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휴가라면서요(1)
“사탄, 악마, 쓰레기, 폐기물.”
“아, 뭐요, 이겼으면 됐지.”
“크흠…. 어떻게 사람이 때려도 그런 곳을.”
“안 때렸거든요?”
셈은 일주일 전의 상황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떨었다.
궁수의 엄청난 일격에 로이드는 그대로 거품을 물고 기절하고 말았다.
그가 눈을 까뒤집고 바지를 적시며 실신한 모습은 그대로 전 세계의 언론에 그대로 방송되었다.
궁수는 아직도 길드 동료들에게 놀림을 받고 있었다.
“대머리는 닥쳐.”
“흐으윽!”
“어찌 그런 심한 모독을!”
“시끄러 민둥산들이 어딜 발언권도 없이 말을 해.”
순식간에 대머리 둘을 시무룩하게 만든 궁수는 한숨을 푹 쉬며 남아있던 프로틴을 깔끔하게 해치웠다.
텁텁한 기존의 프로틴 치고는 너무나도 깔끔한 뒷맛이 궁수의 혀를 맴돌았다.
“그래서 언제까지 쉴 생각인가.”
“글쎄요, 이번 달은 쭉?”
호주에 다녀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아무리 궁수라고 하더라도 계속해서 흉측한 괴물들을 상대하는 것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무리가 있었다.
“흐아아아, 어디 휴가라도 가고 싶은데.”
“이 직종에 휴가가 어딨나.”
“은퇴할까…”
“죽으면 은퇴하는 거지.”
“뭐라는 거야 이 미친 대머리가.”
힐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궁수를 놀려먹었다.
호주를 다녀온 이후 제법 친해졌기 때문에, 도 넘는 장난에도 웃어넘길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물론 계속해서 대머리라고 놀리면 힐이 극대노하기 때문에 궁수도 어느 정도 선을 지켜야만 했다.
그렇게 계속해서 쇠질과 프로틴을 반복하던 차, 궁수의 휴대폰이 시끄럽게 비명을 질렀다.
마침 무료했던 차였기에 궁수는 휴대폰을 들어 대상을 확인했다.
“쓰흡…. 귀찮은데.”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다름 아닌 이은우였다.
그가 전화할 때마다 늘 귀찮은 일이 연류 되어 있었기 때문에 궁수로서는 썩 달갑지만은 않았다.
“에이, 귀찮아.”
뚝.
궁수는 일말의 고민도 없이 은우의 전화를 끊었다. 모처럼 일에서 해방된 지금 굳이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궁수가 전화를 끊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 번 더 휴대폰 전화음이 울렸다.
띠리리리링! 띠리리리링!
발신지는 역시나 귀찮은 정부의 개… 가 아니라 이은우였다.
“살다 살다 남자한테 집착을 당해보네.”
거절!
삼국지를 보면 유비도 제갈량한테 삼고초려를 했는데 두 번까지는 괜찮지 않겠는가.
“암, 영웅호걸은 그리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지.”
- 그건 또 무슨 소린가 계약자여.
“그런 게 있어, 어차피 또 연락할걸.”
궁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한 번 더 궁수의 휴대폰이 벨소리를 울렸다.
전화를 끊을지 말지 고민하던 궁수는 결국 이은우의 그 끈기를 생각하여 전화를 받아주었다.
“여보세요?”
“…이제야 받으시네요?”
“뭘요.”
“전화요.”
“했었어요?”
“네? 통화 신호 안 갔어요?”
“왔죠.”
“야이 씨ㅂ….”
잠시 이은우가 화려한 육두문자 쇼를 선보일 뻔했으나 그는 이를 악물어가며 이를 참았다.
궁수의 능청스러운 태도에 두 손 두 발 다 든 이은우는 결국 한숨을 푹 내쉬며 용건을 말했다.
“헌터님, 이번 주말에 시간 되십니까?”
“저요?”
“네, 헌터님이요.”
애초에 이제 막 원정을 다녀온 궁수가 일정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궁수는 남자가 자신에게 주말에 일정을 묻는 것이 썩 탐탁지 않았다.
“약속 있습니다.”
“네? 무슨 약속이요?”
마치 28년간 모태솔로인 친구가 크리스마스에 여자친구와 여행을 간다는 소식을 들은 반응이랄까.
“누구랑요?”
“제가 왜 사생활을 말해야 합니까?”
“헌터님 여자친구 없잖아요.”
“꼭 여자친구랑만 만나야 합니까? 전 뭐 엄마 아빠도 없어요?”
