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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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상혁이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유리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씩, 웃었다. 눈은 여전히 빨갛고 코도 빨갛지만 안심하라는 듯이 웃은 그녀는 천천히 상혁이의 품에 떨어져 천천히 뒤를 돌았다.
" 알겠지? 사람이 변하는 것은 그만큼 힘들어."
변하기위해 노력했던 자신이었기에 그것을 잘 알고있다. 얼마나 스스로를 바꾸는게 힘든지, 변화하는게 힘든지 잘알고 있다. 그것은 결코 하루아침에 바꾸고 싶다고 바꿀 수 있는게 아니다.
오랜시간 노력하고 연습해도 바꿀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아직 이렇게 바뀐 자신도 누군가가 무섭게 노려보면 무섭다. 억지로 태연한척 해보이지만 그것은 절대 익숙한 것이 아니다. 그저 노력하고, 익숙해졌을분이다.
" 그러니 분명 수연이는 지금 충격으로 하루 아침에 바뀌거나 한 것이 아니야. 그렇게 노력하고 있을뿐이야. 아무렇지도 않은척 평범하고 예쁜 얼굴로 사람들을 대하고 있을뿐이야."
상혁은 그 말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유리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역시 추측일 뿐이겟지. 그리고 지금으로선 그러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하루아침에 성격이 바뀌어버린 다는 것은 그동안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너무 슬픈 일이니까.
" 오늘은, 즐거웠어."
유리는 담담히 상혁이를 향해 말했다.
" 나도-, 마찬가지야."
상혁이도 그런 유리의 말에 웃으며 답했다. 유리는 고개를 휙 뒤로 돌아보며 언제나 와같은 자신만만한 웃음을 지어보이며.
" 나 말이야. 아직 포기하지 않았어. 계속 계속 노력해왔는걸. 아직 아직은 포기할 수 없어. 하지만 오늘은 이대로 넘어가줄게!"
상혁이가 누구를 좋아하든, 누구와 연인이 되든 유리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그만큼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 컸기에, 그리고 지켜주고 싶은 그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오늘은 여기까지다.
더이상 상혁이와 이야기할 자신이 없었다. 왠지 더 이야기를 나누다간 약한 말을 할 것만 같았다.
" 미안해. 멋대로 데이트 신청하고 파토내서. 나 제멋대로지?"
" 아니, 나는 도리어 이렇게 이야기해줘서 고마워."
괜찮다고 말하는 상혁이의 말에 유리는 빙긋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가볍게 손을 흔든 뒤에 앞으로 달려갔다. 어쨌거나 다시 한번 차인것이다. 계속 상혁이를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나올 것같았고 머뭇거리게 될 것같았다.
그런 것은 싫다.
그것은 옛날의 자신과 같으니까. 여기서 멈춰서 포기해버리는 그런 자신. 그런 자신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달렸다. 상혁이에게서 떨어져 골목길로 달렸다.
자신이 예전에 살던 도장이 있던 그 외진 길로 홀로 달렸다.
그 길은 아무도 없었다. 주변에 걸어다니는 사람도 없었고 오직 자신만이 홀로 달리고 있었다. 예전부터 이 길을 다니던 것은 자신뿐이었다.
혼자.
누구와 이야기하지 않고 그렇게 혼자 이 길로 다녔었다. 남들에게 스스로를 보이는 것이 두려워서. 대화하는게 두렵고 아버지가 있는 곳에서 멀어지고 싶어서. 집에있는게 싫었기 때문에.
" 하-아..."
제자리에 서서 예전에 도장이 있었던 건물을 올려다본다. 아버지가 아직 팔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건물이다. 다른 입주자도 없어서 그저 방치되어 있는 빈 건물.
사람이 잘 다니지 않고 가려져 있어 몇년째 방치 되어있는 낡은 건물...
그것들을 잠시 응시하던 유리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 ...보고 있었지? 나와."
인기척이라고는 느껴지지 않건만 유리는 차분하게 말했다. 주변에 누구도 보이지 않건만 마치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렇게 이야기하자.
" 헤에? 어떻게 알았어? 나름 잘 숨어있었는데."
담벼락 틈에서 수연이가 싱긋 웃으며 걸어나왔다. 역시 평상시와는 다른 부드러운 얼굴. 마치 가면같이 예쁜 미소.
" 악취미잖아 이계집애야. 멋대로 남의 고백을 숨어서 지켜보고 뭐가 즐겁다는 듯이 그렇게 웃어?"
" 딱히 그런건 아니야. 내가 위로를 해줘봤자 도리어 너의 기분만 나빠질까봐 지켜보고 있었을뿐. 같은 여자로서 네 마음은 어느정도 이해해. 그렇기에 가만히 있었던 거야."
