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그거야 당연하잖아? 윤아의 부모님이 서울로 이사가기로 했으니 가족으로서 축하파티에 참여하는 것은 기본이지』
상혁은 어제 자신의 누나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눈을 떴다. 어제 저녁에 갑작스럽게 온 상화의 전화. 그 말에 상혁은 저녁 식사도 하는둥 마는둥 급히 식사를 마친 뒤에 자신의 방으로 돌아와 바로 잠들어버렸다.
계속 깨어 있다가는 그것에 대해 계속 생각할 것같았기에 자신으로선 어쩔도리가 없었다. 그래도 하루밤을 자고나면 좀 괜찮아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정답인 모양이다. 가슴이 답답하고 아직 머리가 어질어질하지만 어제처럼 숨이막힐정도는 아니었다.
" 아, 일어났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시선에들어온 것은 언제나처럼 상혁을 깨우기 위해들어오던 윤아의 모습이었다. 서울 코믹월드에 다녀온 뒤, 한동안 상혁이의 방에 들어와 깨워준 적이없었던 윤아다. 오늘 그런 윤아의 행동은 상혁이로서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지금까지의 윤아의 태도로 볼때 분명 그녀는 자신에게 '이사'를 간다고 말하기로 마음 먹었을 것이다. 아마 그간의 모습은 윤아가 고민에 빠져있었기 때문이겠지.
" 응, 슬슬 개학이 다가오니 습관을 들여야지."
" ....하긴. 내가 언제나 깨워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말한 윤아는 빙그레 웃었다. 언제나와 같은 윤아의 순수한 미소였다. 상혁은 그런 윤아의 모습에 다시 심장이 죄어오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방금 윤아의 말은 분명 자신이 이사를 가고 난 뒤의 자신을 걱정해서 한 이야기일 것이다.
" 아침 식사는 간단한 샌드위치야. 오늘 아버지가 일이 있으셔서 일찍 나가셔서 내가 준비했어."
수연이나 곱슬이, 또는 청이나 상화만큼은 아니어도 윤아도 어느정도 요리는 할 수 있었다. 애초에 위에 언급한 사람들은 그 나이또래의 사람들이라곤 생각도 안될만큼 비상식적인 이들이니, 윤아의 실력은 또래중에서는 비할바 없이 뛰어나고 자랑해도 좋을 수준이었다.
" 그렇지 않아도 어제 많이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픈데, 딱 좋은걸."
티를 내지 않는 윤아의 모습에 화답하듯, 상혁도 애써 아무렇지 않은척 말했다. 여태껏 죄책감때문에 제대로 윤아를 보지않았던 상혁이기에 이정도는 속이 쓰려도 연기하지 못할정도는 아니었다.
" 그럼~. 다 내가 생각해서 딱 준비해놨지. 아, 궁금한게 있는데 혹시 오늘 어디가거나 중요한 약속있어?"
등을 돌리고 상혁이의 방에서 나가던 윤아가 갑자기 발을 멈추고 고개를 살짝 돌려 그리 물었다. 약속이라, 본래 그런 것과는 인연이 그다지 없는 상혁이지만 최근 이래저래 가까운 사람이 늘어나서 조금 바빴던 상혁이다. 하지만 오늘은 딱히 명환이랑 만나기로 하지도 않았고, 수연이나 곱슬이 등과도 특별히 이야기 된 것이 없었다.
" 지금은 별로 생각나는게 없는걸. 아마 특별한 일이라도 생기지 않는한 계속 집에 있을 것같은데? 그동안 못본 애니들도 꽤나 쌓여있고."
사실 애니메이션 같은 것을 볼 정신은 없었지만 티를 낼 수는 없엇으므로 비교적 무난하게 대답했다. 그런 상혁의 말이 만족스러웠던 듯 윤아는 고개를 두어번 끄덕인 뒤에 빙긋 웃으며 '그럼 문제없겠네.'라고 말한 뒤 상혁이의 방 문을 조용히 닫고 나갔다.
' ...아무래도 뭔가 계획이 있는것 같은데.'
오늘 자신의 일정을 갑작스럽게 물어본 것으로 보아 분명 윤아가 자신에게 무언가 용건이 있는것 같았다. 그것은 아마 '이사'를 간다는 것과 관련이 있는 내용이리라 생각한다.
그것에 자신은 제대로 답변할 수 있을까? 아니, 답변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윤아를 똑바로 볼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이런 것을 보면 자신도 수연이 만큼이나 이런저런 트라우마에 눌려 종잇장같은 멘탈을 가지고 있는 것같았다.
" 정말이지, 나란 놈은 수연이에게 잘난 듯이 이야기할 만한 녀석이 아니었네."
자조하듯 중얼거린 상혁은 최근 자신을 계속 도와주었던 흑발의 소녀를 생각했다. 도망치고, 숨고 모든 것을 외면했던 외로운 여자아이. 자신은 그런 그녀를 쫓아 어떻게든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저 자기 만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정작 본인은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 있으면서 본인의 의사도 생각하지 않은체 멋대로 일을 벌이다니. 이기적인것도 정도가 있는법이다.
하지만 그런 자신의 이기심에도 수연이는 자신을 똑바로 봐주었다. 오히려 최근에는 혼란스러운 자신의 마음을 생각에 도와준 것도 한두번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에게 언제나 빚이 있다고 강조하지만. 상혁이가 생각하기엔 도리어 자신이 수연이에게 수많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런 말을 할 수없다. 왜냐하면 본인이 직접 '빚이 있는한 자신은 상혁이의 편'이라고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친구도 아닌 모호한 계약관계. 모호하지만 가장 튼튼한 유대관계. 그것이 지금 수연이와 상혁이의 사이였다. 그러니 상혁이도 함부로 수연이에게 그것은 빚이 아니라고 말할 수 없었다. 그러면 '자신의 편'이 사라질 것 같았으니까.
