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집으로 돌아와 가만히 침대에 누워있으니 묘한 생각이 들었다. 내가 이렇게 누군가의 신경을 쓰며 살았던 적이 있었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것,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는 마음. 그러한 것이 너무나 신선하게 느껴졌다.
물론 예전에도 그러한 마음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착한 아이가 되고 싶다는 것도 그러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으니까. 나를 바꾸고 있는 그대로의 내가 아닌 남들이 보기좋게 꾸민 나로서 다가갔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다르다. 있는 그대로, 감추고 있는 마음하나 없이 접근하고 싶다. 그렇게 꾸민 나도 받아들여주고, 지금의 사교성없는 나도 받아들여 주었으면 한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를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다가가야할지 모르겠다.
어린시절 이후 나는 언제나 늘 거부하는 입장이었다. 나에게 다가오지 않고 혼자인 편이 좋다고 그렇게 생각하기도 생각했었다. 외롭지만, 나는 그 적막함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가지 생각해볼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쓸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이런 나의 마음은 전생의 명환에서 계속해서 이어진, 유일하게 남은 명환의 마음이다. 남을 대하기 두렵고, 그저 무섭고 피하고 싶은 마음. 하지만 그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은 그런 작은 소망.
나는 그것을 계속해서 기다렸다. 전생에 그토록 노력했던 것도 내가 잘못되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나를 똑바로 봐주기를 바란 것이다. 하지만 결국 실패했다.
교통사고로 쓸쓸하게 혼자 죽는 순간까지.
가끔 생각한다. 내가 죽을때 나의 부모님은 과연 슬퍼했을까-하는. 물론 나로선 그때만이라도 나를 생각해주었으면 바라고 있을뿐이다. 나를 제대로 봐주었으면... 마지막에라도.
" 복잡하네..."
아무튼 정리하자면 그렇다. 나는 남에게 다가가는 것이 서툰것이다. 그리고 수연이로서 살아온 시간동안 지낸 시간은 대부분이 외톨이였기에 사교성이 특히 낮았다. 애초에 명환이도 사교성이 높지 않았는데 다시 태어났다고 해서 얼마나 달라졌겠는가.
솔직히 나도 조금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싶다. 하지만 그게 안되는걸. 윤아나 곱슬이도 상혁이에게선 한발짝 물러선 상태고 이젠 나만 남은 상태다. 지금까지의 모습으로 볼때 상혁이는 분명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한데...
' 나, 나겠지?'
아니아니 딱히 내가 아무리 예뻐도 공주병은 아니니까 상혁이가 당연히 나에게 반했다거나 하는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소거법으로 따지면 나, 윤아와 곱슬이 중에 남은 것이 나뿐이잖아.
하지만 요즘 이 생각도 흔들리는게. 상혁이 녀석이 나를 평상시와 전혀 다르지 않게 대하는 모습이나, 꼬박꼬박 태클을 보는 모습을 보면 이성보단 동성의 친구를 대하는 듯한 기분이라 조금 자신이 없어졌다.
솔직히 나 말고도 청이 선배도 있고 본인의 누나도 있지 않은가. 무, 물론 친 남매니까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최근 본 소설이나 애니메이션이 그렇고 그런게 많아서 괜시리 불안해진다.
" 역시 납치....는 무슨 생각을하는 걸까..."
당분간 서브컬쳐는 끊도록 해야겠다. 머리를 포니테일로 하고 다녀야하나. 포니테일로 하면 이상하게 기합을 넣기 편하던데. 아무래도 '꾸민'나와 그렇지 않은 나를 나누는 경계이기에 그럴지 모른다.
으으으음-. 계속 이렇게 침대위에 뒹굴거리며 생각해도 나 혼자선 해답이 나올 것같지 않았다. 곱슬이나 윤아에게 상담을 해봐야 그 성가신 말투부터 고쳐! 라고 말할게 분명하고 청이 선배에게 말한다면... 뭔가 약점이 잡히는 기분이라 싫고.