그렇게 말하는 수연이의 얼굴은 웃음을 지운 진지한 얼굴이었지만 역시 전의 표정과는 달랐다. 그것은 말처럼 '진지한' 얼굴이었으니까. 아마 그것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수연이의 말처럼 수연이가 유리에게 해줄 말은 없었다.
그 말처럼 조용히 숨어 지켜보기만 했겠지. 그것에는 딱히 거짓이나 비웃을 이유따윈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진 모르겠지만- 그것은 적어도 진심이라고 생각한다.
" 아무튼 내가 왜 그 이야기를 했던 것인지도 숨어서 들었으니 알겠네?"
" 글쎄, 난 모르는걸? 도리어 나야말로 네가 왜 날 불렀는지 궁금할뿐이야? 너와 상혁이가 데이트 하는 모습을 자랑할 생각이었어?"
여유로운 태도. 말투는 밝고 명랑했지만 말의 내용은 전과 다르지 않게 신랄했다. 어이, 그래도 이쪽은 어디까지나 방금 남자한테 차인 소녀의 입장이라고. -라고 생각했지만 유리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그건 윤아에게 가라고 했던 수연이도 이미 느꼈던 기분일 것이다. 상혁이가 직접이야기 하지 않았으니 녀석이 수연이 본인에게 무슨 생각을 품고 있는지도 모르겠지.
" 내가 널 왜 불렀을거라 생각해?"
수연이의 질문에 도리어 질문으로 되묻는다. 그런 유리의 행동에 수연은 팔짱을끼며 무슨 말을 하냐는 듯이.
" 그건 내가 물은거야. 네가 왜 날 불렀는지."
" 틀리겠지. 넌 알잖아? 내가 왜 불렀는지. 거기다 내가 너에게 한 문자는 고작 '상혁이와 데이트를 하러 간다'정도 였어. 그말에 끌려나온 것은 너야."
" ....."
수연은 말없이 유리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엔 딱히 분노도 슬픔도. 특별한 감정은 걸려있지 않았다. 그저 무감정한 눈. 밝고 명랑한 표정과는 상반된 차가운 시선이다.
" 내가 부른게 아니야. 넌 스스로 나온거지. 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인지는 네가 더 잘알겠지?"
" 도발한 것은 너잖아."
그것은 더이상 명랑한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차갑고 냉소적인, 평소의 이수연의 것이었다. 어쩐지 유리는 그 차가움이 도리어 반갑게 느껴져 속으로 웃음이 나올 것같았다. 밝고 명랑한 것이 아닌 저런 무시무시한 분위기가 반갑다니 자신이 어떻게 된건가 싶어서.
" 왜 가만히 두지 않았지? 너야말로 그때 나를 보고 갔으면 알잖아."
그말에 유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살마 자신이 그날 그네에 앉아있던 수연이를 보고간 것을 알고 있었을 줄이야.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아서 몰랐을 줄 알았는데.
" 비극의 히로인처럼 앉아있던 그거 말이야? 나는 이해가 안되는데. 왜 네가 그렇게 해야했는지. 굳이 그렇게 이상한 가면을 쓰고 학교에 와야했는지."
" 네 이해를 바라고 한 것은 아니야."
" 너도 스스로 '했다'라고 한다는 것은 가면을 쓰고 남들을 대했다고 생각해도 되냐? 왜 그런짓을 하는거야? 그런다고 너에게 무슨 이득이 있다고?
유리의 단호한 말에 수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말없이 유리를 응시할뿐.
" 뭐야, 묵비권 행사라도 하는거야? 말을 하지 않으면 모른다고?"
그렇게 말하는 유리의 말에 수연은 작게 한숨을 쉬며 잠시 땅을 응시하고 있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유리를 바라보기만 할뿐이었다.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히 바라보기만 할뿐. 그런 수연의 모습에 유리는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입을 열었다.
" 내가 왜 이곳에 너를 불렀냐고 물었지? 뭐 네가 스스로 나온 것이긴 하지만 난 어느정도 네가 나올 것을 예상하고 있었으니 네 말처럼 부른 것인지도 모르지."
" ....."
유리의 말에 수연은 잠자코 그 말을 듣기만 했다. 유리는 세삼 자신의 말에 이렇게 경청하며 가만히 있는 수연이의 모습이 새로워서 속으로 피식 웃었다.
" 너 언제나 한발짝 물러서있잖아? 누구와도 대등하게 맞서려 하지 않고. 이번에 가면을 쓰고 사람들을 대하기 시작한 것도 그것의 하나일뿐인다. 냉정하게 대하냐, 웃으면서 대하냐의 차이만 있을뿐."
" ....그건."
