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스킨쉽.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스킨쉽이란 대인관계에 있어 직접 살과 살이 맞닿아 상호 관계에 애착이나 호감을 촉진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그것은 비단 동성뿐이 아니라 이성에게도 해당되며 접촉이 잦을수록 유대감을 가지기 쉬워지고 친숙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확실히 말을 잘 하지 못하는 나에게 있어선 스킨쉽이란 상대방의 호감도를 올리는데에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한가지 문제가 있다면 나는 남과 그다지 스킨쉽을 해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이성은 물론 동성간에도 그다지 해본적이 없기에 어떤 식으로 접촉을 해야하는지 제대로 모른다는거지.
하지만 나에겐 수많은 서브컬쳐로 쌓은 지식이 있으니 만사 오케이라는 거야. 물론 대부분 남성의 시점이라지만 아무렴 어쩐가. 남성의 시점에서 보았을때 두근두근 거렸던 장면을 내가 히로인의 역활에서 하면 되는 거잖아. 거기다 난 전생에 남성이었던 만큼 그런 점을 더더욱 잘 알고 있다.
수업을 들으며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만화나 영화속 상황들을 훑어보았지만 대부분이 굉장히 난이도가 있어보이는 것뿐이다. 어디보자 가장 기본적으로 보이는 것은 손을 잡는 행동인가.
내가 재밌게 보았던 그남자 그여자라는 만화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방영까지 했었던 애니메이션으로 나름 개그코드도 있고해서 어렸을적 재미있게 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명환이었을 적에 직접 만화책을 대여해서 보았을정도로 좋아하는 만화이다.
아무튼 그 만화에서 보면 여주인공과 남주인공이 연인이 되는 장면에서 여주인공이 자신의 마음을 전하는 부분을보면 단둘이 나란히 앉아있을때 조심스레 손을 맞잡아 마음을 전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내심 감동했던 장면이며 잔잔하게 마음을 훈훈하게 했던 장면이다. 물론 이것을 했을때 남자쪽이 조금 눈치가 있어야 통한다고 생각하지만 상혁이라면 알아차릴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의 일들을 보면 상혁이는 만화책이나 소설에서 보았던 그런 일본 서브컬쳐의 남주인공들보단 눈치가 있어보이니 말이야.
응, 좋아 우선 이걸로하자. 시작은 우선 손을 맞잡는거지. 이게 가장 기본이다 이거야!
흘깃, 하고 곁눈질로 옆의 상혁이를 본다.
진지한 얼굴로 칠판을 응시하고 있는 상혁이. 한창 시험기간인지라 어떤게 문제로 나올지 모르니 집중하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거기다 최근 '정신과의사'라는 뚜렷한 미래상을 그린 뒤에는 더더욱 노력하고 있는 모습이다.
그것은 나를 위해서였지-, 내가 수학여행에서 명환이에 대한 질투와 분노로 엉망이 되었을때 그 불길을 잠재워주었던 말이다. 어떻게 그 상황에서 그런 말을 할 수있을까. 참 웃긴 녀석이 아닐 수 없다. 거기다가 그 말이 진심이었다고 말해주듯 그 뒤에 상혁이는 진심으로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이번 중간고사에선 굳이 내가 도와주지 않아도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으음.'
다만, 너무 집중을 하다보니 양 손이 모두 책상위에 있는 것이 문제지만. 지금 내가 노리고 있는 것은 상혁이의 오른팔을 가만히 늘어트렸을때 조심스럽게 그 손을 잡는 것이 목표였다. 그 남자 그 여자에서 보면 여주인공이 그렇게 했었으니까.
하지만 이것에는 큰 문제가 있었다. 남자쪽이 팔을 책상 아래로 늘어트리지 않으면 조심스럽게 손을 맞잡는 장면이 연출되지 않는다는 것.
즉, 저렇게나 수업에 집중하고 있다면 하기가 힘들어진다는 것이다.
' 팔을 내려라, 내려라, 내리라니까.'
