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여름방학이 끝나고 새롭게 2학기가 시작되었다.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특별히 1년이 지나 반이 바뀐 것도 아니고, 전학생이 오거나 누가 전학을 가는 등의 일도 없었다. 수연이가 속한 반도 마찬가지였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무언가 눈에 띄는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다르다-라고 반의 학생들은 생각했다.
뚜렷한 무언가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미묘한 뭔가가 달랐다. 말하자면 반의 분위기라고 해야할지, 말로 설명하기 힘든 추상적인 느낌이지만 그것이 어디서 시작되었는지는 말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반의 구석자리에 앉아 있는 이수연과 유상혁 때문이었다. 겉모습은 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뭔가 분위기가 다르다고 해야하나. 반의 구석구석 숨어있는 수연이의 팬들이라거나 좋아하는 마음속으로 품고 있던 학생들은 그것을 더욱 민감하게 감지할 수 있었다.
뭔가 다르다!
그것이 일부 반 학생들과 팬들의 감상이었다.
" 갑자기 쳐다보지 말아주겠니? 순간 놀라서 소름이 돋았어."
" ...얼마나 소름끼치게 놀란거냐고."
" 흐응, 말하자면 아이템 거래를 하는데 상대방 거래창에 0이하나 적다는 것을 교환버튼을 누른 뒤에 알았을때의 느낌?"
" 뭔가 굉장히 구체적이면서 이해하기 힘든 비유잖아."
대화는 크게 달라지지 않은 것같은데. 일부 반학생들이 지켜보는 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두 사람은 평상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대화를 하고 있었다. 수연이의 팬클럽이나 소위 친위대라고 불리우는 단체가 유상혁을 가만히 두는 이유는 단지 '이수연의 장난감'정도로 취급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이는 모습은 대부분 수연이가 매도하거나 괴롭히는 모습이며 유상혁도 마찬가지로 딱히 수연이에게 크게 뭔가 관심을 가지는 행동을 하지 않고 있었기에 가만히 두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뭔가...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예를 들자면-
예시 1 상혁이가 지우개를 떨어트린 경우.
" 여기, 지우개나 떨어트리다니 행동 하나하나가 칠칠맞구나."
" 오, 주워준거야? 땡큐, 땡큐."
그렇게 말하며 상혁이 수연이의 손에 들린 지우개를 받으려 하다가 어째서인지 상혁이의 손이 자신의 손이 닿자 뭔가 깜짝 놀란듯 이번엔 수연이가 지우개를 놓쳤다.
" ...뭐야, 이거 신종 괴롭힘이냐?"
지우개가 다시 바닥으로 굴러떨어진 탓에 상혁이가 그것을 줏으며 의아하다는 듯이 묻지만 수연은 뭔가 가만히 굳어있다가 이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 그냥 놀랐을뿐이야."
" 놀라? 특별히 방금 놀랄만한 행동을 했나?"
보통 이때쯤이면 수연이쪽에서 '네 손에 있는 병균이 옮아.'라던지, '내손에 네손이 닿다니 불쾌해.'라는 식으로 매도했을터인데 수연이는 아무 말 하지 않고 고개를 휙 돌리며 평상시와 다른 뭔가 새침한 어조로.
" ...별로."
말은 평상시와 다르지만 미묘하게 붉어져있는 수연이의 볼이 보였다. 상혁도 그것을 눈치 챘는지 마찬가지로 조금 얼굴을 붉히며 시선을 반대로 돌렸다.
예시2 체육시간
" 상혁아~! 같이 배드민턴 치자~!"
언제나 상혁이의 주변에 멤도는 여왕(이하 곱슬이)의 모습은 개학하고 나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이젠 익숙해진 광경이라 보고 넘기려 했지만 평상시와 조금 다른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어머나, 빨간 수세미가 배드민턴이라니 신기하기도 하네."
