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말 없이 걷던 우리들이 도착한 곳은 익숙한 건물들이 많은 시내의 번화가였다. 특별히 예정이 있지는 않았지만, 우리 동내에선 가장 번잡한 곳이고 외부로 오는 차량이 많아 교통이 상당히 복잡한 곳이기도 하다.
더불어 7년전에 큰 사고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지. 아, 여기에 있으면 이 녀석에게 뭔가 신경을 쓰게 만들지 않으려나. 문득 그런 마음이 들어 슬쩍 상혁이의 얼굴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그다지 좋은 표정은 아니다. 그러면서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얼굴이 과거에 있었던 일을 생각하고 있는 걸까.
이거 좋지 않은데-.
내가 자주 겪어서 알지만 저렇게 과거의 일을 현실에 계속 대입해서 보는 것은 좋지 않다. 왜냐하면 멘탈이 깨지기 쉽거든. 멘탈깨지기 장인인 내 말이니 믿어도 좋다. 이젠 나도 멘탈을 보호하는 법을 알기에 함부로 그런 쪽 생각은 하지 않는다고. 만약 과거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명환이에게 달려가 괜히 마구 화풀이를 해버릴지 모르니까.
그러면 그저 민폐덩어리 여자일 뿐이니 자제하고 있다.
' 어디 갈만한 곳은 없나. 아, 저기가 좋겠네.'
마침 눈에 들어온 것은 꽤 높은 건물이었다. 그리 크지는 않지만 명색의 영화관이 들어가 있는 건물로, 사실 종합 상가이지만 영화관을 제외하곤 장사가 그리 되지 않아 나머지 층은 텅텅 비어있는 곳이다.
계속 이런 곳에 있기도 그렇고. 기껏 기분좋게 해주려고 불렀는데 이런 곳에 있으면 결코 좋지 않으니 기왕이면 실내로 들어가는 것이 좋게지. 거기다가 역시 남자와 여자가 만나 가는 곳중에 가장 왕도는 영화관! 영화는 잘보지 않지만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 뭘 멍하게 서있는거니? 저기에 갈꺼니까 어서 걷도록 해."
" 응? 저기? 설마 영화관?"
뭐지 이녀석. 내가 영화관에 가자니까 뭘 그렇게 이상하다는 듯이 바라봐.
" 왜 그러실까. 저 건물이라면 당연히 영화관인게 당연하겠지. 뭐가 그렇게 의외니?"
" 아니, 뭐라고 해야하나. 너 영화같은거 관심없잖아. 거기다 밖에도 잘나가지 않는다고 하니 영화관도 잘 가지 않을테고."
뭐야! 내가 그렇게 방구석 폐인에다가 영화같은 것도 보지않는 그런 녀석으로 보였단 말이야....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다지 틀린 말은 아니니 반박할 수 없다. 굳이 말하자면 영화같은거에 관심이 없다기보단 다른 것도 볼게 많기에 잘보지 않는 것이지만...
그래도 아-주 가끔은 영화를 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본게 아마 중학교때였지.... 학교에서 문화체험학습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로 간 기억이 없는 것으로 보아 확실히 나 방구석 폐인이 맞기는 하구나.
" 읏?! 아, 아니 특별히 널 비난하려고 한 것은 아니고. 그냥 의외성 있는 모습이 새롭다고 해야하나, 뭐라고 할까."
나도 모르게 조금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던 모양인지 상혁이가 급히 나를 달래려는 듯한 모습으로 이야기했지만 이미 늦었다. 유상혁에게 커뮤력에 대해 뭐라 했지만 과거의 나는 정말 구제할 도리 없을 정도의 최악의 커뮤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나 정말 바보.
" 으~. 아, 이게 아니라 어서 가보자. 뭔가 재밌는게 개봉했을지도 모르잖아."
상혁은 곤란한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급히 앞으로 걸어갔다. 덩달아 녀석의 소매를 잡고 있던 나까지 땡겨갈 수밖에 없었다. 뭐, 뭐야. 갑자기 움직이는 바람에 자칫했으면 넘어질 뻔했다.
