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상혁이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 것은 대략 5분정도 시간이 흐른 후였다. 비교적 남성복이 많이 전시된 곳이었기에 처음 옷을 둘러보고 있는 나를 묘한 눈으로 보던 점원은, 상혁이가 들어오자 그제야 알겠다는 듯이 방긋 웃었다.
...뭘 알겠다는 건지는 알만 하지만.
" 손님, 이쪽에 있는게 요즘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은 옷이랍니다."
그래도 그다지 티는 내지 않은 체 친절한 얼굴로 이야기해온다. 과연 프로라고 해야하나, 하지만 나를 바라보는 눈빛은 '귀여워라, 풋풋한 고딩 커플이구나~.'라고 이야기하고 있었기에 그대로 듣기엔 좀 미묘했다.
그렇다고 남성복에 대해 거의 문외한인 내가 이 옷 저 옷 살펴본다고 제대로 된 것을 고를 턱도 없어서 어쩔 수 없이 점원이 추천해준 옷가지를 살펴볼 수 밖에 없었다.
" 유상혁. 잠깐 여기에 가만히 서있어보지 않겠니."
" 응? 아아, 그건 어렵지 않지."
네 옷을 고르는 건데 그런 맹한 표정은 짓지 말라고. 남은 지금 예산과 애써 타협할만한 옷을 힘들게 고르고 있는데 대체 어디에 정신을 팔고 있는거야?
" 야야. 그렇게 노려보지는 말아줘... 진심 네가 노려보면 완전 무섭다니까. 거기다 내가 옷을 골라본 경험도 있는 것도 아니니, 네가 그렇게 나한테 어울릴만한 옷을 고르는게 신선하다고 해야되나-."
" 흥, 이쪽도 마찬가지야. 애초에 나는 옷도 인터넷 주문으로 사고, 집 밖으로 잘 나가지 않는다는 것을 너도 잘 알지 않니? 거기다가 옷에 대해서도 여자가 된 뒤 여성복 정도에만 관심을 가졌지. 남성복은 잘 알지 못하니까 네가 도와줘야해."
전생이 남자였지만 명환이었던 이상, 옷에 신경을 썼을리 없다. 내가 옷에 대한 지식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수연으로서 자기 자신을 꾸미는 재미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니까.
" 아무튼 가만히 있어."
" 네...."
기운빠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상혁. 뭐 아주 녀석의 심정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이런 것에 관심있는 녀석도 아니고, 자기를 꾸미는 것에 신경을 쓰던 녀석도 아니니 이렇게 자신의 옷을 고르는 것은 지루하기만 할 것이다. 이해는 하지만- 뭔가 나는 조금 즐거운걸.
" 헤에. 이건 좀 괜찮은걸. 이 셔츠 어때?"
가격도 적정선이다. 상혁이의 몸에 슬쩍 데보니 의외로 검정색도 잘어울리고 심플한 것이 녀석의 이미지와도 잘 어울린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이녀석 꽤 준수한 얼굴이라 제대로 차려입으면 나쁘지 않겠지.
" 나쁘지 않은데? 나에게 어울릴지는 모르겠지만-. 거기다가 비싸거나 한 것은 아니야?"
" 괜찮아. 용돈도 받았고, 서울에서 겪었던 재난은 나름 이런저런 방법으로 메꿨으니까."
" ...네가 이런저런 방법으로 메꿨다고 하니 무척 수상한데 말이야."
" 어머나. 그렇게 의심하는 눈초리로 보지 말아주렴. 당장 경찰서에 치한으로 신고해버리기 전에."
" 윽, 네가 그렇게 핸드폰을 들고 말하면- 아, 알았으니까 진짜로 전화걸지 말라고!"
바보. 설마 진짜로 걸까. 소심한 녀석같으니라고. 그래도 울상을 짓는 얼굴이 나름 귀여우니 봐주도록 할게.
" 역시 어림잡아서 보는 것은 한계가 있겠어. 자, 이 옷을 입어보렴."
" 바지도 사는거야?"
" 그래. 기왕 사는 것 위 아래로 세트로 사는게 좋을 것 같아. 물론 가격은 걱정하지 말고 입도록 해."
두벌을 사는 것이라 약간 지출이긴 하지만, 내가 서코에서 녀석에게 빌린 돈을 생각하면 그렇게 차이도 나지 않는다. 도리어 상혁이 쪽이 아직도 우위라고 해야하겠지. 그러니 이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다.
