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나, 있지. 이제 이사 가.』
소녀는 말한다. 슬프지만, 평상시와 그다지 다르지 않는 밝은 음성으로. 그 말을 들은 맞은 편에 있던 소년은 커다란 모래성을 만들던 손을 멈추고 소녀를 응시한다.
『또 만날 수 있어?』
소년은 그렇게 묻는다. 하지만 소녀는 그말에 뚜렷한 답변을 하지 못하고 애매하게 웃었다. 애초에 이사를 가는 것은 자신의 결정사항이 아니니, 다시 돌아오는 것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아버지가 지금 운영하시던 도장을 팔지 않고 남겨두고 가는 것이랄까. 어쩌면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중에 소녀의 아버지가 뒤늦게 팔지도 모르는 일인지라 확답을 할 수는 없었다.
『응, 분명 다시 만날 수 있어. 나중에-, 분명 분명 확실히.』
하지만 소녀는 강하게 말한다. 분명 만날 수 있다. 다시 되돌아온다고 소년을 향해 확답했다. 그런 소녀의 말에 소년은 다행히라는 듯이 웃음 지었다.
『다행이다. 나, 지금 친구라곤 너뿐이라서 무척 막막했는데 다시 돌아온다니 다행이야.』
약간 어두운 얼굴로 말하는 소년. 소녀는 그 어두운 마음이 무엇인지 아직까지 알지 못했다. 이렇게 헤어지는 순간에도 소년이 가지고 있는 어둠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소녀가 소년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어둠때문이었고. 그 어둠이 있었기에 소녀는 소년에게서 지켜질 수 있었다. 고맙다고, 언제나 이야기할 수 있었다. 외톨이에 언제나 괴롭힘만 받던 소녀에게 소년이 다가간 것도 그 어둠을 소녀에게 공감할 수 있었을 것같기 때문이다.
외롭고 쓸쓸한 그마음을. 그것이 소녀와 소년을 엮는 하나의 연결고리였다.
이제는 헤어져야하기에 그 연결고리는 끊어지겠지만 소녀는 다짐한다. 언젠가 다시, 다시 소년과 만나게 된다면 자신이 먼저 다가갈 것이라고. 그리고 지금처럼 지켜졌던 것이 아닌, 자신이 이 소년을 지켜주겠다고.
『있지. 나 노력할게. 다음에, 다음에 만날때는 지금처럼 너에게 도움만 받는 바보가 아니라 지켜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
소녀의 말에 소년은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살풋 웃었다. 그 웃음은 어린 아이가 짓기엔 너무나도 슬픈 웃음 이었다. 마치 자신에겐 그럴 필요가 없다는 듯이.
『응... 기대할게.』
작은 목소리. 하지만 소녀는 그것을 똑똑히 들었다. 언젠가의 만남을 기대한다는 그 말을. 그렇기에 소녀는 정했다.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지만 다음에 만날 때의 자신은 지금과 달라질 것이라고.
이 소년을. 이 상처많은 아이를 지켜주겠다고.
『 안녕. 다음에 또보자! 나, 잊으면 안 돼!』
소녀는 기운차게 인사했다. 소년이 예쁘다고 이야기한 두눈을 소년의 눈동자와 마주보며. 소년은 그런 소녀에게 마주 인사한다. 언제 보게될지, 만나게 될지 모를 인사를.
씩씩하게.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그 말을 곱씹으며 소녀는 밝게 웃으며 인사했다. 언제나 울상에 자신감이 없던 자신이 지을 수 있는 최고한도의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헤어졌다.
『응, 기억할게.』
언젠가 만나자는 기약없는 약속을 하며.
- - - - - - - -
" 후우, 오늘은 이정도만 해둘까나."
땀에 젖은 적갈색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기며 소녀-곱슬이는 말했다. 수연이에게 빌린 만화책에서 나오던 수련을 직접해보니 나름 괜찮은 것같았다. 한손으로 물구나무해서 팔굽혀 펴기라니. 처음엔 이게 되나 싶었는데 자신이 하다보니 나름 운동이 되는 것같았다.
