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마물한테 보쌈당함
“뭐야, 잡혀서 갇혀 있는 거 아니었어?”
궁수는 공략대의 뒤에서 조용히 상황을 직관하고 있었다.
성안의 헌터들은 무기를 들고 있을 뿐 딱히 별다른 행동을 하고 있지 않았다.
“셈…. 셈도 저 안에 있나?”
궁수는 혹시나 셈이 있을까 샅샅이 살펴보았으나 셈의 반짝이는 대머리는 찾을 수 없었다.
“구조대입니다! 이제 저희가 왔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유강한이 칼을 내리고 조심스럽게 헌터들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그 순간까지도 헌터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 매혹에 걸렸군.
“뭐? 매혹?”
- 서큐버스들이 사용하는 마법이다. 매혹에 걸린 인간들은 정화 마법을 받거나 서큐버스가 직접 놔주지 않는 한 벗어날 수 없지.
“뭐!? 이제 하다하다 몬스터한테 넘어갔다 이거야?”
- 음, 상태를 보아하니 어지간한 정화 마법으로는 어림도 없겠어, 홀려도 단단히 홀렸군.
“잠깐, 그럼….”
궁수의 목가가 섬뜩해졌다. 유강한이 뭘 하기도 전에 궁수가 먼저 소리쳤다.
“강한씨 뒤로 빼요!”
궁수가 소리를 지른 것과 유강한 앞의 헌터가 칼을 내지른 것은 거의 동시였다.
카앙!
과연 S급 헌터.
완벽한 타이밍의 기습이었으나 그는 순식간에 검을 들어 공격을 막았다.
“뭐야! 갑자기 왜 이러는 겁니까! 저희는 당신들을 구하러 왔단 말입니다!”
잘못하다간 헌터들끼리 죽이는 최악의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궁수는 그러기 전에 미리 목이 터져라 소리 질렀다.
“다 매혹에 걸린 겁니다! 매혹을 건 서큐버스를 죽이기 전까지는 어쩔 수 없어요!”
“매혹이요? 이런! 빨리 정화 마법을!”
유강한이 검을 크게 휘둘러 거리를 벌렸다.
일부러 검을 후려쳐 헌터는 다치지 않도록 배려했다.
그와 동시에 멈춰있던 다른 헌터들이 우루루 공략대원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최정예는 아니지만 그들도 나름대로 높은 등급의 헌터들이다.
그나마 매혹에 걸려 전투가 엉성하기에 다행이지 최적의 상황이었다면 이쪽도 큰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죽이면 안 됩니다! 최대한 제압하는 쪽으로 가야해요!”
하지만 다들 알듯이 죽이는 것보다 제압이 훨씬 어렵다. 게다가 어중이떠중이도 아니고 상급 헌터를 상대로는 더더욱 말이다.
이쪽에 S급 헌터들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캉! 카아앙!
한쪽은 죽이려 하고 다른 한쪽은 살리려 하는 전투가 벌어졌다.
“크흐윽! 일단 후퇴합니다!”
수준이야 그럴 수 있지만 동료들이 자신을 공격한다는 사실에 헌터들이 적잖은 당황한 상태였다.
후퇴 이외에는 별다른 선택은 남아있지 않았다.
“뒤로! 복귀합니다! 어서 빠져나와요!”
“어머~ 간만에 찾아오신 손님들인데 그냥 가시면 섭하지.”
“저건 또 뭐야!?”
피로 적신 듯 붉은 머리칼에 고혹적인 신체에 검은 드레스를 입은 마족이 날개를 펄럭이며 헌터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고고한 서큐버스 퀸이 직접 강림한 순간이었다.
“노크도 살살해야지, 하마터면 다 죽여 버릴 뻔 했잖니.”
서큐버스 퀸은 입가를 올리며 가볍게 성벽을 향해 손짓했다. 그녀의 손짓 몇 번에 반파된 성벽이 완전히 수리되었다.
“자…. 잠깐! 이러면!”
이미 헌터들은 모두 성벽 내부로 들어온 상황이었다.
다시 말해서 퇴로가 끊어졌다는 소리였다.
아무리 베테랑 헌터라도 이 상황은 상정 외의 상황이었다.
갑자기 동료들이 공격하는 걸로 모자라 보스가 직접 행차하다니.
억지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 이건…. 안 좋군, 많이 안 좋아.
“그래도 살아 나갈 수 있겠지?”
- 글쎄다.
“정말, 이러면 내가 직접 내려올 수밖에 없잖니.”
‘미친.’
그녀의 압도적인 마력에 절로 몸이 얼어붙었다. 마치 포식자의 눈빛을 마주한 피식자의 기분이었다.
그리고 항상 포식자의 입장이던 궁수에게는 처음 느껴보는 경험이었다.
그 기분은 몹시 불쾌하고.
‘씨발.’
두려웠다.
“어머~ 내 자기가 여기에도 있네?”
서큐버스 퀸이 직접 궁수 앞에 내려왔다. 바짝 얼어 움직이지 못하는 궁수를 이리저리 살펴보기 시작했다.
“흐음…. 뭐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게 합격이려나~”
괴물.