" 음-, 조금 미안한데."
" 뭐가 미안하다는 걸까. 너는 그저 빌려줬던 돈을 받는다는 생각으로 편히 입도록해. 어찌보면 다 네 돈이니까."
" 내 돈이면 차라리 이걸로 건프라-"
그렇게 말하는 상혁의 말에 나는 팔짱을 끼고 나름 부드럽게 미소지으며 말했다.
" 호오, 재밌네, 계속해봐."
" -가 아니라. 당장 갈아입고 온다고."
착하네. 처음부터 그러면 얼마나 좋니. 도망치듯 탈의실로 들어가 사라지는 상혁이를 보며 지갑의 잔돈을 계산했다. 좋아, 아직 이정도면 여유. 옷가게에 나와서 어디를 갈지는 모르지만 아직 쓸 돈은 상당히 남아있었다.
" 손님, 예쁜 얼굴로 좀더 애교있게 말하면 남자친구도 좋아할 거에요."
언제 다가왔는지 친절한 미소를 지은 여성점원이 부드럽게 말한다. 윽, 무슨 소릴 하는거야 정말. 아까부터 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더니만 괜한 참견이 아닐 수 없다. 가뜩이나 나는 이런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오면 거북해지는데.
" -설마요. 그리고 전 저녀석의 여자친구도 아니에요."
" 어라, 정말요? 그런 것치곤 손님이 저 남자손님을 바라보는 시선이 꽤... 아무튼 그래서 당연히 커플인줄 알았지 뭐에요. 제 착각이었다면 죄송합니다."
뭐야 이 점원. 보통 예리한게 아니잖아. 내가 대체 어떤 시선으로 상혁이를 바라봤기에 사귀는 사이로 안 것이지? 여자의 감이라 이건가, 그래서 곱슬이 녀석도 최근 더 나를 경계하는 것이고?
" ...제 시선이 어땠나요?
" 보통 좋아하는 남성을 보는 여성의 시선이라 해야하나, 오래 이런 가게를 하다보면 그런 것을 잘 알거든요. 하지만 아니라고 하니 제 착각이었던 모양이네요."
아니 정확합니다. 너무 정확해서 소름까지 돋았다고요. 곤란한데, 이렇게 남이 보기에도 티가 나기 시작한건가. 정작 본인이 전혀 모르니 상관없긴하지만 이렇게 나를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그 바보도 금방 알아차릴 것이다.
' 그런데 딱히 알아차린다고 큰일나는 것은 아니지만-.'
생각해보니 딱히 곤란한 것도 없다. 내가 녀석에게 호감을 가진다는 것을 알아도 상혁이 녀석은 지금 윤아를 대하듯 모르는 척 편하게 대할지 모른다. 내가 혹여 상혁이에게 고백을 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지금처럼 편안한 관계로 있겠지.
물론 어디까지나 추측이다. 상혁이가 어떻게 나올지는 지금까지의 상황을 통해 유추해볼 수밖에 없으니. 애초에 지금 나로선 틈이 없다. 내가 상혁이를 좋아하던 아니든. 지금 상혁이는 윤아에게 시선이 가있고, 실제로 상혁이와 가장 가까운 여성은 윤아이며 사귀게 된다면 둘일 확률이 가장 높다.
그 다음은 아마 기존에 한번 고백했고, 과거에 썸씽이 있던 곱슬이 정도. 나라는 녀석은 이러니 저러니 해도 3순위인 것이다. 조금 분하지만 그게 사실이겠지. 상혁이가 몇번 나를 도와주러왔다고 해도, 함께해온 세월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없으니.
어라, 나 이거 호라 모젠젠 플레그 아냐? 순간 든 불안한 생각에 고개를 흔드는데,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던 상혁이 마침 문을 열고 나왔다.
" 입어보라고 해서 입어보긴 했는데-. 그, 역시 이런 차림은 나에게 좀 그렇지 않을까?"
검은 셔츠에, 약간 어두운빛의 깔끔한 면바지를 입은 상혁의 모습은 꽤 괜찮았다. 보통 청바지를 선호하며 캐쥬얼한 복장을 즐겨입는 녀석에게 이런 차림은 어색한듯 쭈뼛쭈뼛 어색한 움직임이었다.
" 흐응, 괜찮네. 마치 구더기가 파리가 된 듯한 모습이야. 훌륭해."
