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그것은 오래전에 있었던 이야기.
' 숨어도 소용없지롱~. 네가 어디에 있는지는 눈감고도 찾을 수 있는걸?'
어린시절부터 함께했고, 앞으로도 함께하리라 생각했던 소녀와 했던 약속과. 악몽에게서 도망치기 위해서 약속을 잊어야했던 자신.
무섭고, 무서워서.
몸을 짖누르는 죄책감을 조금이나마 피하고 싶어서. 사람을 피하고, 세상을 두려워했다.
내가 할 수있는 일은.
그 아이가 다시 손을 내밀어 주었을때 잡은 것 뿐. 정말 슬픈 것은 그녀일텐데. 겨우 고통을 극복한 그녀를 나의 죄책감이라는 것으로 물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극복했지만, 나는 극복하지 못했다. 그저, 걱정하지 않게 극복한 척을 했을뿐.
만약 녀석이 스스로 멀어지려고 했다면 나는 그런 '척'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두려운 것이다. 녀석이 멀어지는게.
사라질 것같은 이 불안감이.
' 안녕-.'
그렇게 말하고 사라질 것만 같아서, 나는 황급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 윤아야!"
그것은 나쁜 꿈이었을 뿐인지 모른다. 하지만 뭔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상혁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당장이라도 사라질 것같은 환영이라도 붙잡기 위해, 상혁은 손을 뻗어 잡히는 것을 당겼다.
그리고 눈을 떴을때. 시야에 들어온 것은 눈가를 가늘게 모으고, 이것을 어떻게 해야 고민하는 듯한 아름다운 소녀의 얼굴이었다.
" 윤아가 아니라 미안하네."
그제야 상혁은 정신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잠든 곳은 집이 아니라 모텔. 자신을 깨우러 와준 것도 윤아가 아니라 수연이었다. 뻣뻣해진 눈동자를 천천히 굴려 벽에 있는 시계를 보자 아직 새벽 여섯시를 가리키고 있는 것이 보인다.
" ..... 조, 좋은아침?"
상혁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수연은 함께 웃어줄 수없었다. 늦게 일어나면 버리고 가버릴테다! 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자비를 배풀어 '특별히' 깨워주기 위해 갔더니 난데없이 '윤아야!'라는 외침과 함께 껴안겨 진 것이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인 탓에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껴안겨 져버렸다.
' '윤아'라고 지칭당한 것이 기분나쁜지, 갑작스럽게 당한 이 성희롱 때문에 기분나쁜 건지 모르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금 수연이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이다.
" 죽어버려."
간만에 듣는 소름돋게 차가운 수연의 음성과 함께, 상혁은 배에 강력한 충격을 받고 눈앞에 깜깜해졌다.
- - - - - - -
" 아야야야야.... 얼마나 쌔게 친거야."
" 그렇게 강하게 친건 아니야. 진심으로 쳤으면 진짜로 죽었을거라 생각해."
길을 걸어가며 얼얼한 배를 쓰다듬은 상혁이 이야기하자 수연은 진지하게 답했다. 덕분에 상혁이의 입장에선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지만. 확실히 수연이의 근력을 생각하면 저 진지한 말이 결코 거짓처럼 들리지 않았다.
오토바이를 들고 던지는 곱슬이와 동급, 아니 이상일지도 모르는 근력을 지닌 수연이다. 애초에 평범한 인간의 범주에서 동떨어진 탓에 실감이 나질 않았다.
'....이런거 생각하면 정말 라노벨에서 나올법한 녀석이긴 하네.'
전국 일등의 두뇌를 지녔고, 신체능력도 일반인과 다르며 전생을 기억하고 있는 소녀. 누가보더라도 일반인이라고 보기엔 어렵다. 정말로 소설이나 애니가 아니면 볼 수없는 존재인 것이 확실하겠지. 그런 사람과 이렇게 가까운 시점에서 자신은 행운아라고 불러야 할려나.
" 그보다 어떠니? 잘 어울려?"
아픈 배를 쓰다듬는데에 정신이 팔린 탓에 미처 수연이의 코스프레 의상에 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수연도 그사실을 알기에 옷을 갈아입은지 시간이 좀 지났음에도 이제서야 묻는 것이고.
코스프레 의상이라-. 상혁은 아픈 배를 만지던 손을 내리고 옆에서 걷고 있는 수연이를 위 아래로 훑었다. ....솔직히 말해서 엄청난 퀄리티다. 역시 코스프레의 완성은 얼굴이라고 해야할지. 수연이가 코스프레를 한 모습은 코스프레로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러웠다.
애초에 애니메이션 캐릭터는 동양인의 골격이 아닌 서양인의 골격을 따르는 탓에 같은 옷을 입어도 위화감이 감도는 것이 보통이지만 수연이는 그 몸매나 골격이 놀랄만큼 아름다워서 그런 위화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저런 골격이 순수 동양인이라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 놀랄만큼. 솔직히 센죠 가하라가 2D세계에서 튀어나온줄 알았어. 첫날은 그걸로 할 생각이야?"
" 그래. 내일은 고민중. 유키노시타를 할까, 에루를 할까 요조라를 할까 생각중이지만."
수연은 표장은 변함없이 담담했지만 무언가 기분이 좋은 듯한 어조로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첫 코스프레라는 것에 들뜬 듯, 발걸음마저 가벼운 기분이었다.
" 햐, 새삼 보면 볼수록 대단하네. 보통 이렇게 입으면 골격이나 그런것 때문에 위화감이 생기는데."
" 흐응-. 아, 애니메이션 캐릭은 동양인보단 서양인의 조형에 맞춰나온다는 뭐 그런 이야기?"
" 응, 어디서 봤는데 두상도 그렇고 거의 그렇다고 하더라고."