" 난 이제... 어떻게 해야되려나."
막연해도 너무 막연하다. 이제부터 윤아가 자신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야기할지 그저 두렵고 무서웠다. 부디 자신이 윤아를 실망시키지 말아야 될텐데. 상쳐를 입히지 않고 웃는 모습으로 보내줘야 할텐데.
거울 앞에 서니 눈 앞에는 당장이라도 울 것같은 얼굴을한 볼쌍사나운 자신이 있었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애써 웃는 표정을 지은 상혁은 마음을 애써 정리하며 방문을 열고 나왔다. 우선 세면을 하여 이 이상한 자신의 얼굴을 가다듬어야 할 것 같았으니까. 이런 얼굴을 절대 윤아의 앞에서 보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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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저녁부터는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 일부 지역에서는 큰 비가 쏟아질 것으로 전망됩니다.」
" ......."
윤아는 상혁이에게 약속이 있는지 물었던 주제에 정작 본인이 약속이 있다며 밖으로 나가버렸다. 상혁으로선 계속 윤아와 대면하는 것만으로 정신이 깍여나가고 있었던 터라 도리어 그런 윤아의 말이 조금 반가웠지만.
윤아의 두 부모님도 일이 있어서 아침 일찍부터 없었던 지라 상혁은 오랜만에 본인의 집에서 홀로 TV를 시청하고 있었다. 사실 시청이라고 해봐야 아무 채널이나 틀어둔체 멍하니 의자에 앉아있는 것 뿐이지만 말이다.
처음엔 기분이라도 달랠겸 애니라도 볼까 했지만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아서 만화책도 봐보고 어떻게든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했다. 하지만 모조리 실패하여 이렇게 멍하니 뉴스를 보고 있게 되었지만 말이다.
" 저녁부터 비라... 윤아 분명 우산을 들고나가지 않은 것같은데."
아침에 맨손으로 나가던 윤아를 떠올리며 상혁은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래도 오늘 자신에게 '이사'를 간다는 것을 이야기할 것같았으니 늦게 돌아오거나 하지는 않을 것같았다.
일기예보를 끝으로 뉴스도 끝나고 이상한 다큐멘터리같은 것이 시작하기에 상혁은 TV를 끄고 근처 쇼파에 누워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엇을 하려해도 기운이 나지 않았고 그저 우울함과 나중에 윤아로부터 들을 이야기가 걱정되어 긴장감에 심장만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누구에게 전화라도 해서 수다라도 떨어볼까.
쇼파에 기대듯이 누운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낸 상혁은 자신의 핸드폰에 등록되어있는 번호들을 쭉 살폈다. 고등학교 입학 전만해도 자신의 부모님과 윤아의 부모님, 그리고 청이와 윤아만이 등록되어있던 궁핍한 연락처 목록은 최근 수연이와 곱슬이, 명환이는 물론 지윤이의 번호까지 추가되어 나름 자신도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사람이구나-하고 느낄 수 있게 만들어주었다.
그래도 수연이보단 조금 낫지. 둘이 비교하면 오십보 백보이긴 하지만.
' 곱슬이나 수연이에게 연락을 해볼까.'
활기찬 곱슬이와 최근 자신을 많이 신경써준 수연이. 둘중에 누구에게 전화를 할까 고민하던 수연은 아무래도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했던 곱슬이보단 최근 계속 윤아와 관련된 것을 상담해주었던 수연이에게 전화를 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리고 통화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 어? 윤아?"
핸드폰의 화면에 방금 온 것으로 추측되는 문자 메시지가 표시되었다.
【 자, 그동안 내가 뭔가를 감추는 것같아 신경쓰였지? 신경쓰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거짓말! 계속 신경쓰는게 보였는걸! 아무튼 그래서 그런 상혁이를 위해 이벤트를 준비했어. 어렸을때 했던 숨바꼭질의 연장이야. 나 말이지 이제부터 어느한 곳에 있을테니까 상혁이가 찾아줬으면 해. 못찾으면 내가 뭘 감추었던 건지도 말해주지 않을거야!】
거기서 끊겨있던 윤아의 메시지는 잠깐의 시간을 두고 하나의 메시지가 더왔다.
【제대로 찾아줘야해. 예전처럼.】
예전-이라. 윤아가 말하는 예전은 분명 우리가 아직 어렸던 그때를 말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사고도 나지 않고, 언제까지나 함께할 것이라 생각했으며 곁에 있는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
생각해보면 윤아와 숨바꼭질을 하고, 상혁이 자신이 윤아를 찾아다닌 것은 그 뒤로 없었던 것 같다. 중학교 때에 윤아가 일을 해결할때도 결국 윤아가 자신을 찾았던 것이니 자신이 윤아를 직접 찾아다닌 적은 최근 없는 것같았다.
윤아가 없어지거나 안보이면 불안해지는 주제에 참 우습기짝이 없다.
" ....자신 없는데."
찾아달라고 이렇게 강조하다니. 상혁은 쓰게 웃었다. 찾기는 커녕 어디에 있다고 말해줘도 만나러 갈 자신이 없었다. 거기다가 이 지역 전체를 삼아 숨바꼭질이라니 억지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윤아를 만나러 가기가 이렇게 두려운데 직접 찾아야 하다니.