" 그거 칭찬이지?"
" 당연한 소릴, 이 이상 없을만큼 대단한 칭찬인걸."
나는 녀석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은 후, 녀석의 손에 들린 옷을 점원에게 받은 작은 가방에 넣었다. 그런 나의 행동에 상혁이는 의아하다는 얼굴로.
" 그걸 왜 거기다가 넣어?"
" 바보구나. 당연히 이제부터 그 옷을 입고 돌아다닐 것이니 이 옷들은 가방에 넣어 들고 다니는게 맞지. 너에게도 그정도 머리는 있을텐데? 아니면 내가 너를 너무 과대평가한 걸까?"
나의 말에 상혁이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하지만 윤아가 코디해준 옷차림은 이 가방속에 봉인. 기왕 나와 어울리기로 했으니 내가 코디해준 차림으로 다니도록 하렴.
" 그럼 이거 두벌 계산해주세요."
" 네, 잠시만요."
우리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방긋방긋 웃고 있던 점원에게 말하자, 그녀는 순식간에 계산해준 뒤 친절하게 가게 밖까지 배웅해줬다. 정말 오지랖 넓은 직원이다. 아무리 봐도 내가 녀석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치라고 해야하나. 다음부턴 절대 오지 말아야지.
아까과 같이 번화가로 나왔지만 상혁은 뭔가 어색한 듯 계속 근처 쇼윈도우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며 괜찮은지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이런 차림은 자신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듯, 우스꽝스럽진 않은가 보는 모습이었다.
" 유상혁."
" 어?"
내가 조용한 목소리로 부르자 상혁이는 다시 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그런 녀석의 모습에 살짝 웃으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잘 어울려. 그러니 그렇게 신경쓰지 말도록 해. 진심이니 자랑해도 좋아. 나의 심미안은 무척 높으니 말이지. 아까 구더기에서 파리가 된 정도로 한 것도 농담. 정말 괜찮으니까 자신감을 가지고 똑바로 걷도록 하렴."
그렇게 말한 나는 상혁이를 향해 손을 내밀어 녀석의 옷깃을 잡고 내 옆에 바짝 당겼다. 내 옆에 엉거주춤 서있는 모습이 영 볼쌍사나웠기 때문이다.
" 최고로 예쁜 내 옆에 있으려면, 걸음이라도 당당해야 하지 않겠니? 그러니 똑바로 걷도록해, 내가 잡아줄테니까."
" -아, 아아, 고마워 미안. 신경쓰게 했구나."
" 별로. 네가 그런 것에 익숙하지 않다는 것 정돈 아니까 신경쓰지 않아. 너는 커뮤니티 최악의, 정진정명 오타쿠잖니?"
그런 나의 말에 상혁은 픽 웃으며.
" 그건 너도 마찬가지 잖냐."
" 어머나, 동급취급하지 말아주렴. 나는 제대로 블로그 활동도 하고 있고 커뮤력도 훨씬 대단하니까. 이웃들과도 꽤 친해졌지."
" 인터넷에서?"
정말 한마디도 지지 않는 녀석이다. 나는 녀석의 옷깃을 잡은 손에 한층 힘을 넣으며 녀석을 살짝 올려다본 뒤, 방금 전 유상혁이 그랬듯이 피식 웃었다.
" 그래. 인터넷에서."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말을 끊은 나는, 작게 한숨을 쉰 뒤에 투정부리듯 이야기했다.
" 정말, 그런 것은 넘어가주는게 남자의 미덕이라는 것을 모르는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정말 최악이야."
" 네가 말하는 만큼 나도 그렇게까지 커뮤력이 낮은 것은 아니라고."
" 흐응, 어련하실까."
그렇게 말한 우리는, 한번 시선을 교환한 뒤에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천천히 번화가를 걸어갔다. 딱히 어디를 간다고 정하지는 않았지만 그냥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걸어갔다.
물론.
녀석의 옷깃은 꾹 잡고, 놓지 않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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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아 : 아니, 잠깐만. 뭔가 이상하잖아? 내 순서 아니었어?
물론 윤아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다음편부터 이제 터지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괜찮아~. 사실 이번편에 이어서 쓸까 하다가, 글의 분위기가 좋은 부분에서 우선 끊도록 했습니다. 그냥 전편에서 여기까지 쓸걸 그랬네요. 힘내라, 수연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