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힘숨찐 해방.
“누구…?”
“아, 반갑습니다.”
검은 복면에 붉은 망토를 걸친 사내였다. 그는 오른손을 굽혀 격식을 차려 인사를 하며 자연스럽게 소개를 이었다.
“저는 그분의 여섯 번째 가시 반호입니다.”
“뭐? 가시?”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저는 로쿠님에게 도움을 드리고자 직접 찾아왔습니다.”
그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유창한 일본어에 로쿠는 조심스럽게 창문에서 내려왔다.
달빛을 받아 어스름히 빛나는 그는 어딜 보더라도 너무나도 미심쩍었다.
“나 알아요?”
“물론이죠, 알다마다.”
그는 천천히 로쿠 앞으로 다가왔다. 족히 10센치는 넘는 키 차이에 순간 로쿠가 움찔거렸다.
체급도 체급이지만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섬뜩한 붉은 기운은 로쿠가 감당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제가 당신을 어떻게 알았는지, 제가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
“저는 당신에게 복수할 수 있는 힘을 줄 수 있습니다. 낮의 쓰레기들은 가볍게 죽여 버릴 수 있는 힘을 드릴 수 있습니다.”
“죽여? 내가?”
“그리고 그 힘은 고작 쓰레기들이 아닌 세상의 상위 헌터들을 상대로도 밀리지 않죠!”
로쿠는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인상을 쓰고 그를 바라보았다.
소름 돋는 기운을 내뿜는 그는 자꾸만 로쿠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아…. 닳고 닳은 그 눈빛, 그거에요! 어떤 보석보다도 아름다운!”
자신의 어깨를 끌어안은 복면남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정말로 흥분되는 듯 거친 숨을 몰아쉬며 로쿠의 검은 눈빛을 음미했다.
“물건이죠.”
“뭐?”
“당신의 눈 말입니다. 이런 양질의 물건은 오랜만이라 조금 흥분했네요, 미안합니다.”
“무슨 이런 또라이가 다 있지.”
“또라이라뇨~”
그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뭣…?”
인벤토리가 아닌 마치 공간을 찢는 듯한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새까만 공간 속에서 그는 검은색 검을 꺼내었다.
“검…?”
“정말 아름답지 않나요?”
고풍스러운 손잡이, 중앙에 박혀있는 붉은 보석, 추가로 느껴지는 무시무시한 예기까지.
보석을 제외한 모든 곳이 검은 흑도였다.
그는 마치 아기를 다루듯 소중히 검을 쓰다듬었다.
손잡이에 얼굴을 붙이고 연인이라도 되는 양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그렇게 한참동안 남자가 검을 쓰다듬은 후에야 그는 다시 로쿠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 검이 당신을 강하게 만들어줄 겁니다. 당신은 그저 이 검으로 복수를 하면 되는 거에요!”
“…복수.”
“그래요! 복수! 너무 달콤한 이름이지 않나요! 한을 진 상대방의 머리통을 베어버리고! 눈알을 꺼내서! 다시 입에 쑤셔 박…. 아이고, 죄송~”
남자가 다소 섬뜩한 말을 꺼내긴 하였으나 로쿤은 상관없었다.
복수라는 달콤한 말과 힘이라는 절대적인 권능이 있다면 로쿠는 기꺼이 목숨을 바칠 의향이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로쿤의 목숨을 바칠 가치가 충분했다.
“좋아.”
“그럼 결정이군요.”
로쿠는 남자에게 검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로쿠의 의식이 끊어졌다.
***
“사…. 살려줘! 로쿠! 부탁이야! 나는 그 놈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어두운 뒷골목 남성의 처절한 구걸이 주변을 울렸다.
그 남자는 다름 아닌 로쿠를 괴롭혔던 세 명 중 한명이었다.
“로쿠라….”
“히이이익!”
로쿠가 칠흑의 검을 그의 다리 사이의 땅에 처박았다.
“확실히, 그런 이름을 가지고 있던 때도 있었지.”
- 즐거워 보이는구나 쿠로여.
“복수가 이렇게 달콤한 줄 누가 알았겠어?”
이제는 로쿠가 아닌 쿠로가 되버린 그는 서늘한 미소를 지으며 인벤토리를 조작했다.
툭.
“어?”
그것은 고깃덩어리, 정확히는 사람의 머리였다.
세 명 중 두 명의 머리가 바닥에 떨어졌다. 쿠로는 그들의 머리를 쥐고 흔들며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네 차례야.”
“자, 잠깐….”
서걱!
골목에는 더 이상 남자가 아닌 고깃덩어리가 한 개 더 생겼다.
“하아, 하아, 그래 이거야! 이 통쾌하고도 만족스러운 기분! 아아! 내 그동안 어찌 모르고 살았을까!”