‘이런 걸 도대체 어떻게 이기란 거야?’
겉모습은 평범한 여성의 모습이었으나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일반 여성은커녕 S급 헌터를 한참 웃도는 수준이었다.
“흐그으윽….”
공포감을 떨쳐내기 위해 이를 악문 궁수가 그녀를 노려보았으나 그게 전부였다.
“난 성깔 있는 자기가 좋더라.”
서큐버스 퀸이 궁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이 궁수의 볼에 닿기 직전.
푸욱!
주변 헌터들의 검이 그녀의 온몸을 꿰뚫었다. 서큐버스 퀸은 일순간 정지하여 움직이지 않았다.
‘죽…. 었나?’
“하아….”
제발 죽었길 빌었건만 서큐버스 퀸은 대수롭지 않은 듯 한숨을 푹 쉬었다.
“내가 새로운 자기랑 이야기하는 거 안보여?”
‘아 씨발, 잠깐만요.’
그녀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혈기에 일순간 정신이 아찔해질 정도였다.
화아아아악!
“다들 피ㅎ….”
콰아앙!
그녀가 구두를 신은 발로 지면을 거세게 내리찍었다.
“커허어억!”
“끄아아악!”
쾅!
그것만으로 궁수를 제외한 주변의 헌터들이 일순간에 나가떨어졌다.
하나같이 쟁쟁한 S급 헌터였는데 말이다.
심지어 온몸에 칼이 박혀있는데도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듯 하나 둘 칼을 뽑았다.
‘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발씨바아아알!’
궁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열자루가 넘는 칼과 창에 찔렸는데 피는커녕 신음 하나 내지 않는다니.
적어도 인간인 궁수의 기준에서는 이만큼 두려운 일도 없었다.
칼이 뽑히며 그녀의 몸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뼈와 살이 보이던 곳이 매워지는 것을 바라보는 경험은 썩 유쾌하진 못했다.
오히려 속이 매스꺼워지며 먹은 것이 올라오는 기분이었다.
쨍그랑!
마지막으로 목에 박혔던 검을 뽑아낸 그녀가 다시 싱긋.
“우리 잠시 찐한 이야기 좀 나눌까?”
“아니요. 제가 약속이 있어서….”
“튕기기는.”
“아뇨, 그게 흐거어억!?”
“싫어~ 못 기다려.”
궁수는 서큐버스의 손에 간단히 들려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어?! 뭐야? 진짜 가!? 야! 놔! 이거 안 놔!”
“성깔 있는 자기도 싫지 않은 걸~ 길들이는 맛이 있어야지.”
“이 미친년이 지금 뭐라는 거야!”
“자, 여기가 이제부터 네가 살 집이란다.”
휘익!
“크허어억!”
서큐버스 퀸은 창문을 닫고 또각, 또각 자신의 ‘의자’를 향해 다가갔다.
“흐음~ 무드가 부족한가?”
딱!
그녀가 엄지와 중지를 맞물려 소리를 내자 성 내부의 불이 환하게 켜졌다.
“알현실…?”
마치 국왕이 신하를 맞이할 때 사용하는 알현실과 같았다.
중앙에 길게 깔린 붉은 카페트는 그녀의 붉은 머리칼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나 왔어 자기~”
“오셨습니까.”
“그래, 새로운 자기를 데려왔는데, 어때? 좀 반갑나?”
궁수는 고개를 돌려 그녀가 앉아있는 ‘의자’를 바라보았다.
핏줄이 올라와 터질 듯 팽팽한 근육질의 몸, 조명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대머리.
다름 아닌 셈이었다.
“셈!?”
“….”
“셈 맞잖아요! 시발 왜 혼자서 개 꿀 빨고 있어요!”
하지만 셈은 궁수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묵묵히 그녀의 의자 역할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셈! 셈! 야 이 대머리 새끼야!”
“….”
“기껏 구하러 왔더니! 나 이러면 서운해!”
“….”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인지 아니면 일부러 무시하는 것인지 셈은 궁수의 말을 들은 채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옛 동료라며? 대화라도 좀 해봐.”
“알겠습니다.”
“허어? 뭐가 어쩌고 저째?”
셈은 등에 그녀를 태우고 엉금엉금 궁수에게 다가왔다. 순간 궁수의 어이가 탈출하여 뭐라고 말이 나오지 않았다.
“셈…!”
“뭐냐.”
“셈! 셈! 우리 약속했잖아요!”
“뭐?”
궁수는 가슴을 움켜지고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당장에라도 눈물이 터져 나올 듯 애처로운 표정이었다.
- 일단 진정해라, 너무 흥분했….
“내가 전설의 발모제를 찾을 때까지 같이 노력하기로 약속했잖아요!”
“뭐…. 뭣?!”
언젠가 그런 약속을 했던 적이 있다.
항상 대머리인 셈이 안타까웠던 나머지 궁수가 발모제를 구해주겠다고 한 적이 말이다.
물론 시중에 있는 발모제는 모두 사용해 본 셈이었기에 궁수로서는 그의 대머리를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그렇다.
대머리는 질병이다.
