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6권>
" 제가 단둘이서 이야기하고 싶었던 내용은 이게 전부에요."
살짝 웃으며 말하자 상혁 오빠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픽 웃더니 한 손을 들어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갑작스런 그 행동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노려보았지만 그는 그만 둘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 ...무슨 짓이죠, 이 구더기가."
날카로운 나의 말투에도 상혁 오빠는 그저 기분나쁜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 뭐라고 해야하나, 힘냈구나 싶어서."
" 네?"
" 아니, 이러니 저러니 해도 지금 네 나이는 중학교 3학년이고, 그렇게나 어렸을 적부터 언니를 돕기 위해 노력해왔다는게 대단하다는게 느껴져서 말이야."
상혁 오빠는 말했다. 너와 비슷한 나이일 때의 자신은 비교도 안될 만큼 나약했다고.
" 내가 네가 그런 결심을 했을 나이에, 나는 도망치고 외면하기만 바빴으니 말이야. 그래서 나에겐 그저 네가 굉장해 보여. 아무리 언니라고 할지라도 그렇게 한다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니까."
힘든 일-이라. 그렇게 생각한 적은 없었다. 나는 언니를 좋아했고, 다시 사이가 좋아지고 싶었을뿐이다. 언니를 위해서라기보단 언니와 어울리고 싶은 나를 위해서였다. 다시 언니와 옛날처럼 이야기하고 싶고, 즐겁게 웃는 언니가 보고 싶었다. 단지 그뿐이다.
그리고 가족이니까 무슨 이유를 따지는 것은 우스운 건지도 모른다. 내가 언니를 위해 힘낸 것은 단지 '가족이니까'라는 것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
" 그건 그렇고 내가 이렇게 하면 손으로 쳐낼줄 알았는데 그건 또 의외네."
언젠가 누구로부터 들었던 말과 몹시 비슷한 말이었다. 내가 그 말에 휙 하고 째려보자 상혁 오빠는 히익 하고 놀라면서 내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 ...머리를 쓰다듬는 것은 싫어하지 않아요."
예전에 언니가 머리를 자주 쓰다듬어줬기에 나는 꽤나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다. 뭐라고 해야하나, 그 간질간질한 감각이 좋다고 해야하나. 나는 키도 작고 외모도 이래서 옛날 부터 자주 사람들에게 애취급을 받다보니 머리를 쓰다듬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보통 나와 비슷한 상황의 아이들은 머리 쓰다듬는 것을 싫어하는 편이지만 나는 우습게도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다.
칭찬에 약하거나, 누군가의 애정을 받는 것에 굳이 거절을 하지는 않는 타입이라고 설명하는게 편할 것이다.
" 그럼 오늘 나와 만나서 할 일은 이게 끝이야?"
" 네. 그럼 제가 당신과 특별히 뭘 해야하나요?"
그의 물음에 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답하자, 그는 뭔가 애매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 ...그야 그렇긴 하지만..."
확실히 이런 말만 헤어지기엔 여기까지 온 것이 아까운 지도 모른다. 이야기를 꽤 했다지만 한시간 정도고, 그 정도면 여기까지 걸어온 시간과 크게 차이도 나지 않았다. 시간도 아직 어두워지려면 멀었고 날씨도 좋아서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은 아쉬운 건지도 모른다.
굳이 내가 그의 장단에 맞춰줄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내가 이렇게 단 둘이서 그와 어울리는 일은 앞으로 없을지도 모르니 조금 더 즐겨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기왕이면 언니가 좋아하는 물건이나 장소같은 것을 알려줘서 다음에 그와 언니가 만났을때 좋은 상황을 만들 수 있도록 해주는 것도 좋을 것이다.
" 좋아요. 그럼 다음에 언니와 함께 우리 집에 올때를 대비해서 교육을 하도록 하죠."
" 응?"
" 저는 어머니의 생일날 언니와 같이 당신이 생일선물 고르게 할 생각이니까요. 그때 쌩뚱맞게 이상한 것을 고르거나 할까봐 주의 사항도 알려줄겸 생각한 거에요. 확실히 이건 알려줄 필요가 있겠네요."