아무튼 사람을 대하는게 서툴다니까.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를 신경써주는 느낌이라 나쁘진 않았다. 그렇게 상혁이에게 끌려가듯 영화관에 들어간 나는, 간만에 온 영화관의 모습에 주변을 둘러보며 '호오, 호오'하고 작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과연 나쁘지 않아. 개봉한 영화들은 대체로 로멘스 코미디류가 많았지만 공포 영화도 꽤 있었다.
다만 헐리우드급 블록버스터는 개봉한 것이 없었기에 공포영화와 로멘스 코미디중에 고민할 수밖에 없었고, 결국 가위바위보를 해서 둘중 한사람이 보고 싶은 것을 보기로 했다. 사실 보고 싶은 것이라고 해봐야 극장수로 대충 찍는 것에 불과했지만.
" 좋아. 그럼 이것을 보도록 하자. 왠지 요 앞의 팜플렛으로 읽어봤는데 괜찮을 것같았어."
" 어머나. 로멘스 코미디라니-. 그야말로 너에게 어울리는 장르를 골라왔네. 사실 로멘스 코미디보단 넌 코미디쪽이 맞지만."
" 아니 그렇다기보단 네가 이런장르 좋아하지 않아? 예전에 지윤이에게 들으니 우정물이나 연애물 같은거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지윤이 이녀석! 언제 언니의 취향을 폭로한거야! 아무튼 지윤이가 말한 것처럼 확실히 러브 코미디는 내가 좋아하는 장르다. 비주얼 노벨로서도 그런 장르를 좋아하는 편이고 기왕 영화를 본다면 가볍게 볼 수 있는 로멘스 코미디가 괜찮을 것같았다.
하지만 유상혁 이녀석은 잘 모르네. 원래 여자랑 영화관에 올경우 로멘스가 들어간 것은 자제하라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여자쪽이 지금 자신의 상황과 대입해보기 때문에 영화를 감상하고 나면 함께 있는 남자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져 오히려 악역향을 미친다고 한다나. 연인인 경우 특히 심하다고 하지만-. 뭐 우린 연인도 아니고 내가 녀석의 여자친구도 아니니 상관없으려나.
거기다가 내가 보통 여자애들과 좀 다른 심상을 가진 것도 이유이지만.
" 곧 상영시간이니 줄에 서있도록 하자."
표 값은 유상혁이 내가 뭐라하기도 전에 결제해버렸기 때문에 나는 유상혁이 줄을 서있는 동안 팝콘을 한아름 사왔다. 영화관에서 밖에 먹을 수없는 영화관 특유의 팝콘이므로 많이 먹어야지. 언제 또 먹을 수 있을지 모를 팝콘이니까.
상혁이는 내가 팝콘을 사오자, 오늘따라 내가 돈을 많이 쓴게 신경쓰는 듯한 눈치 였기에 지윤이가 가지고 있던 쿠폰으로 교환했다고 하자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윤이도 나못지않은 방구석 족이었기에 영화관을 왔을리가 없지만 상혁이는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지윤이도 나름 방구석족이고, 나도 마찬가지인데 대체 이 차별은 뭘까.
" 입장하겠습니다."
예쁘게 제복을 차려입은 언니의 말이 들림과 동시에 우리는 영화관으로 들어갔다. 자리는 나쁘지 않았고, 사람들의 숫자도 부담되지 않을 정도였기에 나름 영화를 집중해서 감상할 수 있었다.
대략 두시간정도 지나고, 스탭툴이 오를 때에야 우리는 자리에 일어날 수 있었다. 감상을 말하자면- 나쁘지 않았다, 정도라고 해야하나. 좋아하는 장르인지라 몰입해서 볼 수는 있었지만 검은 생머리를 한 여배우가 차이는 역활이었기에 조금 불만족스러웠어.
몰입해서 봤기에 더욱!
배우 이름이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나중에 찾아보도록 하자. 개인적으로 정말 마음에 들었기에, 다음에 다른 영화에도 출현하면 봐줄 생각이다.