" 뭐야! 너 왜 갑자기 나타나서 방해하는거야, 뭐야 끌고가지 말라고! 이익, 힘은 더럽게 쌘 계집애가!"
" 이런 곳에 굴러다니고 있으면 사람이 다칠지 모르니까 치우는 것뿐이야."
" 이젠 무생물 취급이냐! 너무하잖아 너!"
라면서 상혁이에게 접근하던 여왕(이하 곱슬이)를 질질끌고 가서 단둘이 구석에서 배드민턴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평상시 체육시간에 늘상 빠져있던 수연이로선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예시3 점심시간
" 상혁아, 오늘 나 상화 언니에게 도움받아서 도시락 싸왔어. 특별히 한번쯤 먹어보게 해줄게!"
" 헤에, 뭐야 실력 꽤 늘었잖아. 아침에 누나가 놀랄거라고 한게 이건가?"
그렇게 말하며 윤아가 도시락을 펼쳐보이는데 그 사이로 뭔가가 끼어들었다. 그것은 예쁘장한 도시락통을 들고 있는 수연이였다. 가지런하게 반찬이 정돈되어 있는게 딱 보기에도 정성이 가득 들어간 무시무시한 퀄리티의 도시락이었다.
" ...아침에 시간이 남아서 양을 조금 많이 만들었어. 너에겐 과분하지만 버리는것은 아까우니 줄게."
무감정하게 말하는 수연이의 말이었지만 그것을 빤히 지켜보는 윤아나 곱슬이, 주변 다른 옥상의 학생들은 저 도시락이 결코 '조금 많이 만들어서 그냥 주는' 도시락의 퀄리티가 아님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
'수연아! 줄거면 그냥 대놓고 주라고!'
' 어딜봐도 아침에 정성가득 준비한 도시락이잖아!'
떨떠름하게 도시락을 받아드는 상혁을 지켜보는 윤아와 나름 도시락 전문가인 곱슬이의 생각이었다. 그것은 비단 옥상에서 밥을 먹고 있던 다른 학생들의 생각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직 수연이만이 아무렇지도 않은듯 평상시처럼 무뚝뚝하게 자기 도시락에만 열중하고 있을뿐이다.
예시 4 방과후.
" 상혁아, 오늘 부실에서 할게좀 있는데 도와주지 않을래? 다른 애들은 다 바쁘다고 해서..."
" 아, 청이 선배. 오늘은 특별히 할 것도 없으니 도와드릴게요."
화사한 금발을 빛내며 나타난 청이 선배의 모습에 반의 일동 모두가 감탄한듯 입을 벌렸다. 수연이도 아름답지만 과연 청이 선배도 그 이국적인 아름다움은 결코 뒤쳐지지 않았다.
과연 이 학교를 대표하는 미녀중에 한사람이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 학교에서 상당히 오랜시간을 지낸 탓에 팬의 지분도 가장많은 유연 고등학교의 대표 미녀라 할만하다.
"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같이 도와드릴까요?"
" 어머나~, 수연이는 어제 바쁘다고 이야기하지 않았니?"
" ...신경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 정말?"
" 괜찮아요."
" 그럼 부탁을 좀 할까-나?"
...청이 선배에 이르러서는 뭔가 그 미묘한 뭔가를 이용하는듯한 기분이 들지만 다른 학생들은 굳이 그것에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해맑게 웃으며 '다행이다~'라고 말하는 청이 선배의 모습은 누가봐도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한 사람의 모습이었지만 신경쓰면 지는 거니까.
" 수상하단 말이지."
" 우리 수연이에게 저 유상혁놈이 뭔가 한거 아냐?"
" 어이 너는 어디서 감히 '우리 수연이'라고 말하는거야?"
" 아무튼 좀더 두고봐야..."