하아, 하고 크게 한숨을 내쉰 상혁은 옷을 갈아입고 핸드폰을 가만히 응시한체로 현관 앞에 섰다.
찾는다.
윤아를 찾는다.
머릿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도 말처럼 쉽게 윤아를 찾기로 마음먹을 수없었다. 도리어 이 문자를 못본척 집에서 윤아가 돌아올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왜 안온거냐고 그러면 핸드폰이 고장나서 보지못했다고 변명을 하고- 차라리 그렇게 얼버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할 수없어. 상혁은 애써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하늘이 흐렸지만 상혁의 눈에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머리에 윤아의 문자메시지의 말이 가득차 있어서 다른 것은 생각할 수도 없었다.
" 가야겠지."
흡, 하고 해써 기합을 넣은 뒤에 거리로 뛰어나왔다. 윤아가 어디에 숨어있는지는 모른다. 왜 이런 식으로 자신을 부른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찾아야하겠지. 분명 윤아라면 이런 행동에 이유가 있을 것이다. 설령 단순한 심술이라고 할지라도 자신은 윤아를 찾아야한다.
그동안 계속 윤아가 자신을 지켜봐주고 찾아주었기에. 그러니 이번에는 상혁이 자신이 직접 윤아를 찾을 순서였다. 상혁은 그렇게 애써 생각하며 마음속의 불안감과 긴장감을 외면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것을 다시 인지하면, 도저히 윤아를 찾을 수 없을 것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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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들어 어두워지기 시작한 하늘은, 저녁이 되자 거침없이 비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여름의 끝을 알리듯이 내리기 시작한 비는 천둥과 번개는 동원하지 않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점차 빗줄기가 더욱 굵어지기 시작했다.
" 곤란해. 이렇게 비가오면..."
저녁에 편의점에 다녀오기로 했던 나의 계획이! 비가오는 창밖을 바라보며 수연이는 몹시 후회할 수 밖에 없었다. 마침 좋아하는 게임에서 특정 상품을 사면 아이템을 준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 오늘이다. 하필이면 유효기간도 오늘인지라 나중에 편의점에 가서 야식도 사올겸 사와야지-라고 마음편히 생각했던 것이 독이 되었다. 오후에 뒹굴뒹굴하며 연애 소설이나 보고 있었던 것이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그냥도 나가기 싫은데 비까지 온다면 수연이로선 절대로 나갈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 한심하긴."
그런 수연의 모습을 힐끗본 지윤은 TV로 시선을 옮겼다. 최근 재미를 붙이기 시작한 예능인지라 꼬박꼬박 챙겨보는 지윤이였다. 아까 오후에 빈둥거리던 언니따위야 지윤이에겐 그저 고소하게만 느껴질 뿐이다. 그러니 아까 자신이 함께 나가자고 했을때 갔으면 얼마나 좋아.
" 실책이야. 정말 기상청도 이래서야 곤란해. TV를 보지 않는한 오늘의 날씨를 알 수 없다는건 너무 불합리하잖니."
" 요즘은 핸드폰에도 표시되고 인터넷만 봐도 바로바로 나오는걸? 바보같은 언니야 몰랐겠지만."
" ...핸드폰에 그런 기능이 있다는 것은 처음듣는걸. 핸드폰은 시계를 보기위해 가지고 있는 것이라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전화통화라는 기능도 사용하기 시작했지만 이 핸드폰이란 물건은 수연이에게 판도라의 상자와 같은 물건이었다. 대체 뭐가 들어있을지 모르는...
" 그래도 아직은 우산을 쓰고 나가도 될 것같은데? 더 늦으면 바람도 쌔게 불어서 진짜 못나간다?"
지윤이가 그렇게 이야기했지만 수연은 고개를 천천히 내저었다. 바람이고 자시고 그냥 나가는게 귀찮은거다! 거기다 우산을 들고나가라니. 그냥 맨손으로 나가는 것도 귀찮은데 우산을 계속 들고 돌아다니는 것은 수연이에게 너무나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 편의점도 뭔가 배달서비스 같은게- 응?"
핸드폰을 뚫어져라 보며 뭔가 방법이 없나 고민하던 수연이의 눈에 부르르 진동하는 자신의 핸드폰이 보였다. 워낙 희귀한 상황이라 까먹지만 이것은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을때 일어나는 현상이 맞지? 누가 이 시간에 전화를 할만한 사람이 있나?
수연은 잠시 생각했지만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다. 오호라 그렇다면 이것은 분명 그 뭐지 핸드폰 사기에 해당하는 보이스 피싱같은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수연은 화면에 '청이 선배'라고 표시된 글자도 보지 못한체 당당히 전화를 받았다. 보이스 피싱이라면 당당히 받아쳐주리라 생각하면서.
「아, 수연이니?」
전화에서 들려온 것은 청이의 목소리였다. 당연히 발신자 표시로 청이가 떴으니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그것을 인지하지 않은 수연으로선 꽤나 예상외의 목소리였다. 잠깐 핸드폰을 눈앞에 가져다대니 확실히 화면에 '청이 선배'라고 표시되어 있었다.
" 예. 이 시간에 어쩐일이시죠?"
청이는 용건이 있으면 대부분 오전이나 오후에 말하는 편이니 이런 시간에 전화가 걸려온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수연은 뭔가 불안한 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청이의 음성에 의문을 느끼며 차분하게 물었고, 청이는 그런 수연의 말에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수연아. 상혁이나 윤아가 너희집에 있니?」
" 아니요. 오늘은 문자나 전화를 통해 이야기하지도 않았는걸요."