" 하늘이 어두워졌네."
영화관 밖으로 나오자, 확실히 해가 곧 지려는 듯 어둑어둑해진 시내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다른 사람과 이렇게 오래 단둘이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그것도 남자랑. 당연하게도 없다. 그런 것을 보면 오늘은 나름 기념적인 날인지도 모른다.
" 영화는 괜찮았어?"
내가 조금 쌀살해진 날씨에 손을 비비고 있자, 상혁이가 말을 걸어왔다. 나름 감동적인 장면도 있었던지라 살짝 울컥한게 있었는지 상혁의 눈은 조금 빨갛게 변해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토끼같아서, 조금 귀여웠다.
" 그래. 주인공이 누구누구씨 처럼 궁상스럽지 않다보니 아주 재밌었어."
" 그 누구누구씨는 설마 나를 말하는건 아니겠지."
" 호오, 어떻게 알았을까나. 그정도 머리는 있는 것 같아서 안심했어."
" 너 말이야..."
상혁은 그렇게 말하다가 피식 웃고는 고개를 흔들었다.
" 그래서 이제 어떡할래. 여기서 헤어질까?"
" 글쎄. 조금 아쉬운걸. 조금 걸으면서 이야기하지 않겠니?"
걷는 것은 영화관에 들어가기 전에도 한참했으니 지루할 법한데도 상혁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나 이녀석이나 단 둘이 이렇게 나온 적은 없거나 무척 적었기에 어디를 가야 좋을지 쉽게 결정할 수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걷는 수밖에 없었다.
곧 가을이라 그런가 여섯시가 넘어가자 하늘은 붉게 물들다 못해, 어두워졌고. 조금 쌀쌀하게 느껴졌다. 개학도 앞으로 일주일정도 남았으니 사실상 여름은 끝이나 마찬가지 였다.
" 이렇게 단둘이 누군가와 오랫동안 걸은 것은 오랜만인 것같다."
" 의외구나. 윤아와 항상 이랬을 것 같은데."
7년전의 사고가 있었던 거리를 걸으며 상혁이가 말하자 내가 담담히 대답했다. 상혁은 그런 나의 말에 고개를 흔들며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 그런가-. 윤아는 항상 내 옆에 있어서 그런 것을 잘 느끼지 못하곤 해. 거기다가 이곳에서 사고가 난 뒤로 윤아를 조금 피했던 지라, 사실 초등학교 이후로는 이렇게 단둘이 돌아다닌 적이 적어. 근처 슈퍼나 물건을 사러갈때가 아닌 이상."
태연하게 7년전의 사고를 언급하는 상혁이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고개를 들어 녀석을 보았다. 설마 이녀석이 직접 그런 이야기를 꺼낼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도 괜찮니?"
" 응? 아아, 청이 선배가 벌써 너희에게 이야기했다고 말해줬어. 아무래도 나를 걱정했던 마음에 너희를 불러서 나와 관련된 이야기 했으니 사과한다면서 말해줬거든. 사실 그렇게 사과할 껀덕지가 있는 이야기도 아니지만."
그렇게 말한 상혁은 갑자기 우뚝 발을 멈췄다. 그리곤 손을 들어 주변을 쓱 훑으며 언젠가 보았던 먼 곳을 보는 눈으로 말했다.
" 아마, 이곳이었을거야. 사고가 났던 것은."
상혁이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사람들이 시끄럽게 대화하며 걸어다니는 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 어디에도 7년전에 있었던 대형사고에 대한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 알고 있어. 나도 이곳에 있었으니까."
물론 나는 이 일에 어떠한 관련도 없는 구경꾼이었을 뿐이지만. 단지 가까운 곳에서 사고가 나서 어린 지윤이의 손을 붙잡고 보러온 아이였을뿐이다. 사람들이 응급차에 실려가고 부서진 자동차들을 보며 그저 막연히 누가 크게 다치진 않았어야 할텐데-라는 마음으로 봤었던 걸로 기억한다.