땀에 젖어 갈아입을 옷을 찾기 위해 자신의 방으로 돌아오니 여자애의 방이라기엔 난잡한 방이 눈에 들어왔다. 언제 한번 정리를 하긴 해야할텐데... 이곳저곳 널부러져 있는 만화책이나 각종 책, 그리고 운동기구들을 보며 곱슬이는 쓴 웃음을 지었다.
본래는 운동기구 정도만 있던 방이지만 고등학교에 다니고 나서 수연이에게 빌린 만화책이나 자신이 직접 산 책들이 늘어나며 좀더 너저분해졌다. 본래 전혀 관심없던 것들이었지만 상혁이가 그런 것을 좋아하니 자신도 이야기를 하면 그런 것을 알아야 할 것같아 공부를 하고 있던 것들이다.
만화나 애니를 공부한다니 우습지만.
하지만 그것은 곱슬이의- 그리고 7년전 헤어졌던 작은 소녀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다. 할 수 없다면 할 수 있도록 노력한다. 그것을 마음에 세기고 그간의 시간을 견뎌왔다. 매사의 자신없고, 울상이던 자신이 이렇게 될 수 있던 것도 모두 그런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시절에는 우락부락해서 그저 무서워했던 아버지에게 직접 단련을 부탁한 것도. 아버지를 따라 산에 들어가서 단련한 것도 모두 그런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그것에대한 재능이 있는지, 없는지는 둘째였다.
그저 달라지고 싶어서.
다음에 만날때 했던 그 약속들을 지키고 싶어서 노력했다. 아파서 울고, 힘들어서 지쳐서 그만두고 싶을때도 있었지만 자신은 그 모든 것을 해냈다. 덕분에 예쁘다고 했던 눈은 살이 빠지며 어쩐지 노려보는 모양세가 되었다는게 유일한 불만이지만.
뭔가 스스로를 달라지자는 마음에 했던 염색도 어째선지 날라리로 보이게 했던 모양인지라 중학교 시절부터 유독 시비를 거는 여자애들이 많았다. 자신은 그냥 좀 튼튼해지고 싶었던 여자애였을 뿐인데.
덕분에 중학시절은 그야말로 폭풍같았고. 이상한 녀석들과 지금 이런 만화에서나 나올법한 녀석들을 상대했던 시절이 있었다. 다행히 고등학교엔 그런 애들은 없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성있는 사람들을 만나기는 했지.
" 이수연 그녀석..."
갈아입을 옷을 들고 샤워실에 들어온 곱슬이는 따뜻한 물을 얼굴에 맞으며 엊그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그 날일은 꽤나 갑작스러웠다고 생각한다. 평상시처럼 운동을 하고 있던 곱슬이는 핸드폰으로 걸려온 청이의 전화에 깜짝 놀랐다. 상혁이가 저녁늦게 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연락도 되지 않는 다는 이야기.
아마 그 말은 자신뿐이 아닌 수연이나 다른 친구들에게도 물어보았던 것인지 청이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그렇기에 곱슬이는 주저 없이 상혁이를 찾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하지만 상혁이는 찾을 수 없었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어렸을적 상혁이와 처음 만났던 놀이터를 지나가던중 익숙한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바로 비를 맞으며 처연한 얼굴로 그네에 앉아있는 수연이를.
처음엔 귀신인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세히보니 그것은 분명 수연이였고, 그간 한번도 본적없는 슬픈 얼굴로 그곳에 앉아있었다. 다가가서 왜 그러냐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 않았다. 그저 하염없이 이 놀이터를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있는 수연이를 보며 무슨 일이 있었구나, 하고 생각했을뿐.
하지만 왜 그 놀이터였을까. 그곳은 그다지 크지 않은 작은 놀이터였고, 놀이기구도 그네랑 시소뿐인 장소였다. 옛날에 자신이 이곳에 갔던 것도 괴롭히는 아이들을 피해 우연히 오게 되었던 곳이다. 나중에 알고보니 공교롭게도 아버지 도장의 뒷편이었지만.
