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 서코는 내일이잖아요? 그러면 오늘은 놀고, 저녁에는 각자 근처에서 자던지 한다음 내일 다시 모이는 거죠?"
오늘의 계획은 이야기하고 있는 곰씨에게 상혁이가 어울리지 않게 진지하고 확실한 질문을 했다. 상혁이의 말처럼 내일도 어울리기로 한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함께 숙박하는 것인지 아니면 각자 따로 잠을 자는 것인지 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 네, 그건 각자 호텔이나 모텔등, 숙박업소에서 잠을 자고 내일 서코회장에서 만날 예정이에요. 저녁에는 아무래도 각자 시간을 보내는게 좋을 것같아서."
상혁이의 말에 대답한 것은 미연시 씨였다. 곰씨 다음가는 연장자인만큼 서로 상의한 내용인지 계속해서 말을 덧붙였다.
" 그래서 보시면 카페 공지란에 '정모에 오시는 분들은 숙박비도 지참하여주시기 바랍니다. 당일만 왔다가시는 분들은 해당안됨' 이라고 적어뒀죠. 물론 모에님이랑 고딩님은 내일 서코도 가실 생각이죠?"
" 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한 소릴. 애초에 목적은 서코였다고! 카페 정모때문에 오기도 했지만 고등학생도 됐으니 이제 서코라는 곳에 가보자고 얼마나 벼르고 있었는데 말이야.
" 그럼 저녁시간에는 같이다녀야겠네. 기왕이면 너랑 나는 같은 호텔에서 묵는게 내일 모일때 편하겠지?"
옆에서 상혁이가 내일 이동할때를 생각했는지 나를 향해 물어왔다. 솔직히 나로선 상혁이랑 같은 호텔을 묵는 것은 조금 부담이 되는게 사실이지만, 오늘 서울에서 길을 잃을 뻔한 전적도 있어서 되도록이면 같이 다니는게 좋을 것같았다.
" 흐응, 혹시 같은 방을 쓰자는거야? 변태인걸."
" 서, 설마! 똑바로 다른 방에서 잘거라고. 애초에 너도 숙박비 들고왔을거 아냐."
얼굴을 붉히며 부정하는 모습이 좀 귀여웠다. 아무튼 방금한 것은 농담. 당연히 나도 숙박비를 지갑에 든든히 넣어서 왔고, 설령 무슨 일이 있어도 상혁이랑 같은 방을 쓸 생각은 없다.
내가 아무리 플레그가 꽂혀있어도 그런 말도 안되는 일을 저지를리는 없지. 그리고 이 플레그 내가 꼭 나중에 꺾어버릴거야. 내가 저런 녀석따위에게... 으, 분해.
" 그런데 이런 질문하기는 좀 그렇지만 너무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이제 카페에도 꽤 오래있었고 슬슬 장소를 변경하려던 일행들 사이로 유유윳키가 어색한 얼굴로 나와 상혁이를 번갈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러면 채팅방에 고딩님이 이야기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 소꿉친구나 일진같은 여자애가 고딩님이랑 같은 부에 속해있고. '인당부'라는 동아리에서 실제로 활동하고 있는건가요."
인당부. 우와 정식명칭 진짜 오랜만에 듣는다. 채팅방에서 상혁이가 이야기했던 내용인가보다. 그러고보면 채팅방에서 상혁이가 자주 동아리에서 있었던 일을 자주 이야기하곤 했었지. 그리고 본인의 이야기도 꽤 했었다. 아침마다 여자 소꿉친구가 자신을 깨우러 와준다는 이야기. 곱슬이에 청이 선배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얼굴은 예쁜데 야겜이나 학교에서 하고 있다는 이상한 검은 머리소녀. ...나까지.
생각해보니 내 취급 꽤 나쁘지 않아? 채팅방에서는 '모에'로서 활동하느라 '하앜하앜'등의 채팅만 했지만 생각해보면 윤아는 '전형적인 소꿉친구이며 자신에겐 자주 투덜거리는 귀여운 여자아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했고, 곱슬이는 '눈매가 매섭지만 속은 착하고 쾌활하며 밝은 여자아이'라고 이야기했다.
근데 나는 '여자애면서 학교에서 하루종일 게임을 하고 있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수 없는 무표정한 여자아이'라는 식으로 이야기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뭐야 너무해. 생각해보니 너무하잖아! 거짓말은 아니라지만 그래도 좀 감싸줘야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녀석에게 박한 취급을 받고 있었어.