윤아나 상혁이가 왜 자신의 집에 있겠는가. 의문이 들었지만 우선은 순순히 대답했다. 그러자 청이는 한숨섞인 말투로.
「 그렇구나.... 혹시 수연이의 집에 간게 아닐까 생각해서.」
그렇게 이야기하는 청이의 말에 수연은 물어야 될까 말아야 될까 잠시 고민하다가 이내 물어보기로 했다. 뭔가 가라앉은 청이의 음성에서 불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평상시의 청이에게서 라면 절대 느낄 수없는 그런 불안감이 핸드폰을 통해 수연이에게 전달되었다.
" 괜찮으시다면 무슨 일인지 제가 알 수 있을까요"
그런 수연의 말에 청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결심한듯, 천천히 말했다.
「 상혁이의 집에서 전화가 왔었어. 오늘 윤아의 부모님이 어디를 멀리 다녀왔는데. 집에오니 상혁이와 윤아가 없었던 모양이야. 시간도 늦고, 밖에는 비가 계속 오는데다가 둘다 우산을 가지고 간 기색이 없다고 해서...」
뭐라고? 수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청이가 한 말을 정리했다. 우산을 가지고 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상혁이와 윤아는 비가 오기전의 시간에 나갔을테고. 그 시간은 아마 오후 세시 이전이라 생각한다. 비가 오기 시작한게 세시 반부터였고. 30분전 부터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니까. 그리고 지금 시각은 저녁 일곱시. 족히 네 다섯시간은 밖에 있었다는 소리다.
대체 왜?
수연은 갑자기 든 불안한 생각에 눈가를 좁혔다. 최근 윤아와 상혁이는 같이 하는 일이 적었다. 둘이 함께 나갔다고 보기엔 최근 여러가지로 상황이 꺼림직했다. 그러니 아마 각각 다른 약속을 잡고 나갔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다가 비가와서 고립된 상황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그런 상황이라면 윤아나 상혁이가 미리 연락을 했을지 모른다.
둘다 핸드폰을 가지고 있으니 집에 돌아와 윤아와 상혁이가 없다는 것을 안 부모님이라면 당연히 자신들의 핸드폰에 전화를 했을게 분명했다. 거기다 청이 선배가 자신에게 전화를 할 턱도 없었다.
즉 연락이 되지 않는 상황인 것이다.
" 청이 선배. 네, 알겠어요. 그러면 다른 곳에도 연락부탁드릴게요."
「 응,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 방학도 얼마 안남았으니 집에서 편히 쉬어.」
나름 편안한 목소리로 이야기한 청이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를 끊었다. 수연은 잠시 핸드폰을 빤히 바라보다가 책상위에 올려 놓은 뒤, 곧바로 현관으로 뛰어갔다.
" 지윤아, 언니 잠깐만 나갔다 올게."
" 응? 편의점 가는거야, 흐응 의외네. 그렇게 가기 싫어- 가 아니라 우산은 들고가야지 언니!"
뒤에서 뭐라고 소리치는 지윤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수연은 미처 듣지 못한체 문을 닫고 달려나갔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빗방울이 순식간에 몸을 적셨지만 수연은 게의치 않았다. 우산을 들고 왔으면 제대로 달릴 수도 없을 터였다.
' 정말 귀찮게 하는 구나, 유상혁.'
녀석이라면 분명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연락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혁이 전화를 하지도, 받지도 않는다면 분명 그럴만한 상황이라는 것이겠지. 대체 무슨 일일까.
수연은 빗속을 달리며 상혁이가 갈만한 곳을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왠만해서는 지치지 않는 튼튼한 몸이 이렇게 다행스럽게 느껴지긴 오랜만이었다. 만약 전생의 신체였다면 빗속에서 얼마 가지도 못하고 주저 앉았을 테니까.
' 무슨 일이 있으면 연락이라도 하란 말이야, 이 바보가!'
분명, 분명 윤아와 관련되어 있을 것이라 수연은 생각했다. 최근 상혁이가 불아한 모습을 보이건 윤아와 관련된 일이 있었을 때였으니 아마 분명했다. 문득 수연은 달리면서 중간고사때 상혁이가 자신을 받아주었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이 크게 다칠지도 모르는 상황에 몸을 내던져 받아줬던 상혁이. 혹시 이번에도 무슨 일이 있어서 위험한 행동은 한게 아닐까 걱정되었다.
아니면, 자신이 수학여행에서 도망쳤듯, 윤아가 하는 말이 비참했던 과거의 자신이 떠올라서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도망친 것일지도 모른다. 녀석과 자신은 닮았으니 충분히 그럴만 하다고 생각했다.
자주 가던 카페는 문이 닫혀있었고, 학교 부실도 문이 잠겨 있었다. 자주 가던 책방에 가보기도 했고, 녀석이 좋아하는 오타쿠 샵까지 달려갔다. 귀가길에 들리던 편의점도 가보았고, 녀석이 자주 시켜먹는 음식점에 가보아도 상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달렸다.
어디에 있는지 모르지만 그냥 계속 찾아다녔다.
이런 것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상혁이에게 무슨 일이 생긴게 아닐까 계속 생각이 들어 불안해질 것만 같았다.
걱정.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 이 수연이 남을 걱정하다니. 그것도 가족도 아니고, 학기초만해도 싫어했던 멍청한 남자때문에.