당시엔 아버지를 무서워했기에 도장에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서 몰랐던 것이겠지. 하지만 덕분에 이 장소를 찾아왔던 첫날 자신은 상혁이와 만날 수 있었다.
아이들이 그다지 오지 않는 이 놀이터는 자신과 상혁의 비밀장소였는데.
어째서 수연이가 이곳을 알고 있는지. 그리고 저런 슬픈 얼굴을 한체 이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곱슬이는 그저 그런 수연이를 뒤로 한체 집으로 돌아왔고. 이야기가 모두 해결된 어제 상혁이에게 전화를 해보니 그저 웃으며 별일 아니었다고 이야기해줬다.
다만.
' 수연이가 그렇게 도와줬는데 겨우 일이 이렇게 되서 민망하지만.'
이렇게 마지막에 덪붙였던 사족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수연이는 자신처럼 없어진 상혁이를 찾기위해 나섰고 만났었던 모양이었다. 그리고 윤아에게 가야할지 말지 망설이는 상혁이를 설득해서 보냈던 것이겠지.
" ...그러면서 아닌척 하긴."
그 놀이터엔 그 후에 왔던 것이겠고. 곱슬이는 젖은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대충 털어내고 감싸며 옅게 한숨을 쉬었다. 뭐 예상은 했었다. 그 매사에 무심한 녀석이 묘하게 상혁이를 신경쓸때부터 어렴풋이 눈치챘다.
아마 윤아도 알고 있겠지. 분명 수연이는 상혁이를 좋아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엊그제 있었던 상황을 보자면 상혁과 윤아는 한걸음만 남은 상태라고 생각한다. 거기서 상혁이 윤아에게 간다면 분명 윤아의 마지막 인사와 더불어 고백을 했을 확률이 높다. 누가 고백을 할지는 모르지만 상혁이보단 윤아쪽이 할 확률이 높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곱슬이도 윤아라면 어쩔 수 없지-라고 언제나 생각하지만 만약 자신이 그때 수연이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상혁이를 과연 윤아에게 보낼 수 있었을까.
분명 갈등했을 것이다. 어쩌면 가지 말라고 했을지도 모르고. 자신의 성격성 그자리에서 다시한번 고백했을지도 모를일이다. 윤아가 상혁이를 좋아하는 것은 알지만 자신 또한 지난 몇년간 계속 좋아했던 상대를 쉽게 놔주고 싶지는 않으니까.
하지만 수연이는 보내주었다.
그것은 상혁이에게 전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다. 그 놀이터에서의 얼굴을 보자면 수연은 윤아와 상혁이 이어질 것이라 생각하며 자신의 마음을 접고 보낸 것이다. 그만큼, 상혁을 좋아하고 있다는 것이겠지.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상혁이도 윤아를 거절했다는 거다. 그 이야기를 들은 것도 어제. 윤아로부터 '헤헤, 회심의 고백을 했지만 차여버렸어! ㅜㅜ' 라는 문자를 받은 이후다. 분명 상혁이와 윤아라면 한걸음만 남은 상태라고 생각했고.
누군가와 상혁이가 사귀게 된다면 분명 윤아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야말로 멋진 반전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은 분명- 상혁이가 누군가를 좋아하고 있다는 소리와 마찬가지. 상혁이와 윤아의 관계를 볼때 상혁이가 윤아에게 그간 아무 마음이 없었다고 보긴 힘들다. 하지만 그 마음을 꺽을 정도로 상혁이가 누군가에게 반해있다면.
윤아가 차이는 것도 이상한 것은 아니겠지.
" 그게 나였다면 좋겠지만..."
아, 그거 무리. 곱슬이는 그제야 모든 것을 대충 알아버렸던 것이다. 상혁이의 마음을, 그리고 지금 갈등하고 고뇌하는 수연이의 마음도.