" 부정하려고? 알고 있어. 난 사람들의 감정에 민감해. 언제나 눈치보기 바빴으니까. 넌 언제나 그랬어. 진심을 내보이는 것을 꺼려하고 한발짝 물러서 있었어. 처음엔 왜? 라고 생각했지만 간단해. 너는 그저 자신을 내보이는게 싫었을 뿐이야. 그렇지? 누구도 자신과 대등한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감추고 있었을뿐이야."
" 아니야."
" 맞잖아? 너는 뭐든 잘하지. 하지만 무엇도 하지 않으려해. 그건 평상시 네 태도와 같지. 노력하지 않고-, 무엇도 하지 않아. 한걸음 물러서있는 네 태도처럼."
알고 있다. 그것은 수연이 자신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자신이 왜 특별히 무언가의 꿈을 가지지 않는가. 그것은 자신의 재능때문이다. 서코에 가며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지만 결국 섯불리 내보이기 꺼려지는 자신의 재능. 자신이 조금만 하면 그동안 노력했던 사람들을 비웃듯이 추월해버리는 그런 재능.
" 그래서 내가 이곳에 널 부른거야."
" ...?"
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입고 있던 원피스의 치맛자락을 허벅지에 묶었다.
" 그동안 마음에 안들었어. 너 말이야, 너 너무 오만한거 아니야? 마치 자신이 무언가를 하면 무엇이든 금방 추월할 거라고 하는 그런 생각이."
" 그래서...?"
" 고민좀 했지. 네 그 오만한 생각을 부수면 너의 가면도 부술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말이야. 근데 안타깝게도 네 말처럼 나는 양아치라서 말이야 할 줄 아는 것이라곤 이렇게 남들과 싸우는 것외엔 자신이 없어서 말이지."
휙, 하고 유리는 가져온 가방에서 글러브를 꺼내 자신의 손에 꼈다. 멀뚱멀뚱 자신을 바라봐오는 수연이의 모습이 뭔가 바보같아 허리에 손을 올리고 언제나 말하는 고압적인 미소를 지어보였다.
" 이것이라면 너와 대등하게 대화할 수 있다- 라고 생각해버렸거든."
" ...정말이지 너답게 바보같은 생각이구나."
냉정하게 매도하는 수연이의 말에 유리는 입가의 미소를 천천히 지우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지금 네 입을 열려면 대등한 입장에서 밖에 할 수 없을 것같았으니까."
" ......."
" 솔직히 너 지금도 네가 나한테 진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지?"
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지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지만 그 침묵은 긍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 처음엔 이상하게 생각했어. 넌 그렇게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일까 하고."
그저 남들보다 잘하기에 남에게 기회를 주기위해서 단지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계속 지켜보다보니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최근 수연이가 밝은 모습으로 학교에 등교하는 것을 보며 알게 되었다.
" 아무것도 하지 않아. 그저 보기 좋게 남들의 기분에 맞춰줄뿐. 하는 행동은 달라지지 않았어. 지윤이가 말했어, 예전의 너는 모든 남들앞에서 앞장서서 하곤 했었다고. 모든 잘하는 멋진 언니였다고."
겉모습은 확실히 예전의 수연이었다. 하지만 행동은 달랐다. 정확히는 과거의 수연이가 아닌 지금까지의 수연이의 행동을 답습하고 있었다. 게임을 하지 않고, 평범하게 웃고 대화하지만 결국 노력은 하지 않는다. 지켜본 것은 고작 하루였지만 수연이는 자기 자신에 관심이 없었다. 남들의 눈을 신경쓰고 계속 그렇게 이야기했다.
남의 눈치를 살피며, 계속 그렇게.
" 무엇을 겁내는 거야, 너."
수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매섭게 유리를 노려볼뿐. 그 시선을 받으며 유리는 하, 하고 웃었다. 뭐야 화난거냐. 그냥 가볍게 투닥거릴 생각이었지만 생각보다 살기만만하잖아.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알 수 있다고. 너 말이야, 예전의 나랑 닮았으니까. 사람이 무서운거냐? 네가 노력해서 남들을 추월할때 받는 시선이 두려운거지? 그저 무섭고, 피하고 싶은 거잖아?"
" -시끄러워."
단호하게 말한 수연은 포니테일로 묶고 있던 끈을 더욱 강하게 죄어메었다. 그러면서 유리를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지금까지 억지로 유리의 말에 맞춰주었다면 지금은 진심으로 화내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치부를 틀킨 어린아이처럼.
" 시작하기 전에 한가지 제안해도 되냐?"
" 상관없어."
" 네가 이긴다면 네가 시키는건 뭐든지 하나 들어줄게. 대신-."
자신을 말없이 응시하는 수연이를 보며 유리는 재밌다는 듯이 웃어보이며.
" 내가 이기면 내가 묻는 말에 솔직히 답해줘."