분하다. 정말 분했다. 이래서 먼저 반하는 쪽이 지는 거라고 하는 구나. 다른 누구도 아닌 이렇게나 예쁜 자신이 그런 맹한 녀석에게 호감을 가지고, 이렇게 빗길을 뛰어다니게 될 정도로 좋아하게 될줄이야.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전생이 남자였기에 더더욱 남자에게는 반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남자가 반해도 이상하지 않을 멋진 녀석이면 어쩔 수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녀석은 자신만큼이나 커뮤력 빵점에. 멘탈도 자신보다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면서 귀찮게 따라다니기나 하고 좋은 점이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다하더라도, 자신이 정말 힘들때 도와주러 와준 것은 그녀석이니까.
그래서 반해버렸는걸. 좋아하게 되어버렸다고. 어쩔 수없잖아. 나 정에 약해. 누군가가 좋아해준 다는 것도 어색하고. 가족간의 사랑도 제대로 받아들일 수 없어. 그런 나에게 다가와줬는데 내가 무시하고 외면할 수는 없잖아.
눈으로 쫓게되고. 바라보게 되고. 좋아하게 되어버린단 말이야.
수연은 달렸다. 이제는 어디라도 좋았다. 눈에 띄는 곳이라면 달려갔다. 혹시라도 녀석이 있을만한 곳은 계속해서 달렸다. 그것이 대략 한시간. 이 동내에 살면서 이렇게나 샅샅이 돌아다닌 적이 없을 정도로 찾아다녔다.
그리고 더이상 찾을 곳이 없다고 생각하며 번화가쪽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때, 아직 가보지 않은 곳이 하나 생각났다.
그곳은 아주 예전에 우연히 알게된 곳이다.
언제나 큰길로만 다니던 자신이었기에 이런 샛길이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었다. 그것을 알게 된 것은 7년전. 그 큰 사고가 났던 날이었다.
지윤이와 함께 사고가 난 것을 '오오, 어떡해 큰사고가 나버렸어!'라고 소리치며 보고 있는데 갑자기 뛰어온 이상한 남자애가 나를 어깨빵한 뒤에 달아나버린 것이다. 갑작스러운 일에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진 나는, 고개를 돌려 그녀석을 향해 거기서라고 크게 소리쳤지만, 녀석은 나를 힐끔 본 뒤에 다시 달아나 버렸다.
씨이, 뭐야 저녀석! 이렇게나 귀여운 나를 무시하고 가버리다니 용서못해! 라는 마음으로 지윤이를 질질 끌고 녀석의 뒤를 쫓아가니 이상한 샛길로 가고 있는 녀석이 보였다. 하지만 얼마가지 않아 녀석은 주저앉았고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녀석에게 한바탕 뭐라하려고 했던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에 당황했고, 뒤쫓아가던 걸 멈춘 뒤 샛길에서 빠져나와 가까운 경찰서로 갔다. 왜냐하면 그 녀석, 아무래도 길을 잃은 것처럼 보였는걸.
어째서 그 샛길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꽤나 복잡한 골목들이 얽혀있어서 제대로 알지 못하면 다닐 수 없을 것같았다. 그래도 집에 돌아갈때 그 길로 가니 확실히 빨리 갈 수는 있었지만 말이다.
어렸을적의 기억을 더듬어 샛길을 돌아다녔다. 이곳에 상혁이가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수연이로선 그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하나하나 훌터보고 가자는 마음으로 갔을 뿐이다.
하지만, 그곳에 있었다.
꺼지기 직전의, 낡은 가로등 아래에 익숙한 얼굴을 한 녀석이 고개를 숙이고 벽에 등을 기댄체 멍하니 서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건지, 대체 왜 이런 곳에 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분명 그녀석이었다. 유상혁이라는 이름을 가진 맹한 녀석이 바로 그곳에 있었다.
찾았다.
수연이는 크게 다친 곳도 없고, 특별한 상처도 없어보이는 그 모습에 안도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갑작스럽게 느껴진 인기척에 상혁은 멍하니 가로등을 바라보다 수연이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멍한 표정에 처음으로 '경악'이라는 감정이 어렸다.
왜 그녀가 이곳에 있는지.
무엇때문에 비를 맞으며 그곳에 서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그 마음이 이곳까지 전해졌다. 하지만 물으면 곤란해. 그것은 수연이 자신도 제대로 대답할 수없는 말이었다. 단순히 걱정되서 뛰어왔다고 하기엔 온몸에 비에 젖어 우스운 꼴이었으니까.
" 어머나, 마치 비에 젖은 벌래 같구나. 반들반들한게."
언제나와 같은 비꼬는 음성이었다. 삐뚜름하게 걸린 미소도 평상시와 같았다. 그런 수연의 모습에 상혁은 어이없다는 듯이 어깨를 떨구며 천천히 입을열었다.
" ...왜 이곳에 왔어. 거기다 그렇게 비맞으면 감기 걸린다 너."
왜 이곳에 왔어-라니. 그거야 당연하잖아, 자신은 너를 찾아 이곳에 온 것이다. 언제나 도망쳐서 찾아주기만을 기다렸던 자신이 이렇게 직접 달려서 너를 찾아준 것이다. 좀더 황송해하지는 못할망정 그런 태도라니! 수연이 눈을 가늘게 뜨며 노려보자 그 와중에서도 움찔거리는 상혁이었다.
" 흥, 좋아. 평상시 같이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것으로 보아 몸은 괜찮은 것같구나. 하지만 왜 이런 곳에 있는 걸까나. 윤아도 집에 돌아오지 않고 있다고 연락온 것은 아니?"