아, 그렇지. 역시 이럴땐 여동생과 대화를 하는게 가장 좋으려나. 흔히 만화나 소설에서 보면 이럴 때에는 역시 오랜 시간 함께한 여동생의 충고를 듣는게 좋을것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방문을 열고 마루에 나오니 언제나처럼 TV를 보고 있어야할 동생이 없다. 아, 그러고보니 조금있으면 중간고사니까 시험공부를 하고 있겠구나. 한창 시험공부 중인 지윤이에게 방해가 되는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그래도 마땅히 상담을 할만한 사람도 없었으므로 어절 수없이 지윤이의 방문에 노크를 하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응? 언니가 왠일이야?"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클레식 음악이 귀에 들어온다. 지윤이는 언제나 공부를 할때면 클레식 음악을 틀어놓고 하는데 그쪽이 공부가 더 집중이 잘된다는 모양이다. 나도 클레식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굳이 찾아 듣는 편은 아니므로 괜히 이런 지윤이의 모습을 보면 굉장히 교양있는 여성처럼 느껴진다.
...나는 애니송을 들으면서 공부하는데.
게임ost도 좋은 것이 많고.... 윽, 뭔가 히로인력이 여동생보다 못한듯한 기분이다.
" 뭐야, 들어왔으면 말을 해야할것 아냐?"
평상시처럼 퉁명스럽게 말해오는 여동생의 말에 그제야 이 방에 내가 들어온 이유를 상기했다. 하긴 지금 클레식 음악이니 애니송이니 하는게 문제가 아니지.
" 인생 상담이 필요해."
" ...하?"
진지하게 말하자 지윤이가 전혀 진지하지 않은 모습으로 되물어온다. 뭐야 그 이상한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은! 아니면 역시 이런 대사는 여동생이 오빠에게 할때가 아니면 먹히지 않는 건가.
" 정확히는, 그-. 조금더 사교성있게 다가가고 싶은 사람이 있는데."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지칭하기엔 부끄러웠으므로 조금 돌려말하자 지윤이의 표정이 대번에 기묘하게 바뀐다. 어쩐지 미묘하게 오른손에 들린 샤프가 기괴한 형태로 꺾이고 있었다.
" ...헤에. 그래? 조금 흥미가 생기는걸. 자세히 말해줄래 언니?"
공부하던 책을 덮고,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던 클레식 음악마저 끈 지윤이가 싱그럽게 웃는 얼굴로 나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째서인지 그 얼굴에선 이상한 귀기가 느껴지는 듯했지만 딱히 지윤이가 기분나빠하거나 할 이야기는 하지 않았으므로 내 착각이겠지.
" 아무래도 나는 남들에게 솔직히 이야기하는게 서툴지 않니? 그래서 뭔가 오해도 많이하는 것같은데 고치기는 힘들고..."
내 말에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지윤이는 팔짱을 낀 체 매서운 말투로 답했다.
" 흥, 그런거면 못알아차리는 쪽이 바보아냐? 그런 사람과는 친해질 필요없어."
단칼에 자르듯이 말하는 지윤이가 몹시 무서웠다. 뭐, 뭐야. 내가 뭐 잘못했어? 갑자기 왜 그렇게 날카롭게 잘라버리는 건데. 그러면 상담이 안되잖아! 아니면 혹시...
" 이상하게 과잉반응하는게 수상하네. 혹시 지윤이 너..."
" 뭐 ,뭐야. 나는 딱히 언니가 다른 사람과 친해지는든 말든 상관없지만 그냥 내 의견을 말했을뿐이야."
내가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말하자 당황하듯 말을 더듬는 지윤이의 모습에 나는 내가 머릿속으로 '혹시-'라고 생각했던 것이 확신으로 변했다.
" 그러네. 너도 친구가 없구나? 하기야, 그런 성가신 성격이면 사람과 사귀는게 힘들것같기는 해."
" 언니가 제일 성가신 성격이거든!"