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아니, 애초에.
" 그래, 어차피 내가 이길테니 상관없겠지."
그 목소리는 냉정했다. 그리고 몹시 차분했다. 유리는 천천히 다가오는 수연이를 보다가 천천히 마찬가지로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없이 오른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우와, 장난 아닌데-라고 생각했다. 자신이야 꽤 오랫동안 운동을 해왔고 아버지로부터 격투기를 배웠다지만 수연이는 그런 것이 전무한 여고생이다. 하지만 자신의 얼굴을 향해 뻗어온 주먹의 속도는 결코 자신의 것에 뒤쳐지지 않았다. 자신뿐이 아니라 역시 수연이의 글러브도 가져오는게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어지는 수연이의 몸놀림에 급히 뒤로 물러섰다.
" 계집애야, 너무 과격하잖아!"
" 먼저 말을 꺼낸 것은 그쪽이잖아?"
과연 수연이는 강했다. 예상은 했지만 그녀는 불합리한 존재였다. 그녀의 말처럼 특별히 운동을 한적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격투기를 배운 경험도 전무했다. 하지만 자신이 만났던 누구보다 빠르고 힘도 강했다.
그녀의 말처럼 종일 운동을 하며 노력한 사람들이 이 모습을 보면 회의감을 느낄지 모른다. 그녀가 격투기에 대해 아는 건 고작 영화나 만화, 소설등에서 읽고 배운 허왕된 지식이 대부분이다. 무서운 점은 그것을 흉내낼 수 있는 신체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지.
" 읏-!"
공중에서 채찍처럼 휘둘러온 다리를 막는다. 일반적인 사람은 저렇게 오랜시간 동안 체공할 수 없다. 그렇기에 격투기는 대부분 그라운드 기술이 대부분이고 서서하는 입식타격기술이 주를 이룬다. 하지만 그것을 부정하듯 수연이는 공중으로 몸을 띄우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몸의 유연성도, 힘도, 속도도 아득히 일반인의 위에 있었다. 유리가 피한 곳에 있던 얇은 나무가 단번에 부러져나간 것만 봐도 그렇다. 아무리 얇은 나무라지만 기본적으로 나무. 거기다가 살아잇는 나무인 이상 저렇게 부러져나가는 것은 보통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단순한 사람의 발차기로 그것이 꺾여버렸다. 그것만으로 그것을 일반인이 받아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수연이는 그정도로 강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그정도로.
' 하지만-.'
유리는 속으로 웃었다. 이정도는 이길수 있다. 라고.
수연이는 빨랐다.
물론,
그렇다고 자신이 느린 것은 아니지만.
뻗어오는 수연이의 팔을 낙아챈다. 그러자 민첩하게 반응하여 다른 손을 뻗어오는 그것또한 낙아챈다.
수연이는 강했다.
그 힘도 일반적인 여자아이의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의 힘도 결코 그녀에게 뒤지지 않았다.
" 잡았다구-!"
억지로 자신의 팔을 빼낼려고 안간힘을 쓰던 수연이는 그것이 쉽게 되지 않자 이를 악물고-.
유리의 머리를 향해 박치기를 했다. -과연, 그것은 예상외의 공격이었던지라 유리도 순간 수연이의 팔을 놓칠뻔했다. 실제로 한손은 놓쳤지만 나머지 손은 꾹 잡고 있어서 수연이가 도망가지 않게 한손으로 잡고 글러브를 낀 주먹을 강하게 휘둘렀다.
그런데 피했다. 정확히는 수연이의 볼에 주먹이 닿는 순간 반사적으로 수연이가 고개를 돌리며 등을 젖힌 것이다. 그야말로 놀라운 반사신경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만 아주 타격이 없었던 것도 아닌지 잠시 비틀거리던 수연은 눈을 부릅뜨며 빠져나갔던 손을 들어 유리의 얼굴을 향해 휘둘렀다.
수연이의 흉내를 내보려햇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에게 그정도 재주는 없었다. 그래도 어느정도 충격을 줄이는 것에는 성공해서, 다시 수연이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것을 반복하고 반복하고.
몇번이나 유리의 손에서 수연은 팔을 빼내려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했다.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몇번이나 주먹을 교환했다.
" ...왜-."
아팠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이렇게 싸운적이 없었던 만큼 아팠다. 아무리 피하려한다지만 피하지 못한 것도 있었고 남을 때려본적이 있었을리 없는 주먹이 아팠다. 하지만 그럴 수록 수연은 머릿속은 '대체 왜?'라는 생각만이 들었다.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머리가 헝클어지고 충격에 볼이 빨갛게 붙고 코에서는 피마저 나왔지만 유리는 놓지 않았다. 그 상황은 수연이도 크게 다르지 않았고, 그런 수연이를 보며 유리는 뻗던 손을 멈추고 아픈 볼을 찡그리며 어설프게 웃었다.