비에 젖어 눈가로 흘러내리는 무거운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말했다. 차갑게 젖은 자신의 모습은 상혁이에게 어떤 모습으로 비춰질지 모르지만, 최대한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런 냉정한 수연의 말에 상혁은 움찔하고 몸을 떤 뒤,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시 고개를 떨궜다.
" 아아... 시간이 늦었으니 그럴만도 하지. 하지만 갈 수없어. 못찾았는걸."
" 못찾아?"
무슨 소리를 하는걸까. 수연은 상혁의 말에 눈가를 살짝 찡그렸고, 상혁은 그 물음에 대답하듯 천천히 말을 이었다.
" 그래. 오늘 윤아가 자신을 찾아달라고 문자를 보내왔어. 그 바보녀석, 차라리 집에 갔으면 좋았을텐데 아직도 있는 모양이구나. 하지만 모르겠어. 도무지 계속 찾아다녀도 어디에 있는지 못찾겠어."
거기까지 말한 상혁은 말은 잠시 끊었다가, 토해내듯 말했다.
" 어린 시절 놀았던 놀이터도. 함께 처음으로 갔던 음식점도. 책방도. 밤에 별을 보러갔던 공터도! 어디에도 없었어. 모르겠어. 우리가 알던, 내가 아는 추억의 장소는 모두 찾아봤어. 그런데 없다고!"
비명처럼 소리치는 그말에 수연이가 느낀점은 우습게도 부러움이었다. 비참할정도로 절규하는 상혁의 모습에서, 수연은 그 말속에 담겨진 윤아와의 추억의 장소에 그저 부러움을 느꼈다.
분명 말하지 않은 것은 더 많이 있겠지. 윤아와 상혁이의 사이는 그런 것이다. 오랜 세월, 오랜 시간이 쌓이고 쌓여 이루어진 단단한 인간관계였다. 고등학생이 되어 갑작스럽게 만난 자신과 달리 어린 시절부터 차근차근 쌓이고 수많은 시련을 겪어가며 단련된 사이였다.
아마 지금의 일도 그것들 중에 하나이겠지. 상혁이가 하나하나 과거를 말해갈수록 수연은 과연 자신이 그 사이에 끼어들 수 있을가 고민했다. 하지만 언제나 결론을 내려도 그것은 '불가'였다.
그만큼 자신과 윤아에게는 크나큰 차이가 있었다. 자신은 윤아처럼 상냥하지도 않고 강한 마음을 지니지도 못했다. 그렇다고 많은 추억을 쌓지도 못했고 윤아보다 상혁이를 더 좋아한다고 자신할 수 없었다.
물론 수연이는 상혁이를 좋아한다. 처음으로 생긴 가까운 이성이며. 자신을 위해 계속 쫒아 자신을 달래준 상냥한 남자아이다. 자신의 마음을 치료해준다고 정신과 의사가 된다는 이상한 말도 했지만 그덕에 자신은 녀석의 말을 믿고 견뎌내보기로 마음먹었다.
제대로 남을 보기로 생각한 것이다. 그정도로 크다. 수연이에게 있어 상혁이는 그정도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만큼 좋아하고, 호감을 가지고 있다. 가족을 제외한다면, 아니 가족만큼이나 상혁이를 좋아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윤아도 마찬가지이다. 어린시절부터 함께였고, 곁에있는게 당연할정도로 친숙한 사이다. 분명, 분명 상혁이도 윤아를 좋아할 것이다.
언제나 솔직하지 못한 자신보단, 계속해서 자신을 좋아한 소중한 소꿉친구를 좋아하는게 당연할 것이다.
" 윤아 말이야. 다음주에 이사간데."
" .....!"
그러니까 상혁은 이렇게 고민하는 것이다. 윤아가 말할 것이 두려워 피하는 것이다. 자신이 똑바로 들을 수 없을까봐. 그것이 지금처럼 '이별'을 의미하는 것일까봐.
이사.
그것은 분명 윤아의 입장에선 좋은 일이다. 축하해줘야할 일인게 분명하다. 하지만 상혁은 축하해줄 수 없기에 이렇게 이런 곳에서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윤아의 이야기를 들을 자신이 없어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수연이도 어렴풋이 생각하고 있었다. 그것을 알아차린 것은 어제, 자신이 상혁이와 만났을때 부터였다. 왜 윤아가 자신을 위해 상혁이를 꾸며서 보냈을까. 무엇때문에 나와 사이좋게 되는 것을 바라듯이 이런 것을 했을까.
그런 생각들과, 윤아의 최근 행동들을 떠올리면 어렴풋이 '혹시 어디 멀리가나?'라는 생각을 했었기에 크게 놀라지 않을 수 있었다. 다만 그것을 상혁이가 지금처럼 알고 있다는게 문제일뿐.
아마 이것은 윤아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일 것이다. 분명 오늘 상혁이와 만나자고 한 것도 그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였겠지.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는 몰라도 상혁은 그 사실을 알았고, 그때문에 그것을 윤아의 입으로 들을 자신이 없어 이렇게 도망친 것이다.
계속 찾아다녔다고. 추억의 장소는 모두 가보았다고 말하지만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게 오랜세월. 오랜 시간동안 윤아를 알아온 상혁이다. 정말로 윤아가 있을만한 곳은 절대로 가지 않았을게 분명하다. 아니, 가다가 멈춰서버렸을 것이다.
바로 이 샛길이 그 증거.
이곳에서 갈 수 있는 곳은 번화가다. 7년전에 사고가 일어났던 바로 그 번화가로 이어지는 길. 상혁이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그곳에 가다가 멈춰섰다는 증거일 것이다. 하지만 가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서서 윤아를 피해 숨어있었다.