“있었어요!?”
“뒤질래요?”
“농담입니다.”
한차례 가볍게 웃어넘긴 이은우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뭐, 다름이 아니고 헌터님이 그간 고생하셨지 않습니까.”
“네, 했죠 존나 게.”
“크흠…. 뭐 그러니까 제 개인적인 차원으로 휴가를 좀 보내드리려고 했죠.”
“휴가요?”
“네, 휴가요.”
잠시 두 사람의 통화에 정적이 일어났다. 궁수는 급히 뭔가를 확인하는 척하며 말을 바꿨다.
“아, 부모님과 약속이 사실 이번 주말이 아니었네요.”
“네?”
“다음 주였네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그래서 휴가는 어디로 가는데요.”
“…하아.”
궁수가 하루 이틀 그런 것도 아니고 실제로 이번에 크게 활약하기도 했으니 그는 구태여 뭐라고 말하지 않았다.
“전주에 한옥마을 아시죠? 그쪽에 괜찮은 한옥 펜션을 준비했습니다.”
“오오오오! 펜션! 오오!”
“네, 편하게 쉬고 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언제 가는데요?”
궁수는 높아진 텐션으로 이은우를 재촉했다. 한적하고 조용한, 동시에 운치 있는 한옥 펜션에서의 하룻밤이라니!
궁수의 눈이 빛나며 묘하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혹시나 꼬리라도 달려있었다면 선풍기처럼 힘차게 돌아갔을 정도였다.
“내일이요.”
“…네?”
“성수기라 썩 방이 많지는 않더군요.”
“몇 박 며칠?”
“2박 3일요.”
“그러니까 2박 3일 여행을 하루 전에 알려줬다는 거네요?”
사실 펜션의 자리는 얼마든지 남아있었으나 구태여 이은우는 바로 다음날로 펜션을 예약했다.
일종의 장난과 동시에 소소한 복수였다.
“뭐, 싫으시면 다른 분 드리고요.”
싫음 말고!
아! 이 어찌 더럽고 추잡한 말인가.
‘필요한 거 사고, 준비하고 하면 흐음….’
애초에 딱히 챙길 것도 없다. 대충 속옷과 옷 몇 장이면 되는 것 아닌가?
궁수는 결국에는 이은우의 제안을 수락할 수밖에 없었다.
***
“저 푸른 초원 위에!”
“위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짓고!”
“사랑하는 우리 님과~!”
“힐 여자친구 없잖아요.”
“닥치게.”
“넵.”
궁수는 지금 승용차에 몸을 실고 동료들과 함께 전주로 내려가고 있었다.
멤버는 궁수, 법사, 셈, 힐, 고수혁, 이은우.
허가연도 데려오고 싶었으나 그녀는 처리할 일이 많다며 이를 거절했다.
고수혁도 남자들의 땀내 나는 여행에 썩 내키지 않았으나, 요리할 사람이 없기도 했고 여차하면 문을 따고 납치할 기세였기에 어쩔 수 없이 여행에 합류했다.
“그런데 은우씨는 왜 왔어요.”
막상 보내주는 것처럼 생색이란 생색은 다 내놓고 당일 날, 당연하다는 듯이 이은우는 일행에 합류했다.
물론 딱히 궁수가 은우에게 악감정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괜시리 한번 놀려보고 싶었다.
“제가 냈는데 전 오면 안 됩니까?”
“정부의 충실한 개…. 헌터가 이렇게 막 빠져도 되요?”
“개라니! 나도 사람이야 사람!”
“사람이었어?!”
“멍멍멍멍!”
“푸하하하!”
모두 상당히 기분이 업 된 상태였기에 기나긴 여행길에서도 딱히 지치지 않았다.
애초에 다들 헌터였기에 체력으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들이었다.
노래와 흥이 함께하는 차량 속에서 이은우가 조용히 나궁수에게 말을 걸어왔다.
“궁수님?”
“네?”
그는 마치 대단한 비밀이라도 말하는 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되뇌었다.
“이건 궁수님한테만 몰래 알려드리는 건데…. 그 한옥에서 밤이 되면 특별한 이벤트를 한다고 합니다.”
“이벤트요?”
“네, 요즘 전주가 도깨비를 컨셉으로 밤마다 담력시험이 열린다고 합니다.”
“네? 도깨비요? 전주가 도깨비랑 무슨 상관이 있나요?”
