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대머리는 약하지 않다.(2)
“셈! 안돼! 지금 뭐하는 거야!”
“갑자기 왜 자해를?!”
“뭐야? 설마 포기하는 건가?”
갑작스러운 셈의 돌발 행동에 헌터들도 적잖게 당황했다.
그러나 정작 팔이 잘린 본인은 대수롭지 않은 듯 고통스러운 비명도, 어떤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한수 앞의 상황도 예측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상황 바로 이 다음 벌어진 상황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스스스스스….
“팔이…. 다시 생겼다?”
뼈와 살이 다시 돋아나는 그런 드라마틱한 수준의 재생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차라리 새 살이 돋아나는 재생이 훨씬 나을지도 모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지금 잘려나간 샘의 왼팔에는 피로 만들어진 새빨간 팔이 달려있었기 때문이다.
꿀꺽.
긴장한 헌터들도 꼴깍 침을 삼키며 셈을 노려보고 있었다.
“정말 괴물이 따로 없군….”
셈이 뿜어내는 기색은 S급 헌터들조차 몸을 위축하게 만들 지경이었다.
잠시 헌터들과 셈의 신경전이 이어졌다. S이라 함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존재들이다.
셈은 그런 존재들과 기싸움에서 오히려 압도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었다.
절그럭.
“옵니다!”
콰앙!
“크흐으으윽!?”
가볍게 발을 구른 것뿐인데 탱커의 수호 장벽에 거대한 파문이 일어났다.
쾅! 쾅!
“오래는 못 버티네!”
상대는 괴물이 아닌 사람이다. 셈은 집요하게 수호벽의 한 곳만을 파고들었다.
저 거대한 대검으로 그런 정확도를 보일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었다.
“저와 근접 딜러들이 먼저 들어가겠습니다. 후방 지원 부탁드립니다.”
“네!”
유강한을 비롯한 근거리 딜러들이 먼저 몸을 날렸다.
도적은 단검을 역수로 쥐고 계속해서 살수를 날렸으며 유강한과 카른은 집요하게 가슴팍의 보석을 노렸다.
과연 S급 헌터다운 훌륭한 합격술이었다.
탱커를 공격하던 셈이 기습적으로 검로를 틀어 유강한의 머리통을 노렸다.
예상하지 못한 틈을 노리는 공격이었으나 그는 검을 비틀어 셈의 공격을 흘러내었다.
“하아압!”
유강한이 셈의 관심을 끄는 사이 카른이 마력을 일으켜 창을 세워 셈에게 돌진했다.
마치 한줄기 빛과 같은 예리한 공격이었으나 아쉽게도 그 공격이 셈에게 닿는 일은 없었다.
셈은 땅을 짓밟아 파동을 만들어 카른의 자세를 순간 망가트렸다.
“치잇, 더럽게 까다롭네.”
공격에 실패한 카른이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셈은 자신이 공격을 당할 뻔 했다는 사실이 분했는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어딜 미천한 날파리가….”
셈의 전신에서 붉은 기운이 일렁였다. 그것은 붉은 갑주를 타고 이내 대검에까지 깃들었다.
“피해요!”
촤아아아악!
궁수가 헌터들에게 소리친 것과 셈이 붉은 검기를 날린 것은 거의 동시였다.
콰가가가각!
콰아앙!
“크허억!”
다행히도 다른 헌터들은 피했으나 카른은 공격을 피하기는 이미 늦었다.
그는 급한 대로 창을 들어 날아드는 공격을 막았으나 셈의 검기는 막는다고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날아드는 검기에 밀려 벽에 처박힌 카른의 이마에서 피가 한줄기 흘러내렸다.
“흐으으, 거 더럽게 빡세네.”
튼튼한 S급 헌터답게 카른은 바로 일어났으나 그의 숨은 전보다 훨씬 거칠어져 있었다.
“퉤, 힘만 무식하게 세서는.”
피가 고인 침을 뱉은 카른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거 존나 터프하게 싸우시는구만!”
그야말로 일기당천.
마치 삼국지의 여포가 떠오를 정도로 셈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원래라면 아무리 셈이 강하다 하더라도 S급 헌터들을 상대로 이 정도까지 싸울 수는 없을 것이다.
갑주가 문제인지 혹은 새로운 능력을 얻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확실히 평소의 배는 강력해져 있었다.
“하! 나도 가만히 있을 순 없지!”
이전 공성전 때 인벤토리 가득 받아두었던 마력포션을 꺼내 그대로 원샷했다.
“크흐으!”
전신에 회색빛 마력이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마치 몇 시간동안 땀 흘리며 운동을 마친 후 시원한 프로틴 한잔을 마시는 그런 느낌이었다.
“컴파운드 보우.”
마력 포션은 차고 넘친다. 탱커도 한숨 돌린 듯 여유가 있어 보였고 근접 딜러들은 조금 버거워 보이긴 했으나 그래도 나름대로 잘 버텨주고 있었다.
다시 말해서.
- 독무대로군.
“그렇지.”
화살통에 회색빛 마력 화살이 가득 찼다.