과거의 자신처럼.
아버지에게서 도망쳐, 제대로 아버지의 말도 듣지 않은체 멋대로 상상하고 도망다녔던 자신처럼.
" 그래서. 그게 어쨌다는거니?"
" ...!"
매정하게 이야기하자 상혁이가 자신을 바라본다. 눈을 크게 뜬 그 얼굴은 분명 수연이에게 분노하고 있는듯한 모습이었다. 네가 어떻게 그런말을 할 수 있냐는 배신감마저 담긴 얼굴이었다.
하지만 수연이는 멈추지 않았다. 상혁이가 한 것처럼 부드럽게 설득할 자신은 없다. 그렇다면 자신의 식데로, 할 수 있는만큼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 윤아의 말은 들어본걸까. 아니, 이곳에 있다는 것은 제대로 들을 자신도 없다는 것이겠지. 바보같구나, 아직 네 귀로 윤아의 말을 듣지도 않은 주제에 무서워서 주저앉아 있는 꼴이라니."
" -들으려 하지 않은게 아니야. 찾을 수없어. 어디에있는지 알 수없다고."
" 거짓말. 너는 윤아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어. 그것도 정확히 알고 있잖니. 단지 두려워서 피하고, 도망치고. 그러고 있는것 아니야?"
"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알아. 바로 내가 그랬으니까."
수연의 말에 상혁은 큭, 하고 입을 앙다물더니 시선을 피한다. 같지는 않지만 비슷한 상황은 수없이 격었다. 배신당할까봐 피해다니고, 대답이 두려워 기를 막고. 만나기 두려워 숨어있던 것은 익숙하다.
모두 자신이 했던 일이니까.
" 달라. 너와는 다르다고."
" 그럴지도. 나는 그렇게나 가까운 상대의 말을 피한적은 없었으니까."
" 가깝기에 하지 못할말도, 듣고 싶지 않은 말도 있는거야!"
맞는 말이다. 상혁이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수연이가 격은 것은 비슷한 일이지, 상혁이와 같은 일이 아니다. 상혁이와 윤아의 관계만큼 친한 친구를 가진 적은 없었다. 가지고 싶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말이다.
이것은 그때와 상황이 비슷하다. 내가 지윤이에게서 도망다닐때, 상혁이가 수연이를 설득하기 위해 했던 말과 비슷하다. 비슷한 상황이니까 너도 할 수 있다. 그런 상혁의 말에 수연은 녀석을 싫어했었다. 비슷한 상황이라고 같으리란 법은 없다. 자신의 고통도 모르고 아픔도 모르면서 그런 소리를 멋대로 지껄일 수 있다는 것에 환멸마저 느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짓은 그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이것도 비슷할뿐 같은 것은 아니다.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은, 지금 윤아가 바라는 답을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 그래, 너와 나는 달라. 이 상황도 비슷할뿐 다르지. 하지만, 이건 확실해."
수연은 상혁이를 보았다. 상혁도 수연이를 보았다. 그런 교차하는 시선속에서 수연은 빙긋 웃음지었다. 언제나와 같은 삐두름한 미소가 아닌, 어린시절에 지윤이에게 지어주던 그런 부드러운 미소였다.
" 윤아는 너를 기다리잖니."
" ....."
" 두려울거야. 무서울거야. 알아, 듣고 싶지 않을테지. 나도 분명 어머니와 아버지가 헤어져 지윤이를 만나지 못하게 된다는 말을 들으면 그 말을 지윤이의 입에서 듣기 괴로울거야."
천천히.
천천히 다가갔다. 벽에 등을 기댄체, 힘없이 서있는 상혁이에게 손을 뻗어 힘없이 꺽여있는 머리를 천천히 품에 안았다.
" 윤아도 고민했을게 분명해. 너에게 말하고 싶지않고. 아버지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하고, 마지막은 웃으면서 예쁜 모습만 보여주고 싶을거야. 그 이야기를 하면 분명 윤아는 울테니까."
하지만, 하고 작게 말을 끊은 수연은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
" 그래도 윤아는 결심했어. 너에게 이야기를 한다고 마음먹었어. 그러니 너도 결심해야지. 소중한 소꿉친구가 애써 결정했는데 너는 그런 소중한 아이의 마음을 무시할거니?"
" 그건...."
" 정말이지, 라노벨 주인공같은 주제에 이럴때는 조연보다 못하구나. 주인공이라면 주인공답게, 멋지게 달려서 히로인을 멋지게 데려와야 하지 않겠니."
그래. 자신에게 그랬었던 것처럼. 피해도 숨어도, 지겹게도 찾아내어 설득하고, 버팀목이 되어주는 그런 것처럼. 윤아에게 못할 턱이 없다. 그저 지금 두려워서 무서워서 숨어있을뿐. 난 분명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 만나면 제대로 보지못할 것만 같았어."
상혁은 말했다. 그런 그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 응."
가볍게 긍정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상혁은 계속해서,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말을 이야기했다.
" 제대로 웃으면서 이야기를 들어줄 자신이 없었어."
" 그래."
" 이제 만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하면 울 것같아서 갈 수 없었어."
" 이해해."
" 윤아의 마음을, 제대로 받아줄 수 없을 것같아서 두려웠어."
" 아아, 힘들었겠구나."
품에 안았던 상혁이를 일으켜 세웠다. 무너지듯 서있던 녀석의 몸을 수연은 똑바로 세웠다. 똑바로 서자, 수연은 상혁이를 바로 앞에서 올려다볼 수 있었다.