" 뭐야, 패배 선언이냐?"
" 아니야!"
그리고 그 순간을 노린 수연이의 갑작스런 박치기에 결국 손을 놓친 유리는 몇걸음 뒤로 물러서다 결국 넘어졌다. 머릿속이 윙윙 도는 기분이었다. 그것은 수연이도 마찬가지. 이마가 아픈지 머리를 붙잡고 그렁그렁한 눈으로 유리를 바라본 수연이는 유리를 향해 소리쳤다.
" 뭐 때문에. 뭐가 그렇게 필사적인거야! 적당히 항복하면 되잖아. 내가 이겼어, 내가 이긴거잖아!"
" ...바보냐."
우기듯이 소리치는 수연이의 말에 유리는 피식웃으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얻어맞은 볼이 아직도 얼얼했다.
" 네가 빌려준 만화에서 나오더라. '포기하면 거기서 시합종료에요-.'라고."
" 이런 상황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이 바보가!"
매도하는 수연이의 말에 유리는 어깨를 으쓱한 뒤, 부운듯한 볼을 왼손으로 쓰다듬으며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말하자면 난 지지 않았다는 거야."
" ...아프잖아."
" 당연하지."
" 그러면 왜 그렇게까지 해? 뭐가 그렇게 중요해서. 이 싸움에 무슨 의미가 있는데!"
" 너와 대등하게 대화를 하기 위해서라고 했잖아. 거기다-."
자신을 바라봐오는 수연이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유리는 아픈 와중에 자신만만 웃음을 지어보이며 말했다.
" 아무런 재능도 없던 내가 너와 이렇게 싸울 수 있는 노력의 대단함을 보여주려고 했다."
" 그건-."
" 역시 대단하네, 이수연. 네 생각처럼 사람은 타고나는 재능이 중요하긴 한가봐."
정말 노력했다. 눈물을 흘리며 힘들다고 몇번이나 포기하고 싶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계속 계속 노력해서 얻어낸 힘이다. 몇년이나 그렇게 단련한 자신의 자랑이다.
" ...뭐가.. 대단해."
그렇게 힘들게 노력했다. 몇년이나 그렇게 노력한 유리다. 하지만 결국 수연이를 이기지 못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자신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그런 노력이다. 화가났다. 그것은 유리에 대한 화가 아니다. 불합리한 자신에 대한 분노다. 언제나 생각했다. 자신의 재능을. 언제나 뛰어나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런 것을 바란 것은 아니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을 가지고 싶다고 해도 이런 불합리한 것을 바란 것은 아니다. 마치 비웃는 것같아서. 노력한 모두를 비웃는 것같은 이런 재능은 바란적 없었다.
" ...내가- , 내가 조금만 노력했으면 상대도 안됐을텐데.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노력했어도 넌 이렇게 비길 수도 없었을텐데!"
노래도, 기타도. 공부도, 운동도. 자신이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노력한다면 오랜시간 공들여 노력해왔던 사람들을 비웃듯 초월해버린다. 자신은 그것이 싫었다. 자신이 하는 것을 보고 회한을 가지는 사람들의 얼굴이 싫었다. 마치 과거 자신이 지었던 얼굴과 같아서.
무엇을 해도 결국 제대로 되지 않는 자신과 같아서.
" 네가 뭘그렇게 억울하게 생각해?"
하지만 유리는 천천히 다가와서 그렇게 소리치는 수연이의 머리를 툭하고, 손바닥으로 치며.
" 그래도 말이야, 평범한 놈이 노력한 것만으로, 천재를 노력하게 만들수 있다는 것은 대단하지 않냐?"
그것은 언제나 처럼 자신만만한 유리의 웃음이었다.
" 이기지 못할지도 몰라. 아무리 노력해도 노력하는 천재를 평범한 놈이 이기는 것은 무리지. 어쩌면 불가능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 그렇지만 결국 승리하는 것은 더 노력한 놈인거야. 천재도 노력하지 않으면 평범한 놈한테 진다고? 결국 누가 져도, 이긴놈에게 박수쳐주면 멋지잖아. 넌 뭘 그렇게 무서워하는거야? 그 가면도, 무엇때문에 쓴건데?"
" ...윤아도 너도.. 왜 그렇게 나한테 신경쓰는거야. 나는 고작 올해 만난 그런 녀석일 뿐인데."
" 그건 내가 할말이다. 너야말로 뭘 그렇게 우리를 신경쓰는거야?"
유리의 말에 수연이는 할 말을 잃었다. 그 말처럼 수연은 그 둘을 신경쓰고 있었으니까.