뚫어져라 옆을보며 주문을 외워보지만 상혁이의 시선은 정면에 고정되어있고 양손은 책상위에. 한손은 공책을 단단히 고정하고 다른 손으론 쉴세없이 샤프를 놀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가 내리길 바란다하더라도 저 모습을 보면 도무지 손을 내릴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후우, 마음을 편하게 가지자. 수업시간이 이번 시간만 있는 것도 아닌데. 천천히 기다리다 보면 상혁이도 지쳐서 한번쯤 쉬기도 하겠지.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 생각보다 상혁이는 열심히 공부를 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5교시 수업이 한창 진행될때까지 단 한번도 쉬지 않고 수업에 열중할 줄이야! 이렇게나 모범적인 학생이 되다니, 솔직히 감동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내가 오늘 생각한 가장 기본적인 목표인 '손을 맞잡는 것'도 할 수 없잖아. 나는 뚱하니 한창 수업중이신 선생님을 바라볼 수 밖에 없었다. 이미 알고 있는 것인지라 특별히 열중할 필요는 없었지만 상혁이도 열심히 수업중이고, 평상시처럼 다양한 망상을 하며 시간을 보내고 싶어도 지금은 그럴 기분이 들지 않았다.
묘한 초조함.
막상 내가 가진 마음을 표현하려고 하니 그것이 쉽게 되지 않는 것에 솔직히 한심하고 혼란스러웠다. 내가 말을 조금만 솔직하게 전할 수 있어도 굳이 이런 방법을 취할 필요는 없었겠지. 정말 마음 같아서는 지윤이가 제의 했던 것처럼 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당당한 수연이'의 모습으로 말을 해볼까 생각이 들었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이 딱히 꾸미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지만 왠지 그런 모습의 나는 생각이상으로 솔직해서 내가 하고 싶은 말 그 이상의 말도 할지 몰라서 말이야. 왠지 그모습이 되면 부끄러운 말도 술술나오다보니.
굳이 말해서 지금 내가 생각하는 속마음. 지금 이런 나의 속마음이 겉으로 표출되어버린다. 그래서 '나 정말 최고'같은 것도 직접 입으로 말했을 정도. 어린 지윤이는 그때 그런 나의 영향을 받은 탓에 '언니 정말 최고!'라고 말하곤 했었다.
저번에 잠깐 포니테일 모드로 돌아갔을때 지윤이의 모습을 보면 아직도 그때의 '언니 정말 최고!'의 기억이 남아있는 것같아서 순간 흠칫했다.
' ...응?'
내가 그런 생각을 하며 어떻게 해야하나-하고 생각하고 있는데 문득 옆에 상혁이의 움직임이 이상했다. 뭔가 멍한 표정으로 칠판을 보고 있나 싶었는데 여태까지 샤프를 들고 힘차게 필기를 하고 있던 오른팔이 책상아래로 편안하게 늘어져있지 않은가.
왼팔을 턱을 괴고 있는 모습이 수업이 조금 지루한 모양이었다.
이거 기회지 기회! 초 찬스! 손에 아무것도 안들려 있는데다가 오른팔도 딱 좋은 위치에 늘어져 있다. 이제 나는 가만히 왼손을 내밀어 비어있는 상혁이의 오른손을 잡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정말 간단한 행위. 그냥 손을 맞잡는 행동은 그것만으로 만족되는 것이다. 아마 그러면 상혁이도 깜짝 놀라 나를 돌아볼 것이다. 그러면 열심히 거울을 보고 열심히 연습한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살짝 아래로 내린 뒤에 눈을 살그머니 올려뜨는 행동'을 하면 상혁이도 내 마음을 알아차리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조심스럽게 왼손을 뻗어보았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냥 손을 맞잡는 행동. 단지 그것일 뿐인데 뭔가 엄청 부끄러웠다.
어, 어떻게 잡아야하나. 살그머니 부드럽게 깜싸듯이 잡는게 좋을까. 아니면 태연하게 잡는게 좋으려나. 아니 그보다 손이 굳어서 더이상 옆으로 움직이지 않는게 문제다.
뭐, 뭐야 나. 뭘 이렇게 갑자기 긴장하는데. 평상시처럼 태연하게 하면 되잖아. 중간고사 때 상혁이의 병실에서는 훨씬 대단한 것도 많이 했으면서 겨우 손잡는 것도 못하는거냐고.
' 으으, 완전 소심해...'
갑자기 명환이었을 적 성격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아니 왠지 그러니까 게이같지만 그런 '남성의 마음'이라는 것이 아니라, 명환이가 가지고 있던 그 소심함이 '이수연'인 나에게 갑자기 전염되어온 기분이다.
평상시의 나라면 손잡는게 뭐가 대수라며 그냥 잡았을 것이다. 더군다나 전생에 남성이었던 만큼 여성의 손을 잡는 것보다 오히려 남성의 손을 잡는게 쉬웠다.
