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첫 공중파 출연.
대형 합방 이후로 약 이주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궁수는 지금 대략 난감한 상황에 처해있었다.
화려한 대기실의 불빛, 수많은 화장품 종류, 분주하게 움직이는 코디네이터들 까지.
“궁수! 반짝! 화려!”
“어, 그래 잘 어울리네.”
“10분 뒤에 촬영 들어갑니다~!”
- 퍽 잘 어울리는군 계약자여.
“하…. 시끄러 머리 복잡하니까.”
‘내가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궁수가 있는 곳은 다름 아닌 한국 최대 방송국인 KBTC였다.
어째서 궁수가 이곳에 있냐면 이야기는 일주일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깔끔하게 던전을 클리어한 궁수는 잠시 길드 휴게실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제법 격렬한 전투를 벌였기 때문에 궁수는 푹신한 침대에 누워 곤히 잠이든 상태였다.
다만 그것이 문제였다.
며칠을 철야한 허가연이 마침 휴식을 위해 휴게실에 들어왔다.
그렇지 않아도 장난이 심한 허가연의 눈에 궁수의 스마트폰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그녀도 기본 매너는 있는 사람이다.
평소라면 건들지 않겠으나 그녀는 지금 일주일 내내 연속된 철야에 판단력이 흐려진 상태였다.
다시 말해 선을 넘기에는 최적의 상태였다.
잠금 따위는 걸어두지 않은 궁수의 휴대폰은 너무나도 쉽게 내용물을 오픈했다.
그런 상황에서 허가연의 손에 쥐어진 궁수의 스마트폰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이나 다름없었다.
“우리 유망주씨 어디 쪽지함이나 한번 볼까?”
반쯤 곯아떨어진 궁수는 그녀를 막지 못했다. 과연 유명 헌터.
그녀도 이름을 알법한 몇몇 유명인사들이 궁수에게 쪽지를 보내왔다.
“키야~ 화려하네, 화려해. 와 얘도 연락한다고? 미쳤네.”
물론 궁수는 그런 쪽지들을 읽지도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혹시나 재밌는 것은 없나 쪽지를 쭉 내렸다.
그러던 와중 그녀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방송사 KTBC의 방송 제안이 말이다. 쪽지의 내용은 다름 아닌 토크쇼에 관한 것이었다.
헌터에게 궁금한 것을 물어보며 갈증을 해소하고 나아가 헌터의 간단한 능력들을 보여주는 일종의 쇼였다.
헌터가 가진 미지의 힘은 일반인에게 있어 매우 매력적인 요소였다.
그런 만큼 해당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틀었다 하면 10%를 넘기는 인기 프로그램이었던 것이다.
[안녕하세요. 나궁수 헌터님. KTBC의 ‘헌터에게 물어봐’의 담당 PD인 나석주라고 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궁수님께 출연 제안을 드리고자 연락 드렸습니다.]
그 아래에는 쇼에 관한 여러 정보들이 적혀 있었다.
요컨대 궁수와 나법사가 함께 나와주면 좋겠다는 내용이었다.
“흐흐흐!”
그녀의 손가락은 이미 궁수의 스마트폰 위에서 화려하게 춤을 추고 있었다.
궁수가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답장을 보내고 말았다.
[쪽지 확인했습니다.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출연하겠습니다.]
쪽지를 보내고 채 5분도 되지 않아 답장이 도착했다. 감사 인사와 쇼의 세부 일정에 대한 것이었다.
“짜식, 너 누나한테 감사해라!”
그녀는 궁수 옆에 스마트폰을 던져두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궁수가 일어났을 때는 이미 담당 PD의 부재중 전화가 3통이 걸려있을 때였다.
당황한 궁수는 거절의 뜻을 밝혔으나 이미 궁수와 법사에 틀을 맞춰 구성된 방송을 바꿀 순 없었다.
그리고 결국 꼴이 이거다.
“진짜 돌겠네, 레벨업도 바빠 죽겠는데.”
흰색 셔츠에 검은색 바지를 입은 궁수가 한숨을 푹 쉬었다.
머리를 빗어 올리고 팔도 몇 번 접었다. 셔츠 위로 근육질의 팔이 불끈 튀어나왔다.
추가로 받은 메이크업은 궁수의 얼굴을 더욱 부각시켜 주었다. 마치 영화에서나 볼법한 근육질 미남의 얼굴이었다.
“반짝반짝!”
나법사는 아무 상관없다는 듯 반짝이가 잔뜩 붙은 흰색 정장을 입고 연신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거기에 메이크업까지 더하니 말 그대로 해맑고 순수한 귀공자를 보는 것만 같았다.