- 이제 시작일 뿐이다, 즐거운 일은 얼마든지 있다.
“그래, 그래야지, 아직 세상에는 죽일 놈이 너무 많아.”
- 어울려주마.
“그래, 파트너.”
***
- 계약자여,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너무하지 않는가.
“뭐, 나 바빠.”
- 바쁘다기엔 크흠….
궁수는 지난 이 주 동안 길드 본부에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
휴가라고 갔더니 마물들이 쏟아져 나온 것부터 어디서 놀다 왔는지 거지같은 싸이코 집단까지.
“에이 모르겠다~ 확 내일 멸망이나 돼라~.”
- 크흠, 적어도 선택받은 헌터로서 할 말은 아닌 것 같다만.
“아주, 나 혼자 지키지, 안 그래?”
- ….
한꺼번에 몰아친 사건에 번아웃이 와버린 궁수는 소파에 누워 휴대폰을 뒤적이고 있었다.
너튜브도 볼 것이 없었던 궁수는 포털 사이트에 들어갔다.
딱히 할 일도 없었기에 세상 돌아가는 꼬라지나 보자는 생각이었다.
궁수의 이목을 잡은 기사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거쳐 간 듯 5만이 넘는 댓글이 달려있었다.
“와…. 뭐야?”
기사에 달린 영상은 퍽이나 끔찍했다.
일본의 시내 한가운데에서 칠흑의 검을 든 사내가 무자비하게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있었다.
그는 민간인, 헌터, 경찰을 막론하고 살인을 저질렀다.
더군다나 웬만한 상위 헌터들도 그를 막기는커녕 무참하게 죽어 나갔기 때문에 현재 일본이 애를 먹고 있는 듯했다.
“미친, 뭐냐 이게.”
그는 말 그대로 거리를 종횡무진하며 눈에 들어온 것 전부를 베어버리고 있었다.
왼쪽 상단에는 그의 이름과 본 모습이 함께 올라와 있었다.
“로쿠? 순둥하게 생겨서 세상에….”
- 뭔데 그런…. 허억!?
“왜, 뭐라도 보여?”
궁수의 휴대폰을 들여다본 천궁이 깜짝 놀라 눈을 부라렸다.
물론 눈이 어딨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 마검! 마검이다!
“뭐? 저게?”
- 그것도 하필 복수의 마검이라니! 제길!
“뭐? 복수?”
천궁은 몹시 골 아픈 일이라도 생긴 듯 인상을 팍 쓰고 계속해서 궁수의 휴대폰을 응시했다.
실제로 천궁에게 얼굴은 없었지만 아마 있었다면 지금쯤 눈을 부릅뜨고 미간에 빡 힘을 주었을 것이다.
영상에서는 아직도 로쿠가 날뛰고 있었다. 그가 검을 휘두르면 검은 잔상이 남기며 무참히 모든 것을 베었다.
심지어는 자동차나 헌터들이 발사한 마법까지도 모조리 베어버렸다.
일반 총알은 그의 전신에 솟아난 검은 마력에 막혀 뚫고 들어가지도 못했다.
- 계약자여, 지금 당장 일본으로 가야한다.
“응? 내가? 왜?”
- 어쩌긴! 마검이 나왔으니 당장 제압해야 하지 않겠느냐! 이러다간 저 일대가 피바다가 될 거다!
“그건 딱하지만….”
물론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모습은 딱하긴 하였으나 그건 일본의 일이다.
굳이 한국인인 자신이 넘어가 일을 수습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내가 뭐하러?”
- 사람을 구하는데 당연히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난 네가 왜 그렇게 노발대발 하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섬나라에서 마검 하나가 날뛸 뿐이잖아?”
일본은 한국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강한 헌터들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다.
물론 저 남자가 압도적으로 강해 보이긴 하였으나 아무리 그래도 저 남자 하나를 제압하지 못해서 나라 전체가 골골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 아니다. 지금은 고작 침식이 1단계밖에 진행되지 않아서 그런다.
“1단계? 그럼 앞으로 몇 단계가 더 있단 거야?”
- 그렇다.
“그럼 완전히 침식되면 어떻게 되는데?”
- 그건….
천궁은 생각하기도 싫은 듯 끄응 고민하며 대답했다.
- 저 나라는 멸망할거다.
“…뭐?”
아무리 침식이 되었다지만 어디 후진국도 아니고 일본인데.
그리 쉽게 멸망이 될 거란 말은 썩 신빙성이 없었다.
천궁은 답답한 듯 아오! 진짜! 야! 같은 의미 없는 말을 뱉으며 노발대발 성질을 내기 시작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진정한 천궁은 차분하게 다시 말을 이었다.
