알 수가 없습니다?”
“네?”
“지구상의 물질이 아니라는 거? 근데 이건 보통 마물에게서 나온 물질의 공통점이라서요.”
“으음 존나 당연한 소리를 하시네요.”
“애초에 마기가 너무 심해서 다루기도 어려워 죽겠단 말입니다.”
은우는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쭉 내밀고 대답했다. 하긴 궁수도 절로 얼굴이 찡그려질 정도의 마기다.
게이트에 대한 연구도 제대로 되지 않았는데 대뜸 마검을 주고 알아내라 한들 그것이 가능할리 없었다.
‘뭐 별수 없나.’
“일단 알겠습니다. 은우씨의 무능함을요.”
“쓰흡, 제가 무능한 겁니까? 연구원들이 무능한 거지.”
“존나 동료한테 너무하시네요.”
“괜찮습니다. 우린 남이니까.”
“그것 참 신박한 개소리네요.”
잠시 가슴 따뜻한(?) 대화가 오갔다.
“그래서 세이비어 관련된 거는요.”
“그것도 잘….”
“끊겠습니다.”
“아 잠깐만요!”
“아뇨, 됐어요.”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은우가 다급히 궁수를 잡았다.
뭔가 불안한 느낌을 느낀 궁수는 말을 무시하려 했으나 워낙에 다급한 그의 태도에 어쩔 수 없이 다시 스마트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뭔데요.”
“이번에 S급 승격시험 대상자가 나왔습니다.”
“승격시험이요?”
“네, 뭐 보든 말든 헌터님의 자유지만요, 일단 헌터님도 그 명단에 들어가 있어서 말씀 드립니다.”
S급 헌터라.
막연하게 생각은 했지만 벌써 여기까지 오르다니. 피식 웃음을 지은 궁수는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그거 S급은 정부 지명의뢰잖아요.”
“그렇죠.”
“저 최근에 무슨 일한 지 알죠?”
“알고 있죠.”
일본 마검 사태 해결.
에티오피아 내전 종결.
기타 다수의 상위 등급 게이트 클로징까지.
궁수가 의미하는 바는 뻔했다.
“퉁치죠?”
사실 이미 S급 헌터에 오르고도 충분할 업적이었으나 은우는 그럴 순 없다는 듯 말했다.
“저도 그렇게 해 드리곤 싶지만 아시잖아요? 안 되는 거.”
“아휴 확 이민을 가버리던가 해야지.”
“헌터님 제발요.”
“요즘 미국이 대우가 좋다던데~”
“아흐흐흐흑 헌터님! 저 웁니다?! 울어요!”
다른 헌터라면 몰라도 S급 확정이나 다름없는 궁수가 한국을 버린다니.
은우가 바짓가랑이를 잡고 질질 빌면서도 말려야할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궁수도 정말로 나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가볍게 운을 때며 물었다.
“그래서 의뢰가 뭔데요.”
“흠 다름이 아니고 최근에 새로 등장한 게이트가 애를 먹고 있어서 말입니다.”
“게이트요?”
“예, A급 게이트인데 먼저 들어간 A급 헌터 여덟이 돌아오지 않습니다.”
A급 게이트에 A급 헌터 여덟 명이라니, 충분히 해결하고도 남을 전력이었다.
아무리 A급 게이트의 난이도가 높다고 하더라도 베테랑을 여덟이나 갈아 넣고도 클리어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덟 명이면 해결할 만 한데요?”
“일주일쯤 기다려도 나오지 않으니 A급 10명으로 이루어진 구조대를 보냈는데.”
“걔들도 안 왔다?”
“그렇죠.”
“그래서 데려와라?”
“정답!”
궁수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했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짚이는 것은 없었다.
“그걸 나 혼자 가라고? A급 열여덟이 사라진 곳을?”
“왜요? 못해요?”
“못할 건 없지만….”
“추가로 S급 힐러인 한가은 헌터님도 함께 갈 예정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요?”
‘S급 힐러라, 이러면 말이 달라지지.’
궁수는 납득하며 이은우에게 정보를 보내달라 말 한 후 전화를 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