" 뭘 피하는 거야. 뭐가 무서운건데? 그렇게 가면을 쓰고 남을 대해야 할정도로 두려운 것이 뭐야?"
똑바로 눈을 마주쳐오는 유리의 시선에 수연이는 무심코 그 눈이- 무척이나 맑고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하게 마주쳐 오는 그 눈동자가.
" ....나는, 올해 겨우 상혁이를 만났어."
" 알아."
" 윤아는 몇년동안이나 계속 상혁이를 좋아했고 지켜줬어."
" 알아 임마."
가볍게 대답하는 유리의 말에 도리어 화가난 것은 수연이였다. 이렇게까지 말했으면 알텐데 어떻게 저렇게 태연하게 답할 수 있을까!
" -너도 마찬가지잖아! ...계속, 계속 상혁이를 좋아했잖아. 몇년이나, 몇년이나 만나기를 고대했다면서. 그렇게 노력했으면서 억울하지 않아? 분하지 않냐고! 슬프잖아. 그렇게 울었잖아!"
갑작스럽게 소리치는 수연이의 말에 얼굴을 살짝찡그린 유리는 한숨을 쉬며 빨갛게 변해있는 수연이의 이마를 손으로 툭쳤다. 그러자 이마가 아픈듯 수연이가 인상을 찡그렸다.
" 그래 슬프다. 그렇게 울만큼 마음도 아팠어. 하지만 그래서? 그게 왜 네가 물러나있어야 되는 이유가 되는데?"
" 나는 겨우 올해 상혁이와 만났을뿐이야. 겨우 호감을 느끼고 있어. 이제야 좋아하고 있어. 그런 내가, 그런 내가 할 수 있을리가 없잖아...!"
이녀석은 무슨 바보같은 소리를 하는걸까. 유리는 다시한번 손으로 빨간 수연이의 이마를 쳤다. 이번엔 좀더 쌔게. 그러자 수연이가 한층 인상을 찡그리며 고개를 젖혔다.
" 무, 무슨 짓이야!"
" 너 지금말투 지윤이녀석이랑 비슷하다? 뭐 그건 넘어가도, 무슨 그런걸 신경쓰냐? 우리가 상혁이를 얼마나 좋아했건 얼마나 알고 지냈건 네가 무슨 상관인데?"
그 말에 수연이가 뭐라고 말을 하려 했지만 그보다 빠르게 유리가 말을 이었다.
" 사람과 사람이 이어지는데 필요한건 누가 더 오래만났느냐가 아니야. 누가 더 많이 좋아했느냐가 중요한게 아니라고. 얼마나 좋아하고 사랑했는지 분명 필요할지 모르지만 그런 것으로 사람간의 사이가 정해지는 것은 아니잖아."
그렇게 말한 유리는 수연이의 가슴 정중앙을 손으로 쿡찌르며.
" 누군가와 이어진다는 누구를 더 좋아하고 경쟁하는 것이 아니야. 지금 네가 하는 것은 마치 네가 지금 노력하는 사람들을 비웃는 것같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행동과 같지. 네가 좋아한다고 하면 상혁이가 수락해버릴까봐 피한거잖아. 윤아나 내가 아닌 자신이 될까봐."
" ....."
말없이 고개를 떨구는 수연이의 뒷통수를 빤히 바라보던 유리는 단번에 손을들어 그것을 내리쳤다!
" 아파!"
" 바보냐! 너는 사람이 그렇게 쉽냐, 무슨 그런 것을 고민하는데! 네가 좋아한다고 상혁이도 널 좋아한다고 어떻게 단언하냐! 무슨 공주병이라도 되는거야?"
" 그, 그럴리가 없잖아!"
" 뭐가 그럴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했으면서. 윤아도 거절당하고 남은 것은 너와 나뿐이었고. 너는 너 자신보단 내가 되길 바란 거잖아. 그런 가면까지 쓰고 무슨 헛짓거리를 하는거야."
" ....."
" 야, 이수연 잘들어. 누군가와 이어진다는 것은 누가 더 오래 좋아했는지. 얼마나 좋아하는지 그 마음을 경쟁하는 것이 아니야. 그 마음이, 전해지는 사람이 승리하는거라고."
뭐 나는 실패했지만. 하고 빙긋 웃은 유리는 그렇게 말하며 수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 왜 언제나 그렇게 도망치려고 하는거야. 물러서려고 하는건데. 이번 일뿐이 아니야. 그렇게 대단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더 멋지게 살 수 있잖아. 하고 싶은 것도 마음껏 할 수 있다고. 왜 언제나 그렇게 가면을 쓰고 물러서는거야?"
" ...하지만."