" 네, 맞아요. 전 거짓말을 한적은 없는 걸요. ...설마 믿지 않았다거나."
" 아, 아니 그냥 너무 신기하잖아요. 진짜 라노벨주인공 같으시네. 소꿉친구에 일진 여자아이. 그리고 환상속의 오타쿠 미소녀... 앗, 마지막 말은 잊어주세요!"
뭘 잊어. 다 입밖으로 떠들어놓곤.
" 그렇죠. 라노벨 주인공 같은 녀석이라니까요. 덤으로 그 붉은 머리 일진 여자애한테는 고백까지 받은 전적도 있고."
" 야, 야! 그건...."
" 어머나, 남자라면 그런건 자랑스러워 할 줄 알아야지. 곱슬이도 신경안쓸걸? 이미 자기 입으로 떠들고 다니는 녀석이니."
" 그건 그렇다만."
실제로 곱슬이는 자신에게 고백하는 귀찮은 녀석들에게 이미 자기는 상혁이에게 고백을 했으며 차였다! 그래도 내가 따라다닌다! 라고 엄포를 해논 상태다. 정말 엄청난 녀석이 아닐 수 없다. 수많은 미연시를 하고 애니를 섭렵한 나지만 그런 무대포 여자애는 난생 처음이다.
" 왠지 화가날 것같네요."
" 동감이다."
" 모에님을 만나지만 않았어도 이번 모임은 그만두는 거였는데."
나머지 세사람은 여태 고백이라는 것과는 인연이 없었는듯 내 이야기에 타오르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조금만 더 불을 지피면 당장에 폭발할지도 모르겠는걸. 뭐로 슬슬 부체질을 해볼까... 이번 모임에서는 이런걸로 상혁이를 슬슬 갈궈야지.
" 그럼 모에님은 어떠세요?"
내가 어떤 기름을 부을까...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유유윳키가 궁금한게 많은지 재차 나에게 질문을 해왔다. 그런데 어떠냐니? 뭐가 어떻다는 소리일까.
" 네?"
" 부서에 여자들뿐이고 남자는 고딩님 뿐이라면서요. 거기다가 고딩님에게 아침마다 깨우러 올정도로 호감도가 올라간 소꿉친구에 직접 고백까지하고 차였음에도 부서에 남아있는 일진 여자아이. 그 가운데서 모에님은 고딩님을 어떻게 생각하나 해서."
" ...어떻게- 라니."
흠.
나는 가만히 팔짱을 끼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생각해보면 난 상혁이를 딱히 이렇다, 뭐다 하고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냥 입학한 후에 계속 내 옆에 있었고 떨쳐내려해도 따라온 귀찮은 녀석 정도일까.
처음에 멋대로 설득하려해서 기분이 상했었고, 내 운동신경을 알면서도 멋대로 구해준 탓에 팔과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었다. 내가 어디를 가든 계속 따라와줬고, 도망칠때도 옆에 있어줬다. 디즈니 랜드에서 자칫 방황할뻔 했을때도 어울려 주었고, 수학여행의 마지막 날에 무너질만한 나를 붙잡아 주었지. 나를 위해 마음을 고치는 정신과 의사를 하겠다고 한 것은 무척 우스웠지만, 지금 생각하면 조금 멋있었을지도.
....아니 난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거야!
" 모에님? 얼굴이 붉어지셨는데요."
" 아, 아니. 착각하신거에요."
아 덥다. 그러니까 왜 뜬금없는 질문을 해가지고. 하지만 이런 나의 반응이 문제였나보다. 유유윳키와 곰씨, 미연시 씨의 눈이 아까의 순박한 눈이 아닌 날카로운 칼날처럼 변했다. 하기사 미연시와 애니메이션으로 단련된 오타쿠들이다. 지금 나의 반응은 몹시 모범적인 히로인의 반응이었던 만큼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이해한 모양이었다.
그래서 더 부끄러워! 놀리려다가 오히려 당해버리다니...
" ? 어째 다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데."