물론 궁수가 민간 설화에 빠삭한 사람은 아니었으나 전주와 도깨비는 별 관련이 없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도무지 어울리려 해도 어울리는 것이 하나도 없어서 궁수로서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은우는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투로 말을 이었다.
“뭐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그 컨셉이 잘 먹혀 들어가나 봅니다.”
“그래요?”
“여튼!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중요한건 담력시험입니다.”
“그게 왜요, 진짜 귀신이라도 나와요?”
“에헤이! 우리 헌터님 감이 없어도 너무 없으시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이은우는 마치 대단한 것이라도 있다는 것처럼 조용히 궁수의 귀에 속삭였다.
“그 담력시험을 놀러 온 여성분이랑 같이 간다 이겁니다! 여성분이랑!”
“네?”
“일종의 소개팅이랑 비슷한 거죠, 어두운 숲! 무서운 도깨비! 그곳에서 피어나는 남녀의 사랑!”
“흐음….”
“흔들다리 효과라고도 하지 않습니까!”
물론 궁수도 연애 경험이 전무하였으나 딱히 여자친구가 필요하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옆구리가 시렵다, 외롭다와 같은 말 들은 궁수와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시려우면 운동하면 되고 외로우면 덤벨이 있는데 굳이?’
이미 뼈 속까지 헬창의 DNA가 흐르는 궁수에게 있어서 여성이란 그저 염색체 XX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은우는 그렇지 않은 듯 후욱, 후욱 숨을 몰아쉬며 이미 망상에 빠져 있었다.
이야기를 다 들은 궁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조용히 이은우를 바라보았다.
궁수의 표정은 마치 개짓거리 하는 손자를 바라보는 할머니의 눈빛이었다.
“왜요, 왜 그렇게 보시는 겁니까.”
“아냐, 은우 하고 싶은 거 다 해.”
“아니 왜, 왜 그렇게 보는 건데.”
“이 할미는 은우 먹는 거만 봐도 배불러.”
“뭐요, 제가 뭘 먹어요.”
궁수는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창밖을 바라보았다.
화창한 햇살과 푸른 하늘을 꾸미는 새하얀 구름이 오늘따라 더욱 아름다웠다.
“도착!”
한옥 마을은 제법 인파가 있었다. 어림잡아 한 거리에 수백은 될 정도?
그렇다고 관광을 하지 못할 정도로 많은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사람들이 있어 마을이 더욱 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잠시 주변을 둘러보던 와중 나법사가 궁수의 옆에서 팔짱을 끼었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입술을 내밀고 주변을 살펴보고 있었다.
“여기까지 놀러 와놓고 표정이 왜 그래.”
휴가를 간다 했을 때 가장 좋아했던 법사다.
차에서 부모님과 마지막으로 갔던 휴가가 생각난다며 방방 뛰며 입이 귀에 걸릴 수준이었다.
“냄새난다.”
“냄새? 무슨 냄새?”
혹시나 무슨 악취가 나는지 궁수도 코를 킁킁거렸으나 딱히 무슨 냄새는 나지 않았다.
오히려 상점에서 파는 고소한 전 냄새가 궁수의 코끝을 찔렀다. 궁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법사에게 물었다.
“냄새 안 나는데? 설마 저 전 때문이야?”
“아니다! 난다 냄새! 더러운 냄새!”
“흐음…. 나는 잘 모르겠는데, 하수구 냄새려나?”
“으으! 구린 냄새! 간다! 빨리!”
“그래, 빨리 가서 짐이나 풀자.”
궁수는 마을 구경은 이쯤 하고 동료들과 함께 펜션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은우가 말 한대로 한옥 펜션의 모습은 깔끔했다.
대들보와 마루, 기와가 올라간 지붕은 정말로 한옥이구나! 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시원한 통유리가 뻥뻥 뚫려있어 퓨전 한옥임에도 전혀 이질감이 없었다.
말 그대로 휴가를 즐기기에 최적의 공간이 아닐 수 없었다.
짐을 푼 궁수는 마루에 철퍼덕 누웠다.
바람이 통해 선선한 마루에 간질간질 불어오는 바람에 절로 낮잠이 올 지경이었다.
“우린 이제 나갈 건데, 잘 거야?”
“아니, 그냥 조금 누워있던 거였어.”
짐 정리를 끝낸 동료들이 가벼운 차림으로 밖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별건 아니고 마을이나 둘러보며 쉬자는 마음이었다.
아까 마을에 들어오며 맡았던 전 냄새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끄으응! 가자 가!”
기지개를 피며 일어난 궁수는 슬리퍼를 질질 끌며 동료들과 함께 밖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