" 뭐가 하지만이야. 평범한 나같은 놈이랑 비길정도면 말 다했지. 그렇게 자신만만하면 끽 소리못할만큼 엄청난 것을 하면 되잖아. 하고 싶은 것을 하면 되잖아. 왜 그렇게 남의 눈치를 봐? 뭘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거야."
뭘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가.
언제나 수연은 그랬다. 한발짝 물러서있었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후, 처음의 실패를 맛보고 계속 한걸음 물러서있었다. 무엇을 해야할지 몰랐다. 조금만 노력해도 다른 사람들이 지어보이는 그 얼굴이 무서웠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이 두려웠다.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계속 뒤로 물러나 있었다.
이번의 일도 마찬가지다. 상혁이를 그날 보내고 난 이후, 한참을 고민했다. 자신은 이대로 좋은가. 계속 그녀석을 좋아해도 괜찮을까. 그날 그렇게 아팠던 자신의 마음을 생각하니 오랜시간 계속 상혁이를 좋아한 윤아의 마음과 유리의 마음이 어떨지 한참 고민했다.
자신은 고작 1년이다. 1년간의 만남이었고 이제 호감을 느끼고 좋아했을뿐이다. 그런 자신이 이렇게 아팠는데, 윤아와 유리는 어떨까. 그 생각을 하니 자신있게 좋아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윤아와 유리가 슬퍼하는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자신과 상혁이가 만약 이어졌을때 둘에게 버림받을것같았다. 그때 둘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같았다.
그랬기에 마음을 정리했다. 도망치지는 않는다. 과거의 자신의 얼굴을 하고 그렇게 지내보기로 마음먹었다. 차라리 누구에게나 사랑받던 이수연의 모습을 하기로 했다. 상혁이를 좋아하는 이수연이 아닌, 모두를 좋아하려했던 이수연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 ...가면이, 아니었어."
그 마음은 진심이었다. 도망치려 한것도 아니었다. 단지 그렇게 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 그게, 노력한 거였다고."
똑바로 마주볼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노력한 얼굴이었다. 옛날에 한번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번 노력한 것이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수연이 되기로.
" 있,잖아. 그거 어렸을때 나의 얼굴이라고 지윤이가 말해줬지?"
" ...아아."
어린시절 밝고 누구에게나 멋졌던 수연이.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런 아이.
" 그거 말이야. 노력-한거야. 그게, 나의 노력이었어."
모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전생의 명환이와는 전혀 다르게, 애니메이션도 만화도 게임도 멀리하고. 공부도 열심히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그런 자신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한 것이다.
" 왜? 대체 왜 그렇게 해야했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의 너도..."
그렇게 말하던 유리도 말꼬리를 흐렸다. '힘들다'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과거 어둡다고, 뚱뚱하다고 놀림받고 왕따당했던 자신이기에 알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자신으로는 무리였으니까. 그래서 자신도 스스로를 바꾸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 상혁이에게 사랑받을 수 있도록. 지켜줄 수 있도록.
그것은 수연이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 나 말이야, 태어난 바로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쭉 모두 기억하고 있어."
눈물을 한방을 떨구며 수연은 말했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던 과거의 자신의 일이었다. 누구에게도 이야기할 수 없었던 '자신'에 관한 것이다.
" 나, 태어났을때 엄마가 꼭 안아줬어. 사랑한다고, 미안하다고. 같이 하지 못하지만 계속 지켜보고 있을 거라고."
어째서였는지는 모른다. 자신이 태어났을때 자신의 어머니는 필요이상으로 너무 기뻐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전생의 부모님에게 받지 못했던 사랑을 모두 자신이 채워주려는 것처럼 그렇게 사랑한다 말해줬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계속해서 함께 할 수 없어서 미안하다고 말해줬다.
딸과 함께 옷을 사러 가고 싶었다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걷고 싶었다고.
가끔은 티격 태격싸우고 장래를 걱정하며 한숨짓고.
매일 맛있는 밥을 해주며 사랑해주고 싶었다고.
" 어머니가, 엄마가-, 말했는걸-! 나는, 나는-! 사랑 받는 아이가 될거라고! 엄마가 지켜줄테니까. 계속, 사랑받게 될거라고...!"
그래서.
노력했다.
" 사랑받으려고, 노력했어. 사랑받는 얼굴을 하고-. 그렇게 그렇게 노력했어! 좋아하는 것도 외면하고. 하지만 실패했는걸. 사랑받지 못했어. 모두 무리였던거야!"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얼굴을 했지만 모두 자신을 경외할뿐 친구는 생기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최선을 다했지만 새로운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해주지 않았다. 모두 실패했다.
계속, 실패했다.
" ...그것을 후회해?"
조용한 음성으로 유리는 물었다. 그 말에 수연은 아무런 말도 답하지 않았다. 힘들었겠구나, 라고 생각한 유리는 천천히 수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마치 어린시절 사랑받으려고 노력했던 수연이에게 칭찬을 하듯. 장하다고, 노력했다고. 정말 힘냈구나-라고.