" 어? 진짜?"
내 말에 상혁이는 나를 바라보며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뭐야 청이 선배. 상혁이에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 그래. 난 7년전 어머니 생일 선물을 사기 위해 번화가에 왔었어. 그때 큰 사고가 있어서 무슨 일인가 잠시 이곳에 있었지."
" 그렇구나..."
상혁은 그제야 납득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 가만히 서있더니, 갑작스럽게 나를 진지한 얼굴로 바라봤다. 뭐, 뭐야 갑자기.
" 수연아."
" 뭐, 뭐니. 갑자기 그런 기분나쁜 얼굴로 보고."
혀 씹을뻔했다! 왜 갑자기 진지한 얼굴로 말을 하는건데. 평상시처럼 실없이 멍청한 얼굴로 이야기하라고.
" 그-, 상담하고 싶은게 있는데 잠깐 들어줄 수 있을까? 왠지 수연이라면 같이 생각해줄 수 있을 것같아서."
그렇게 말한 상혁은 약간 부끄럽다는 듯이 씩 웃은 뒤.
" 나의 편-이라고 했으니까. 그, 괜찮지?"
그 말은 조금 갑작스러웠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무엇때문에 이 곳을 걷던 상혁이가 그런 이야기를 해온지는 모른다. 어쩌면 내가 청이 선배의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과거와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알기에 말한 것인지 모른다. 아니면, 내가 사고에 있었던 당사자이기에 말을 꺼내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니, 알기 위해선 상혁이에게 직접 들어보는 수밖에.
" 그래. 얼마든지 말하도록 하렴. 너의 말처럼 나는 너의 편이니 말이야."
상혁이는 나의 대답에 안도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사람이 없는 곳에서 이야기 하고 싶다고 했기에 번화가 한쪽에 있는 공원으로 걸음을 옮겼다. 늦은 시간에 산책을 나온 사람들이 꽤 있긴 했지만 번화가보다는 확실히 돌아다니는 사람의 숫자가 적었다.
이젠 완전히 어두워져서, 공원의 가로등에 불이 들어오고 있었기에 우리는 가로등 아래에 있는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 원래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갑자기 너라면 괜찮을 것같다는 생각이 들었어."
" 어머나, 그 말만 들으면 이제 나한테 무슨 짓이라도 하려는 것같은 대사인걸."
" 윽, 아, 아니. 당연히 그런건 아니지! 크, 확실히 방금 한 말은 조금 의미심장하긴 했구나..."
상혁은 푹,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긁적였다. 무슨 말부터 할지 고민하는 듯 하던 녀석은 이내 마음을 정한듯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 어린 시절부터, 윤아는 나와 함께 있었어."
그것은 내 생각보다 훨씬 오래전부터의 이야기였다. 상혁이와 윤아가 처음 만나던 때의 이야기. 그것은 상혁이가 아직 제대로 말도 하지 못하던 어린시절이었다.
상혁이의 아버지와, 윤아의 아버지는 고교시절부터 친구로. 대학까지 함께 나온 아주 절친한 사이였다. 심지어 아내가 된 어머니들도. 둘이 함께 미팅을 하러 나갔다가 사귀게 되어 각각 결혼에 골인한 아주 희귀한 케이스였다. 어머니는 어머니들끼리 친구였고, 아버지는 아버지들끼리 친구였다.
그러니 어린시절부터 가족간의 교류가 활발할 수밖에 없었고, 상혁이와 윤아는 어린시절부터 언제나 함께였다. 집도 바로 옆집. 아침에 일어나 서로 집 앞에서 만나는게 일상이었으며 무엇을 하든 함께하든 소중한 소꿉친구였다.
서로의 아버지를 또다른 부모로 생각할만큼 가족간의 관계도 남달랐고, 둘다 모나지 않은 성격이었기에 마찰없이 가족처럼 자랐다.