자신과 관련된 이야기가 아닌지라 카페를 둘러보며 남은 커피를 마저 마신 상혁이만 오직 나의 반응을 눈치 못챈듯 어벙하게 물어왔다. 아니 그러니까 넌 진짜 라노벨 주인공이냐고. 왜 혼자 못알아채는데. 아니 알아채면 그게 더 곤란하고 문제니까 그냥 그대로 있는게 낫겠구나. 네가 둔해서 정말 다행이야.
내가 플래그를 다 파낼때까지 계속 몰랐으면 좋겠지만... 플레그가 어디까지 박혀있는지를 몰라서 엄두가 나지 않는다. 우우.
" 하하, 전 라노벨에만 이런 이야기가 있는 줄 알았지 뭐에요."
" 그 뭐냐, 원래 현실은 소설보다 더 판타지스럽다고 하던데 그 말이 딱 맞네."
" 하하하. 이런 하... 끊은 담배피고 싶다."
덕분에 내 눈앞에 있는 세명도 멘탈이 좀 깨진 모습이다. 하긴 저들의 입장에서 상혁이는 여자만 네명인 부서에서 사랑받는 남학생. 거기다가 본인은 그것을 둔감해서 알아차리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것일텐데 짜증이 날만하다.
자꾸 이렇게 자랑하기도 뭐하지만 나는 초 미소녀고!
" 이제 슬슬 가야죠. 국전에도 가서 둘러보고 오락실도 가려면 시간이 좀 부족할 수도 있으니까요."
눈치가 정말로 존재하지 않는 상혁이는 멘탈에 금이간 세명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지 편안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세 명은 그런 상혁이의 반응에 눈을 게슴츠레 뜨면서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고, 상혁은 그 반응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특별히 뭐라 묻지는 않았다.
" 너 전에 국전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냐?"
주섬주섬 자리를 일으키는 세명을 가만히 바라보다 천천히 짐을 챙기는 나에게 상혁이가 기분 좋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아무래도 서울에 온데다가 국전 근처에 가게 되니 기분이 좋아진 모양이었다. 게임이 목적이었던 나와는 달리 상혁이는 각종 피규어나 프라모델 때문에 꼭 한번 국전 근처에 가보고 싶어했었으니 말이다.
사실 그정도 샵은 다른 곳에도 많이 있는데 분위기라고 해야할지, 유명한 곳이니 그런 것이겠지. 게임같은 것은 확실히 국전쪽이 우월하지만.
" 그래, 맞아."
일본어로 정발된 게임은 왠만한 게임샵은 잘 들여놓지 않는 편이다보니 일일히 말을 해서 구해야했다. 하지만 국전은 좀더 다양한 게임을 볼 수 있지 않을까해서 기대중. 물론 내가 pc로 하는 어덜트 게임이나 일본에서 직접 구매하는 게임들은 없겠지만.
워낙 수위가 높다보니.
" 그리고 이번에 그 근처에서 건프라 세일한다고 하더라."
" .....어머, 난 프라모델같은거 관심없는걸? 갑자기 무슨 이야기이실까."
'수연이'로선 딱히 건담을 만든적도, 이야기를 꺼낸 적도 없기에 상당히 황당한 말이었지만 난 그 이유를 알기에 새치름하게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 명환이가 건담을 좋아하더라고. 아니 좋아한다기 보단 자주 본다고 해야하나?"
흥, 그럴줄 알았다.
내가 인상을 살풋 찡그리자 상혁이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건담- 뭐 좋아하긴 한다. 전생에는 체포하겠어, 라던지 페트레이버 등등 그런 류에 관심도 많았고 메카닉 계열도 남자아이답게 좋아했으니까.
지금도 싫어하는 편은 아니지만 전생에 좋아하던 것들중 피규어나 프라모델같은 것은 끊은 상태였고 자연스럽게 건담이나, 건프라와도 소원하게 되었다. 사실 여자가 되니 메카닉이 그렇게까지 땡기지는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난 프라모델이나 피규어는 엄청 좋아하거나 하는 편은 아니었으니.
" 뭐 봐서, 쓸만한게 있으면."
" 내가 프라모델의 매력을 알려줘야겠네. 명환이도 요즘 그래서 건프라에 빠져들었다니깐."
" 건방지긴. 그녀석과 동급취급하지마."
쓸쩍 노려보았지만 상혁이는 그저 기분좋은 미소를 지으며 항복이라는 듯 손을 들어올렸다. 흥, 바보같은 웃음이나 짓기는. 그런게 이녀석의 성격이니 뭐 할 수없나.