이건 언니만이 아니라 나의 어머니와도 관련된 문제니 말이다. 어차피 제대로 된 생일파티가 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적어도 생일 선물정도라도 제대로 준비하면 혹시 무난하게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 아, 괜찮다면 혹시 잠깐 옷가게부터 가시지 않겠어요? 제가 언니가 좋아하는 코디를 알려드릴게요. 그러면 나중에 언니 옷을 선물하게 되거나, 또는 당신이 옷을 입을때 언니가 싫어할만한 패션을 피할 수 있잖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며 조금 멀리 보이는 옷가게를 손으로 가리키자 상혁 오빠는 무언가 당황한듯 고개를 흔들었다.
" 저, 저기는 좀-. 이번에 너까지 데려가면 무슨 오해를 받을지..."
" -뭐죠, 그 엄청나게 의심스런 대사는."
" 그렇게 있다고 해야하나...."
식은땀 마저 흘리며 말하는 태도가 몹시 수상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어차피 옷가게가 저기에만 있는 것도 아니고 굳이 집착할 이유는 없었다.
" 그리고 저번에 수연이가 직접 사준 옷이 있어서 만난다면 그것을 입고 갈 생각인데 어때?"
...언니가 직접 옷을 사줬다고? 이건 꽤 의외였다. 언니가 자신이 아닌 남에게 돈을 쓰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나에겐 자주 옷이나(게임이나 만화에서 자주나오는) 악세사리(게임이나 만화속의 캐릭터가 사용할 법한)를 자주 사주긴 하지만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 선물하는 것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하기야 언니는 지금까지 친구를 만든적도 없으니 당연하려나.
" 그런거라면 언니가 사준 옷을 입는게 좋겠죠. ...오히려 안입는다면 언니 분명 엄청 신경쓸거에요."
무관심한척 하지만 분명 다음에 자신을 만났을때 입어주기를 바라고 사줬을 것이다. 그렇다면야 언니가 좋아하는 스타일의 여성복 정도만 알려주면 될 것같네.
" 아까 저 옷가게는 싫다고 하셨으니 그럼 저기로 가죠."
" 그래, 저기는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니까 괜찮아."
그렇다면 아까 그곳은 이미 가봐서 가면 안된다 이 말이려나. 역시 엄청 수상하다. 나중에 혼자 가보던지 언니에게 물어봐야지.
여성의류가 많은 매장인데다 여성 속옷도 진열되어 있어서 보통 남자가 가기엔 조금 꺼려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상혁 오빠는 생각보다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나와 함께 옷가게로 들어갔다. 이 사람은 사람관계도 서툴고 언니와 같은 오타쿠면서 뭔가 이런 행동은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게 신기하다.
아니 오타쿠에 대한 편견이라기보단 언니라면 이런 옷가게 볼때 아무렇지 않은척하면서 괜히 이상하게 눈치를 보니까 말이다. 여자가 여성 의류매장에 들어가는데 뭔가 꺼려하는듯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뭔가 싶지만.
나는 그 매장에서 대략 적으로 언니가 좋아하는 스타일을 이야기했다. 좋아하는 속옷과 같은 것은 언니의 프라이버시를 위해서 이야기하진 않았지만 치마를 선호하며, 자신의 스타일을 드러내는 옷을 좋아한다는 것. 그리고 묘하게 팬티스타킹을 좋아한다는 것을 말할까- 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이런 말하긴 조금 그렇지만 어째서 언니는 자신과 같이 검은 긴 흑발을 하고 있는 여자아이들은 그런 스타킹 종류의 속옷을 입어야 한다고 생각하는걸까. 여자이면서 스타킹 패티쉬라도 있는 걸까. 내 언니지만 가끔은 정말 알 수가 없다.
" 예상 외네, 치마를 좋아하다니."
" 왜요? 언니는 당신들과 만날때 늘 치마를 입었으니 이상하게 생각할 것없지 않나요?"
나의 말에 상혁 오빠는 '하기야 그건 그렇긴하지만...' 하고 중얼 거렸다. 이번에도 뭔가 숨기고 있는 것같아서 내가 노려보자 상혁 오빠는 급히 손을 흔들며.