다만, 어린시절의 윤아는 지금과 달리 아주 활발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물론 지금도 나름 활발한 성격이었지만 그때는 그야말로 남자아이 같아서, 언제나 동내애들을 꼼짝못하게 하는 골목대장같은 존재였다. 아마 어린시절부터 상혁이와 논 것에 대한 영향을 받은 것이겠지.
지금의 윤아를 생각하면 전혀 그럴 것같지만, 그 유일한 잔제가 상혁이에게 늘상하는 각종 격투기술이 그것들이다. 생각해보면 곱슬이와 사이가 좋은 것도 그러한 것을 작게나마 교류하고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곱슬이는 다름아닌 도장집 딸이었으니까.
아무튼 그에 반해 상혁은 몸도 왜소하고 그다지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어서 주변 아이들의 먹잇감이 되곤 했는데 그때마다 윤아가 그 아이들을 모조리 쫓아내줬다. 상혁은 그런 윤아가 무척 고마웠지만, 여자인 소꿉친구에게 도움만 받는다는게 부끄러웠는지 나이가 먹으면 자신이 더 강해질거라고, 그때는 자기가 지켜줄거라고 말하곤했다.
윤아는 그런말을 하는 상혁이를 볼때마다 곤란한 듯 웃으며.
『그럼 그때가 되면 부탁할게.』
라고 답했다.
그러기를 몇년. 초등학교에 다니게 된 상혁이와 윤아는 학교에서도 함께였다. 주변 동성친구들에게 놀림을 받는 경우도 함께였지만 둘다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미 더 어린시절부터 듣던 놀림이었고 두 사람 모두 겨우 그정도로는 서로에게서 등을 돌릴만큼 가볍지도 않은 관계였기에.
윤아는 어떠했는지는 모르지만, 어린시절 상혁이에게 윤아는 첫사랑이었다. 어린 마음에 깃들었던 작은 풋사람. 상혁은 윤아와 언제나 이런 관계로 있으리라 생각했기에 그 마음을 가지고, 나중에 좀더 몸이 크고 자신이 윤아를 지킬 수 있게 되면 그때 이야기하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는 미처 몰랐다. 그런 관계가 불과 단 하나의 사건으로 흔들리게 될 줄은.
나이를 좀더 먹고, 10살이 되던 해. 이제 막 윤아를 좋아한다는 풋사랑을 가지기 시작했던 그때. 상혁은 조금 친해진 남자 아이들과 번화가로 놀러나왔다. 그 나이때의 애들이 그렇듯, 놀다보니 시간이 가는 줄 몰랐고. 정신을 차렸을땐 하늘이 어두워진 이후였다.
시간을보니 언제나 들어가던 시간보다 한참 늦은 시간이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논 것은 처음이었고, 같이 놀던 아이들도 슬슬 돌아가자 불안해지기 시작한 상혁은 근처 지나가던 어른의 도움을 받아 공중전화 박스를 통해 집에 연락을 할 수 있었다.
왜이렇게 늦었냐고 타박하는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고, 마침 오늘 일이 늦게 끝난 윤아의 아버지가 오는 길에 자신을 데리러 온다고 이야기를 했다.
상혁은 어두워진 하늘을 보며 다행이라고 안도했다. 어두운 밤에 혼자 돌아가면 길을 잃을 것만 같았기에 윤아의 아버지가 오신다고 한 것은 상혁으로서 정말 고마운 일이었다.
그렇게 기다리기를 십분. 전화박스에 기대어 거리르 보던 상혁은 멀리서 익숙한 자동차가 오는게 보였다. 다름이 아닌 윤아의 아버지의 자동차. 기쁜 마음에 자동차를 향해 손을 크게 흔드는 순간.
그 바로 옆에서 조그마한 여자아이가 튀어나왔다.
윤아의 아버지는 그 아이를 피하기위해 급 브레이크를 밟으며 핸들을 꺾었고, 마침 반대편에서 오던 자동차가 크게 사고가 나고 말았다. 더군다나 반대편에 오던 차량은 그 속도도 그리 넓지 않은 길에서 달리기엔 속도가 무척빨랐기에 윤아의 아버지의 자동차는 그대로 반대편 도로의 건물까지 박히고 말았다.