" 날 믿어. 이 똑똑하고 완벽한 나의 말을 믿으렴. 어리석은 네 뇌를 믿지 말고."
" ...하지만."
" 하지만이 아냐. 추한 변명따윈 듣고 싶지 않아. 윤아는 기다린다고 했어. 그렇다면 너도 제대로 그 마음에 답해줘야지. 영원히 헤어지는 것도 아니야. 그리고 윤아의 입으로 간다고 직접들은 것도 아니지. 너는 그냥 '이사'를 간다고 들었을뿐이야. 라노벨 주인공같은 너라면 분명, 윤아를 제대로 옆에 데리고 올 수 있을거야."
" -뭐야 그게."
그제서야 상혁은 피식 웃었다. 방금전보단 한층 밝아진 듯한 얼굴이었다. 역시 그렇겠지. 수연은 생각했다. 상혁이의 바로 옆은 역시 자신보단 윤아가 어울린다. 윤아는 아무래도 자신이나 곱슬이를 상혁이의 바로 곁에서 본인이 했던 것처럼 지켜주길 바랐을 것같지만 그건 무리다.
왜냐하면 그건 윤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이수연도, 곱슬이도. 청이도 할 수없는 윤아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가장 곁에 서서, 상혁이를 지탱해주는 것은 역시 자신보단 윤아가 어울린다.
분하지만.
정말 울만큼 분하지만.
" 가."
탁, 하고 상혁이를 뒤로 돌려 등을 떠밀었다. 갑작스런 수연이의 손길에 비틀거리는 녀석. 상혁은 그런 나의 행동에 고개를 돌려 수연이를 바라보았다. 뭐라 말하려고 하는 것같았지만 수연이는 그 말을 막듯이 재빠르게 말을 이었다.
" 제대로 윤아를 데리고 오도록해. 보잘것없는 너의 곁에서 그렇게 웃으며 함께 있어줄 수 있는 것은 윤아뿐이니까. 제대로 데려와."
" 이렇게 기다리게 해서 무슨 말부터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 다시 말하지만 넌 라노벨 주인공같은 녀석이니 멋대로 입이 움직여줄테니 걱정하지마렴."
" 아니 그렇게 말해도..."
쓴 웃음을 지으며 답한 상혁은 수연이가 계속 가라고 재촉하자 어쩔 수없다는 듯이 발을 앞으로 한걸음 내딛었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는지 머뭇 머뭇 수연이를 바라보았다.
" ....너는 괜찮아? 그- 비도 계속 맞고 있었고."
뭐가 괜찮냐는 것일까. 수연은 그런 상혁의 말에 순간 말문을 잃었다. 역시 이상한 것에 예민한 녀석이다. 분명 방금 한 말도 단순히 '비'만을 말한 것이 아닐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알진 못했어도 이렇게 까지 해줬으니 뭔가 느끼는게 있겠지.
하지만 곤란하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뭔가 이상한 것을 깨달으면 제대로 윤아에게 마음을 전하지 못할 것같았다.
" 건방지네. 너에게 걱정받을만큼 얕보일줄은 몰랐어."
" 아니 그래도 너. 마치 울 것같은 얼굴이니까..."
아, 그랬던가. 마음은 괜찮다고 애써 생각했지만 얼굴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언제나 냉정하고, 매정한 무표정만 고수해왔으면서 이런때만 표정이 깨지는지. 정말 곤란한 얼굴이 아닐 수 없다. 하는 수없는걸.
" 괜찮아. 자..."
수연은 잠시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천천히 마음을 가다듬었다. 마지막이다, 이것만 하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한 수연은 천천히 몸에 힘을 뺐다. 그리고 자신을 바라봐오는 상혁이를 향해, 지금 지을 수 있는 최대한도의,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 봐."
녀석이 제대로 갈 수 있도록. 괜히 걱정하지 않게.
" 전부 괜찮아졌지?"
어린시절에 짓던, 그 미소를 지어보였다. 자신감넘치고, 언제나 환하게 웃던 그 시절의. 하지만 그런 수연이의 미소에, 상혁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여전히 머뭇머뭇 거리던터라, 수연은 힘차게 녀석의 등을 밀었다.
" 누가 구더기 아니랄까봐 꿈틀거리기는, 어서 윤아를 만나러 가도록해."
" 너, 너무 쌔게 밀었다고!"
실제로 넘어질뻔한 것같지만 쌤통이다. 그러니 어서 갔어야지. 수연은 자신의 잘못은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 알았어. 윤아의 이야기를 제대로 듣고 올게."
" 그래. 더이상 귀찮게 하지말고 어서 가버리렴. 나도 편의점에 사러갈 것도 있으니까."
상혁은 그렇게 말하는 수연이를 잠시간 응시하더니 어쩔 수없다는 듯이 달려가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머뭇거렸다는 것이 거짓말이었다는 것처럼, 힘찬 발걸음이었다. 바보. 그렇게 달릴 수있으면 진작에 갔으면 좋잖아.
" 하아."
수연은 그런 상혁이의 뒷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완전히 모습이 사라질때까지 계속, 계속.
" ...그래도."
비가와서, 비가 오는 날이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 작품 후기 ============================
다음편이 윤아편 마지막입니다. 그다음은 곱슬이 편이에요! 하지만 곱슬이편은 많이 짧을지도 모르지만... 미안하다 곱슬아!
역시 제가 눈에 숙주가 와서 글자가 잘보이지 않으니 오타가 있으면 댓글로 꼭남겨주세요. 댓글로 남겨주시면 하루안에 수정할테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