상혁의 말에 수연은 고개를 갸웃하며 그런 이야기가 있었나 고민했지만,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캐릭터의 가슴크기나 다리길이, 몸매를 떠올리고는 '그럴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럴지도. 뭐 나는 애초에 쿼터니까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 하긴 쿼터라면 서양인과 닮는 것도-. 가 아니라 너 쿼터였어? 지금까지 행동을 보면 전혀 그런 것같지 않던데?!"
" ...시끄럽긴. 애초에 그런 말이 나올 일도 없었어. 내 친 어머니가 하프였으니, 딸인 나는 쿼터겠지. 외모나 이런 것을 보면 서양인 유전자가 들어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고."
상당히 뜬금없게도 수연이에 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된 기분이다. 약간 이국적으로 생겼구나-라고 생각하기는 했지만 설마 쿼터였을 줄이야.
" 놀라운 사실이네. 쿼터인데도 그렇게나 진한 검은 머리카락이라니, 뭔가 갑자기 신기해진다."
" 어머니도 흑발이었어. 눈은 파랗기는 하셨지만. 물론 나도 사진으로만 본거야. 나와 상당히 닮았지만 눈이 파랗다고 생각하면 돼."
" 그러면 말야-. 애초에 쿼터면 청이 선배와 처음 만났을때 그리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잖아."
" 좀 달라. 청이 선배는 딱보기엔 혼혈이 아니라 그냥 외국인인걸."
금발의 푸른눈. 그리고 하얀피부, 커다란 가슴. 확실히 혼혈이라는 것을 알 수 없을만큼 완벽한 외국인이었다. 다만 순수 외국인과 다른 점은 청소년기부터 온다는 급격한 삯음 현상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일까.
" ...하긴 확실히 그렇지. 나도 처음에 봤을땐 뭐라고 말해야할지 당황해서 굳어버렸고."
" 지금 지윤이가 아직도 그렇지만."
청이 선배만 만나면 급격히 얼어버리는 자신의 여동생을 떠올리며 수연은 속으로 웃음지었다.
" 아무튼, 약속장소는 제대로 가고 있는거니?"
아직 여덟시 반정도 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아침 식사를 함께 하고 서코로 가기위해 약속시간은 아홉시로 정해져 있었다. 미묘하게 길치인 수연으로선 내심 상혁이의 안내에 따라 가고 있는 이 길이 조금 미심쩍게만 느껴졌다.
" 당연하지. 그나저나 이상하네? 보통이라면 내가 묻는쪽이잖아? 어제부터 생각한 건데, 혹시 길찾는 것에 약해?"
딱히 비난이 담긴 것도, 놀리는 말투도 아니었지만 그런 상혁의 말에 수연은 약간 움찔 할 수밖에 없었다.
길치-라니.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이 길치라니!
애초에 길치 기믹을 가진 여캐는 애니메이션같은 곳에서 밖에 보지 못했던 수연이다. 그 기믹을 가진 당사자가 바로 자신이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조금 방구석에 처박혀 살았고, 밖에 나가지 않은 것은 사실이지만. 설마 길을 찾는 것에 이렇게 약할줄이야!
" 우, 웃기는구나. 설마 내가 길을 찾는 것도 못할까봐. 서울 지하철역 노선표와 순서까지 다 외울만큼, 나는 길에 아주 해박해."
" ...서울 지하철 역 노선표와 순서를 다 외우는 것은 굉장하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것과 길에 해박한 것은 다른 것아닐까."
" 가-같은 걸!"
얼굴을 붉히며 소리치는 수연의 말에 상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뭐 그럼 그렇다고 해두지, 라는 듯한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들어 다양한 수연이의 표정을 보는 재미가 있었지만 굳이 더 놀려봐야 매섭고 싸늘한 독설로 돌아올 것이 뻔하므로 적당할 때 멈추기로했다.
" 그건 그렇다고 치고. 아무튼 다 왔어. 이 골목만 돌면 약속장소인 음식점이 보일거야."
" 건방져-, 뭐가 그건 그렇다 치고니?"
" 참 장소는 아침부터 여는 간단한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던데 괜찮아?"
으읏-, 이녀석 이제 아주 내 말은 듣지도 않는구나. 수연은 인상을 찡그리며 간만에 확 쏘아붙여줄까 하다가 작게 한숨을 쉬며 관뒀다. 하아, 씨이... 그렇지. 이런건 먼저 플레그 박힌 쪽이 지는거지. 이렇게 편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분이 좋아지는 내가 밉다, 정말.
" 상관없어. 애초에 나는 빈털털이니 선택권따위 없지."
" 아-, 맞다."
생각해보니 수연은 돈이 하나도 없었기에 숙박비는 물론 식비까지 상혁이 자신이 부담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지금 자신이 은근히 놀리고 있음에도 꾹꾹 참고 있는 것이 그것때문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 작품 후기 ============================
오늘 체력측정이 있어서 피곤합니다... 이틀연속으로 적은 용량이라 죄송해요!
롤은 제가 아침 여덟시부터 저녁 여섯시까지 접속하구요. 저번에 친구가 아이디가 정지되서 제가 일겜이나 하라고 잠깐 빌려줬었는데 그때 연락하신 분이 있더군요. 전 듀오랭은 이상하게 듀오만하면 지는 징크스가 있어서 함께할때는 전 항상 일겜을 합니다!
실제로 일겜을 더많이 하지만요!(랭겜은 하루에 한두판뿐이 하지 않아요)그럼 다음편은 서코 입성! 그리고 짧은 코스프레와 구경및, 떡밥투척후 밤에 돌입합니다. 2일차엔 딱히 밤에 이벤트가 없구요. 3일차에 있을 예정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