그리고 뒤이어 오던 자동차들도 충돌. 번화가였기에 인도를 걷던 사람들도 몇몇 휘말렸고 거리는 단숨에 아비규환으로 변했다.
상혁은 자신의 눈앞에서 일어난 사고에 그것이 마치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부서진 차량들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 상혁은 자신을 치면서 뒤로 빠지는 사람들 틈을 지나 윤아의 아버지가 몰던 자동차가 있는 곳으로 갔다.
자동차는 그야말로 처참할정도로 부서져, 운전자의 생존도 가늠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찌그러진 자동차의 틈. 그 틈에 피투성이가 된 윤아의 아버지가 보였다.
윤아의 아버지는 피투성이가 된체 신음하다가 자동차로 가까이 다가온 상혁이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들리지 않았다. 윤아의 아버지가 제대로 말을 할수 없었기도 했고, 상혁이의 귀가 재기능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 상혁이의 눈엔 힘겹게 한쪽 손을 뻗으며 소리치는 윤아의 아버지의 모습이 무서웠다. 살려달라고,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같았다. 상혁아 도와줘, 살려줘, 꺼내줘. 그렇게 소리치는 윤아의 아버지의 모습에, 상혁은 뒷걸음질 쳤다.
도와줘야하는데. 구해드려야 하는데 너무 무서웠다. 가장 소중한 친구의 아버지이고, 자신이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아버지이다. 그리고 자신의 또다른 부모나 마찬가지인 존재. 그런 소중한 사람을 두고, 상혁은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도망쳤다. 도망치는 중, 자신과 부딪쳤는지 뭐라고 소리치는 여자애가 보였지만 그 말도 들리지 않았다. 그저 도망쳤다. 전심전력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뒤돌아 도망쳤다.
하지만 길도 친구들을 따라 왔을뿐인지라 상혁은 얼마지나지 않아 멈췄다. 길을 잃고 근처 벽에 기대어 펑펑 울었다. 어떻게 해야할지 몰랐다. 아무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상혁은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자신과 부딪혔던 여자애가 데리고 온 경찰관에 의해 경찰서로 안내되었다. 어떻게 알고 따라온 것인지는 모르지만, 그 소녀덕에 상혁은 경찰의 도움을 받아 집으로 갈 수 있었다.
그때부터 상혁은 윤아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뭐가 지켜준다는 걸까. 상혁은 집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학교에 가서도 윤아를 피해다녔다. 윤아가 뭐라 매도할지 너무나 두려워서. 무섭고 괴로워서.
윤아가 아파하는 것을 알았다. 윤아의 아버지가 한쪽팔을 잃어 직장을 그만 두는 것을 알았다. 윤아의 아버지가 술로 매일밤을 지세고, 윤아가 눈이 죽어가는 것도 알고 있었다.
위로해주고 싶지만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할까. 모두 자신의 탓이다. 자기가 그날 친구들과 늦게까지 놀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거기다가 윤아의 아버지를 버리고 자신은 도망치지 않았던가.
경멸당할거다.
미움받을거야.
외면받고 버려질게 분명했다.
윤아의 어머니가 어떻게든 집안을 꾸리려 했지만 사정이 따라주지 않아 이윽고 가지고 있던 집마저 넘어가게 되었다. 집을 유지할 수 없었기에, 작은 집으로 이사가야했고 그러려면 다른 곳으로 이사를 가야만 했다.
그것은 싫었다.
윤아와 이렇게 헤어지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잘못했고 만나기가 두려웠지만 자신의 곁에서 윤아가 영영사라지는 것같아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상혁은 자신의 부모님에게 전화했다. 언제나 일때문에 집에 계시지 않는 부모님에게 상혁은 울면서 엉엉 울면서 부탁했다. 그것은 어린마음에 부린 투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상혁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런 투정뿐이었다.