일련의 상황들을 보며 숙덕거리던 반의 아이들은 상혁과 둘이 하교를 하고 있는 수연을 창밖으로 보며 한참을 더 토론을 했지만 특별한 결론은 나지 않고 다음을 기약하며 해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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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나는 지금 단 둘이 상혁이와 걷고 있었다. 특별히 다른 여자애들과 하교하는게 신경쓰인다거나, 청이 선배와 단둘이 부실에 남아있는게 거슬린다거나. 윤아와 곱슬이가 달라붙는것을 때어내기 귀찮았다거나 하는 이유는 아니다.
응, 절대 아니야. 난 그렇게 소심하지-.... 아니 소심하지만 신경쓰지 않는걸!
오늘 내가 상혁이와 단 둘이 하교 한 것은 그런 것보다는 좀더 제대로 된 이유가 있었다. 개학하기 전, 상혁이의 누나인 상화 언니로부터 들은 이야기 때문에 근 한달간 뭔가 무슨 일을 벌이려는게 아닌가? 라고 긴장하고 있었지만 특별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런 일을 의논하는 것에는 내가 전생을 이야기했던데다가 그런 흑막같은 말을 한 당사자의 동생인 상혁이가 제격이기에 이렇게 카페에서 이야기를 하게 된 것이다.
" 커피는 아메리카노로 두 잔주세요."
-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상혁이가 아메리카노를 두 잔 시켜버렸다. ...내가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시켜버리다니. 그보다 '아메리카노 좋아하지?'라는 식으로 보며 웃지 마! 나 아메리카노 절대로 좋아하는거 아니니까!
아무튼...
" 그 뒤 상화 언니로부턴 별말 없었니?"
" 응, 네가 그렇게 말해서 꽤 유심히 관찰했는데 평소랑 다를거 없는 성가신 누나였어."
" 어머나, 자기의 누나한테 하는 소리치곤 너무하네."
그래도 그정도의 외모에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브라더콤플렉스의 누나인데 평가가 좀 너무하지 않나 싶다.
" 어렸을 때부터 뭔가 정체를 알 수 없는 헛소리를 하지는 않았어?"
" 너야말로 좀 심한거 같지 않냐."
나의 말에 잠깐 뭔가 골똘히 생각하던 상혁은 팔짱을 끼곤 천천히 말을 했다.
" 그러고보면 누나가 좀 특이하긴 했어. 그날 내가 경찰의 도움으로 집을 돌아왔을때 누나는 집에 없었거든. 나중에 알고보니 나를 찾기위해 밖에 돌아다니고 있었던 모양이야. 지금까지는 그냥 내가 길을 잃어버렸을까봐 찾으러 갔다고 생각했는데..."
" -너를 구하기 위해서 갔다,라는 거니?"
" 네가 말한 누나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네. 그보다 나에겐 왜 한마디도 하지 않았으면서 왜 너한테는 그런 말을 한 걸까."
" 글쎄. 아무래도 헛소리 취급받을 확률이 높고 누구라도 다른 세상에서 너는 이미 죽었다,라는 식으로 이야기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을가 싶네."
나니까 '헉! 그럴수가, 부들부들'하면서 믿어줬지 다른 사람이었으면 머리에 꽃을 꽂았는지 먼저 찾아볼 것이다. 아니 어느 누가 '난 시간을 역행했엉 ㅋ'하면 믿어주겠는가. 만약 청이 선배에게 그런 이야기를 햇으면 바로 이 지역에서 가장 훌륭한 정신병원으로 안내되었을 것이다.
" 그러고보면 너는 꽤 순순히 믿는구나? 내 이야기도 그렇고 네 누나의 이야기도."
그렇게 묻는 나의 말에 상혁은 고개를 갸웃하며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 너도 그렇지만 누나도 어린시절부터 굉장히 특이하고 이질적이었으니까 '누나라면 그럴지도.'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해야하나. 너의 말을 들어보면 왜 누나가 굳이 어린시절부터 이야기가 나왔던 미국행도 거부하고 있었고 고등학생이 되서야 받아들였는지도 이해가 가능하고. 어린시절부터 나에게 보인 이상한 집착도 나름 이해할 수 있었으니 말이야."