결코 나을 수 없는 난치병! 그것이 억만장자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수장이라도! 혹은 세계를 구한 영웅이라 하더라도!
대머리는 치료할 수 없다.
하지만 궁수는 동료를 위해.
더 이상 셈이 대머리로 고통 받는 걸 멈춰주기 위해 어떤 의사도 도전하지 못한 난치병 치료를 도전한 것이다.
그 질병을 치료하기 위해 궁수는 셈과 약속했다.
언젠가 셈의 대머리를 치료하기 위한 전설의 발모제를 구해오겠다고 말이다.
셈의 시선이 전에 없을 정도로 크게 흔들렸다. 필사적으로 궁수의 눈을 피하며 고개를 돌렸으나 이미 궁수는 알고 있었다.
셈의 몸이 희미하게 떨리는 것을 말이다.
“패션 대머리인 척하지마요! 아무리 패션인척 해도 길드의 모든 사람이 셈이 탈모 대머리란 걸 알고 있다고요!”
적잖게 당황한 셈이 입을 떡 벌리며 소리쳤다. 그럴 리 없다는 듯 고개를 휘저으며 필사적으로 궁수에게 울부짖었다.
“무…. 무슨 그런! 연기는 완벽했단 말이다!”
“개소리 마요! 대머리가 무슨 연기야! 거기 완벽한 증거가 있는데!”
“크허어억! 그…. 그런!”
“푸하하하하하!”
“애초에 샤워할 때 샴푸는 왜…. 웃어?”
셈의 위에 타고 있던 서큐버스가 배를 잡고 미친 듯이 웃기 시작했다.
정말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기 힘든 듯 눈에 눈물까지 고여 가며 그녀는 박장대소를 하고 있었다.
“끄흐흐흑. 흐윽…. 하아, 진짜 배야, 아하하하하!”
“괜찮으십니까, 주군!”
“뭐? 주군? 다시 말해봐, 주구운? 주군건 니 모발밖에 없다 이 배신자 새끼야!”
물론 궁수도 현재 셈이 매혹에 걸린 상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여태까지 함께 동고동락 해왔던 동료의 태도가 뒤바뀌어 있는 것은 여간 고까운 일이 아니었다.
“아오, 진짜 못 참겠네, 야 너 나와! 좀 맞자 이 대머리 새끼야!”
“자기~ 설마 도전이 왔는데 도망치는 건 아니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셈은 눈을 감고 왼손을 자신의 가슴에 올려두었다. 무릎을 꿇은 그는 주군에게 충성을 고하는 고결한 기사처럼 보였다.
물론 실체는 마물한테 뿅간 대머리 아저씨였지만 말이다.
“그래도 너무 심하게 부수지는 마! 내 새로운 자기니까!”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쑈를 해라 쑈를, 이래서 시발 모없는 놈들이랑은 상종을 하면 안돼요, 모(毛)가 없는 거야 모(母)가 없는 거야?”
서큐버스가 셈의 등 위에서 내려왔다. 내려오는 그 모습마저도 고혹스러웠으나 그 이상의 느낌은 들지 않았다.
“대머리 다음은 너다.”
“어머나? 기대할 게 자기~?”
“그래, 기대하는 게 좋을 거다.”
분쇄자를 든 궁수가 성큼 대머리…가 아닌 셈 앞에 섰다.
- 잘못하면 죽일 수도 있다.
“아니, 이 정도는 해야 해.”
궁수가 기억하는 셈은 자신이 최선을 다해 부딪혀도 모자람이 없는 상대였다.
오히려 근접 전투에서 모자란 쪽은 궁수일 것이다.
어쭙잖게 제압하는 것이 아닌 정말로 죽을 기세로 달려들어야 어떻게든 전투의 균형을 맞출 수 있는 헌터.
그것이 궁수가 기억하는 대머리였다.
아니, 셈이었다.
***
“단단하게 묶어!”
“어휴, 진짜 이 일도 못 해먹겠군.”
사망자는 다행히도 없었으나 제법 부상을 입은 헌터들이 많았다.
그마저도 S급 헌터들이 진심을 발휘하여 주었기에 망정이지 그마저도 없었다면 그렇지 않았다면 몇 명은 죽어 나갔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흐음…”
주변 통제를 마친 헌터들이 유강한에게 의사를 물었다. 다른 헌터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헌터도 아니고 상위 헌터를 제압해야 했으니 소모되는 마력이나 체력이 상당했을 것이다.
제압한 헌터들 중 아직도 소리를 지르며 덤벼드려는 사람들이 제법 있었다.
S급 힐러인 한가은이 해주 마법을 사용했으나 도저히 매혹을 풀어낼 수 없었다.
‘매혹을 풀기 위해서는 반드시 들어가야 하는데… 그렇다고 또 다 데려갈 수는 없으니.’
제압한 헌터들도 누군가는 지키고 있어야 하고 무엇보다 이곳은 변수가 너무 많다.
어떤 위험한 변수가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는 곳에서 함부로 움직일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기에 대표인 유강한의 선택이 더더욱 중요한 것이다.
노심초사 끝에 유강한이 자신 앞에 모인 S급 헌터들을 향해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