" -응, 후회, 해."
수연은 속삭이듯 중얼 거렸다. 후회한다. 사랑받지 못했던 자신을.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던 어린 수연이를.
" 그럼 지금은, 아무렇지 않아? 뭔가- 하고 싶은것은 없어?"
그렇게 노력하고, 힘냈지만 실패했다.
그렇기에 지금 수연이는 어떤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두려운 것이다. 무섭고 자신의 재능을 믿을 수 없는 것이다. 알고 있지만 할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싶은것.
언제나 생각했다. 상혁이와 만나고 뭔가 하고 싶은게 있지않을까 다시 한번 생각하기 시작했다. 서코에가서 노래를 부르며 자신의 재능도 뭔가 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나지 않았다.
무엇부터 해야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윤아의 일때문에 머리가 복잡해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하지 못했다.
" 지금, 네가 가장하고 싶은거. 아무것도 없어?"
유리는 수연이에게 재차 물었다. 하고 싶은 것이 없는지. 한 걸음 물러서있는 자신을 앞으로 끌고오기 위해. 함께 대등하게 서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할지 앞으로 무엇을 하고 싶은지. 수연이가 생각하는 것은 결국 하나뿐이었다.
결코 변하지 않은 한가지였다.
" ...나."
떨리는 목소리로 수연은 힘겹게 입을열었다. 어째선지 눈물이 나왔다. 가슴이 북받치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이 울럴거렸다.
"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바라는지는 예전부터 기억하고 잇었다. 하지 않았을 뿐이다. 무섭고 두려워서 물러나 있었을뿐이다.
하지만 가지고 있었다.
잊고 있었던게 아니라 그 마음을 꾹 누르고 있었다.
매정한 얼굴로 사람을 거절하고, 냉정하게 잘라내고.
혼자서 밥을 먹고 아무도 다가오지 못하게 외면하고.
하지만 잊고 있지 않았다. 언제나 생각하고 있었다. 바라고 있었다.
" 사...."
꾹 눌러참고 기다리고 있었다.
" -사랑, 받고 싶었어...! 모두에게. 가족에게, 친구들에게 사랑받고 싶었어-!!"
싫어해서 거절했던 것이 아니다. 귀찮아서 외면했던 것이 아니다.
" 무서웠어. 두려웠어! 나를 외면할까봐. 엄마가 말한 것처럼 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어서. 부끄러워서, 바보같아서!"
도망치고. 기만하고, 피하고 숨어있었다.
" 외로운 것은 싫어. 혼자인 것도 싫어! 친해지고 싶었어. 모두에게 사랑받고 엄마가 말한 것처럼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런 내가 되고 싶었어."
하지만 계속 실패했다. 하고 싶지만 한번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생에서 부터 바랐던 그마음. 누군가가 자신을 믿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누구도 도와주지 않았다.
부모님도.
학교의 학생들도.
경찰도.
그 모두가 누구도 자신을 믿어주지 않았다. 혼자였다. 계속 계속 혼자였다.
그래서 다시태어났을때 어머니의 말을 듣고 이번에는 사랑받는 아이가 되자라고 생각했다.
사랑스런, 모두에게 사랑받는 그런 아이가 되고 싶었다.
" 미움받는 것은 이제 질렸어. 외면받기도 싫어. 그래서 그랬던거야. 겨우 생긴 친구였기에. 더 외면받기 싫었어.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었어.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것은 계속 감춰두었던 수연이의 본심이었다. 누구에게도 다가오지 못하게, 냉정하고 차가운 얼굴을 하고 싶었지만 그것은 단지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누구도 다가오지 못한다면 진심으로 외면받을일도 버려질 일도 없으니까. 계속 그렇게.
" 나, 바보같지...?"
전생에는 아무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다. 그랬기에 새롭게 태어났을때 모든 잘하게 되었을때 너무나 기뻤다. 이것이라면 모두에게 사랑받을 수 있을거라 생각했다.
노력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하지만 실패했고, 다시 한번 힘내려할때마다 주저없이 그런 것은 꺾이고 말았다. 이 재능이 무서워졌다. 사람들에게서 받는 그 시선이 무서웠다. 그래서 피한 것이다.
계속.
계속 그렇게.
============================ 작품 후기 ============================
오늘은 여기까지 입니다. 사실 좀더 한참 투닥거리게 하고 싶었는데-. 분량상 투닥이는 부분을 줄였네요. 사실 처음 구상했을땐 수연이보다 곱슬이가 훨신 잘싸웠지만 지금은 그냥 잡고 팼네요!
다음편은 이제 5권 분량 마지막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