윤아를 도와달라고. 어떻게든 해달라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그 뒤. 윤아의 가족과 상혁의 부모님이 어떤 의견을 교환했는지 모른다. 그 뒤로 윤아의 가족은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날이 많은 상혁이의 집에서 보호자라는 명목으로 함께 살게되었다.
하지만 상혁은 방 밖으로 나와 윤아와 만날 수 없었다. 같은 집에 살게 되었지만 한번 틀어진 관계는 쉽게 돌아오지 않았다. 죽었던 눈을 했던 윤아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와 자신의 방문을 두드려줬을때도 열지 못했다. 누나가 뭐라 말을 했지만 그 역시 외면했다.
계속 계속. 중학생이 되어 청이 선배의 도움으로 윤아를 다시 보게 될때까지 자신은 윤아와 마주치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도, 그 죄책감이 남아 상혁은 윤아를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예전의 활발함이 사라진 것이 자신의 탓인 것같아서. 지금 집에서 함께 살고 있는 것도 결국 자신의 고집에 불과한 것같았기에.
" 그래서 지금 윤아의 태도에 내가 고민하고 있는거야."
상혁은 힘없이 이야기했다.
" 윤아가 나에게 뭘 숨기는 경우는 거의 없었어. 그렇기에 더욱 불안해. 물론 윤아의 성격상 과거의 일에 관한 것은 절대 아니겠지만 윤아가 숨기고 있는 말이라면 분명 나에게 영향이 있다는거야. 그것도 나에게 좋지 않은 쪽으로. 만약 윤아가 나에게 그 말을 이야기했을때 나는 순순히 쉽게 수긍하거나, 대답할 자신이 없어."
상혁이가 말하는게 뭔지 조금은 알것 같았다. 과거의 내가 그랬듯, 등을 돌리고 외면하고 도망치고 있는 것이다. 윤아와 마주보는게 아직도 두렵고 무서운거다. 지금 상혁이는 계속 그렇게 윤아를 대해왔던 것이다.
그랬기에 윤아의 마음을 받아줄 수도 없었다는 거겠지. 참으로 복잡한 사이다. 애초에 나는 이정도로 사이좋았던 친구가 있던 적이 없기에 녀석의 입장을 생각하려면 가족에 대입하는 수밖에 없다.
그중에서도 지금이라면 지윤이-. 아버지는 조금 나아졌어도 아직 조금 서먹하니까. 만약 내가 지윤이와 그런 상황이라면 무척 괴로울 것이다. 그리고 지윤이가 뭔가 숨기고 있다면 분명 나에게 영향을 주고 피해가 주는 것이기에 감추는 것일테고, 그것을 알고 있기에 괴로울 것이다. 내가 받을 상처를 생각해서, 이야기하지 않는 것을 알기에.
" 그러네. 지금 윤아가 감추는 것은 너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이겠지."
" 맞아.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엇이든 제대로 대답할 자신이 없고, 그 말을 함으로서 윤아가 상처입는 것을 바라지도 않아."
나라도 그럴 것이다. 자신은 줄 곳도망쳤다. 그냥 이 상황이 어떻게든 유지가 되길 바라며 그렇게 등을 돌렸다. 하지만 계속 쫓아와줬다. 어떻게든 함께하기위해 노력해줬다. 그런 아이가 자신때문에 또 상처를 입는다. 그리고 그 말은 자신을 상처입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말에 자신은 무슨 답변을 해야할까. '괜찮아' 아니면 '미안해' 그 어떤 것도 입 안에만 멤돌뿐 쉽게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이녀석에게 뭐라고 이야기 해야할까.
위로?
아니면 격려를 해야하나?
어떤 말이든 나에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나는 이녀석처럼 도망쳐본 경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그랬기에 할 수 있는 말도 있는 법이다.
" 걱정마."
" 응?"
나는 부드러운 어조로 이야기하며 고개를 떨구고 있는 유상혁의 관자놀이를 검지 손가락으로 쿡,찔렀다. 그리곤 싱긋 웃으며.