‘어차피 죽일 수는 없다. 최대한 지원을 하는 쪽으로 견제하자.’
마침 셈의 거대한 대검이 카른을 향하고 있었다. 휘두르는 검을 맞추라니, 다른 궁수들이라면 개소리라며 쌍욕을 뱉었을 것이다.
하지만 궁수는 가능했다.
궁수만이 가능하고 궁수만이 할 수 있는 미친 장기였으니 말이다.
쐐애액!
태풍을 머금은 화살이 궁수의 시위를 떠나갔다.
터엉!
소용돌이치며 날아간 화살은 정확히 셈의 대검을 타격했다.
“…뭐?”
“이걸 맞춰?”
옆에서 지켜보던 마법사와 힐러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코앞에서 이를 바라본 카른 마저 깜짝 놀라 궁수를 바라보았다.
“화력이 끝인 줄 알았는데….”
궁수의 단편적인 모습만을 봐온 헌터들은 신기에 가까운 궁수의 활솜씨에 눈을 부라렸다.
“뭐해요? 빨리 안 움직이고!”
“아, 그래야지!”
카캉!
정신을 차린 카른이 창을 크게 휘둘러 거리를 벌렸다.
마치 유강한과 카른, 그리고 도적 이렇게 세 명의 헌터들이 셈을 감싸고 있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이렇게까지 후방 지원을 믿은 적은 없었는데.’
마치 그들에게 있어서는 여분의 목숨이 하나 더 있는 것처럼 든든하기 그지없었다.
“같잖군….”
셈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혀를 차며 자세를 갈무리했다.
여태껏 한손으로 휘두르던 대검을 양손으로 쥐었다.
“지금부터가 본판이다.”
콰앙!
“흥!”
셈이 땅을 박차고 도적에게 돌진했다. 다른 직업에 비해 방어력도 약하고 공격력도 약하다.
물론 그도 S급 헌터였지만 비교적 다른 헌터와 비교해서 밀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셈이 보일 수 있는 최적의 수라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말은.
쐐애액!
까앙!
궁수도 이를 주의 깊게 바라보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모자란 곳을 채워주는 곳이 후방지원인 궁수가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궁수의 화살이 정확히 셈의 대검을 노리며 날아들었다.
당황한 셈이 검로를 틀었으나 이미 그때는 도적은 안전한 곳으로 후퇴한지 오래였다.
“라이트닝 스퀘어!”
타이밍 좋게 캐스팅을 끝낸 마법사가 셈에게 속박 마법을 적중시켰다.
셈의 주변에 새하얀 빛의 기둥이 나타나며 셈을 에워쌌다
마력을 일으킨 궁수가 주의 깊게 셈을 노려보았다.
“포인트 어택.”
셈의 몸에 또다시 노란 과녁이 떠올랐다.
“허어? 한 개?”
셈의 약점은 오직 가슴팍의 붉은 보석이 전부였다.
“하, 까라면 까야지.”
태풍이 궁수의 화살에 깃들었다. 어차피 죽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셈이 자신의 공격에 정신이 팔려 다른 헌터가 노릴 수 있는 틈이 나온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쐐애애액!
거친 파공음을 내며 날아간 화살은.
“…네?”
콰득!
셈의 왼손에 잡혀 간단히 부숴졌다. 전투 시작할 당시 셈이 잘라내었던 왼팔이었다.
“이 거리에서 이걸 막는다고…?”
이 정도 거리라면 속도는 거의 총알이나 다름없는 셈이다. 저 무거운 갑주를 입고 총알과 같은 속도로 날아드는 화살을 막다니.
“도대체 얼마나 괴물인거야….”
“하아…. 슬슬 재미없군.”
셈은 왼손으로 가볍게 속박을 찢고 나왔다.
“최상위 속박 마법을 저렇게 쉽게!?”
콰직!
셈은 대검을 땅에 꽂아 넣었다. 셈의 갑주에서 미친 듯이 붉은 기운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뒤로! 젠장 늦었나!”
후퇴하라는 말을 할 틈도 없이 근거리 딜러들이 붉은 기운에 먹히고 말았다.
알현실 안에서 피로 만들어진 혈구가 만들어졌다.
“젠장…. 안 보여.”
급한 대로 궁수는 포인트 어택을 활용하여 다른 헌터들에게도 적용시켰다.
헌터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나 나타난 포인트로 하여금 헌터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한 명은 포인트가 네 개 다른 두 명은 포인트가 세 개였다.
그리고 중앙에서의 포인트 단 한 개.
다름 아닌 셈이었다.
“라이트닝 스피어!”
마법사가 지체 없이 혈구(血球)를 향해 마법을 날렸으나 어떠한 충격도 주지 못하고 튕겨져 나가고 말았다.
“어떡하지?”
- 흐음, 혈계인가….
“뚫는 방법이라도 알아?”
그나마 가능한 것은 헌터들의 위치 파악이었다. 이마저도 포인트로 겨우 가능한 것이라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다시 말해 궁수의 후방 지원이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저걸, 저걸 어떻게 해야 하지?”
- 뚫어야지 별 수 있겠느냐.
“뚫는다고? 저걸?”