하지만 이상하게 그것이 마음처럼 쉽게 되지 않았다. 단순히 손을 잡는 행위일 뿐인데 왜이리 가슴이 두근거릴까. 얼굴이 확확 열이 오르는게 분명 얼굴도 붉어졌을 것같았다.
아아, 큰일이야. 이런 모습을 누가 보기라도 하면 분명 의심할텐데. 머릿속이 뒤죽박죽해서 막상 손을 잡아도 내가 생각한 '최고로 예쁜 수연이'로서 바라볼 수 있을지 의문이다.
그나마 지금의 나라면 왠만해선 무표정한 포커페이스겠지만 만약에라도 내 예상범위를 초과해서 무표정이 깨지면 형편없이 바보같은 얼굴이 나올지도 모르는데. 그런 얼굴을 보이는 것은 싫다.
' 하지만...'
계속 이대로 고민하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체로 끝나면 더욱 아쉬울 것같았다. 별로 대단한 것도 아니다. 겨우 손을 잡는 것이다. 그것도 하지 못한다면 다른 스킨쉽은 도전해보지도 못할 것이다.
수연아 힘내자!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왼손을 옆으로 움직인다. 시선은 칠판에 고정한체 붉어지는 얼굴을 참으며 부끄러움을 눌러담고 몇센티씩, 아니 몇밀리씩 옆으로 움직인다. 나로선 형편없이 느린 행동이며 바보같은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나로선 정말 힘내는 것이다. 부끄러움을 참고 노력하는 것이다.
몸에 확확 올라오는 뜨거운 열기에 잠식된 나의 뜨거운 손이 차가운 상혁이의 손에 살짝 닿는 순간 깜짝놀라 손을 뒤로 빼버릴뻔 했지만 애써 참았다. 정말 장하지 않을 수 없잖아. 도망치지 않고 잘 참았어 나!
조심조심.
머뭇머뭇 거리며 떨리는 왼손으로 천천히 차가운 상혁이의 손을 잡았다. 뭔가 찌릿찌릿한 기분이 들어서 상혁이도 혹시 이럴까 궁금해졌다.
' 응?'
하지만 내가 그렇게 용기를 내어 상혁이의 손을 잡았지만 어째선지 상혁이에게선 이렇다할 반응이 없었다. 혹시 당황해서 얼어버린 걸까. 아니면 내 행동에 놀라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는 건가.
두근두근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눈동자만을 살짝 굴려 상혁이쪽으로 돌리자 나는 훅, 맥이 빠져 버릴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게-
" ...잠들었네."
그렇다. 상혁이는 턱을 괴고 아주 곤히 잠들어있었다. 아무래도 점심시간에 식사를 하고 따뜻한 교실에 있다보니 잠이 몰려왔던 모양이다. 마침 과목도 국어이다보니 특히 그럴만도 하지. 어쩐지 좀 멍해보이더니만 그 사이 잠들어버린 모양이다.
겨우 어렵사리 손을 잡았건만 이래서야 무의미하다. 상혁이가 잠들어버리면 내가 이렇게 손을 잡고 있다는 것도 모를테니까.
' 어쩔 수 없지.'
살짝 미소지으며 곤히 잠든 상혁이를 바라본 뒤에 나는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수업을 들을 생각이었지만 역시 칠판의 글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의 고동이, 상혁이와 맞잡은 손에서도 느껴지는 것같았기에. 상혁이는 모를테지만 우선 이건 나의 작은 심술이라고 해두자. 어쩐지 이렇게 가만히 손을 맞잡고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무척이나 편안해져서 나는 계속 그렇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5교시가 끝나는 종이치고 상혁이가 잠에서 깰때까지 나는 그렇게 계속, 조용히 손을 잡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대부분이 개그일거라 생각하며 방심했던 분들 안녕하세요. 이번편은 대부분이 염장입니다 ^오^역시 히로인 시점에서 쓰는건 남자로서 굉장히 묘한 기분이네요. 단순히 여주인공 시점이 아닌 '히로인'의 시점이니 특히 그렇습니다.
그나저나 사실 오늘도 못올릴뻔 했어요. 검은사막 너무 재밌네요. 으헤헤, 커뮤니티에선 재미없다고 말이 많던데 저는 완전 취향이에요. 메디아 서버의 리파나 라는 캐릭터 명으로 활동중입니다. 메디아는 사람도 딱 적당히 있다보니 무척 평화로운 곳이네요.
저는 이제 검은 사막을 하러 가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