" 힘들고 어렵고, 대하기 어려우면 도망쳐. 그래도 윤아의 말은 똑바로 듣고, 상처를 입더라도 윤아에게는 웃고. 그리고 도망치도록 해. 혼자 울수 있는 곳으로 숨어 숨죽여 울도록 하렴."
" -하지만 그렇게 하면...'
" 건방지네. 아직 내 말은 끝나지 않았어.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도망치면 그때는."
고개를 들어 나를 보는 상혁. 그리고 나는 그런 상혁을 마주본 뒤에 고개를 돌리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꾹 그 얼굴을 잡고 나와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게 했다. 적어도, 내 시선에서는 절대로 도망치지 못하게.
" 네가 그랬듯이, 이번엔 내가 찾아줄테니까."
" ......"
" 네 머리로는 애써 숨어도 나는 웃으면서 찾아낼 수 있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도망치도록 해. 말했잖니."
나는 너의 편이라고.
그렇게 말하며 손을 놓자. 상혁은 다시 어깨를 푹 떨구더니 픽 웃었다.
" ....결국 너는 도망치라고 밖에 하지 못하는구나."
" 어머나, 그게 내 전문분야이니까. 찾는 것은 처음이지만 나니까 분명 잘할테지."
내 말에 상혁은 마주 시선을 마주쳐왔다. 어두워져서 잘보이진 않지만, 형광등 때문인지 눈이 약간 반짝 반짝 빛나는 듯한 느낌이다.
" 흐응, 설마 감동해서 울었니?"
" -정말 너 말이야..."
상혁은 뭐라 말을 하려다가 작게 한숨을 쉬고 씩 웃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뭐 너는 늘상 그런식이지.'라는 느낌? 그다지 나쁜 기분은 아닌 것같았다. 제대로 도울 수는 없지만 나의 말에 조금 기분이 나아진 것일까.
" 그럼 늦었으니 돌아가도록 하자. 더 늦으면 지윤이가 뭐라할지도 모르니."
" 아. 그래, 확실히 이젠 돌아가야 하겠지."
내가 말을 하며 일어서자 상혁도 공원의 시계를 보곤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실이미 많이 늦었지만. 으으, 분명 집에 돌아가면 지윤이가 또 뭐라고 잔소리 할거야.
" ...아무튼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워."
" 별말씀을."
나는 고개를 돌려 상혁이를 바라보았다. 살짝 볼이 붉어진게 나를 아주 의식하지 않는것은 아니구나-라고 생각했지만 조금 착잡한 마음도 들었다. 방금 상혁이가 했던 과거의 이야기. 역시 상혁이는 윤아를 좋아했던 모양이다. 그것도 첫사랑이라-. 남자는 첫사랑을 쉽게 잊지 못한다고 하는데.
더군다나 지금까지 상혁이를 위해 윤아가 했던 행동과 상혁이가 윤아를 생각하는 마음. 솔직히 말해 비집고 들어갈 틈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를 좋아하고, 호감을 가지고, 좋아하는 것을 너무 가볍게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것은 너무 복잡하고 어렵고, 괴롭고 힘든 것이라는 것을 외면했던 것인지 모른다.
상혁이와 윤아. 마치 둘은 하나와 같은 느낌이다. 그것을 내가 억지로 비집고 들어가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해도 힘들어하는 상혁이는 보기 힘드니까 말이야. 이 녀석은 언제나 실없는 소리나 하고 맹한 표정을 짓고 있는게 어울리는걸.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그런 막연한 생각을 하니 조금 가슴이 따끔했다. 단순한 호감이라고, 플레그라고 우스겟소리처럼 생각하고 가볍게 여겼지만.
역시, 나는 녀석을 많이 좋아하게 되어버린 걸지도 모른다.
============================ 작품 후기 ============================
다다음편이 윤아편 마지막입니다. 하지만 클라이막스는 다음편이겠네요. 궁금한 점이나 오타가 있으면 댓글로 꼭 남겨주세요! 댓글 몇번씩 읽어보니 언제든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덤으로-.
수연아 힘내!
p.s 히어로즈 오브 스톰 하시는 분있으면 말씀해주세요. 함께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