- 그럼 이대로 보고만 있을게냐? 네 동료들이 다 죽어나갈 텐데?
“….”
궁수는 조용히 장궁으로 형태를 변환했다. 궁수의 화살통에는 단 한 개의 화살이 채워져 있었다.
화살촉이 일반 화살보다 배는 기다란, 마치 창과 같은 화살이었다.
“쓰읍….”
적중 포인트는 셈.
이왕 쏠 거라면 셈의 포인트까지 함께 노려보자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포인트 한 개가 다른 포인트들을 향해 돌진하였다.
혈계 속 상황은 말 그대로 아수라장.
그렇지 않아도 까다롭던 저격이 더더욱 까다로워졌다. 궁수는 인상을 팍 지으면서도 유심히 결계를 노려보았다.
‘어렵다.’
기다란 화살촉 위로 네 개의 모든 속성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가장 날카로운 부분에는 마치 드릴처럼 회전하는 바람이.
그 다음에는 타오르는 화염이, 중간에는 화염과 빙하를 어울리게 하기 위한 대지가, 마지막에는 냉기를 잔뜩 머금은 빙하의 기운까지.
‘그래도 못할 건 없다.’
궁수의 눈매가 가늘게 휘었다.
자신은 천재였고 천재였기에 늘 기대 받아 왔다. 무엇보다 궁수가 다른 천재들과 확연히 다른 점은 그것 하나였다.
그 누구도 실망시켜본 적이 없다는 것.
격렬하게 움직이는 포인트를 궁수는 유심히 바라보았다.
포인트가 위로 움직이면 셈이 무슨 자세를 취했을지 가로로 흔들리면 또 무슨 자세를 취했을지 서서히 궁수의 머릿속에 그려지기 시작했다.
다른 천재는 결코 할 수 없는, 단 일 점만을 보고서 적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경지에 오른 것이다.
눈 하나도 깜빡하지 않은 궁수는 계속해서 시위를 당긴 채 혈계 안을 주시하고 있었다.
자칫 잘못하다간 눈먼 화살에 동료가 맞을 수도 있는 노릇이니 평소보다 더욱 예민해진 상태였다.
혈계 속 포인트 세 개가 동시에 힘을 합쳐 포인트 한 개를 멈추었다.
그리고 그것은 궁수가 호시탐탐 노리던 기회이기도 했다.
“지금!”
콰드드드득!
마치 드릴처럼 회전하는 화살은 기어코 혈계를 꿰뚫었다.
“아직이다…. 아직.”
혈계를 뚫은 화살은 아직도 힘이 남았는지 그대로 포인트 한 개를 향해 날아갔다.
“제발, 제발…!”
1초라는 시간이 그렇게 긴 시간인지 궁수는 처음 깨달았다.
1
0.8
0.5
0.2
0
화아아악!
“그렇지!”
시간이 지났을 때 혈계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궁수는 마지막까지 화살을 겨누고 셈을 노려보았다. 혈계가 사라지며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붉은 갑주였다.
절그럭.
쩌어억! 쨍그랑!
셈의 가슴팍에 달린 보석에는 정확히 궁수의 화살이 꽂혀있었다.
붉은 보석은 점차 힘을 잃더니 이내 회색으로 바뀌어 평범한 돌로 변하고 말았다.
쿵!
셈은 그대로 뒤로 넘어가 쓰러졌다.
“아직 숨은 붙어있어! 빨리 회수해!”
“어머~? 아끼던 말이 부숴졌네?”
승리의 기쁨을 나누기도 잠시 왕좌에 앉아있던 그녀가 앞으로 걸어 나왔다.
“아쉬워라, 아끼던 말이었는데.”
그녀의 손짓 한 번에 셈의 몸을 감싸고 있던 갑주가 다시 핏빛 가루로 변하여 그녀의 몸에 흡수되었다.
그러나 돌이 되버린 보석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뭐, 더 재밌는 걸 발견했으니까, 그건 돌려줄게.”
“크헤에엑!”
“셈! 정신이 들어요!? 셈!”
“흐으으윽 하아, 하아….”
“치료! 빨리 치료를!”
셈은 숨이 끊어질 듯 얇았다. 힐러는 닥치는 대로 마력을 때려 박아 셈에게 힐을 꽂아 넣었다.
S급 헌터의 모든 마력을 사용하고 나서야 셈의 호흡은 겨우 안정화될 수 있었다.
그녀는 성큼 궁수의 앞으로 다가왔다. 날개를 퍼덕이며 다리를 꼬고 궁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넌 시련을 통과하며 가치를 증명했어.”
“….”
“목숨을 바치면 아끼는 종으로 삼아주마.”
모든 라이프베슬이 파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태도는 여유롭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녀에게서 전과 같은 위압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하하!”
“응? 웃어? 혹시 내가 너무 좋아서 웃음이 나오는 거야?”
“아니, 그건 아니고.”
궁수의 시야에 익숙한 시스템 메시지가 나타났다.
[레벨업 - LV 100]
[2차 전직을 할 수 있습니다.]
“넌 씨발 형한테 좀 맞자.”
궁수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