뭐야, 왜 화를 내는건데. 아니면 아닌거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잠시 헛기침을 한 지윤은 조금 차분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착각하지마. 나 학교에서 친구 백명정도는 코웃음치며 만들수 있어. 지금만해도 내가 한 농담에 2층 창문으로 뛰어내리려고 한 친구가 있을정도인걸."
대체 어떤 농담을 했길래 2층 창문에서 뛰어내리려고 한걸까. 그런 것은 조금 무섭다고 생각한다.
" ...그러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니? 그쪽이 못알아차리는 것을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고 내 행동의 개선방향을 제시해주었으면 해."
" 애초에 언니의 성가신 성격을 개조하지 않는한 무리겠지만..."
나의 말에 시건방진 소리를 중얼거리던 지윤이는 아, 하고 뭔가가 생각났다는듯이 서랍에서 머리끈 하나를 꺼내며.
" 그러면 포니테일로 변해서 '퍼펙트 언니'로 다가가보는 건..."
" 기각."
내가 단번에 거절하자 지윤이는 입술을 삐쭉내밀며 아쉽다는 듯이 혀를 찼다. 대체 '퍼펙트 언니'는 뭐니. 무슨 퍼펙트 셀도 아니고. 거기다가 항상 그런 모습으로 있는 것은 피곤하단 말이야.
" 정말 이기적인 언니네. 요구조건만 말하고 이쪽의 의견은 듣지를 않다니..."
갑자기 이녀석에게 상담하기로 한 자신을 마구 패버리고 싶어졌다. 내 생각보다 여동생은 훨씬 귀찮은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 좋아, 그러면 이것은 어때?"
" 말해보렴."
이번에는 또 무슨 이상한 의견을 말하는 건가 싶어 귀를 기울이니 지윤이가 인상을 찌푸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 언니는 입만 열면 성가실 뿐이니까 스킨쉽을 늘려보는것은 거야."
" 스킨쉽?"
" 그래. 굳이 말을하지 않아도 좀더 행동으로 '당신에게 호감이 있다'라고 표현하는거지. 자주 손을 잡는다던지, 잦은 접촉을 하면 상대도 어느정도 눈치 챌거야."
아-, 확실히 그런 것은 괜찮아보였다. 상혁이도 남성인 이상 내가 자주 접촉하면 눈치챌 것이다. 보통 사람들에게 손을 데는 것을 꺼려하는 나이니까 분명 확실해. 더불어 전생이 남성이었던 만큼 남성의 몸은 나름 익숙하다.
" 음...."
뭐, 뭐야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제대로 알아들었다니까. 그래 스킨쉽 좋지. 확실히 말보다 행동으로 직접 전할때 더 좋은 경우도 많잖아.
" 뭔가 언니라면 이상한쪽으로 스킨쉽을 할거같아서. 내가 말한 것은 손이나 어깨 그런데 말하는거야."
" 너는 대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거니?"
" ...언니 가끔 묘하게 남자다운 구석이 있어서 말이야."
분명 이상한 쪽으로 할 것같아서 말이야... 라고 몹시 건방진 소리를 했다. 설마 내가 그럴리가 없잖아. 나는 남자의 시점에서 좋아하는 스킨쉽 정도는 전생에서부터의 기억으로 이미 마스터했는걸. 좋아 좋아. 내일한번 직접 시도해보도록 하자.
" 괜히 스킨쉽을 제의했나..."
지윤이가 미묘하게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듯했지만 무시하기로 했다. 각종 만화나 소설등에서의 이벤트를 참고하면 이런 스킨쉽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까.
조금 부끄럽지만 힘내도록 하자.
============================ 작품 후기 ============================
오늘은 조금 짧습니다. 말했다시피 이번편은 연애가 중점이다보니 계속 이렇게 전개가 될것 같네요. 물론 어머니 생신편에 들어가면 또 수연이 멘탈을 굴려야 되니까. 당분간은 많이 케어해줘야겠죠.
참고로 수연이가 남자애대해 잘안다고 하지만 상혁이와 간병이벤트때에 있었던 일을 보자면 스킨쉽이나 이런 것에 묘하게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