상혁이가 말하길. 어린시절의 누나는 또래에 맞지 않게 무척 어른스러웠고 자신을 챙겼다고 한다. 특히 상혁이가 그 사건으로 방에 틀어박혔을때 가장 안도한 것은 누나였다고 한다. 다들 걱정을 하는데 오직 누나만은 그렇게 있으라고, 자신이 지켜준다고 이야기했었다고...
" 한가지 더 말하자면 누나가 포니테일을 고집하는 것은 내가 어린시절에 도와준 아이를 만난 이후로 묶은 머리를 너무 좋아하게 되어서 말이야. 그것을 말했더니 그 뒤로 계속 포니테일을 하더라고."
포니테일 페티쉬까지 감당해주는 누나라니 너무 무섭잖아! 덤으로 어린시절에 너를 도와줬던 '포니테일 여자아이'는 바로 나잖아! 더 무서워!
" ...갑자기 뭐야 그 최저의 쓰레기를 보는 눈은. 오랜만이라 도리어 신선한데."
" 흐응, 이제는 이런 시선도 쾌감을 느낄 정도가 된걸까 파리로 우화하기 직전의 구더기는 과연 대단하구나?"
" 어째서 파리로 우화하기 직전의 구더기냐고!"
어째서냐고 물어도... 나는 살짝 볼을 붉히며 새침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다.
" 매번 다른 사람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지만, 네가 말하는 그 어린시절의 '포니테일 여자아이'는 나잖니?"
" ...아."
" '당신의 어린시절의 포니테일을 보고 전 포니테일 페티쉬가 되어버렸습니다!'라는 소리를 당사자의 앞에서 하는거라는 것을 명심하렴."
어린시절 경찰을 불러 도와줬던 소녀가 나라는 사실은 저번에 상화 언니의 말을 들은 이후 내가 직접 상혁이에게 말했지만 상혁이도 어딘가 짐작하고 있었던 듯 크게 놀라거나 하지 않았다. 물어보니 내가 학교에 포니테일을 하고 있을때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의심하기 시작한 것은 내가 녀석을 빗속에서 찾아왔을 때였다고.
" 하지만 나는 역시 긴 생머리가 더 아름답다고 생각해."
" 갑자기 그런 쪽으로 이야기 빠지지 말아줘!"
뭐야, 나름 진지한 말이었는데. 포니테일은 편하긴 하지만 역시 나는 검고 긴 생머리가 좋다. 아니면 상혁이는 역시 포니테일이 더 예쁘다고 생각하는 걸까.
" 미리 말해두지만 네가 울며 애원하지 않는 이상 포니테일은 하지 않아."
" 울며 애원하면 해주는거냐."
" 그정도면 가상하다고 생각해서 한번쯤 해줄지 모르지."
내심 울며 애원하는 모습을 보고 싶어서 그렇게 말해봤지만 상혁은 게슴츠레한 눈으로 나를 보며.
" 아무리 그래도 그정도 변태는 아니라고."
" 실망인걸."
" 대체 어느 면에서!?"
물론 여러가지 의미에서-다.
============================ 작품 후기 ============================
상화가 이야기한 것은 딱히 이 글에서 진지하게 다룰 생각은 없습니다. 어렴풋이 추리가 가능하게 떡밥은 던져두겠지만 이 글은 어디까지나 수연이의 일상물겸 러브코메디니까요. 단지 환생이라는 시점에서 판타지 요소가 들어가기에 약간 그것에 의미를 둔 장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어? 죽고 나니 환생했잖아 ㅎㅎ 단지 이거면 좀 시시하잖아요. 수연이가 환생한 것은 수연이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아닌 이상 설명하기도 어렵고 복잡해요. 저는 그냥 이제 염장물이나 쓰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