" 아니 아니, 보통 여자애들도 치마 입는 것을 싫어하는 애들도 많잖아. 윤아도 치마는 펄럭거리고 춥다고 바지를 입거든."
" 그래요? 의외로 언니처럼 스타킹으로 완전 무장하면 나름 따뜻할때도 있긴 하지만... 확실히 바지쪽이 따뜻하긴 하죠."
내가 그렇게 답하자 상혁 오빠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뭔가를 숨기고 잇는 것같은데 넘어가주기로 했다. 난 그런 것을 일일히 캐묻는 성격도 아니니 말이다.
" 배고프지 않아? 잠깐 뭐라도 먹지 않을래?"
" 식사를 할만큼의 여유자금은 가져오지 않았는걸요. 애초에 오늘 당신과 만날 목적은 단지 이야기를 하는 것 뿐이었으니."
" 아아~, 그런 것은 걱정마. 애초에 이번엔 내가 사줄 생각이었어. 좋아하는 여자애의 여동생에게 돈을 내게 할수는 없잖아."
" ...언니에게도 그렇게 솔직하게 말하면 얼마나 좋나요. 아무튼 전 공짜는 좋아하지 않아서 별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상혁 오빠는 푸핫, 하고 웃으며 나의 어깨를 탁탁 쳤다. 대체 나의 말 어디가 웃겼던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아니 아니, 수연이랑 전에 같이 서울 갔을때 수연이도 그런 소리를 하더라고. 내가 뭐좀 사줄려고 하니 어찌나 거부를 하던지. 잘 못했으면 바로 집에 갈 기세였다니까."
물건을 사주는데 왜 집에 갈 기세였다는 말인가. 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 뭐 좀 사줄려고 하는데 왜 집에 가려고 한거죠?"
" 아, 물건을 사줘서라기보단 첫날에 수연이가 지갑을 잃어버려서......."
즐겁게 웃으며 이야기하던 상혁 오빠는 거기까지 이야기하다가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덩달아 내 얼굴도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언니는 지갑도 잃어버리고 2박 3일간 어떻게 어디서 있었다는 말인가.
" 자세한 설명 부탁해도 괜찮나요."
싱긋, 웃으며 말하자 구더기의 안색이 하얗게 변하며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돈이 없는 언니가 2박 3일간 같이 있었던 남성과 어디서 함게 있었는가.
아주 중대한 문제였다. 지금까지 무시하고 넘어갔던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 ....그, 별거 아닌데-."
" 별거 아니면 이야기해주시면 감사하겠네요. 구더기 오빠."
" ........"
그 뒤, 하늘이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상혁 오빠에 대한 나의 취조는 끝나지 않았다. 덤으로, 집에 돌아가면 언니에게도 꼭 자세히 물어보도록 하자.
============================ 작품 후기 ============================
지윤이와 상혁이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 다음편 부터는 상혁이와 수연이의 이야기입니다. 수연이! 주인공인데 3편이나 제대로 등장하지 못했어! 그러면 수연이와 상혁이의 조금의 염장물 다음에 바로 새어머니의 생일입니다.
점점 완결이 가까워지는 군요!
참 E북 출간에 관해서는 아직 자세히 듣지는 못했어요. 그리고 내용은 부실한 부분을 조금 미루고 추가하는 식으로 해볼까 생각중입니다. 2편의 중간고사편은 중간고사 부분을 축소하고 학교 축제편을 추가할 생각이고, 곱슬이와 윤아의 비중도 엄청 늘어날 거에요. 웹연제에서는 수연이만 비중이 몰려있었지만요. 주요 뼈대는 모두 똑같이 해볼 생각입니다.
어차피 e북이라 편집하는쪽에서도 별로 터치하지 않을것 같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저도 종이책이 좋긴 하지만, 공략당해 버렸다는 애초에 출간 목적인 글도 아니었고, 출간될 확률도 없다보니 그냥 e북 출간한다길래 승낙한 거랍니다.
TS라는 마이너한 장르에다가 역시 마이너한 라이트노벨이고 주인공도 여주. 그러니 애초에 상업성은 별로 없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