이상하게 이런 곳에서는 눈치가 빠른 자신이다. 정말 곤란하지 않을 수 없다. 상혁이야 뭐, 어쩔 수 없다고 생각은 한다. 애초에 인간 관계가 자신 마음대로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솔직히 지금 상황은 곱슬이로서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수연이겠지. 그때 놀이터에서 보았던 모습으로 보아 마음을 정리하든, 또 혼자 땅을 파고 우울해하고 있을지도 모를일이다.
' 그 계집애 멘탈은 무지 약하니까.'
그것을 알 수 있는게 지금 지윤이가 한시간에 한번씩 자신에게 기묘한 문자를 보내고 있기 때문에 잘 알 수 있다. 언니가 엊그제 밖에 나갔다 온 뒤로 이상하다느니 뭐 아는거 없냐고 틱틱 돌려서 묻는게 어디로 보나 걱정하는 여동생의 모습이다.
그리고 수연은 여동생에게 걱정을 끼칠만큼 상태가 안좋다는 것이고.
이제 방학이 끝나는 것도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았고, 오늘은 주말이니 내일 한번 부실로 찾아가보자. 늘 방학때 부실로 와서 놀던 수연이를 보자면 오게 될 확률이 높으니까.
특히 그런 일이 있었던 만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나올 확률이 높지.
아무래도 이야기만 들었던 것인지라 직접 보기전까지는 상황이 어떤 것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내참 나도 뭐, 굉장히 오지랖 넓네."
내 코가 석자인데 말이지. 곱슬이는 헛웃음을 지으며 냉장고에서 꺼낸 우유를 한모금 마셨다. 계속 상혁이를 좋아했고, 이제 이런 상황에서 두 녀석을 신경쓰는 자신이 오히려 우스웠다.
계속 노력했다.
정말 열심히, 그렇게 한결같이 노력했는데.
" 내일, 데이트 신청을 해볼까나."
마지막, 마지막으로 한번 힘내보고 생각해보도록 하자. 둘의 사이를 보고, 그리고 관계와 상황을 보며 이야기해보도록하자. 내일 수연이가 멀쩡히 나온다면 한번 녀석이 보는 앞에서 데이트 신청을 해봐야지. 그건 분명 볼만할 것이다.
자, 이제 어떻게 할래?
라는 마음으로. 어쩌면 도발이라고 할 수도 있다. 아니, 도발이 맞다. 물론 그것은 윤아가 차였다는 것을 모르는 수연이에겐 혼란스러운 행동이 될지도 모른다. 그래서 더더욱해야겠지.
아니면 그녀석 또 도망칠지도 모르니까.
============================ 작품 후기 ============================
뭔가 오랜만인 것같기도 하고?! 사실 어제부터 쓰기 시작하려했는데 인터넷이 끊겼었어요... 이제 곱슬이편! 곱슬이편은 좀짧구요. 이제 그 다음은 지윤이겸 수연이 편입니다. 개인적으로 곱슬이라는 캐릭터를 무척 좋아하는데 말이죠.
사실 수연이보다 곱슬이라는 캐릭터가 먼저 완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연히 곱슬이의 남친 역활은 상혁이가 아니었구요. 사실 수연이라는 캐릭터는 제가 이전에 생각하던 글에 마지막에 나오는 존재였을뿐이었는데 어쩌다보니 이젠 주인공으로 되어버렸네요.
사실 공략당해버렸습니다-라는 글보단 단편이라고 할 수 있는 수연이의 어머니의 이야기가 먼저 플롯을 짰었거든요. 전에 말했다시피 공략당해버렸다는 그냥 생각나서 생각없이 쓰기 시작한 글이라...
이 글이 완결나면 곱슬이의 스토리(중학교때)이야기나. 이 글의 전 이야기라고 할 수 있는 수연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써볼 생각입니다. 수연이의 어머니의 이야기는 분량이 특히 그리 길지 않아서 쓰게 될 확률이 높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