물론 현실은 미친 폭파광이지만 말이다.
“첫 케이블 방송이 생방송이라니….”
“두 분 다 나오세요!”
“하…. 갑니다.”
시간이 된 듯 진행자가 궁수와 법사를 불렀다.
미리 전해 받은 대로 궁수는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으며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요즘 한참 핫한 두분이죠! 나궁수, 나법사 헌터님입니다!”
“와아아!”
짝짝짝!
스튜디오의 여러 연예인들이 박수갈채를 날렸다. 모두 한 번씩은 TV에서 봤던 익숙한 얼굴이었다.
“반갑습니다. 나궁수입니다.”
“나법사다!”
어색하기 짝이 없는 인사를 마치고 궁수와 법사는 지정받은 자리에 앉았다.
‘내가 어쩌다 이런 곳에….’
돌아가면 허가연의 정수리에 큼지막한 혹을 만들어 주리라 다짐하는 궁수였다.
“두 분 다 이름이 특이한데 혹시 본명이신가요?”
“네, 본명입니다.”
“그렇군요! 혹시 이름을 그렇게 지은 계기가 있을까요?”
“부모님이 지어주셨습니다.”
“오~! 과연 어릴 때부터 재능을 알아보셨군요! 모두 대단하십니다!”
궁수의 거지같은 말주변을 사회자가 화려한 언변으로 어찌어찌 이어나갔다.
궁수와 가벼운 대화를 마친 사회자는 그 옆의 나법사에게 말을 돌렸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궁수가 아메리카노라면 나법사는 고농축 되어 미각이 마비될 정도로 쓴 에스프레소라는 사실을 말이다.
“두 분 이름이 비슷하신데 혹시 형제라거나 그런 건 아닌가요? 핫핫핫!”
“형제?”
“네~ 두 분의 케미가 그렇게 재밌다고 난리더라구요! 이쯤 되면 진짜 가족 아닌가~!”
“나! 없다! 가족! 버렸다! 엄마가! 나!”
“….”
‘와 씨 지렸다.’
스튜디오에 거대한 폭탄이 떨어졌다. 그것도 후유증을 무시무시하게 남기는 핵폭탄을 말이다.
실시간 방송의 채팅창도 달아오르다 못해 화르륵 불이 타오를 지경이었다.
[탈룰라 최고단계 ㄷㄷ]
[ㅋㅋㅋㅋㅋ 말하는 놈은 아무렇지 않은데 사회자 멘탈 나감ㅋㅋ]
[재슥이형 힘내요 ㅋㅋㅋㅋㅋㅋ]
[부모도 없는데 저 정도까지 올라온거면 대단한거지, 응원한다!]
[진짜 그러네 ㅠㅠ 힘내요!]
다행히도 일반 인터넷 방송에 비해 훨씬 순한맛의 채팅들이 올라왔으나 문제는 그 속도였다.
초당 수백 개의 채팅들이 미친 듯이 올라왔다는 것이다.
오죽하면 방송을 모니터링하는 담당자들도 채팅을 멈추어가며 하나하나 읽어야 할 수준이었다.
“그, 그런 가슴 아픈 일을 딛고도 이런 훌륭한 헌터가 되셨다니! 흐흑! 나법사님의 정신력에 찬사를 보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영혼의 쉴드 on]
[막아! 어떻게든 막아!]
[언어의 마술사가 요깄네 ㅋㅋㅋㅋㅋㅋ]
[고아 + 탈룰라 + 버려짐을 이렇게 막네 ㄷㄷㄷ]
[무빙 지렸다 ㄹㅇ]
[폭탄 전문 처리반ㅋㅋㅋㅋㅋ]
과연 국민 MC 우재슥이다.
그는 과장되게 우는 연기를 하며 상황을 풀어가면서도 자연스럽게 나법사를 치켜세웠다.
‘국민 MC 짬밥이 어디 가는 건 아니구나.’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가 스튜디오에 자리 잡았다.
이대로 간다면 그리 큰 문제없이 방송을 마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 그럼 여기서 헌터님들의 능력을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두 분 잠시 이쪽으로 나와주시겠어요?”
“네.”
“알았다!”
궁수는 미리 챙겨온 천궁을 들고 앞으로 성큼 걸어 나갔다. 나법사는 싱글벙글 웃으며 궁수를 따라나섰다.
“궁수씨의 활솜씨는 이미 유명하기로 정평이 나 있죠? 실제로 나궁수 헌터님은 각성 전에도 무려 ‘예비 국가대표’였습니다!”
스튜디오에 배치된 큼지막한 스크린에서 궁수의 과거 사진이 몇 개 나왔다.