" 아, 그건 이리 줘. 내가 들어줄게."
" 기특하네. 좋아 양보할게."
" ....단번에 승낙이냐. 보통 예의상 한번은 거절해야지."
" 어머나, 여자에게 그런 말하는 남자는 인기없어."
아무래도 커다란 코스프레 의상을 넣은 가방은 내가 들기 부담스러워 보였는지 상혁이가 옆에서 직접들어주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상혁이는 나보다 키가 크다보니 확실히 내가 들때보다 안정감이 있어보였다.
" 그럼 저희는 준비 다됐는데 슬슬..."
상혁이가 짐을 다 든 것을 확인한 나는 나머지 일행들도 준비가 다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가 흠칫했다.
" ...곤란하네. 집에가고 싶어."
" 뭘까 저 이상한 오오라는. 내가 잘못보고 있는거지?"
" 내가 오늘 온 곳은 카페 정모일텐데 이상하네. 속이 뒤틀려버릴 것같다."
좋소, 저게 바로 뒤틀린 오타쿠요.
서코에가면 더 많이 볼수 있소. ....가 아니라 너무 어둡다고 당신들!! ~아, 정말 어쩔 수 없네. 부러운건지 질투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대로 두면 즐거워야할 정모가 찝찝해질 것같으니 계속 저런 뒤틀린 상태로 내버려 둘수는 없었다.
" 슬슬 가야하지 않을까요. 오빠들."
남에게 놀리는 듯한 말투를 쓰는 나로선 최대한 사근사근한 말이었다. 거기다가 난생처음으로 '오빠'라는 말을 사용한 탓에 조금 닭살이 돋았지만 상관없어.
" 오, 오빠?"
가장 먼저 퍼득 정신을 차린 것은 미연시 씨였다. 이어 곰씨, 유유윳키도 흔들리는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 어머나, 왜 그러실까. 나이는 제가 어리니까 이렇게 부르는게 좋지 않나요?"
검지손가락으로 입술을 훑으며 부드럽게 이야기하자 세명의 머리가 봉산탈춤을 추듯 위아래로 거세게 끄덕여졌다.
" 그, 그렇지 그 편이 듣기 좋-은게 아니라 맞지!"
" 위험했다. 순간 심장이 멈출뻔했어."
" 후, 이게 살아있다는 것이군요."
방금전까지 암울했던 분위기는 어디갔는지 순식간에 쌩쌩해진 태도였다. 노리고 한 것이긴 하지만 저렇게 급변해버리니 질릴지경이네. 오빠라는 말이 그렇게 좋을까.
" 그럼 국전으로는 여기서 걸어가면 되나요?"
" 아니 버스를 타는게 좋지만 아무래도 인원도 인원이고 짐도 있으니 택시를 타도록 하자."
기분이 좋아진 세명은 슬슬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햇고, 카페 점원의 인사를 받으며 다시 거리로 나왔다. 국전까지 어떻게 가야하나- 하고 생각하는데 이런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았는지 상혁이가 대신 질문을 했고 곰 씨가 여전히 살짝 붉어진 얼굴로 기분좋게 답했다.
" 택시면 한명은 앞에않고 뒤에 네 사람이 앉아야 할텐데 조금 좁을지도 모르겠는데요."
" 그렇지 앞은 한명이고 뒤에 네명은...."
그렇게 말을 하던 일행은(상혁이 제외) 갑자기 뭔가가 생각났는지 눈을 반짝였다. ....그렇게 반짝이지 않아도 알아. 한명이 앞에 앉으면 남은 네명이 붙어앉으니 나랑 딱 붙어 앉을 기회라는 거지?
" 괜찮으면 제가 앞에 앉을게요. 괜찮죠?"
"""
네...."
"
"
물론 나는 냉정한 여자니까 기회따윈 주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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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쓰던 부분과 붙여서 이어서 올립니다! 용량도 슬슬 늘려볼까 생각중. 10kb는 너무 적은 것같아요. 다시 20kb로 돌아갈때까지 차차 용량을 늘릴 생각입니다.
그리고 롤은 몇분이 친추를 주셨더군요!
다음에 할 수 있으면 같이 하도록해요!
지금 병원에 입원한 탓에 실3승급만 한 열번정도한듯... 한달되면 왜 강등인거야! 후 다시 금장만 찍으려고 하는데 귀찮네요.