- 전에 상대했던 서큐버스 퀸 기억나느냐?
“당연하지, 설마 저게 그거보다 쌔?”
- 지금은 아니다만, 최종 침식이 완료되면….
“완료되면?”
심각한 천궁의 말투에 궁수도 덩달아 인상을 구겼다.
- 서큐버스 퀸 열 마리가 와도 저걸 이기지 못 할 거다.
“뭐…?”
서큐버스 퀸은 궁수의 뇌리에 똑똑히 박혀있었다.
그것도 그럴 것이 여태까지 궁수가 상대했던 적들 중 단연 가장 강력한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정말 생사의 고비를 넘나들며 상대했던 녀석이기 때문에 궁수는 똑똑히 그녀의 힘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괴물이 열 마리가 와도 상대가 되지 않는다니.
‘이게 말이야 방구야?’
궁수의 표정이 심각해짐에 따라 천궁도 부가적으로 설명을 이었다.
- 저 검에 몇이나 되는 사람이 죽어 나갔는지 아느냐? 완전히 침식이 완료되면 같잖은 마법이나 공격은 통하지도 않는다.
“뭐?”
- 네 잘난 궁술이나 법사의 마법으로도 피해를 입힐 수 없단 말이다!
“그러면 개사기잖아.”
- 그러니까 더 강해지기 전에 제압해야지!
복창이 터진 천궁은 끈질기게 궁수를 설득했다. 마검의 위험성, 실제로 마검이 대륙을 멸망시킨 이야기까지.
물론 아직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하지 못한 궁수는 조용히 천궁의 말을 흘려들었다.
“야, 그럼 물어나 보자.”
- 뭐냐.
“내가 저걸 해치운다 쳐, 그럼 나한테 좋은 게 뭔데.”
보상도 뭣도 아무것도 없다.
물론 평소에도 보수를 바라고 하는 일은 아니었으나, 굳이 타국에 날아가서 저 위험해 보이는 녀석을 상대하고 싶지는 않았다.
궁수의 말을 들은 천궁은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애초에 내가 저런 걸 상대해야 할 필요도 없잖아, 저쪽 나라 헌터들도 유능하다니까? 지내들 일인데 지들이 처리해야지.”
혓바닥이 길어진 궁수의 말에 천궁은 짧게 한마디 뱉었다.
- 쫄?
“아니 쫀 게 아니라 내 말은 이득이….”
- 쫄?
“누가 쫄아 쫄기는? 저런 거 내가 이긴다니까? 나는 그저 일본의 헌터들을 믿는 것뿐이지.”
- 쪼오올?
“….”
궁수가 휴대폰을 집어넣고 양손에 깍지를 끼고 그대로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야.”
- 세상 쌘척은 다하더니, 에이잉 쭉쩡이였군.
천궁은 미끼를 던진 것이고.
“…콜.”
궁수는 고것을 확 물어분 거시여.
- 그래야 내 계약자 답지.
궁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바깥의 헌터들을 향해 외쳤다.
“나랑 일본 여행 갈 사람!”
“응? 웬 일본?”
“민간인은 빠져, 셈! 힐! 온천이 근육에 그렇게 좋다는데 가시죠!”
“흐으음, 온천이라, 확실히 최근 좀 몸이 뻐근하긴 했지.”
그러니까, 궁수는 미끼를 던진 것이고.
“좋군! 같이 가도록 하지!”
“나도! 나도!”
“저는 좀 쉬겠습니다.”
동료들은 고것을 확 물어분 거시여.
고수혁을 제외한 나머지 헌터들은 모두 동의의 의견을 비췄다.
마지막으로 궁수는 휴대폰을 들어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헌터님 어쩐 일로 전화 주셨나요.”
“몸은 좀 어때요?”
“글쎄요, 아직 좀 뻐근한 게 있어서 쉬고 있습니다.”
‘호오, 그러시겠다?’
“이미 다 나았잖아요.”
“낫다뇨, 아직 후유증이…”
“됐고 은우씨, 같이 온천여행 어때요?”
“온천이요?”
궁수는 세상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미끼를 던졌다.
“흐음, 국내에 온천이 괜찮은 곳이 있나요?”
“일본으로 갈 겁니다. 표를 싸게 구해서요.”
“호? 일본이요?”
“네, 뜨끈한 노천탕에서 달을 보면서! 크흐으으! 술도 한잔 딱하고!”
“오오오….”
“밤에는 헌팅도 다니고!”
“오오오오!”
그러니까.
궁수는 미끼를 던진 것이고.
“좋습니다! 언제 가나요?”
“오늘요.”
“…네?”
은우는 고것을 확 물어분 거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