‘아니 저런 건 또 어디서 구한거야.’
궁수의 얼굴에 옅은 홍조가 올라왔다.
아무리 그래도 전 국민이 보는 방송에서 자신의 과거 사진을 풀어버리니 궁수라도 조금은 부끄러운 것이다.
“크흠….”
“젊다! 궁수 젊다!”
“뭐래, 난 지금도 젊거든?”
“우욱! 늙었다!”
“쓰읍….”
그래도 생방송이라 욕을 할 수는 없고 눈으로 쌍욕을 날리는 궁수였다.
꾸물거리는 사이 방송 진행원들이 순식간에 세팅을 끝마쳤다.
‘과녁?’
어느 하나 특별한 것 없는 평범한 과녁이었다.
‘설마 저걸 맞추라는 건가?’
이곳은 경기장도 아니고 스튜디오다.
저런 과녁 따위 헌터가 아닌 궁수의 현역 시절에도 숱하게 뚫어왔던 과녁이다.
시끄럽고 거리도 먼 경기장도 아닌 스튜디오에서 궁수가 저런 과녁을 맞추지 못할 확률은 한없이 0에 가까웠다.
“나궁수 헌터님은 표시된 자리에서 화살을 10발 모두 적중시키면 저희 헌터에게 물어봐가 준비한 소정의 선물을 드립니다!”
“아, 네! 너무 기대되네요!”
혹시나 자신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가 했으나 사람들은 흥미진진한 시선으로 궁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뭐야….’
궁수는 화살통에서 화살 열 발을 꺼내 손에 쥐었다.
활을 들고 폼을 잡는 것만으로 스튜디오에서 환호가 세어 나왔다.
‘저런 거 눈 감고도 맞추지.’
촤좌좌좌좍!
일말의 고민도 없이 궁수는 시위를 당겼다. 열 발의 화살이 순식간에 궁수의 손을 떠나갔다.
그렇게 날아간 화살은.
콰직!
열 발의 화살이 단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과녁 정 중앙에 꽂혔다.
현역 시절에도 손쉽게 할 일을 헌터가 된 궁수가 할 수 없을 리 만무했다.
“오오오!”
“이야!”
“대단하네요!”
스튜디오 대부분이 환호를 보내주었다. 너무나도 시시한 도전에 진이 빠진 궁수가 뒤로 빠지기 전.
“근데 저런 건 일반 국가대표도 하는 거 아닌가요?”
아주 흥미로운 말이 들려왔다.
궁수는 획 고개를 돌려 말의 발신지를 바라보았다. 대화의 발신지는 다름 아닌 노란 머리를 한 남자였다.
스튜디오의 모든 시선이 그에게 꽂혔다. 그는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더욱 당당하게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아니 한국 양궁 국가대표 선수들도 하는 걸 헌터가 보여주는 게 의미가 있나요?”
“어…. 이진수씨?”
잠시 스튜디오에 싸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그 유능한 우재슥 마저도 할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와중 궁수의 심정은 어땠는가.
‘너 잘 걸렸다.’
씨익, 입꼬리를 끌어올린 궁수가 팔짱을 끼고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아마 속도는 조금 차이가 나겠지만 국가대표 선배님들이라면 충분히 가능하겠죠.”
이진수도 궁수가 자신의 편을 들어주자 신이 난 듯 우쭐한 표정을 지으며 거만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그럼 헌터만 보여줄 수 있는 묘기를 보여드릴까 합니다만.”
궁수는 싱긋 웃으며 이진수 앞에 다가갔다.
분노라고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으나 이진수가 압박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이건 도우미가 필요해서 말이죠, 진수씨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
스튜디오에 한 번 더 정적이 일어났다.
보통은 여기서 거절할만하지만 아쉽게도 이진수의 자존심은 보통 높은 것이 아니었다.
“네, 좋습니다! 까짓것 도와드리죠!”
“캬, 감사합니다. 역시 시원시원한 게 보기 좋네요.”
갑작스러운 상황이었으나 PD는 이 상황이 흥미로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방송을 속행했다.
‘원래 생방송의 묘미란 이런 거 아니겠어?’
확실히 이번 쇼는 임팩트가 부족하긴 했다. 그런 상황에서 돌발상황이라니, 분명 좋은 장면이 나올 것이다.
“저 그럼 제가 말한 것 좀 준비해 주시겠어요?”
“사과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네? 사과요?”
“그 옛날에 보면 나오잖아요, 머리 위에 올리고 맞추는 거.”
“아아….”
궁수의 입가에 더없이 사악한 미소가 자리 잡았다.
“아뇨, 방울토마토로 준비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